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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사항별로 살펴본 헌법전사

        허완중 전남대학교 법학연구소 2021 법학논총 Vol.41 No.3

        Constitutional history generally takes as a starting point the enactment of the constitution in the modern meaning, which contains content on the protection of basic rights and separation of powers. The Constitu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corresponds to the constitution in the modern meaning. Therefore, the history of the Korean constitution must be traced back to at least April 11, 1919, when the Provisional Charter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enacted. The historical process directly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constitution in the modern meaning is called pre-constitutional history. In this respect, the pre-constitutional history is a link between before and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constitution in the modern meaning. Joseon and the Korean Empire were tyrannical monarchies. However, on April 11, 1919, the Provisional Charter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drafted and the Republic of Korea was founded, and a democratic republic was proclaimed. There was a civil revolution that moved from empire to republic. Therefore, korean pre-constitutional history is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Republic of Korea as a democratic republic in which the subjects who have awakened to the people overcame the old system of secular politics. A constitutional code and a meaningful document containing constitutional matters are called a constitutional document. Contemporaneous thinking on the Constitution is expressed not only in the Constitutional Code, but also in various forms of documents. In this respect, constitutional documents are useful guides for understanding the history of the Constitution, especially the pre-constitutional history. Several constitutional documents are related to the pre-constitutional history. The country's name, which is closely related to the determination of the people and territory, and expresses the basic character of the country, was confirmed as the Republic of Korea through Joseon and the Korean Empire. The Republic of Korea refers to a country for all people, composed mainly of the korean nation. The form of state established by the Constitution was established as a democratic republic from the Provisional Charter of the Republic of Korea in 1919 and maintained until now. Republicanism emerged in earnest after efforts to change the tyrannical monarchy into a constitutional monarchy failed, overcoming the challenge of bluntism and becoming the basic principle of the Constitution. The subject of constitutional enactment emerged as the people built the Republic of Korea after a long struggle. The state domain is the basis of the people's living and the spatial scope of the state's power. Joseon and the Korean Empire did not give up their territories even in the face of constant threats and invasions from powers, so the territory of the Republic of Korea inherits the original territories of Joseon and the Korean Empire. The constitution in the modern meaning was enacted to guarantee the freedom and rights of the people. In Korea, the concept of equality has traditionally emerged, and the people have constantly fought for the abolition of the class system and realized it. And the concept of freedom imported from the West was immediately understood and put into practice. So, when the Provisional Charter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drafted, freedom and rights were specifically stipulated. Therefore, when the Provisional Charter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enacted, freedom and rights were stipulated in detail.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established after several attempts to establish a government in exile and a provisional government. 헌법사는 일반적으로 기본권 보호와 권력분립에 관한 내용을 담은 헌법인 근대적 의미의 헌법 제정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은 근대적 의미의 헌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한국 헌법사는 최소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한 1919년 4월 11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근대적 의미의 헌법 제정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역사적 과정을 헌법전사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헌법전사는 근대적 의미의 헌법 제정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는 고리이다. 조선과 대한제국은 전제군주국이었다. 그런데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만들고 대한민국을 건국하면서 민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넘어가는 시민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한국 헌법전사는 전제군주정 아래에서 삼정문란을 가져온 세도정치라는 구체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인민으로 각성한 신민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을 세우는 과정이다. 헌법전과 헌법사항을 담은 의미 있는 문서를 아울러 헌법문서라고 한다. 헌법에 관한 당대의 사고는 헌법전뿐 아니라 다양한 형식의 문서로 결집하여 표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헌법사, 특히 헌법전사를 이해하는 데 헌법문서는 유용한 길잡이가 된다. 헌법전사와 관련이 있는 헌법문서에는 혁신정강 14조, 12개 폐정개혁안, 홍범 14조, 헌의 6조, 국태민안・칙어, 대한국 국제, 성명회 선언서, 대동단결선언, 무오독립선언서, 2・8 독립선언서, 3・1 독립선언서 등이 있다. 국민 및 영토 확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나라의 기본성격을 표현하는 국호는 조선과 대한제국으로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되었다. 대한민국은 한민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민 모두를 위한 국가를 가리킨다. 헌법이 창설하는 국가 형태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부터 민주공화국으로 확정되어 지금까지 유지된다. 공화주의는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는 노력이 무산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복벽주의의 도전을 물리치고 헌법의 기본원리가 되었다. 헌법을 만들고 고치는 주체는 인민으로 각성한 신민이 오랜 투쟁 끝에 시민으로 각성하고 나서 대한제국이 국가로서 기능하지 못하면서 나타난 자연상태를 민족으로 뭉쳐 극복하여 대한민국을 건설하면서 국민이 되어 나타났다. 국가영역은 국민이 사는 토대이면서 국가권력이 미치는 공간적 범위이다. 조선이 청나라와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이후에 조선과 대한제국은 열강의 끊임없는 위협과 침략 속에도 영토를 조금도 포기하지 않아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고유영토를 그대로 계승한다. 근대적 의미의 헌법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고 제정되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평등 개념이 등장하여 인민이 끊임없이 신분제 폐지를 위해서 싸워 실현하였다. 그리고 서양에서 수입한 자유 개념도 곧바로 이해하여 실천하는 데 이르렀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만들 때 자유와 권리가 구체적으로 규정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무 황제(고종)의 7차례 국내 망명 시도에 이은 국외 망명정부 시도와 미주에서 싹튼 임시정부 수립 노력이 발전적으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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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헌정의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과 제헌헌법의 관계

