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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산 김삼룡박사의 생애와 사상

        양은용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5 馬韓, 百濟文化 Vol.25 No.-

        본고는 문산 김삼룡(文山 金三龍, 1925-2014)의 생애와 사상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그는 원불교 창립기에 교조 소태산대종사(少太山大宗師, 朴重彬, 1891-1943)와 2대 종법사인 정산종사(鼎山宗師, 宋奎, 1900-1962)가 집안에서 제우(際遇)한 인연으로 어린 시절, 원불교 교역자의 길에 들어선다. 그의 생애는 크게 6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성장교육기(成長敎育期)로, 1925년(1세) 출생에서부터 1938년(14세)까지의 재가 유․소년기이다. 제2기는 출가수학기(出家修行期)로, 소태산대종사 문하에 출가하여 주경야독으로 수행과 연구를 시작하고부터 1956년(33세)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원광대학 강사로 임용되도록까지의 청년기이다. 제3기는 창학교수기(創學敎授期)로, 원광대학 강사로 대학의 기틀을 쌓는데 참여하고부터 1972년(48세) 원광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교무처장에 취임하도록까지의 장년 1기이다. 제4기는 연구활동기(硏究活動期)로, 원광대학이 종합대학으로 개편되고부터 대학과 교단, 그리고 지역사회를 잇는 활발한 활동과 함께 마한․백제문화연구소를 중심한 익산문화와 미륵신앙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1986년(62세)에 총장에 취임하도록까지의 장년 2기이다. 제5기는 경영지도기(經營指導期)로, 원광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여 교단과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대내외의 활동을 전개하고부터 2000년(76세) 정산종사탄생100주년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성업을 성공리에 마치도록까지의 장년 3기이다. 제6기는 수양보은기(修養報恩期)로, 정산종사관련 성업의 회향으로부터 원로수도원에 안주하여 교단원로로 수양하며 법문집 등을 펴내는 보은행을 하다가 2014년(90세) 열반에 들도록까지의 만년기이다. 그의 업적은 원불교의 문화사업과 원광대학교의 교육․연구사업, 그리고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활동을 통해 드러난다. 원불교신문사의 설립과 <원불교신문>의 창간,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초대소장으로서 익산지역의 백제왕도 구명,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로서 인재육성사업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문산의 사상은 원불교사상의 전개를 바탕으로 하여 미륵신앙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이를 정리하면 우선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새 회상관(會上觀)으로, 대종사의 대각으로부터 전개된 구세제인(救世濟人)을 위한 모임의 실체관이다. 둘째, 새 회상관에 새 주세불관(主世佛觀)으로, 소태산대종사를 새로운 주세불로 본다. 셋째, 사생관(死生觀)으로, 모태에서 와서 모태로 돌아간다는 모태회귀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넷째, 국가‧민족관(國家民族觀)으로, 한민족인 세계정신의 지도국, 인류도덕의 부모국으로 거듭잘 것이라는 전망이다. 다만, 문산의 생애와 업적 등은 앞으로 세밀한 보충이 요망된다. 그의 저술을 비롯하여 대담이나 회고 등을 포함하면 그의 사상은 좀더 다양하고 풍성한 관점이 드러날 것이다. The Life and Thoughts of Dr. Munsan Samryong Kim Eunyong Yang Honorary Professor Wonkwang University ABSTRACT The present article aims to observe the life and thoughts of Munsan Samryong Kim (1925-2014). Thanks to the connection of his family with the Great Master Sotaesan (Jungbin Park, 1891-1943), the founder of Won-Buddhism, and the 2nd Master Jeongsan (Gyu Song, 1900-1962), he began his career as a priest of Won-Buddhism from early in his youth. His lifetime might be divided into 6 phases. The 1st phase is the period of his growth and education, ranging from his birth in 1925 (age 1) to his teen ages in 1938 (age 14) when he spent his childhood and adolescence at home. The 2nd phase corresponds to the period of his youth during which he left home, entered Buddhist priesthood as a disciple of the Great Master Sotaesan, working and practicing during the day and studying at night, and was appointed as lecturer of Wonkwang College upon graduation from the department of Buddhism, Dongguk University in 1956 (age 33). The 3rd phase is the first part of his middle age during which he contributed to laying the groundwork for Wonkwang College as its lecturer and took office as dean of the academic affairs when the school was upgraded to university in 1972 (age 48). The 4th phase of his life covers the second part of his middle age during which, since reorganization of college to university, he had been actively engaged in researches of Iksan culture and studies on Maitreya belief with Mahan-Baekje Cultural Research Institute as his base together with other joint activities with the academic circles and local community until he was appointed the president of the university in 1986 (age 62). The 5th phase corresponds to the third part of his middle age, called the period of management consultation during which he performed domestic as well as foreign duties as president of Wonkwang University representing the religious order and the local communities until he successfully retired from chairman of the foundation for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the Master Jeongsan in 2000 (age 76). In the 6th or last phase of his life, to be duly called the period of mind cultivation and repayment of kindness, he retreated to the abbey for seniors spending days publishing the collection of his talks, recollecting the projects related to the Master Jeongsan and cultivating his mind as senior member of the religious order, and at last passed away in 2014 at his age of 90. His achievements could be summed up in the cultural projects of Won-Buddhism, education and research programs of Wonkwang University and activities for development of the local communities. Typical examples of his achievements include establishment of Won-Buddhism Newspaper Company, the first publication of Won-Buddhism Newspaper, research of Iksan area as capital city of Baekje Kingdom in the capacity of the first director of Mahan-Baekje Cultural Research Institute, and initiative in manpower training as president of the Love Jeonbuk Movement. Munsan's thoughts showed a broad range of spectrum, starting from development of Won-Buddhistic ideas as basis to Maitreya belief. His areas of concern and activities may be classified in the following categories: First, a new 'view of hoesang' (會上觀) that represents substance of meetings for 'save the world and govern the people' (救世濟人) developed from enlightening of the Great Master. Second, a new view of main Buddha in addition to the new view of hoesang in which the Great Master Sotaesan shall be regarded as a new main Buddha. Third, a view of living and death from the viewpoint of recurrence of uterus which everything comes from and returns ultimately to. Fourth, a view of nation and state believing that the Korean people shall be reborn as those of the leading country of the world or parent country for human moralism. More refined studies are requested to fill up the vacancy in the ...

