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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서울역사편찬원 2016 서울과 역사 Vol.- No.92
이 논문은 대한제국 한성부의 도시화와 연희공간의 변화, 청국과 일본 연희문화의 유입, 연희 담당자의 대응에 주목하여 한성부 연희공간의 변화를살피는 글이다. 京中優人들은 정조 8년(1784)을 마지막으로 나례가 자취를감추는 시기 민간 공연예술에 관여한다. 서울지역 재인의 흥행 활동에 영향을 준 관청은 좌우 捕盜廳과 龍虎營으로, 나례를 담당하던 官과 연희 담당층의 관계는 여러 이해관계로 밀착된 모습을 보여준다. 한성의 공연문화는 조선후기까지 궁정・시정・외방, ‘성내’와 ‘성외’의 관계망 속에서 성내 연희를불허하되 ‘빈 땅’에서 공연하는 것은 눈감아준다는 궁정사회의 탄력성과 무반과 중서층 등을 포괄한 ‘왈자(曰者)’들의 영향력 하에 질서가 유지되었다. 1882년 조청상민수륙통상장정 체결을 계기로 시작된 한성의 開市場화는외인들의 토지 침탈과 상권 건설로 이어졌으며, 외인극장이 도시에 들어선사건은 ‘성내’의 공연활동을 엄금하였던 질서에 균열을 가져왔다. 외인들의유입을 배경으로, 1899년을 전후하여 ‘청인 희극장’이 한성부 내에 탄생하였고, 청국과 일본 연희문화의 영향으로 기존 연희공간 질서는 위협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존 연희 담당자였던 왈자들은, 대한제국 설립 후 전통적왈자–관청 관계가 붕괴되어 곳곳에서 마찰을 빚으면서도 한성부 내 공연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성부 도시계획과 한성전기회사의 이윤추구, 왈자들의 대중적 공연 모색, 외인의 특권적 지위라는 역학의 균형 아래 탄생한 용산 무동연희장은 기존 연희공간에 대한 통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연희공간 질서가 창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후이다. The organization of play space and the culture of play in the HanseongBu during the period of empire of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