        김수용 한국헌법학회 2019 憲法學硏究 Vol.25 No.1

        비교헌정사적으로 근대 민주국가는 봉건질서를 타파하고자 하는 민주시민의 탄생과 민주시민에 의한 시민혁명 발발, 민주시민들을 대표하는 의회 조직, 의회에서 민주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한 헌법 제정, 헌법에 입각한 민주국가 수립, 민주국가를 실현할 구체적인 법령 마련, 헌법 제정과 실천 과정에서 미흡했던 내용을 반영한 헌법 개정 등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1919년 4월 11일에 건립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였다. 즉 1919년 3.1혁명 이전에 민주시민들이 탄생하였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3.1혁명을 일으켰다. 1919년 4월 10일 저녁 10시경에는 민주시민의 대표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개원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11일에 대한민국헌법(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하였다. 1919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대한민국헌법에 따라 1919년 4월 11일에 건립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법령 등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19년 9월 11일에는 1919년 4월 대한민국헌법 이후 미흡한 내용들을 반영하여 제1차 헌법 개정을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헌법은 총 5차에 걸쳐 개정이 되었는데, 해방 이전 마지막 개정은 1944년 4월 22일에 이루어졌다. 1944년 대한민국헌법은 제61조에서 헌법 개정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7월 17일에 공포된 제헌헌법(1948년 대한민국헌법)은 1944년 대한민국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헌법 제정 절차에 따라 새롭게 제정되었다. 그러나 1944년 대한민국헌법과 1948년 제헌헌법은 기본편제가 유사한 점, 두 헌법 모두 제1조에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규정하고 있는 점, 1948년 7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의 대한민국 정체성 논쟁과 결정 내용 등을 종합할 때, 1948년 제헌헌법은 헌법 제정 절차에 따라 제정되었지만 실질은 1944년 대한민국헌법의 개정 또는 전면 개정이라고 할 수 있다. On April 11, 1919, the first Constitu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hereinafter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19”) was enacted and was promulgated in Shanghai, China. The Article 1 of the Constitution says “The Republic of Korea shall be a democratic republic.”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hereinafter “the Republic of Korea of 1919”) was established by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19 in the course of the March 1st Revolution caused by democratic citizens.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19 was revised five times until liberation from Japanese imperialism. The last Constitution(hereinafter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44”) was revised on April 22, 1944.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imperialism, the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Korea(hereinafter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48”) was enacted on July 12, 1948 and was promulgated on July 17, 1948. On August 15, 1948, the Republic of Korea(hereinafter “the Republic of Korea of 1948”) was established by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48. The Article 1 of the Constitution also says “The Republic of Korea shall be a democratic republic.” like that of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19. On July 7, 1948, the National Assembly of 1948 decided the identity of Republic of Korea of 1948 as follows. “We, the people of Korea, proud of a resplendent history and traditions dating from time immemorial, upholding the great spirit of independence, as manifested in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the course of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now at this time engaged in reconstructing a democratic, independent country are determined.” In other words, the Republic of Korea of 1919 was established by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19 on April 11, 1919, then it was reestablished by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48 on August 15, 1948. In summary,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imperialism,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48 was made by new process even though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44 had the process of revision. But I think that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48 was the revised constitution of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44 based on the decision of the National Assembly of 1948 on July 7, 1948, the same Article 1 of two Constitutions(the Korean Constitution of 1919 and the Korean Constitution of 1948) and the similar formation of two Constitutions,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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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 민족운동과 대한민국 정부