      • KCI등재

        전북지역 마한의 역사문화권과 향후 과제

        이문형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22 馬韓, 百濟文化 Vol.39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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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지역에서는 「역사문화권정비법」의 ‘마한역사문화권’에 도내 지역의 포함 여부가 큰 관심사의 하나 였다. 다행스럽게도 개정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6월 법의 시행을 앞두고 있다. 최근 전북지역의 만경강유역을 중심으로 점토대토기와 한국식동검이 출토되는 토광묘 계통의 분묘가 집중 조사되어 초기철기시대 혹은 마한의 성립기 분묘 유적의 최대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 의 성과를 바탕으로 익산 미륵산에서 전주 모악산에 이르는 분지형 공간을 ‘만경강유역 문화권’으로 설정 하기도 한다. 또한 완주 상운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분구묘(墳丘墓) 유적이 전북지역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 다. 본 논고는 전북지역의 마한 관련 분묘유적을 정리하고 수계에 따른 문화권의 설정과 그 특징을 검토하 여 마한시기에 전북지역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살펴본 글이다. Ⅱ장에서는 「역사문화권정비법」의 발의와 제정 과정을 포함하여 ‘마한역사문화권’에 대한 내용을 검토 하고 법안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Ⅲ장에서는 전북지역 마한의 문화권과 그 특징을 현재까지 조사된 분묘유적을 토대로 수계(水系)에 따 른 문화권으로 구분하였다. 그 결과 만경강유역권-동진강유역권-고창천유역권으로 크게 세분되었다. Ⅳ장의 각 유역권의 특징으로는 만경강유역권이 마한의 형성기 혹은 성립기에 해당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 의 분묘유적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동진강유역권의 경우 상대적으로 고고학 자료가 영세한 편 이지만 중국 진나라의 허리띠가 출토된 정읍 운학리고분군을 주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창천유역권은 3 세기 이후의 마한 분구묘 밀집 분포지역으로 그 최고의 정점에 고창 봉덕리고분군이 있다. 결국 전북지역의 수계권별 마한 시기의 분묘유적을 통해 마한의 형성기부터 분구묘 전통의 다장(多葬) 고(高)분구묘까지 모두 확인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마한이라는 역사적 무대에서 전북지역이 차지 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북지역의 마한 문화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는 광 역의 측면에서 도내 마한 문화의 연구가 필요하며, 이에 대한 적극적인 행정력과 타 지역과의 유기적인 협 력체계, 이를 위한 관련 전문가의 육성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Lately, the inclusion of certain provincial regions in the ‘Mahan Historical and Cultural Sphere’ of the 「Historical and Cultural Zone Reorganization Act」 has been a great concern of local people. Fortunately, the revised bill of the act has passed the National Assembly and is about to go into effect in coming June. In recent years, an intensive study has been conducted on the pit tombs from which potteries with ring rims and Korean style bronze daggers have been excavated mostly around the Mangyeong River Basin in Jeollabuk-do, which has thus emerged as the largest center of tomb remains of the early Iron Age or the founding period of Mahan. Based on a series of achievements like this, the basin-shaped space from Mireuksan in Iksan to Moaksan in Jeonju occasionally comes to be set as the ‘Mangyeong River Basin Cultural Zone’. Besides, the remains of mounded burials (墳丘墓) which are represented by the remains of Sangun-ri, Wanju have been identified throughout the Jeonbuk region. The present paper investigates the importance of the Jeonbuk region in the Mahan period by organizing the remains of tombs related to Mahan in the Jeollabuk-do region and examining the establishment of cultural spheres according to the water system and their characteristics. In Chapter II, the contents of the ‘Mahan Historical and Cultural Sphere’, including the process of initiation and enactment of the 「Historical and Cultural Zone Reorganization Act」, were reviewed and the problems of the bill were examined. In Chapter Ⅲ, the cultural sphere of Mahan in Jeollabuk-do and its characteristics wereclassified into the cultural spheres according to the water system based on the remains of the tombs investigated so far. As a result, the cultural sphere of Mahan in Jeollabuk-do was subdivided largely into the Mangyeong River Basin - Dongjin River Basin - Gochang Stream Basin. In Chapter Ⅳ, As for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lated river basins, it was found that there are a large number of tomb remains from a relatively early period coincident with the formation or establishment time of Mahan in the Mangyeong River Basin. In case of the Dongjin River Basin, the amounts of archaeological data are relatively small, but notable was the Unhak-ri tomb cluster in Jeongeup, where a belt of the Chinese Qin Dynasty was discovered. Lastly, in the Gochang Stream Basin, Mahan’s mounded burials since the 3rd century are densely distributed and it was confirmed that, among them, the ancient tombs cluster of Bongdeok-ri, Gochang are at its zenith. In the end, it turned out that all the tombs from the formation period of Mahan to the multiple and high mounded ancient tombs of the Mahan tradition could be confirmed through the tombs remains of the Mahan period in each water system of the Jeonbuk region. Consequently, it could be summed up that the proportion of Jeonbuk region on the historical stage of Mahan is heavily large. It seems therefore necessary to study Mahan culture in Jeonbuk region from a broader perspective with a view to advertise the excellence of Mahan culture in broader scope of Jeollabuk-do. In addition, it is further requested to mobilize active administrative power and to introduce an organic cooperative system with other regions. For this purpose, the nurturing of related experts should be accompanied, as well.

