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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건축과 거주

        문동규(Mun Dong-Kyu) 새한철학회 2008 哲學論叢 Vol.4 No.54

        이 글은 건축과 거주의 상호공속적인 관계를 규명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잘 사는'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잘 산다'고 할 때, '산다'는 것은 '거주함'을 말한다. 그런데 거주한다는 것은 건축과 연관되어 있으며, 건축은 본래 거주함이다. 그래서 건축이라는 것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듯이 어떤 재료를 통해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이 아니라 근원적으로는 인간을 이 땅 위에 거주하게 함이다. 건축은 본래 거주하게 함이다. 그러나 거주함이란 인간이 단순히 어떤 거처에 머무르면서 체류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을 통해 나타난 '사물' 안에 거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사물이란 사방, 즉 땅과 하늘 그리고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인 사자들이 하나로 포개짐인 사방을 모아들이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방 안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은 결국 사물 곁에 체류하고 있음, 즉 건축을 통해 나타난 사물 곁에 체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주의 근본특징은 '보살핌'이다. 왜냐하면 사방 안에 거주하고 있는 인간은 다른 삼자들을 보살피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본래적인 보살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구를 위해 어떤 것의 고유한 본질을 침해하면서까지 그 어떤 것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그 어떤 것의 지배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래적인 보살핌은 우리가 어떤 것을 처음부터 그것의 본질 안에 그대로 놓아둘 때, 발생한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것을 본래적으로 보살피면서 거주한다는 것은 건축을 통해 나타난 사물들 곁에 자신의 본질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거주가 건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KCI등재

        ‘10.19’ : ‘이름 짓기 어려운 이름’

        문동규 ( Mun Dong-kyu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22 호남학 Vol.- No.72

        ‘10.19(일명 여순사건)’란 하나의 ‘사태(Sache)’이다. 그래서 이름 짓기가 어렵다. 보통 우리가 일컫는 이름은 대개 사람이나 사물에게 붙여 부르는 것인데, 10.19란 그런 것이 아니어서 이름 짓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10.19란 다양한 사건들이 이어지면서도 중첩된 하나의 ‘사태’이기에 이름 짓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사태’는 ‘개념(der Begriff)’을 통해서만 포착할 수 있는데, 포착할 수 있는 그 ‘개념’을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10.19에 대해 명칭을 부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드러난 10.19 ‘사태’를 통해 명칭을 부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우선 10.19가 발생해서 종말을 고할 때까지의 전개과정, 즉 지금까지 드러난 10.19의 사태에 대해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다음으로 10.19가 ‘항쟁’인지와 기존의 명칭들을 검토하고 있는데, 여기에선 기존의 명칭들이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검토 후 10.19에 대한 명칭 부여, 즉 이름 짓기에 대해 고민하는데, 그 이름 짓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10.19란 다양한 사건들이 중첩되어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그러면서도 드러난 하나의 ‘사태’이기 때문이다. 10.19(also known as the Yeosun incident) is a ‘state of affairs(Sache)’. So 10.19 is hard to name. Usually, the names we call are given to people or things, but 10.19 is not such a thing, so it is difficult to name it. It is difficult to name 10.19 because it is a ‘state of affairs(Sache)’ in which various events are connected and overlapped. In fact, ‘a state of affairs(Sache)’ can only be captured through a ‘concept(Begriff)’, because it is difficult to create that ‘concept’. However, if we are in a situation where we have to give a name to 10.19, we will have no choice but to give a name through ‘a state of affairs(Sache)’ of 10.19 that has been revealed so far. Therefore, this article first outlines the 10.19 development process from the occurrence of 10.19 to the end, that is, the events of 10.19 that have been revealed so far. Next, we are examining whether 10.19 is a ‘resistance (uprising)’ and the existing names, which reveal that there are problems with the existing names. And after this review, we are thinking about giving a name for 10.19, that is, naming it, and it shows that it is very difficult to name 10.19. In fact, this is because 10.19 is a ‘state of affairs(Sache)’ in which various events overlap and hide itself, and yet a ‘state of affairs(Sache)’ that is revealed.