        이준식 한국근현대사학회 2009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48 No.-

        This article shall review that socialist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Korean peninsula should affect the establishment of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 After it had appeared as a branch of nationalist movement, the socialist movement left, disputed, reconciled and solidified with the nationalist movement. As the solidarity between the two became a general trend since the mid 1930s, a democratic republic and a equal economy would be a core idea in establishing new nation, represented by each group of national movement. Nationalists had never though the capitalism was a ideal system and they had never been in the strict position on anti-communism. On the contrary, they wanted to establish new system which should overcome the contradiction and limitation of the socialism and capitalism. Socialists would be acknowledged to withhold or reserve a proletarian revolution and proletarian dictatorship and to make a concrete solidarity with nationalists in order to liberate Korean people under Japanese Imperialism. The establishment of Republic of Korea in 1948 was extended in the lien with above national movements. A lot of Korean people had a left-wing mind in establishment of New Nation under the disordered political situation after the liberation from Japanese Imperialism. Even the anti-communists gave an assent to the state ownership on several important industries, the land reform and the controlling economy. The Original Constitution of Republic of Korea ordinated under this circumstances. The Original Constitution had the factors from liberty and equality which were core value of modern society, but the Constitution strongly contained and preferred the factors related to equality rather than liberty. This was prominent especially in economic provisions of the Constitution. The current Constitution of Republic of Korea apparently describes succeeding the legal identity of the Provisional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born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The Provisional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showed a feature of the alliance of right-wing and left-wing since it had started. The Government operated and performed its mission and goal actively when the consolidation between left and right was accomplished. The socialist movement had contributed to extend the scope of the national movement as it had in that Government. Through the consolidation between socialism and nationalism, the nationalist movement, before August 15, 1945, had already reached to an agreement on the framework of the newly established Nation. The core ideas in establishing New Nation which presented by each major national movement groups were very similar in organizing a perfect independent state, introducing a democratic republic and enforcing equal economy. And the each movement group’s ideas in establishment of the Nation was succeeded by several political groups and parties’s ideas in describing the Original Constitution, under the political situation after the independence. The reason that the Original Constitution could contain ‘most’ progressive provisions under at that time of the south Korean system, was the historical backgrounds like above. This article shall review that socialist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Korean peninsula should affect the establishment of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 After it had appeared as a branch of nationalist movement, the socialist movement left, disputed, reconciled and solidified with the nationalist movement. As the solidarity between the two became a general trend since the mid 1930s, a democratic republic and a equal economy would be a core idea in establishing new nation, represented by each group of national movement. Nationalists had never though the capitalism was a ideal system and they had never been in the strict position on anti-communism. On the contrary, they wanted to establish new system which should overcome the contradiction and limitation of the socialism and capitalism. Socialists would be acknowledged to withhold or reserve a proletarian revolution and proletarian dictatorship and to make a concrete solidarity with nationalists in order to liberate Korean people under Japanese Imperialism. The establishment of Republic of Korea in 1948 was extended in the lien with above national movements. A lot of Korean people had a left-wing mind in establishment of New Nation under the disordered political situation after the liberation from Japanese Imperialism. Even the anti-communists gave an assent to the state ownership on several important industries, the land reform and the controlling economy. The Original Constitution of Republic of Korea ordinated under this circumstances. The Original Constitution had the factors from liberty and equality which were core value of modern society, but the Constitution strongly contained and preferred the factors related to equality rather than liberty. This was prominent especially in economic provisions of the Constitution. The current Constitution of Republic of Korea apparently describes succeeding the legal identity of the Provisional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born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The Provisional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showed a feature of the alliance of right-wing and left-wing since it had started. The Government operated and performed its mission and goal actively when the consolidation between left and right was accomplished. The socialist movement had contributed to extend the scope of the national movement as it had in that Government. Through the consolidation between socialism and nationalism, the nationalist movement, before August 15, 1945, had already reached to an agreement on the framework of the newly established Nation. The core ideas in establishing New Nation which presented by each major national movement groups were very similar in organizing a perfect independent state, introducing a democratic republic and enforcing equal economy. And the each movement group’s ideas in establishment of the Nation was succeeded by several political groups and parties’s ideas in describing the Original Constitution, under the political situation after the independence. The reason that the Original Constitution could contain ‘most’ progressive provisions under at that time of the south Korean system, was the historical backgrounds like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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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공화국 헌법의 성립과 정부헌법개정 활동