      • 고도 익산 백제문화유산의 활용 방안

        문이화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5 馬韓, 百濟文化 Vol.26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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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Study on the Utilization of Baekje Cultural Heritage in Iksan Mun, Ehwa (Research Institute for the Mahan-Baekje Culture, Wonkwang University) This is to study how to utilize cultural inheritances of Baekje Kingdom in Iksan. There are several cultural inheritances of Baekje in Iksan, especially Kumma-myon and Wangkung-myon, including Wangkungri remains and Miruksa temple sites. It was under the historical and cultural background that the places were designated as an ancient capital according to the special law for the preservation of ancient capitals in 2004. And in 2006, the work began to register Iksan historical site as an UNESCO world heritage site. From the year 2011, the work expanded with the new name ‘Baekje historical site’ combining Iksan site and Kongju and Buyeo site. Then Baekje historical site was registered as a UNESCO world heritage site this July. Considering such a significant importance of Baekje cultural heritage, some measures have to be taken for locals and visitors as well as a few experts to enjoy the cultural heritage. The utilization of cultural inheritance of Baekje Kingdom will contribute to solving the problem. We can utilize cultural heritage effectively through tourism and education. In case of Iksan site, most of the heritage are buried in the ground. Therefore their utilization is as much difficult, compared with cultural heritage of other sites. To make good use of cultural heritage, several suggestions will be studied profoundly, for example, the application of diverse mass communication and digital instruments, the art of storytelling, and the mobilization of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as well as the preservation and the maintenance of cultural heritage sites. 본고는 익산지역에 산재해 있는 백제문화유산의 활용방안을 검토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익산지역에는 금마면과 왕궁면을 중심으로 하여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등 백제문화유산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적 환경을 바탕으로 2004년에는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에 의하여 고도로 지정되었으며, 2006년부터는 「익산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등재추진」 작업이 시작되었다. 2011년 「공주․부여역사유적지구」와 통합하여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등재가 추진되었으며, 올해 7월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가 공주․부여의 백제문화유산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와같이 미륵사지, 왕궁리유적 등 익산의 백제문화유산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이 때에 지역주민과 내방객들이 그 가치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야 할 과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과제 해결 방안의 하나로 백제문화유산을 활용한 다양한 방법을 사례를 들어가면서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문화유산은 관광과 교육의 목적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되는데 익산지역의 백제문화유산은 주로 매장문화유산으로서 일반 문화유산에 비하여 문화유산의 활용에 어려움이 큰 편이다. 따라서 활용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문화유산의 보존 및 정비를 기본으로 하고, 첨단 디지털 기법과 스토리텔링 기법,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 활용 등 몇 가지의 방안을 제시해 보았다.

      • KCI등재후보

        전북지역 마한·백제 사주식 주거 구조의 양상

        조성희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8 馬韓, 百濟文化 Vol.32 No.-

        Attempts are made in this paper to take a overview over the distribution and patterns of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s as investigated from the relics of the Mahan/Baekje residential districts in Jeonbuk province. Jeonbuk area is the old land of Mahan and Baekje where the two groups of forces coexisted like a political and cultural transition zone in which, it is assumed, they learned or accepted the architectural technology from each other through mutual exchanges in the area of residential culture. Although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 has been recognized as a characteristic residential style of Mahan, the characters of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 are found even in Baekje's pit-type settlement, and the distribution is extended upto Gyeonggi and part of Gyeongnam provinces. The western plain area in Jeonbuk, above all, is believed to be the one where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 was most frequently practiced. Particularly in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ites in Gimje, Buan and Gochang areas, the characteristics of Baekje-style dwelling culture are seldom confirmed, suggesting that its time of appearance is the earliest among them. There was a change in kiln facilities from clay-made fireplace to flagstone one. As for the 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 of Baekje style with which such relics of Baekje as tripod vessel, high-heeled cup, pot-belly jar, etc. were unearthed, it begins to appear in the northwest plains with Iksan in center. It is estimated that the structure of that style had spread upto the Jeongeup area through the traffic route of Mireuk-Moak Mountains and some of the style advanced even to the Seomjin River basin beyond the Noryeong Mountain Range. In other words, it can be presumed that both the four-pillar-type and the non-four-pillar-type dwelling structures must be a residential culture of Mahan in Jeonbuk province and that there were changes in kiln facilities and excavated artifacts within the four-pillar-type residential area which accommodated dwelling elements of Baekje style. The installation size of the four-pillar-type structure in residential area is mainly 20% ~ 40% of the total area. Therefore, there seems no relation between the increasing percentage of the residential area and the installation size of the four-pillar-type structure, and it is shown that the size of the four-pillar-type structure decreases as the dwelling site grows to middle and large size. It is thought that the four-pillar-type residential area in Jeonbuk province had spread around the western plains area. It is also estimated that the four-pillar-type structure was most prevalent from the 3rd to the 5th century AD. It is believed that the four-pillar-type residential structure in Gimje, Buan, and Gochang was the earliest one since the characteristics of Baekje residential culture were hardly recognized there. It is therefore judged that the development and construction technology of the four-pillar-type residence might have reflected the influences of the culture and politics of that time, and we do not exclude the possibility that such type of residence must have been accepted and built by the choice of residents in the settlements. 본고에서는 전북지역에서 조사된 마한·백제 주거유적 가운데 사주식(四柱式)의 구조 속성을 가진 주거지의 분포와 양상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전북지역은 마한과 백제의 古土로써, 두 세력집단이 공존한 정치·문화적 점이지대였기 때문에 주거문화의 경우에서도 상호교류를 통한 건축기술을 습득하거나 수용하였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사주식 주거지는 마한의 특징적인 주거양식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백제(계)의 수혈주거지에서도 사주식 구조 속성이 확인되며, 분포범위 또한 경기도와 경남 일부 지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전북지역에서 사주식 주거지가 가장 성행하는 권역은 서부평야권역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김제, 부안, 고창지역의 사주식 주거지에서는 백제계 주거문화 속성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어 출현시기에 있어서도 가장 이를 것으로 생각된다. 점토제부뚜막에서 판석재부뚜막으로 노 시설의 변화가 나타나고 삼족기, 고배, 단경호 등 백제의 유물이 출토되는 백제(계) 사주식 주거지는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부평야지역에서 출현이 감지되며, 미륵산-모악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통해 정읍지역까지 확산되고 일부는 노령산맥을 넘어 섬진강 유역으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비사주식 주거지와 사주식 주거지 모두 전북지역 마한의 재지문화이며 백제계 주거 요소를 수용하면서 사주식 주거지 내에서 노 시설과 출토유물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거지 내 사주의 설치 면적은 총 주거면적의 20%∼40% 내의 범위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주거지의 면적 증가율과 사주의 설치면적은 무관하며, 오히려 중대형의 주거지로 갈수록 사주의 면적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북지역의 사주식 주거지는 전북 서부평야지역을 중심으로 확산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심 성행시기는 기원후 3∼5세기 대이며, 백제계 주거문화의 속성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 김제·부안·고창지역의 사주식 주거지가 가장 이를 것으로 생각된다. 사주식 주거지의 발생과 사주 축조기술에는 당시의 문화상과 정치체의 영향력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취락 내 거주민의 선택권에 의해 받아들여져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고 있다.

