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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시대 한국의 자유주의 연구

        김용직(Yong-Jick Kim) 성신여자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2011 국가와 정치 Vol.17 No.-

        이 글은 1920년대 초에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언론계 지식인들의 활동이 3.1운동을 계승하는 민족주의적 노선이며 온건 개혁적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노선이었음을 밝히려 하였다. 식민지 자유주의자들은 합방이후 사라진 정치영역의 재건을 위해 정치적 자유나 언론의 자유를 부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제 총독부는 이런 동아의 온건개혁적 요구에 대하여 초기에는 방관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다가 이들이 문화정치에 대한 비판론을 제기하자 일제는 검열을 실시하거나 정간조치를 취하는 등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일제는 동아 의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을 독립을 추구하는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하였고 이들의 활동이 동화주의 정책에 근본적인 위협이라고 간주하였다. 식민지 자유주의자들은 산업과 교육의 계몽과 개혁을 통한 독립의 점진적 모색이라는 문화민족주의운동노선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식민지통치정책의 자유주의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This article claims that moderate nationalists of donga daily were in fact liberals and their common ideology was liberalism deriving from the declaration of the great nationalist movement, the March First movement of 1919. Colonial liberals criticized the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in Korea and demanded recovery of civil liberties and political freedom. Although they maintained in the initial phase rather "liberal" policy, Japanese rulers began to oppress these liberal nationalists and their major organ- the Donga daily. Japanese rulers regarded the Donga liberals as potent enemy that could derail their colonial ruling system in Korea. Gradualism was a major ideological approach along with nationalism for these Korean liberals, and they targeted their critique in the areas of industrial policy and education.

      • KCI우수등재

        사회운동으로 본 3ㆍ1 운동

        金容稙(Yong-Jick Kim) 한국정치학회 1994 한국정치학회보 Vol.28 No.1

        3ㆍ1운동의 한 중요한 국면은 근대 국가에 대항하여 일어난 최초의 사회운동이라는 점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통치는 비록 외삽적 국가에 의한 지배였지만, 한반도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근대적 통치를 시행하였다. 지배권력이 근대국가의 하부구조와 행정력을 갖춤에 따라 사회집단들의 저항도 근대적 사회운동의 양식을 띠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3ㆍ1운동을 민족사회 운동, 즉 민족적 동기에서 유래한 대중사회운동으로 규정하고 사회운동적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운동 집단의 형성을 고찰하고 이어서 운동의 자원(resources)과 동원 (mobilization)과정을 살폈다. 특히 민중 봉기의 사회적 기반을 분석하여 운동내부의 이질적인 흐름들을 밝히고자 하였다. 3ㆍ1운동은 그 준비기에서부터 천도교, 기독교, 학생의 3개 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민중봉기 시기의 동원 유형은 도시-기독교층, 산촌-천도교층, 향촌-유지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세개의 사회 집단들은 민중항쟁기에 다수의 시위와 봉기를 조직하고 주도하여 처음에는 종교적 민족운동에 불과하던 것을 대중시위운동으로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3ㆍ1운동 중에는 민중봉기가 약 2개월 동안 전국에서 격렬히 지속되었다. 집중적인 전국적 투쟁기인 이 시기에 몇차례의 대규모의 시위의 ‘파도’가 때로는 연속적으로 때로는 동시에 조선의 전역을 강타하였다. 본 연구는 3ㆍ1운동이 3가지의 이질적 운동이 중첩된 민족사회운동이었음을 발견하였다. 이에는 첫째, 도시와 근대적 사회구조에 기반한 기독교 중심의 진보적 민족운동계열이 있었다. 또한, 둘째, 비록 운동의 준비기에는 불참했지만, 전통적 사회구조와 조직에 기반한 삼남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 민족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셋째, 민중적 민족주의운동으로 중인과 산촌주민을 기반으로 천도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민중민족주의운동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3ㆍ1운동의 민중봉기에는 전향적 동원과 방어적 동원의 두 대조적 동원 유형이 발견되었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도시를 기반으로 한 시위운동을 주도하였고, 전통적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남부 농촌 지역의 민중항쟁을 조직하였다. 근대적 공공영역과 전통적 공동체가 각각 조직, 연락망, 추종자 단체 등의 하부구조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시위의 제1과 제 4의 파도는 신생하는 근대적 공공영역을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반면에 제 2의 시위파도는 전통적 공동체의 기초 위에서 지방 유지나 전통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독립시위의 제 3의 파도에는 다른 어떤 경우보다도 연합적 집합행동이 많이 나타났다.