      • KCI등재

        일상에서 이상으로 : 이상적인 삶을 위한 이정표'

        문동규(Mun Dong-Kyu) 새한철학회 2010 哲學論叢 Vol.60 No.2

        우리의 삶은 대체로 사회적 관습과 세론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면서 실현해야 하는 나의 가능성들은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미 사회적 관습과 세론에 의해 정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단지 수용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일상적인 삶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인 삶은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자신의 '결단'을 통해 사는 삶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일상성이 제공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던진 채 자신의 고유하고 본래적인 '존재가능(존재할 수 있음)'을 실현하라고 부르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결단'을 통해 사는 삶, 즉 '본래적인 삶' 말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삶 중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하는 삶은 전자보다는 후자일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적인 삶에 안주하기 보다는 본래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이상적인 삶일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길'인 하나의 이정표를 보여주고 있다. 즉 '일상에서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 말이다. 그것도 하이데거가 그의 '기초존재론'에서 전개하고 있는 '세인'의 존재방식인 '비본래적인 실존'과 양심의 부름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단에 의해 선택된 '본래적인 실존'에 대한 현상학적이고 해석학적인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은 '우선 대개' 세상 사람인 세인으로 살아가는데 이 삶이 바로 비본래적인 실존이자 비본래적인 삶이며, 이러한 비본래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을 불안·양심에 의한 결단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때 본래적인 삶인 이상적인 삶은 일상적인 삶의 '변양'이다.

      • KCI등재

        '깨달음의 세계 ; 본래적인 실존의 세계 : 벽송 지엄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만남

        문동규(Mun Dong-Kyu) 새한철학회 2011 哲學論叢 Vol.64 No.2

        이 글은 조선 전기의 선승이자 지리산권의 대표적인 승려였던 벽송지엄(碧松智嚴)의 '깨달음의 세계'와 20세기 서양 사상계의 거장들 중 한사람인 하이데거가 그리는 '본래적인 실존의 세계'를 우리가 벗어나고파 하는 일상적인 삶을 대신할 세계, 일상성을 넘어서서 본래적인 자기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 우리가 진정 바라는 자유로운 삶의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것을 위해 이 글에선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바탕 위에서 지어진 지엄의 가송인 『벽송당야로송(碧松堂埜老頌)』 속에 실린 게송(偈頌)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고, '본래적인 실존의 세계'에 대해서는 '비본래적인 실존방식'에서 '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Weg)'을 그리고 있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선 '깨달음의 세계'와 '본래적인 실존의 세계'란 모든 인간이 바라면서 살아가는 그 바람과 같은 것이 일상 속에서의 우리의 '미혹' 내지는 '존재방식'을 벗어던지면서 그 일상을 '변양'할 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지엄이 그리는 '깨달음의 세계'와 하이데거가 보여주는 '본래적인 실존의 세계'가 완전히 다른 세계가 아닌 비슷한 세계이며, 하이데거의 사유와 지엄 내지는 불교적인 사유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근친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This article is shown that the world of Self-realization byeoksongjieom's is similar to the world of a original existence M. Heidegger's. The world of Self-realization and the world of a original existence is the world that is to replace the world everyday life's, the original world to live in a self-world beyond everyday life, a world of free life what we really want. Of course, I had been used gasong in 『byeoksongdangyarosong』 Jieom's and『Being and Time(Sein und Zeit)』 Heideggers in order to saying this. Jieom's works is show to the world of Self-realization, Heidegger's works has to the way that can go to the world of original existence. So 'the world of Self-realization' and 'the world of original existenc' can be done when our 'delusion' or 'way of being' can be changed. Jieom's the world of Self-realization and Heidegger' the world of original existence is a similar world than completely different world.