      • KCI등재

        馬韓墳墓와 그 墓制의 認識

        이남석(Lee, Nam-Seok)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3 馬韓, 百濟文化 Vol.22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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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마한의 시·공간적 범위를 설정한 후 구체적 개념을 정의하여 그들의 분묘 정황을 살펴 보았다. 이후 그에 따른 묘제의 특성을 검출하고, 나아가 그것이 백제사회에 이르면서 어떻게 변천되었는가를 살펴보는데 목적을 두었다. 최근 마한에 대한 역사인식이 비교적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시간적으로 기원전후 3세 기 어간의 마한은 원초적 자료인『三國志』魏志東夷傳에 근거할 경우 종족·지역·문화의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결론할 수 있다. 나아가 정치적 의미로서는 54개의 소국을 아우르는 총 합적 개념이었을 뿐이고, 오히려 후대의 마한을 역사체로서 인식의 진전에 따라 왕국 등으로 인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마한의 기본개념은 정치체가 아닌 지역·시대·문화 혹은 종족적 개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고, 구체적 정치체로서의 실상은 馬韓小國혹은 馬韓諸國의 용어가 합당할 것으로 정리하였다. 마한을 시·공간적으로 규정하고 그 범위에서 인지되는 분묘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다만 최근에 발견된 미룡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화순의 용강리 유적의 분묘, 세종시 나성동 유적 등이 있어 동시기 묘제의 대략적 환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 기왕에 알려진 광주 신창동 옹관묘의 경우도 마한의 분묘로 봄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들 분묘자료를 토대로 마한분묘의 묘제는 일 단 封土·封石墓로 정리된다. 묘제는 목관이나 옹관의 사용이 전제되나 이를 지면상을 대강 정지 하여 안치하고, 다시 흙이나 돌을 대강 덮는 방식으로 복원할 수 있다. 이러한 묘제환경은 동시기 분묘자료의 전반적 유실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매장시설의 빈약상은 아무래도 마한사회 특유의 상장례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의 묘제는 소국의 하나였던 伯濟國이 고대국가 백제로 발돋움하면서 전반적 변화를 가져와 백제묘제로 정립된다. 더불어 백제묘제는 이전의 마한묘제와는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는데 다양한 묘제가 지역적으로 고유의 분포권을 가지면서 정립되었음이 그것이다. 물론 백제 초기 도읍의 범 위인 한강 중·상류지역에는 마한 고유의 봉토묘나 봉석묘가 일정기간 유지되나, 이외의 대부분 의 마한지역은 신유형의 묘제 유입과 함께 상호 관련을 통해 다양한 묘제 변화가 연출된다. 특히 분묘는 대체로 고총고분으로 구축되어 이전의 마한묘제와 대비되는데 그러한 변화상은 3세기 후 반경에 새롭게 유입된 주구토광묘의 영향으로 마한지역에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墳丘墓즉 분구 토광묘나 분구옹관묘를 통해 알 수 있다. In this thesis, I have set the spatio-temporal scope of Mahan and defined specific concepts to survey the region s tombs. Then, based on the data, I have figured out the characteristics of the burial system involved and gone from there to see how it transformed in Baekje. Recently, Mahan has been put in relatively diverse historical perspectives, but the possible conclusion is that the state, which existed in the time slot that splits three centuries between CE and BCE, can be perceived as an ethnic, regional, and cultural entity, according to Dongijeon, Wiji, of The History of Three Kingdoms, the original historical record. And politically, it was merely a total concept that comprised fiftyfour statelets, and we should rather suppose that the later Mahan as a historical entity was viewed as a kingdom in accordance with progress made in the understanding. Therefore, for the basic concept of Mahan, a higher priority should be placed on region, period, culture, or ethnicity than politics, while to specify its true picture as a body politic, the Statelet of Mahan (Mahan smallnations) or the Statelets of Mahan should be appropriate. When Mahan is defined temporally and spatially, data on its tombs as recognized in the scope is very meager. Yet, a rough configuration of the contemporary burial system is possible based on the artifacts including the recently discovered tombs in Mirong-dong, the tombs in th relic of Yonggan-ri, Hwasun-gun, and the relic of Naseong-dong, Sejong City. Further, it wouldn t be too much to include amongMahan tombs the already-disclosed bronze earthenware coffin in Sinchang-dong, Gwangju. Based on the data on the tombs, the burial system for Mahan tombs is understood as earth-capped and stone-capped tomb . A burial system presupposes the use of wooden or earthenware coffin, which is placed after land surface is roughly excavated and then recovered by covering it with earth or stones. While such a burial practice is presumed to have caused a general loss of the elements of the contemporary tombs, the meagerness of the burial facilities is presumably related to the unique funeral ceremony of Mahan. The burial system of Mahan came to be established as that of Baekje, which brought general changes with its growth into an ancient state. With that, the burial system of Baekje revealed a big difference from the earlier burial system of Mahan, which consists in the establishment of various burial systems demonstrating proper distribution in different regions. Certainly, in the upstream and midstream of Han River, which constituted the boundary of Baekje capital in the early period, Mahan s unique earth-capped or stone-capped tombs were maintained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In most of the other parts of Mahan, however, the introduction of new types of burial system brought various changes to the burial system. Especially the tombs were generally built as old tombs that are contrasted with the earlier burial system of Mahan, which change can be verified through mounded tombs such as pit-burial mounded tombs and earthenware-coffin mounded tombs, which are extensively distributed in Mahan region under the influence of the guttered-around pit-burial tomb, a new arrival around late 3rd century CE.