        이병규 한국헌법학회 2017 憲法學硏究 Vol.23 No.4

        This study examines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constitution of the fifth republic of Korea through the eighth constitutional amendment, focusing on the government-led constitutional revision activities. In particular, it explores how the establishment of the fifth republic's constitution led by the government was in progress, whether there were any limitations to the process or not, and what meanings the constitutional reform has to the constitutional history of Korea. For this study, under scrutiny were the data related to the eighth constitutional amendment including 「the Report of the Constitution Study Group」 and 「the Minutes of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Deliberation Committee」. In the chaotic political situations after the 10.26 incident in 1979, the fifth republic's constitution presumably sought professionalism and democracy in the process of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through the operation of the constitution study group,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deliberation committee and the western constitutional system research group. The constitution included such contents that the revised constitution itself was defined as the starting point of the fifth republic of Korea and it had the ideological foundations of ‘construction of a democratic welfare state’, ‘realization of a just society’ and ‘peaceful transfer of political power’, aiming to sever the relations with the 1972 Constitution known as the Yusin Constitution. In this light, the 8th constitutional amendment seems to have made meaningful changes in the constitutional history of Korea in terms of expanding the scope of basic rights, adopting the single-term system for the presidency, enhancing the power of the national assembly, emphasizing the independence of the judiciary, and so on. However, the eighth constitutional reform has the limitation that it could not properly reflect Korean people's desire for democracy which became much stronger after the 10.26 incident. The constitution of the fifth republic cannot be free from the criticism over its democratic legitimacy, considering the facts that the government's four principles of the constitutional amendment were continuously presented during the deliberation processes, each bill at issue in the meetings was revised after hearing and actually reflecting the opinions of the related branches of the government, and a public hearing for the constitutional reform was finally cancelled. The discussion about the fifth republic's constitution reveals that the constitution had some limitations from the beginning due to lack of its own intrinsic political ideology or political philosophy as well as lack of its democratic legitimacy in the establishment processes. In conclusion, the fifth republic's constitution itself proclaimed the new start as a new republic but the constitution with such radical limits hardly took root in the people of Korea. 이 글은 제8차 개헌에 의한 제5공화국헌법의 성립 과정을 ‘정부헌법개정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정부 주도에 의한 제5공화국헌법의 성립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한계는 없었는지, 나아가 그것이 우리 헌정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헌법연구반 보고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회의록」을 포함한 제8차 개헌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제8차 개헌 당시 정부의 개헌활동은 10ㆍ26사태 이후 혼란스런 정국 상황에서 헌법연구반, 서구헌법제도조사반, 헌법개정심의위원회 운영을 통하여 헌법개정 과정의 전문성과 민주성을 기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헌법 내용적으로는 스스로 제5공화국의 출발로 규정하고 ‘민주복지국가 건설’ ‘정의사회 구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념적 기초로 내세우면서 유신헌법과 단절하고자 했다. 이에 기본권 영역의 권리 확대나 대통령 단임제, 국회 권한 강화, 사법부 독립성 강화 등은 우리 헌정사에서 의미 있는 변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8차 개헌은 10ㆍ26 이후 한층 높아진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면이 있다. 심의 과정 내내 정부의 헌법개정 기준이 강조되고, 쟁점이 되는 개정 사항마다 정부 부처의 의견을 듣고 반영하는 회의 과정, 공청회 취소 등을 통해서 볼 때 제5공화국 헌법은 개헌의 민주적 정당성 결여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의할 때 제5공화국헌법은 그 성립 과정의 민주적 정당성 문제와 함께 그 자체의 고유한 정치이념이나 정치철학의 결여로 처음부터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제5공화국 헌법은 스스로 새로운 공화국의 출발을 내세웠지만, 이상의 요소와 권위주의적 통치가 작동함으로써 국민 속에서 제대로 정착하기 어려운 길을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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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소앙의 헌법사상 : 삼균주의의 형성과 전개