      • 하이데거와 전통형이상학

        문동규 ( Mun Dong-kyu ) 한국하이데거학회 2005 존재론 연구 Vol.12 No.-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서 전통형이상학은 해체의 대상이다. 물론 이때 해체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전통형이상학의 해체란 전통형이상학이 하고자 했던 작업을 철저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전통형이상학은 존재자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에 대해 올바르게 물음을 제기하지 못하고 ‘존재망각’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전통형이상학의 존재물음은 ‘존재자가 존재한다’에서의 ‘존재한다’, 즉 ‘존재’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존재자의 근거를 묻는 물음으로서 ‘존재자성(Seiendheit)’에 대한 물음과 그 대답으로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통형이상학에서는 존재가, 플라톤에게서는 이데아(ἰδέα),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에네르게이아(ἐνέργεια), 중세에서는 악투알리타스(actualitas), 칸트에게서는 경험가능성의 조건, 헤겔에게서는 절대정신, 니체에게서는 힘에의 의지 등이라는 ‘존재자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전통형이상학의 물음의 구조 때문에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전통형이상학은 자신의 주도적인 물음인 ‘티 토 온(τί τὸ ὄν, 존재자란 무엇인가?)’에서 ‘온’의 이중적인 면을 보지 못하고, 즉 ‘온’이라는 낱말이 현존자(존재하는 것, 존재자)와 현존(존재하다, 존재)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존재자의 근거인 존재자성만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통형이상학은 존재자와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지 못한 채 존재자의 최종적인 근거 내지는 원인만을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 다른 한편으로는 최고의 것인 신적인 것에 대한 대답으로 자신의 존재물음을 전개하고 만다. 그래서 전통형이상학의 본질 틀은 ‘존재-신-론’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존재-론’, 다른 한편으로는 ‘신-론’ 말이다. 그렇다고 이 ‘존재-신-론’이 따로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존재자의 근거 내지는 원인을 찾는 ‘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바로 전통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원인 내지는 근거인 존재자성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를 망각하고 만다. 따라서 우리에겐 존재에 대해 제대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새로운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Die Geschichte der uberlieferten Metaphysik ist eine Geschichte der Seinsvergessenheit nach dem Denken Heideggers. Denn die uberlieferte Metaphysik fragt nach der ‘Seiendheit’ des Seiendes, d. i. dem Grund und der Ursache des Seiendes. Aber ‘ist’ das Seiende. In der uberlieferten Metaphysik bleibt fragenloss das ‘ist’. So die Seinsfrage der uberlieferten Metaphysik offenbart sich als die Seinsvegessenheit. Und dann, was offenbart sich als die Seiendheit in der uberlieferten Metaphysik? Platon die Seiendheit als ἰδέα vorstellt, Aristoteleles als ἐνέργεια, Tomas Aqunas als actualitas, Kant als die Bedingung der Erfahrungsmöglichkeit, Hegel als den absoluten Geist, Nietzsche als Willen zur Macht. Aber dann dies offenbart sich, wenn die uberlieferte Metaphysik fragt die Seindheit des Seiendes. Und doch was ist die Wesensverfassung von uberlieferten Metaphysik? Sie ist ‘Onto-Theo-Logik’. Denn die uberlieferte Metaphysik stellt die Seiendheit des Seienden in zwiefacher Weise vor : einmal das Ganzen des Seienden als solchen im Sinne seiner allgemeinsten Zuge ; zugleich aber das Ganze des Seienden als solchen im Sinne des höchsten und darum göttlichen Seienden. Daher die uberlieferte Metaphysik ist ‘Onto-Theo-Logik’.