      • 문산 김삼룡선생과 익산문화권의 연구

        홍윤식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5 馬韓, 百濟文化 Vol.25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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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4년 5월 6일 석가탄신일에 돌아가신 문산 김삼룡 선생의 1주기를 맞이하여 선생이 남기신 학문적 업적과 사회문화계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문산 김삼룡 선생은 원광대학교 총장과 원불교 학과 교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학교발전과 지역사회발전, 백제사를 통한 지역의 역사문화 연구에 노력하였으며, 그러한 노력은 <익산문화권의 연구>, <한국 미륵신앙의 연구> 등의 연구업적으로 이어졌고, 미륵사지 등의 중요 문화유적과 <관세음응험기>에 근거하여 백제 무왕대에 익산으로 천도하였다는 ‘익산천도설’을 피력하였다. 특히 1973년 10월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부임한 후, <미륵사지 발굴조사>,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오금산성 발굴조사> 등 익산의 중요 문화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에 큰 성과를 거두어, 오늘날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 등 익산의 백제왕도문화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될 수 있는 학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문산 김삼룡선생의 생애와 사상적 편력은 <익산문화권의 연구>에서 비롯하여 <한국미륵신앙의 연구>로 결말을 맺고 있으며, 선생의 한평생이 지역문화사랑, 그 자체였다고 할 것이다. A Study on Munsan Samryong Kim and Iksan Cultural Area Yunsik Hong Honorary Professor Dongguk University ABSTRACT This article is dedicated to the late Munsan Samryong Kim on the occasion of the first anniversary of his decease on May 06, 2014, Buddha's Birthday, in commemoration of his outstanding scholarly achievements and contributions in the social and cultural circles. Throughout his successive holding of various posts such as president of Wonkwang University, professor at the Department of Won-Buddhism Science, director of Mahan-Baekje Cultural Research Institute, etc., Munsan Samryong Kim had devoted himself to the progress of the university and local community as well as to the studies on the local culture with a focus on the history of the Baekje Kingdom. His devoted efforts were met with great research records including <A Study on Iksan Cultural Area.>, <A Study on Maitreya Faith in Korea>, etc. It should be particularly noted that he asserted 'the transfer of Baekje's capital to Iksan' which took place during the reign of King Mu on the basis of major cultural relics including the remains of Mireuk Temple site and <the records of Kwanseumeungheumgi (觀世音應驗記)>. Since his inauguration as the first director of Mahan-Baekje Cultural Research Institute in October 1973, he continued to win great success in researches and studies on many cultural relics in Iksan as shown in the articles including <Excavation Research of Mireuk Temple Site>, <Excavation Research of Wanggung-ri Relics>, <Excavation Research of Ogeum Mountain Fortress>, etc. only to name a few. It was he who laid academic foundation for pushing ahead this day of applying for inscription of cultural heritages of the Baekje Kingdom in Iksan as the capital city such as Mireuk Temple site and Wanggung-ri relics as the world cultural heritages. The life and ideological career of Munsan Samryong Kim began with <A Study on Iksan Cultural Area> and ended up with <A Study on Maitreya Faith in Korea>, meaning that the whole span of his life itself represented his deep love for local culture.

      • KCI등재

        건축사적 측면에서 본 미륵사의 세계유산적 가치

        천득염(Cheon, Deuk-Youm),김준오(Kim, Juno)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0 馬韓, 百濟文化 Vol.19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9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백제 古都로서 익산은 당시의 포괄적 문화중심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으며, 역사유적지구 내의 종교적 역할로 서 미륵사지는 백제의 영향력과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현재 익산지구에 대한 고고학, 인문, 역사, 지리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의 지속적인 연구가 이뤄지고 있으며, 현재 주변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왕궁리유적, 관방유적 등은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문화의 흐름과 보편적 특징을 고려하였을 때 백제의 고도로서 뚜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구들을 바탕으로 백제고도에서 미륵사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이 무엇이었으며, 독창적 특징, 고대 탑파에서 차지하는 위상, 가람배치의 적용과 발전, 건축적 특징 등에 대하여 당대 주변국에서 보이는 형식과 특징을 비교분석함으로써 미륵사만의 내재적 특징을 연계 고찰하고자 하였다. 미륵사지는 7세기 백제의 유산으로서 백제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중심적 위치에 있다. 미륵사지 탑은 한국 불탑양식의 주류를 형성하는 시발점이 되고 있으며, 양식전개라는 차원에서 백제의 가람양 식 변화와 함께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번안과정에서 보이는 석탑의 목조건축적 표현은 불교문화권 어디에서도 비슷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창의적인 것이다. 또한 지역적 특수성과 역사적 사실의 재현공간이라는 차원에서 지금도 그 웅장하고 화려했던 모습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으며, 7세기 백제의 중심지로서 동아시아 문화전파의 허브역할을 담당한 중요성은 뛰어난 보편적 가치 기준으로서 미륵사지 유적의 세계문화유산적 의미를 돋보이게 한다. 본고에서는 미륵사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규명하기 위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평가기준 항목별 충족여건으로 미륵사만의 건축사적 가치인식을 위한 사료 검토와 미륵사 조영의 의미, 문화중심지로서의 중요성, 가람의 배치 와 조영특징에 따른 구조적 성격과 우수성, 동아시아 건축에서 차지하는 내·외재적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백제건축의 독창성과 불국토를 실현하고자 한 정신세계는 역사유적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확보하는데 있어 필수적 요소라 생각된다. Historic ruins of Iksan district, has appeared the character as an advanced civilization of the Baek-je Dynasty and it is on the important position with religious roll, shown influence and social work of Baek-je Dynasty. The study is going on the diversity aspects of archeology, humanity, history and geography so and forth around Iksan-si district, Mireuksa, Wanggungli ruins, fortressed remains have the definite characters in the cultural side, in regard to the passage of the culture and the universal feature. This study is to connect to immanent features of Mireuksa, comparing neighbouring countries about what are the position and roll of Mireuksa, unique peculiarities, the statues about ancient pagodas, building layout development and structural feature, etc. Mireuksa, the one of the 7th heritage pagodas in Baek-je Dynasty, is centrality to explain the high culture heritages and features of the era. This pagoda did not only started the mainstream of Korean Pagoda formation, but it has been most creative stone one with wooden structural formation, and nowhere else during the developing time of style when wooden pagoda adapted to stoned material in the temple of Baek-je. Mireuksa is good enough to inference the magnificence and luxuriance with distinct characteristics of the area and re-enacting the history, the important point which had a key part the cultural hub of 7th Baek-je is stand out as World Heritage Site Mireuksa in common sense. In order to investigate the worth of World Heritage Site Mireuksa , the study reports the historical review up to the structural character and superiority and the inner and external characters in East Asia according to a meaning of building, the importance as cultural center, temple placement and erecting feature as well as awareness of architectural worth. Through the study, the spiritual world which was going to make the Philosophy of Temple Structure is one of the most vital elements to keep the authenticity and integrity the historic heritages.