        송석윤(Song, Seog-Yun) 한국헌법학회 2020 憲法學硏究 Vol.26 No.1

        조소앙은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1945년 임정요인들이 귀국할 때까지 함께 한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최고의 이론가였다. 그는 유교경전을 익히면서도 서양문물을 접할 수 있는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조소앙은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후 1908년에 메이지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1913년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였고, 대동단결선언, 대한독립선언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작성하는데 중심역할을 하였다. 조소앙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약 2년간 유럽에서 외교활동을 벌였는데 이때 접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사상이 이후 그의 삼균주의 사상이 형성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삼균주의는 1941년 임시정부가 채택한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 체계화되었다.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은 근대국민국가 사상에 기초하여 군주주권을 폐기하고 국민주권을 선포하였으며 헌법을 제정하여 법치주의를 구현할 것을 천명하였다. 1919년의 대한독립선언서에서는 대한민주의 독립을 선언하여 새로운 독립국가의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조소앙의 사상은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제1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모두 평등하다(제3조)는 규정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민주공화국이라는 표현은 비교헌법적으로 볼 때 당시 세계적으로 최첨단에 있었다. 조소앙은 1920년대 후반에 좌우의 독립운동세력을 하나로 모으려는 노력 속에 삼균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삼균주의는 1930년 결성된 한국독립당의 강령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41년에 제정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의 기초를 이루었다. 삼균주의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그리고 국가와 국가사이의 평등을 추구하였는데, 개인과 개인간의 평등은 보통선거를 통한 권력의 균등, 경제력의 균등, 교육의 균등을 의미하였다. 그는 국민국가 차원에서의 독립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2중혁명을 방지하기 위해 경제력의 균등을 강조하였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1948년의 헌법제정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신생 대한민국에서 1950년대에 교육을 통한 인적 인프라와 농지개혁을 통한 경제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지침이 되었다. 조소앙은 두 개의 세계대전을 겪은 20세기 전반에 당시의 시대정신과 호흡하면서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할 헌법사상의 기초를 세웠다. 오늘날의 새로운 도전 속에서 조소앙의 삼균주의의 기본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Jo So-Ang was an independence activist and top theoris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e grew up in a family background where he could learn Confucian ideas and have access to Western culture. He went to Japan in 1904 with royal scholarship and majored in law during 1908-1912 at Meiji University in Tokyo. He moved to China in 1913 and committed himself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played a central role in writing the Declaration of the Grand Solidarity,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of Korea and the Provisional Charter of the Republic of Korea. Jo So-Ang was engaged in diplomatic activities in Europe for about two years from 1919 to 1921, and the ideas of social democracy in Europe that he encountered had a considerable impact on the formation of his constitutional thought. His Doctrine of Three-Equalities was systematized in the Code for Found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dopted by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1941. The Declaration of the Grand Solidarity in 1917 based on the ideas of the modern nation state abolished the monarchy and proclaimed that the Constitution should be made.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of Korea in 1919 presented a concrete vision of a new independent state by focusing on democracy. His thought got linked to the Provisional Charter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shall be a democratic republic”(Article 1), and “All of the people of the Republic of Korea shall be equal(Article 3) In particular, the term ‘democratic republic’ was at the cutting edge of the comparative constitutional world at that time. In the late 1920s, Jo So-Ang developed the Doctrine of Three-Equalities in an effort to bring together the left and right independence movement forces. So, this doctrine became the basis of 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s programme of 1930. It also formed the basis of the Code for Found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enacted by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in 1941. The Doctrine of Three-Equalities pursued equality between individuals, between ethnicities, as well as between nations. The equality between individuals meant equality of political power through universal suffrage, equality of economic power, and equality in education. As he sought independence on the level of nation state, he emphasized equality of economic power to prevent the two-stage revolution of proletarian internationalism. Jo So-Ang’s Doctrine of Three-Equalities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constitution of 1948. It formed also the basic principle of building human infrastructure through education and economic infrastructure through land reform in the 1950s.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Jo So-Ang struggled with the zeitgeist until he laid the foundation for the constitutional idea of building a new democratic republic. Given today s new challenges, it seems necessary to look back on the basics of Jo So-Ang’s Doctrine of Three-Equa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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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건국절’ 논란

        신용옥(Shin, Yong-Oak) 고려사학회 2016 한국사학보 Vol.- No.65

        제헌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치한 잠정국가인 대한민국의 독립정신을 계승해 민주독립국가로 재건된 헌법상의 현실국가였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 아니라 대한민국정부가 남한 단정으로 수립된 날이다. 남한 단정은 1948년 12월 12일자 유엔총회 결의로 분단정부로 전화했다. 분단정부인 대한민국정부를 전국정부로 변신시키고 여기에 대한민국을 유일합법국가인 독립주권국가로 보는 시각이 덧씌워지면 분단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8・15 건국일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대한민국정부는 유엔 결의에 의한 유일합법정부이며 이 유일합법정부는 곧 전국정부라는 것과 그 정부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독립주권국가라고 주장하겠지만, 그 실제 내용은 분단국가의 분단정부이다.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정부를 유엔이 승인한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와 주권국가로 보는 시각은 북한을 흡수 통일하는 방법 이외의 다른 통일 방법, 예를 들어 1947년과 1948년의 유엔총회 결의에서 언급된 ‘포괄적 협의’를 바탕으로 한 통일을 배제하는 것이며 분단국가의 분단정부를 고착화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8・15를 대한민국 건국일로 정하자는 주장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According to the preamble of the 1948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Republic of Korea was a nation reconstructed from the spirit of independence harbored by the Daehanminguk Yimsijengbu(Provisional Government). However, August 15th of 1948 is not a date that Republic of Korea was founded ; rather, it is the day that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established as a separate entity of South Korean governance. A resolution passed by the United Nations (UN) General Assembly on December 12th, 1948 influenced the structural characteristic of South Korea’s separate government to the extent where it became a divided government. From then, the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 - which is a divided government- was transformed into a national government; and combined with the emerging viewpoint that defined Republic of Korea as an independent sovereign nation with the only lawful government, a divided nation was born. Indeed, others that argue for the 8・15 founding date might assert that the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 is the only government deemed lawful by the UN resolution, and that this government is, in itself, the national government; thus, the Republic of Korea -a nation represented by that national government- is the only lawful, independent, and sovereign nation in the Korean Peninsula. However, the true substance of this argument surrounds the divided government of a divided nation. This particular viewpoint that perceives Republic of Korea and its government as the only sovereign nation and lawful government in the Korean Peninsula approved by the UN effectively excludes methods of reunification other than the unilateral absorption of the North -such as one mentioned in the 1947 and 1948 UN resolutions based on ‘inclusive discussions’- and serves to fixate the current state of division. The essence of the argument for the 8・15 founding date lies here.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민주주의