      • 3.1운동과 국제관계 : 1920년대 동북아국제관계 재고찰

        김용직(Yong-Jick Kim) 혜암신학연구소 2019 신학과교회 Vol.11 No.-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적 각성의 대반전을 이끌어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국제 사회에서 한국독립의 기치를 높이 세워나갔다. 이들은 대내적인 한민족 본토주 민들과 해외 이주교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배경으로 하여 해외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한국의 해외 민족지도자들은 1919년 상반기 파리강화회 담과 1921~22년 워싱턴 군축회담에 한국민족대표단을 파견하고, 한국 독립의 선전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합병 이후 일제의 만행과 3.1운동에서의 일제의 폭력적 진압 등의 사실을 국제무대에 고발하여 한국의 독립 선포와 반일 여론의 형성이라는 대의의 국제적 확산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비록 독립을 단기간에 성취할 수 없었지만 열강과 국제 사회에서 한국 민족은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하 였다.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큰 분수 령이 되었고, 한민족이 3.1 만세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하였다. 1919년 한국의 3.1운동은 전국적 독립 봉기와 시위운동을 일으 켰고, 한민족의 열렬한 독립의 요구와 열정은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3.1운동 기간에 형성된 한국의 임시정부는 이후 한국의 혁명적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다만 러일전쟁 이후 아태 지역에 있어서 일본의 지속적 국력 상승과 1차 세계대전에서의 대독 전쟁 승리 등의 요인으로 인해 1920년대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은 열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919년 파리강화회담과 1921년 워싱턴회의에 한민족은 대표단을 각각 파견하고 독립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바라던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한민족 지도자들은 반식민 민족주의 혁명운 동의 대대적인 부흥과 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1919년과 1920년대까지 구미 열강은 아직 제국주의적 관점과 식민 주의적 관행과 사고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다. 미국은 민주주의와 이상주의의 기치를 내세우긴 하였지만 상원이 대변하는 고립주의적 전통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비록 구미 열강의 친일 대외 정책 기조의 변화는 더디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한민족의 독립 활동은 외면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더욱 이전 시기보다 활성화되고 있었다. 특히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확산되고 심화되는 한국인의 민족주의적 각성은 일본에 대한 열강의 태도가 바뀌는 시점이 도래할 경우에 한국 독립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정신적 자원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In 1919 Korean nationalist leaders could galvanize national consciousness and led Korean people into great national awakening, which eventually succeeded in establishing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The Korean leaders could continue their nationalist struggles against Japanese oppressions on firm support of domestic population as well as of Koreans living abroad in China, Manchuria and United States. Korean nationalists sent special mission groups to Paris Peace Conference of 1919 and to Washington Arms Limitation Conference of 1921 and began their diplomatic activities toward western great powers. Although independence was not readily acquired, the Koreans impressed some of global opinion leaders as time goes by and further spread positive outlooks by onlookers on feasibility of Korean independence in future. World War I was a great watershed that fundamentally dissolved imperialistic world order and it also provided salient opportunity for Koreans to start their nationalist movements. During 1919 March First Movement Koreans launched a nationwide uprising and demonstration movements so fierce that foreign and Western media payed great attention to them. Many Korean exiled governments emerged during the active phase of Korean nationalist struggles in 1919 that ultimately integrated into a Shanghai based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September 1919. Even if Korean nationalism was in vogue since the great success of 1919’s independence struggles, Koreans could not gain freedom on account of Japan’s latest success in their military successes in World War I against the Germany in Northern China. Neither could Koreans persuade any great power to assist Korean cause of independence in Washington Arms Limitation Conference of 1921. United States could not favorably respond to Korean revolutionary claim that attempted to topple Japanese rule in Korea and create schism among great powers in Pacific region. President Harding and his Secretary of State Hughes could not risk conservative traditional approach of American isolationism unlike former President Wilson. Notwithstanding these incidents of diplomatic frustration and failure in 1919 and 1920s, Koreans could envision a bright future considering immense effects of nationalist awakening since 1919

      •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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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과 민주화의 결과 비교

        김용직(Yong-Jick Kim) 성신여자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2021 국가와 정치 Vol.27 No.1