      • KCI등재

        존재와 시간의 사태관계

        문동규(Mun Dong-Kyu) 새한철학회 2007 哲學論叢 Vol.4 No.50

        이 글은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에서 핵심적인 문제인 '존재와 시간'의 '사태관계'를 「시간과 존재」라는 강연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그 문제는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인 존재역사적 사유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도 그의 후기 사유에 있어 핵심적인 용어, 즉 그의 사유의 주도어인 '발현'이라는 낱말 내지는 발현이라는 사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존재와 시간은 존재자가 아니라 사태다. 그래서 존재와 시간은 존재자에 해당되는 표현인 '그것이 있다'가 아니라 '그것이 준다(...이 주어져 있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따라서 존재와 시간의 사태관계는 '그것이 [존재와 시간을] 준다([존재와 시간]이 주어져 있다)'라는 표현을 통해 밝혀진다. '그것이 존재와 시간을 준다'에서 존재와 시간은 '주어지는 것'으로서 '보내줌', '내줌'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보내줌과 내줌으로서 드러나는 존재와 시간의 '사태-관계'가 바로 '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현 속에서 존재와 시간은 '발현함'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존재라는 하나의 사태와 시간이라는 하나의 사태가 서로 서로를 규정하면서도 서로에게 고유함을 가져다주는 공속 속에서, 즉 역운으로서의 존재가 훤히 트는 내줌으로서의 시간과의 공속 속에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존재와 시간이 각기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다가 그 둘이 결합된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시간은 이미 원래 존재 '와' 시간으로 공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와 시간이 발현 속에서 발현한다는 것은 '존재가 시간을 통해, 시간과 더불어 발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와 시간의 사태관계인 발현의 발현함은 전통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인 '표상적 사유'으로는 도저히 통찰될 수 없고, 그것과는 다른 사유인 발현의 발현함에 '응답하는 사유'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 헤겔의 ‘경험’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 - 「헤겔의 경험개념」을 중심으로 -

        문동규 ( Mun Dong-kyu ) 한국하이데거학회 2007 존재론 연구 Vol.15 No.-

        이 글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입문’ 부분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하이데거가 이 ‘입문’의 16개 문단을 상세하게 해석하고 있는 『헤겔의 경험개념』을 중심으로 말이다. 이 해석에서 하이데거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이라는 작품을 1807년에 출판할 때 맨 처음에 내세운 명칭이 “의식의 경험의 학문”이라는 명칭이었는데, 이 명칭의 가운데에 있는 ‘경험’이라는 낱말이 강조되어 있으므로 헤겔의 「정신현상학」 ‘입문’과 그 저작 전체를 ‘경험’이라는 낱말을 통해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이 ‘경험’은 우리가 보통 경험한다고 할 때의 그러한 경험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 즉 존재자의 존재자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은 현상하는 앎으로서의 현상하는 앎의 현상함인데, 의식의 경험의 학문은 현상하는 것으로서의 현상하는 것을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식의 경험의 학문은 존재자의 존재, 실재하는 것의 실재성, 주체의 주체성, 절대자의 절대성을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입문’에서 하이데거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학문이란 절대자의 인식을 지향하는 것인데, 이것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경험은 절대 자가 우리 곁에 현현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In dieser Arbeit handelt es sich um den Hegels Begriff der Erfahrung. “Wissenschaft der Erfahung des Bewußtseins” lautet der Titel, den Hegel bei der Veröffentlichung der Phänomenologie des Geistes im Jahre 1807 dem Werke voranstellt. Das Wort Erfahrung steht mit fetten Buchstaben in der Mitte zwischen den beiden anderen Wörten. Was denkt Hegel, wenn er das Wort “dei Erfahrung” in dieser betonten Weise gebraucht? “Die Erfahrung” nennt das, was das Sein des Bewußtseins ist. Erfahrung ist nicht mehr der Name fur eine Art des Erkennens. Erfahrung nennt die Subjektität des Subjekts. Erfahrung sagt, was im Wort Bewußt-sein das ‘-sein’ bedeutet. Erfahrung jetzt das Wort des Seins, insofern dieses vom Seienden her als einem solchen vernommen ist. Die Erfahrung ist die Weise der Seiendheit des Seienden, das west im Sich-vor-stellen. Das, was Hegel im Wort Erfaheung denkt, sagt, was die Präsentation des in der Repräsentation wesenden und so sich absolvierende absoluten Subjeks ist. So die Erfahrung ist die Subjektität des absoluten Subjekts. Die Erfahrung ist als die Präsentation des absoluten Repräsentation die Parusie des Absolu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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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청학동 : 관념적 실재와 귀향적 이상향