        한시준 ( Han Seejun ) 단국사학회 2019 史學志 Vol.59 No.-

        한국민족의 역사에서 일어났던 가장 커다란 변화와 변혁을 꼽으라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군주주권의 역사가 국민주권의 역사로 바뀐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민족사의 대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20세기 전반기였고, 그 계기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이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계기로 민족사의 대전환이 이루어졌다. 1919년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이 발표되고, 40여일 후인 4월 11일에 독립국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면서 민족사가 뒤바뀐 것이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갖는 국가로 건립되었다. 이로써 반만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군주주권의 역사가 국민주권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임시정부의 수립도 민족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임시정부의 헌법을 통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여, 전제군주제의 역사에서 민주공화제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을 기초로 정부를 운영하면서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를 정착 발전시켰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한 헌법으로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이를 근거로 정부를 운영하였다. 이후 헌법은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개정할 때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보완되고 개정되었다. 헌법을 기초로 한 정부의 운영과 경험은 민주공화제를 정착 발전시키는 데 있어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 민주주의가 정착 발전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임시의정원이었다. 임시의정원은 각 지방인민을 대표하는 의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이었다.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대의기구로 의정원을 두고, 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정부를 유지 운영한 것이다. 의정원은 1930년대부터 정당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1942년 좌익진영의 정당 및 단체들이 의정원에 참여하면서 다당체제로 바뀌었고, 여당과 야당도 생겨났다. 의정원을 통한 이러한 경험은 정당정치의 기원을 이룬 것이었고,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를 정착하고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디딤돌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광복 후 건설할 민족국가에 대한 총체적인 계획을 <대한민국건국강령>이란 이름으로 제정 공포하였다. 핵심은 신민주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고, 신민주국은 전민족 최대 다수의 균등한 생활을 실현할 수 있는 국가였다. 그 방안은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균등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삼균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삼균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삼균주의 국가’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신민주국이었다. 신민주국이란 신민주주의 국가를 말하는 것이고, 구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구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일컫는 것이다. 미국의 자본주의나 소련의 사회주의 국가를 따르지 않고, 한국민족의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안고 있는 결점을 보완하고, 이들보다 더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 ‘삼균주의 국가’였다. To cite the biggest change in the history of the Korean race, what can be said? There are many opinions, but the history of Monarch has changed to that of Popular Sovereignty. This transition was prompted by the 3.1 Movement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history of the nation changed when it declared itself an independent nation on March 1, 1919, and 40 days later, on April 11, 1919, it was founded as an independent nation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was founded as a nation of Popular Sovereignty. The establishment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s also greatly changed national history. It has been transformed into a history of Democratic Republics through the Constitu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established the Constitution and operated the government based on the Constitution to establish and develop Popular Sovereignty and Democratic Republics. On April 11, 1919, < The Korean Provisional Charter of the Constitution > enacted as a constitution based on democratic principles and ran the government based on it. Since then, the Constitution has been supplemented and amended on five occasions until the amendment of < The Korean Provisional Charter of the Constitution > in April 1944. The operation and experience of a government based on the constitution has become a major asset in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a democratic republic. It was The Korean Provisional Congress that contributed greatly to the settlement and development of democracy. The Korean Provisional Congress was a legislative body of the interim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consisting of lawmakers representing each local people. It had The Korean Provisional Congress as an organization to collect the opinions of the people and ran the government under The Korean Provisional Congress's resolution. The Korean Provisional Congress have been running around political parties since the 1930s. In 1942, left-wing parties and groups joined the parliament, which also resulted in the creation of the ruling party and opposition parties. This experience achieved the origin of party politics and served as a great stepping stone to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Popular Sovereignty and Democratic Republics.