      • KCI등재

        馬韓 - 硏究現況과 課題

        최몽룡(Choi, Mong-Lyong)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3 馬韓, 百濟文化 Vol.22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9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마한의 始原은 한반도에서 기원전 1500년부터 토착사회를 이루던 지석묘사회가 해체되기 시작하는 철기시대 전기(기원전 400년-기원전 1년)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까지 올라가지만 한국선사고고학의 입장보다는 시간적으로 삼국시대 전기(철기시대 후기: 서기 1년-서기 300년)에 그 중심을 두고 역사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연구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이는 마한의 연구는 백제와의 역사적 관계 속에서 중심지의 변천 및 54국과의 관계 등을 항시 고려하면서 진행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제의 역사와 문화가 영역의 확장 및 도읍의 변천에 따라 漢城→熊津(公州)→泗 (扶餘)의 세 시기로 구분되듯이 마한의 경우도 백제의 영향 하에 이루어진 중심지의 이동 및 변천에 따라 天安→益山→羅州의 세 시기로 구분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百濟國은 기원전 3세기-기원전 2세기에 성립된 馬韓의 바탕 위에 기원전 18년에 성립되었다. 이는 물론『三國史記』초기의 백제 기록을 믿고 또 최근 조사된 적석총의 연대가 기원전 2세기-기원전1세기로 올라간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전제에 따른 것이다. 마한으로부터 臨津江과 漢江유역의 영역을 할양받으면서 점차 정치적 국가체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백제는 초기의 문화적 양상이 마한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흔적은 백제시대의 무덤과 유구에서 찾을 수있는데 積石塚, 土壙墓, 甕棺墓, 馬韓土室의 변형인 福주머니 형태의 지하저장고 등이 해당된다. 이 가운데 積石塚은 高句麗이주 세력의 분묘로 백제 초기의 지배세력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당시 백제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적석총이 축조되던 시기는 기원전 2세기-기원전 1세기경으로 韓國考古學編年上鐵器時代前期(기원전 400년-기원전 1년) 末이며 이를 통해 百濟의 建國이 형성되고 三國時代前期(서기 1년-서기 300년)에로 進入하게된다. 그리고 마한 54국으로 표출된 크고 작은 여러 족장사회(族長社會, chiefdom society)로 시작된 마한은 백제가 그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 영역이 축소 개편되었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족장사회는 通商圈(Interaction Sphere)을 형성하면서 복합족장사회(complex chiefdoms)로 발전되었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目支國이라는 국가 체제(state)로 성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三國史記』에 보이는 마한의 신라 및 백제와의 관계기사를 고려해 볼 때, 늦어도 기원전 1세기경에는 馬韓이 국가사회로 성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물론 이 과정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마한과 백제는 그들의 국가형성과 성장에는 주위의 孫吳/東吳(서기 222년-서기 280년), 晋(서기 265-서기 316년), 南朝중 梁(서기 502년-서기 557년), 衛滿朝鮮(기원전 194년-기원전108년), 高句麗(기원전 37년-서기 668년) 뿐만 아니라 沃沮, 東沃沮, 濊/東濊, 弁辰, 北沃沮(團結), 婁와 같은 족장사회와의 국제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Mahan(馬韓), which was established in the Gyeonggi-do, Chungcheong-do and Jeolla-do provinces around 3 cen. B.C. - 2 cen. B.C. about 1-2 centuries earlier than the Baekje state formation in 18 B.C on the territory of Mahan, has been annihilated and annexed by the Baekje dynasty later between the late of 5 cen. A.D. and the early of 6 cen. A.D. according to the expansion of territory and the transfer of the final capital to Buyeo(538 A,D.- 660 A,D.) from Gongju of Baekje dynasty(475 A.D.-538 A.D.) in 538 A.D. We can say that the chronology of Mahan is based mainly upon between the period of the Iron Age(400 B.C. - 1 B.C.)/Former Three Kingdoms period(1 A.D.- 300 A.D) and Later Three Kingdoms Period(300 A.D.- 660/668 A.D.) according to the Korean Archaeological Chronology, and it can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to the movement of its socio-political center(capital). They are as follows: Cheonan(天安)/稷山(Jiksan)/成歡(Seonghwan), Iksan(益山) and Naju(羅州) Period. The transfer of Mahan s socio-political center is closely related to the military power and territorial expansion of the Baekje dynasty(18 B.C. - 660 A.D.). Mahan and Baekje had coexisted for a about 5-600 years long, and the recent increase of archaeological evidence made it possible for both Korean archaeologists and ancient historians together to begin Mahan study with full-scale. Mahan culture is characterized such archaeological traits as deep subterranean pit house named Tosil (土室), whose bottom can be reached by ladder from the moundshaped ceiling with entrance similar to the flat roofed building of Çatal Hüyük of Anatolia, Turkey in addition to the Jugumyo(周溝墓) burial site with moat around it, wooden building with post holes stuck into the ground(堀立柱, 四柱式建物), sawteethed wheel designs on the surface of pottery(鋸齒文) and bird s footprint designs(鳥足文). Chinese Historical books(『後漢書』, 『三國志』魏志東夷傳韓傳) tell us the religious aspect of the Mahan society in which Sodo(蘇塗) with its apex of Cheongun(天君) religious leader, was the ancient asylum as a culmination of Mahan people s shamanism and ancestor worship religions indicating separating between state and religious center of Sodo forming a theocracy during the Iron Age(400 B.C. - 1 B.C.). Their secular leaders as chiefs of Samhan(三韓) chiefdom society based upon clan and hierarchy are Geosu(渠帥), Sinji(臣智), Geomcheuk(險側), Beonye(樊濊), Salgye(殺奚), and finally Eupcha(邑借) as orders in terms of each status and territory controlled. We believe that all the names of Samno(三老) of Okjeo(沃沮), Jangsu (將帥) of Dongokjeo (東沃沮), Hu(侯), Eupgun(邑君), Samno(三老) of Ye(濊)/東濊(Dongye), Daein(大人) of Eupnu( 婁), and Gunjang(君長) of Suksin(肅愼) did as same status of chief in their chiefdoms as in Samhan(三韓). Korean academic circles came to realize that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Mahan(馬韓) society, one of the Three Han(三韓: 馬韓, 弁韓, 辰韓) Society was to be more than essential in the study of Baekje. According to historical records and archaeological data, Mahan Society represented by Mokjiguk(目支國) ruled by King Jin(辰王) has been located in the middle and southwestern parts of the Korean peninsula from the 3 cen. B.C. or 2 cen. B.C. to the end of the 5 cen. A.D. or early 6 cen. A.D. Mahan had already occupied central portion of the Korean peninsula, including the Han River Valley when King Onjo(溫祚) first set up the capital of Baekje Kingdom at Wiryeseong(慰禮城), considered to be the Pungnap-dong toseong(風納土城, historical site no.11) near Han River V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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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남방 확장과 가야 접경의 변화