        본 연구는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과 20세기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타협민주화라는 민주화의 비교헌정사적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영국의 명예혁명과 한국의 민주화는 그것이 발발한지 30년간 큰 변화 없이 중요한 개혁안들이 타결되었다. 특히 중요한 사안들은 사건 초기1-2년 사이에 큰 타결이 이루어졌고 그 주된 결과는 혁명이후 적어도 수십 년 이상 (영국은 150년 이상) 유지되었다. 한국의 민주화의 결말도 1987년 헌정체제로 확정된 후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 이 두 사건은 혁명과 민주화라는 상이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타협정치라는 요소를 가졌다는 공통점을 보이는데 본 연구를 통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째, 두 나라의 사건들 ― 17세기 혁명과 20세기 민주화 ― 은 타협과 협약의 정치라는점에서 유사성을 가졌다. 명예혁명은 타협의 성격이 강하며 이에는 윌리엄과 영국 의회와의 타협, 그리고 다시 두 정당 토리와 휘그와의 타협에 의해서 입헌군주제라는 새로운 유형의 정치체제가 탄생했다. 반면, 한국은 1987년 민주화에서 권위주의 정부 내 온건파와 민주화운동의 타협적 정당세력들이 타협을 하였고 이는 6월 항쟁과 6.29 민주화선언이라는두 대조적 흐름들이 결국 주요 정당지도자들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어 대통령직선제 헌법개정으로 나타났다. 둘째, 두 사건은 하나는 정치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주화였고 이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는 전자는 혁명적 결말로, 후자는 민주적공고화로 달리 나타났다. 영국의 혁명결말이 가장 큰 결과는 국왕과 의회와의 17세기 장기적 갈등관계가 결국 의회가 지배권을 확립하는결과로 결정되어 전제군주제가 입헌군주제로 바뀐 것이다. 반면, 한국의 1987년 민주화는타협민주화로 전개되어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이 강화된 자유민주적 헌정체제로의 복귀가이루어졌다. 한국 민주화는 민주적 이행과 민주적 공고화라는 두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첫단계는 1987-1988년에 둘째 단계는 1998년 등장한 김대중 정부시기까지 걸쳐서 전개되었다. 셋째, 영국과 한국의 두 사건의 결과는 타협민주화임에도 차이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즉, 영국의 명예혁명은 “의회내 국왕제”라는 특이한 입헌군주체제로 귀결되었고 반세기 이상지속된 영국 국왕과 의회의 갈등과 분열을 2년 만에 총결산하였다. 주요 성과인 혁명 결말은 (1)국왕계승의 원칙을 확정한 윌리엄과 메리의 공동군주제, (2)정치적 타협 결과로 권리장전과 관용법제정, 그리고 (3)의회가 지배권을 가진 “의회내 국왕제”로서의 입헌군주제의정착이다. 반면에, 한국의 1987년 민주화의 결과는 둘로 나뉜다. (1)단기적으로 헌법개정에 따른 자유민주주의 헌정체제로의 복귀가 이루어지고 권위주의가 퇴출되는 민주적 이행과 (2)중장기적으로 후속정부에 의해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정치체제가 자유민주주의체제로 안정화되는 민주적 공고화로 후자는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집권으로 달성되었다. 결론적으로 명예혁명은 장기적으로 영국의 정치체제를 150년 동안 발전시켜가는 큰 기틀을 다진 성공사례로 평가되며 한국 민주화도 30년 동안 정치경제 체제의 발전을 이끌어 온원동력이자 구조적 기반으로 평가될 수 있다. This is a comparative research of two grand historical incidents of democracy, Britain’s Glorious Revolution(1688-9) and Korea’s 1987 Democratization. Although these two historical cases are far apart in the history of global revolution and democratization, striking similarities are found. We claim that these cases, despite of differences, they belong to the same category of revolutionary change, i.e, democratization by compromise. First, there are two distinct political forces gathered around key parties and they emerged as key agents that recognized historical mission of making political compromise. Challenge groups that have evolved into a coherent threat to authoritarian system staged new level of struggles. Whigs emerged as a strong enemy of royal power in the late 1680s. Then in 1688 key compromise was made between Tories and Whigs that enabled them to invite William of Orange in parliament’s fight against King James. Compromise was a major aspect that defined Korea’s case as well. Korea’s democratization in 1987 was a result of compromise of moderate reformists in government and elites of oppositional parties. Whereas British Revolution in 1689 ushered England to the new stage of monarchy, Korea’s democratization was not decisively achieved by 1987 but was ongoing processes for at least ten to fifteen years to come. Historical cases of two nations shared many key common traits. Both cases were derived from long-term socio-economic changes, England’s rise of the gentry and Korea’s emergence of the middle class. They shared common roots of precedent cases of extreme disorder and conflict, English civil war(1641-60) and Korea’s Kwangju Incident(1980). The most salient finding is in both cases compromise and political pacts are key aspect of constitutional arrangements. Korean constitutional reform of 1987 has been a lasting icon and motive-force that led a vital democratic transition path of Korean Democracy for a decade. As a resut of revolution in 1688-9 English leaders could launch a new constitutional governance system, i.e., King-in-parliament, which could lead England into the next phase of prosperity and democratization over a century. Compromise by political elites was a major factor of settlements for both England and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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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ㆍ1운동의 政治思想