      • 3.1운동, 기독교 그리고 대한민국 ― 대한민국의 기독교적 기원에 대한 소고

        박명수(Myung Soo, Park) 혜암신학연구소 2019 신학과교회 Vol.11 No.-

        본 논문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기원을 기독교와 관련해서 살펴보 았다.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였다. 기독교인들은 독립협회와 만국공동회의 창설과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미주 한인 교포들이 중심이 된 대한인국민회는 대한제국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나라는 기독교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명시적으로 한반도에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는 최초의 주장이었다. 3.1운동을 통해서 기독교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는 개인의 자유, 자치와 자립정신, 대의제 등을 통해서 민주국가의 기초를 놓았다. 3.1운동의 원인이 되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러시아의 공산혁명과는 다른 서구 민주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출발하였고, 기미독립선언서의 자주국과 자주민은 바로 이것을 명문화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3.1운동을 새로운 국가운동 으로 발전시킨 것은 임시정부였다. 이 임시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이것은 주권은 전체 인민에게 있고, 정부 형태는 삼권분 립이며, 개인의 소유권은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 헌법을 만드는데 결정 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은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는 출발부터 시련을 겪었다. 특별히 공산주의자 들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인민공화국을 만들려고 했다. 이런 시련 가운 데서 일관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킨 사람이 바로 김구였다. 김구가 이렇게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대한인국민회가 후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한반도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어떤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를 놓고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미국 정부와 임시정부가 함께 추진하는 민주공화국과 소련과 공산당들이 추구하는 인민공화국과의 투쟁이었다. 결국 1948년 남한에 대한민국이 건설되었다. 이렇게 남한에 민주공화국이 건설된 것은 결국 사람들이 소련식 정부보다는 미국식 정부를 선호했고, 이것은 오랫동안 미국 선교사들을 통하여 미국의 민주주 의를 소개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공산 치하에서는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대한민국 설립에 매우 적극적이 었다. This paper examined the origins of the Republic of Korea in relation to Christianity. Christians introduced democracy to Korea in earnest. Christian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founding and activities of the Independent Club and Manmingongdonhoe as the origin of democracy in Korea. In particular,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which is centered on Korean living in the USA, sew through the collapse of the Great Korean Empire and believed that the future of new Korea should be a democratic republic nation based on Christianity. This was the first explicit argument that a republic nation should be established on the Korean Peninsula. Through the March First movement, Christianity played a very important role in building a democratic republic nation in Korea. Christianity laid the foundation of a democratic state through individual freedom, autonomy and self-reliance, and representationalism. Wilson s national self-determination, which was the motive for the March First movement, started in connection with Western democracy, which was different from Russian communist revolution. In this context, the sovereign nation and people of 1919 independence proclamation specified this spirit in writing. However, it was the provisional government that developed the March 1 movement into a new national movement. According to this provisional constitution, the Republic of Korea is a democratic republic, which means that the sovereignty belongs to the whole people of Korea, the power of government is separated into three parts, and the ownership of the individual is guaranteed. The crucial contributors to this constitution were Christians. Nonetheless, the Shanghai Provisional Government suffered from the start. Especially, the Communists denied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tried to turn the country into a People s Republic nation. In these trials, Kim, Gu was the one, who consistently opposed communism and defende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reason why Kim, Gu was able to defend the Republic of Korea was because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the USA supported his stand.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from occupancy of Japan, there was a fierce struggle over which country to build in earnest in the Korean peninsula. This was a struggle between the Democratic Republic nation, which the US government and the provisional government were pursuing together, and the People’s Republic, which the Soviet Union and the Communist Party were rooting for. Finally, the Republic of Korea was established in South Korea in 1948. This establishment of a democratic republic nation in South Korea, which had long been introduced to US democracy through American missionaries, meant the people of South Korea preferred American-style government to Soviet-style government. Also, Christians thought that they could not maintain their faith under the communist rule, and they were very active in establishing the Republic of Korea.