        김병남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21 馬韓, 百濟文化 Vol.38 No.-

        As an ancient nation, Baekje's growth took place in two directions: north and south. To the north, Goguryeo controlled the south, to the south was the subjugation of Mahan, and to the southeast, it passed through Gaya and connected to the Wae. Therefore,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with Gaya in the growth of Baekje is an important issue in terms of mutual influence due to cooperation and antagonism between the two countries beyond the simple identification of boundaries. According to records, Baekje and Gaya in the 1st and 3rd centuries do not directly face borders. It was not until the middle of the 4th century that Baekje was associated with Gaya in the form of southern conquest. However, considering that the boundary of Baekje was limited to a part of Jeollabuk-do from the south of the Geum River to the Mangyeong River before King Geunchogo, the north-south contact was made with Gaya in the middle and lower reaches of the Nakdong River. The reason why Baekje was interested in Gaya even though it had nothing to do with the direct border was because of the link between Baekje-Gaya-Wae trade. Therefore, the relationship between Baekje and Gaya in the 4th century is important as the starting point of the southern region of Baekje afterward, although it did not establish a direct border. However, as a result of the continuous all-out war against Goguryeo, the securing of influence over the Gaya region of Baekje could not be maintained. Baekje showed interest in Gaya again during the reign of King Dongseong(479-501), after the capital of Ungjin. However, externally, it responded to Goguryeo's continued attempts to advance south after the fall of Hanseong, and internally, disasters such as great famine, robbery, and epidemics continued, so it was difficult to concentrate. Rather, Baekje's will to advance south triggered a rupture in the relationship with Gaya, making Gaya approach Silla. By the time of King Muryeong in the 6th century, Baekje actively advanced into the border area with Gaya. Attempts to incorporate and dominate the territory of the outskirts of Gaya[hyeon-eup] by grasping the hogu of Baekje people in the Gaya region, By attacking the 4 prefectures of Imna and acquiring Kimun and Daesa, etc., Baekje territorialized the entire Seomjin River from Namwon to Hadong, forming a border with Gaya, which is a vertical line between West and East. 고대 국가로서 백제의 성장은 남·북의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남하를 제어하 고, 남으로는 마한의 복속과 동남쪽의 가야를 관통하여 왜국까지 연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백제의 성장에서 가야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단순한 경계선의 확인을 넘어 양국의 협력과 반목에 따른 상호 영향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기록 상 1~3세기 백제와 가야는 직접적으로 국경을 마주하지 않는다. 4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백 제가 남방 정벌이라는 형태로 가야와 관련을 맺는다. 그러나 근초고왕 이전까지 백제의 경계가 금강 이남에서 만경강 일대의 전북 지역 일부에 한정되는 점으로 보면 낙동강 중·하류의 가야와는 남과 북 의 횡렬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백제가 직접적인 접경과 무관함에도 가야에 관심을 둔 이유는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교 역의 연결 때문이다. 따라서 4세기 백제와 가야의 관계는 직접적인 접경을 이루지 못했음도 불구하고 이후 백제가 갖는 남방 지역 연고권의 시발점으로서 중요하다. 그러나 백제의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 력 확보는 고구려와 전면전이 지속된 결과 유지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백제는 웅진 천도 이후인 동성왕(479∼501) 시기에 다시 가야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한성 함락 이후 지속적인 고구려의 남진 시도에 대응하고, 대내적으로는 대기근·도적 발 생·전염병 창궐 등의 재해가 이어져 집중하지 못했다. 오히려 백제의 남방 진출 의지는 가야와의 관계 에 파열음을 촉발해 신라에 접근하게 만들었다. 6세기의 무령왕 때에 이르러 백제는 가야와의 접경 지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에 이른다. 가야 지 역 백제민에 대한 호구 파악으로 외곽[현읍]의 영역 편입과 지배를 시도하고, 임나 4현을 공략, 기문과 대사 획득 등으로서 백제는 남원으로부터 하동에 이르는 섬진강 전 유역을 영역화하여 서와 동의 종 렬적인 가야 접경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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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國南朝都城과 百濟