        金容稙(KIM YONG-JIC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5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4 No.1

        3ㆍ1운동의 정치사상의 큰 흐름은 계몽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의 3대사상으로 대별될 수 있다. 3ㆍ1운동의 정치사상에는 33인 서명자들 뿐 아니라 1919년 3-4월간 전개된 3ㆍ1운동과 그 운동 중에 결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형성에 직, 간접으로 큰 영향을 미친 한민족 지도자들의 사상도 포함된다. 특히 선언문 작성에 기여한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 그리고 이들의 배후의 최대 민족주의 사상가인 도산 안창호와 우남 이승만의 사상 등이 3ㆍ1운동의 사상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아직 사회주의 사상이 충분히 전파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한 3ㆍ1운동에서 외래의 급진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당시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제외하면 거의 무시할 정도이다. 3ㆍ1운동의 3대사상중 계몽주의 사상에는 자유주의 사상이, 민족주의 사상에는 독립주의 사상이, 공화주의 사상에는 국제평화주의 사상이 각각 포함되어 있다. 3ㆍ1운동은 우리의 시원적 민족주의 운동을 세계적 이념과 문명사의 흐름에 통합한 대사건이었고 우리에게 근대 국가로의 확고한 이정표를 제시해준 사건이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이권의 세계적 붕괴와 몰락을 목도한 탈냉전의 관점에서 볼 때에 역시 3ㆍ1운동은 식민지시대에도 민주공화제 수립을 천명한 임시정부를 탄생시키고, 대외적으로 국제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장기적 국가목표를 세우고 민족의 우수성을 인류사회에 선양한 결정적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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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ㆍ1運動과 집합행동

        김용직(Yong-Jick Kim) 한국정치학회 2002 한국정치학회보 Vol.36 No.3

        본 연구는 1919년 3~4월에 발생한 집합행동들 중 참여자 1천명 이상 사례를 대상으로 3ㆍ1운동의 이론적 관점 및 가설을 제기하고 이를 통계적으로 검증하였다. 민족사회운동의 관점에서 자원동원과 전파 및 정체성 등 5대 변수를 중심으로 집합행동의 발생과 참여에 대한 SPSS분석과 카이분석, ANOVA, 회귀분석을 수행했다. 3ㆍ1운동 집합행동 참여자 수 결정 변수를 조사(회귀분석)했는데, 독립변수는 2주별 시기, 학생주동 여부, 민족정체성 강도, 중부지역 여부, 시, 융, 면의 지역화 정도, 선행운동 전파요인, 조직화 정도, 집합행동 유형이었다. 통계분석결과, 자원동원에 관한 조직화, 정체성, 및 학생, 중부권역 변수 등이 3ㆍ1운동 참여자수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밝혀졌다. 권역변수와의 차이 검증과 지도자와 권역에 대한 교차 카이 분석 결과, 3~4개의 사회세력이 독자적 조직을 통해 대중을 동원했음이 확인됐다. 결국, 민중봉기 동원과 시위 파도가 전향적 및 방어적 유형으로 대별된다는 복합적 동원가설의 타당성이 자료분석을 통해 확인됐다. This is a paper done through statistical research on incidents of collective action of more than the 1000 person participants during the March First Movement of 1919. For statistical analysis, Chi-square, ANOVA, regression were performed. The results show that variables such as organization, identity, students, mid-region were significant on the numbers of participants of the March First Movement. The complex mobilization hypothesis was supported by the existence of two separate types of mobilization, proactive and defens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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