      • KCI등재

        3・1운동의 3・1혁명으로서 헌법사적 재해석 : 건국절 논란과 연관하여

        김광재(KIM Gwangjae) 전남대학교 법학연구소 2019 법학논총 Vol.39 No.1

        2019년은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 100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을 시작해야 할 중요한 해이다. 2019년이야말로 지난 100년 간 왜곡되고 뒤틀린 것들이 제대로 규명되고 정체(正體)를 되찾음으로써 새로운 100년의 정초(定礎)를 다지는 해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3・1혁명을 3・1운동이라 명명하면서 그 의의를 독립운동이라는 대외적 측면에 국한해왔다. 3・1혁명은 독립운동일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모든 인민(국민)이 참여하여 기존 질서에 항거하고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이끈, 즉 민주공화국으로의 역사적 전환을 가져온 혁명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미국 등의 세계적 혁명사례들과 비교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건국절(일)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정식)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입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인 1948년 4월 11일이라는 입장이 대립한다. 기념일 지정에 대한 우리와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국, 프랑스, 중국 등 세계 각국의 태도를 살펴보면, 역사적 사건의 완성일(종결일)이 아닌 출발일(촉발일)을 기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월 1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일로서, 7월 24일은 대한민국(정식)정부 출범일로서, 8월 15일은 광복절이자 대한민국(정식)정부 국민축하일로서, 3월 1일은 혁명일이자 대한민국의 출발일(촉발일)로서 각 의미를 갖는다. 이와 같이 본고는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발원일이 3월 1일에 있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3・1혁명과 그로 인해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사적 의의와 가치를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The Republic of Korea celebrated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March 1st Revolution in 2019. Thus, this year is an important year to look back on the past 100 years and start a new century. In 2019, we will have to recover the distorted and undiscovered history of the past 100 years. So we have to make it a year to set a new 100-year framework. In the meantime, we have referred to the March 1st Revolution as the March 1st Movement and have limited its significance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as the external aspect. It should be noted that the March Revolution was not only an independent movement, but a revolution that l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also the historical transition to the Democratic Republic. This point becomes clearer when compared with the cases of global revolution such as Britain, France, Russia, the United States and China. Since the mid-2000s, the controversy over the date of the national foundation day has not diminished. The position of August 15, 1948, the date of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April 11, 1948, the dat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Pro- 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re in conflict. Looking at attitudes of countries such as Korea, Vietnam, Indonesia, the United States, China, and France to designate the anniversary, we can see that they commemorate the start date (date of the event), not the completion date of the historical event. The April 11th is the launch date for the Republic of Korea (Provisional Government). The July 24th is the day of the Korean (official) government. The August 15th is the day of independence and it is the celebration day of the Korean government. The March 1st is the day of revolution and the beginning date of Korea. Thus, in recognition of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Revolution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is study correctly recognized that the start date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on March 1st. And this study focused on redefining the Constitutional meaning and value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which was established through the Korean Revolution.

      • KCI등재

        한국의 근대국가 건설운동과 공화제

        朴贊勝(Park Chan-seung) 역사학회 2008 역사학보 Vol.0 No.200

        The western form of government was introduced in Korea through Chinese books in 1840s. It was not until 1880s that Korean people had a real understanding of constitutional monarchy system and democratic republic system. Until then absolute monarchy has been established in Korea and politicians of reformist group thought that people in Korea had a too low political awareness to maintain a republican form of government. The reformist group in Korea attempted to make a first step of constitutional monarchy by restraining the power of King Gojong, Gojong frustrated the reformists' plan by his flight from the palace in February, 1896. King Gojong became an Emperor by himself in 1897 and rather reinforced his power, Independence Club, the organization of enlightened citizens, resisted it. Independence Club made a plan to enlighten the public and to organize a rudimentary form of parliament. They wanted to gradually introduce constitutional monarchy in Korea but they were dismissed by Gojong in 1898 who even more strengthened his power then. Although the members of the society for study of constitutional government organized in 1905 planned to make Korea a constitutional monarchy, intellectuals did not expect that the democratic republic system would work in Korea. At that time most people in Korea had a low political awareness and no chances for school education. However some editorials of Korea Daily News asserted the necessity of establishing a nation state. Ahn Chang-ho also claimed in his public lectures that Koreans had to regain sovereignty. The turning point of the discussion on the forms of Korean government was the China revolution occurred in 1911. Some Korean intellectuals moved to Shanghai and met the Chinese revolutionists. Korean nationalists were convinced that they should establish a new nation in Korea as a democratic republic. Korean nationalists clarified the people's sovereignty through the declaration of the unity of Korean nationalists in 1917. In some leaflets distributed during the March First Movement in 1919, it was proposed that a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needed to be established and it should be a democratic republic government. As the imperial governments in China, Germany and Russia were all collapsed in 1910s, Korean nationalist believed that democratic republic was the general tendency of the time.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formed in April 1919 adopted indeed a democratic republic system. Korean people finally chose the democratic republic system as a new national polity after the long discussions since 188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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