        하운고(He Yun Ao)(賀云翺)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10 馬韓, 百濟文化 Vol.19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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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와 중국에 있어 가장 왕래가 왕성한 시기의 하나인 梁代시기는 백제의 한성기 후기에서 시작하여 웅진시 기와 사비시기의 초중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백제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역할을 하였던 지리 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당시 동아시아지역의 서로 다른 국가의 교량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백제 도성문화로써 특수한 의의와 위치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궁성유적에 있어 익산 왕궁성 유적은 현재 유일한 백제 도성왕궁의 자료로, 백제 도성이 발전하던 최고수준에서 출현된 것으로 백제도성 건설의 훌륭 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익산 왕궁성 건축의 완성이 무왕시기이지만, 이 시기는 남조의 가장 마지막 왕조가 수나라에 의해 이미 멸망 한 후이다. 그러나 익산 왕궁리의 설계는 오히려 남조도성의 건강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조의 태성(台城) 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왕궁성의 평지는 남북으로 된 장방형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정치영역, 생 활영역, 궁원(宮苑)영역 등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남조 태성(台城)기능의 공간적 구조를 모방한 것으로 이는 남조의 태성궁(台城宮)의 금원(禁苑)인 화림원(華林園)의 방법과 일치한다. 또한 익산 왕궁성에서는 대관사(大官寺)건축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이 사찰은 아마도 백제 무왕과 왕비의 능묘에 사용된 능사(겓寺) 로 추정된다. 이러한 능(陵)과 사(寺)가 한 곳에 모여 있는 능사합일(陵寺合一) 제도는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우리는 익산 왕궁성과 불사유적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익산 왕궁성은 백제 도성의 핵심 건축군 즉, 궁 건축의 최상의 작품이며, 동아시아지역의 다른 문명과 교류 융화하면서 특히 백제의 변혁기에 창조된 문화의 결정체이다. 그 구조를 보면 전반적으로 보존과 재현이 잘 되어 있으며, 이러한 점은 백제 한성기와 웅진기, 사비시기 도성과 중국 남조도성 건강(建康)도성 유적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매우 독특하고 귀중한 가치가 있다. 둘째. 동아시아 3-7세기의 제왕의 능묘와 불교 사찰이 결합된 능사합일(陵寺合一) 제도의 전형적인 표본이 며, 불교가 중국 남북조시기에 완성되면서 다시 한국 백제왕조에 전해지면서 더 진보된 발전을 가져 왔다. 비록 중국문헌에 남조 양대에도 겓寺合一 제도를 기록하고는 있으나 현재까지 아직 실제 사례가 발굴된 바가 없다. 한국 익산의 陵寺合一 제도의 범례가 발굴됨에 따라 그 가치는 매우 크다 하겠다. The age of Liang Dynasty , a period when transactions were most bustling between Baekje Kingdom and China, is thought to correspond to the one that started from the latter era of Hanseong ranging to the beginning or middle part of Ungjin and Sabi time. Baekje Kingdom, particularly, was placed in a geographically favorable location as a mediator for China and Japan, performing thus an additional role as a bridge between other countries in the then East Asian region, a fact evidencing that the kingdom featured a special significance as well as a position with its culture of castle walls. The relics of Wanggung Castle excavated in Iksan are, among others, the only proof as of today to reveal information about the royal palace in the castle wall of Baekje Kingdom, demonstrating the peak level of technology and wisdom employed for building the castle walls during the kingdom era. The construction of Wanggung Castle in Iksan was completed during the reign of King Mu, equivalent to the period when the last regime of the South Dynasty was already destroyed by Sui (隋). The plan of Wanggung-ri, Iksan was, however, influenced rather more by the Jiankang Palace (健康宮) of the South Dynasty s castle walls and may therefore be better called as Taicheng (台城) or outer wall of the South Dynasty. The plain land of Wanggung Castle, shaped in rectangle that stretches from south to north, was divided into the quarters for politics, living and palace garden (宮苑) from south toward north. This structure is a mimic of spatial make-up of Taicheng , South Dynasty, equivalent to the way Hualinyuan (華林園), forbidden garden (禁苑) of Taicheng Palace (台城宮), was constructed. From the site of Wanggung Castle in Iksan, the relics of building of Daegwan Temple (大官寺) was unearthed, a fact leading to assumption that the temple was likely to have functioned as such for royal tombs of King Mu and his queen of Baekje Kingdom. This system of tomb and temple in the same compound is believed to have been affected by the South Dynasty. Two important significances could be detected from the relics of the Wanggung Castle and the Buddhist temple in Iksan as follows: First, the Wanggung Castle of Iksan was a masterpiece of palace found among the key structures of castle walls constructed during the Baekje era. It could be said to be a product of culture created especially during the period of revolution in Baekje following the transactions and fusion with other civilizations in East Asian region. Their structure has been generally well preserved and reproduced, extremely unique and valuable features which could hardly be found either in the relics of castle walls during the eras of Hanseong, Ungjin and Sabi in Baekje Kingdom or in the remains of Jiankang Castle of the South Dynasty, China. Second, it is a typical example for the system of tomb and temple in the same compound that united tombs of emperors and Buddhist temples in the East Asia in the 3-7th centuries and has made further progress in line with flourishing of Buddhism in the period of the South and North Dynasties in China as well as its transfer to Baekje Kingdom in Korea. Although the system of tomb and temple in the same compound was recorded in the literature of the South and North Dynasties in China, no excavation has been actually performed in this regard so far. This is why it is so significant that a type of the system of tomb and temple in the same compound was unearthed in Iks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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