        문동규(Mun, Dong-Kyu) 새한철학회 2016 哲學論叢 Vol.85 No.3

        이 논문은 한국인의 이상향의 전형인 청학동, 특히 지리산 청학동을 ‘관념적 실재’임과 ‘귀향적 이상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글이다. 사실 이상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떠오르는 이상향의 전형은 청학동, 특히 이인로의 ‘청학동기’에 드러나고 있는 지리산 청학동이다. 이때 지리산 청학동은 전설에서나 나타나는 ‘청학’이 살고 있는 곳으로서, 또한 그곳을 찾아간 이인로가 찾지 못한 공간으로서 관념적 공간이자 관념적 실재이다. 그렇지만 지리산 청학동은 우리가 우리의 본래적이고 진정한 삶을 펼칠 수 있는 장소로서의 귀향적 이상향, 즉 우리가 귀향해서 살고 싶은 좋은 장소일 수 있다. 사실 지리산 청학동은 사람들이 은둔해서 살고자 했던 하나의 은둔지이다. 그러나 지리산 청학동은 그러한 은둔지를 넘어 또 다른 세계에서 살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때 지리산 청학동은 우리가 살고픈 이상향일 수 있다. 은둔이란 지긋지긋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이지만, 그 도피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그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 즉 고향과 같은 장소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리산 청학동은 ‘하나의 고향과 같은 장소’로서 우리가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펼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리산 청학동은 사람들이 격차성이 난무하는 현실로부터 벗어나 고향과 같은 장소에서 살고자 하는 귀향적 이상향일 것이다. 그것도 이인로의 말대로 지리산 청학동이 훤히 탁 트인 ‘넓은 곳’이라면, 그곳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놀이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열린 장’인 고향과 같은 곳일 것이기 때문이다. In this article, I argue that Mt., Jiri cheonghakdong is an ideological reality and a homecoming utopia. The hope of everyone is to live the ideal life. The typical Utopia of a Korean is a cheonghakdong, especially Mt. Jiri cheonghakdong. But Mt. Jiri cheonghakdong is an ideological reality as an ideological space. That is because Jiri cheonghakdong is a place where the Chunghak lives legendary. However Mt. Jiri cheonghakdong is a homecomming utopia as a place where we can live our original and genuine life. In fact, Mt. Jiri cheonghakdong is one of the hideout where the people want to live. But Mt. Jiri cheonghakdong provides the foundation to live in a different world beyond such hideout. Of course, a hermit is an escape from reality. But an escape appear in the desire to live a different life beyond the real life in denying the reality. If so, Mt. Jiri cheonghakdong is the place where we can freely live our life, that is the place as home. Therefore Mt. Jiri cheonghakdong is a homecomming utopia that we want to live in a place like home escape from reality. If Mt. Jiri cheonghakdong is a ‘wide area’, that is because Mt. Jiri cheonghakdong is a place as home where all that exists play and mingle with each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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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과 이상적인 삶 : 벽송지엄의 『벽송당야로송(碧松堂埜老頌) 』 을 중심으로

        문동규(Mun Dong-Kyu) 새한철학회 2009 哲學論叢 Vol.57 No.3

        One of the ideal life is living in the world of self-realization. The self-realization is wisdom that truly knows and sees one's own existence and reality. It denotes that one gets the eyes of wisdom which can penetrate the true reality of all things. This paper reveals an ideal life that the realized who accept to a self-realization is a freedom to enjoy himself. This paper is intended to analyze of Buddhist text in verse recorded in "Byeoksongdangyarosong" by Byeoksong Jieom who succeeded to the lineage of Zen Buddhist in Joseon Dynasty period and left a Buddhist hymn from the standpoint of Zen Buddhist in order to understand an ideal Life. In the "Byeoksongdangyarosong" text in verse Jieom is that the realized who achived a self-realization enjoy to life of ideal. First, that we see or hear in everyday life, it is the one' own original nature. Second, when you accept the self-realization that the true reality of all things is the one' own original nature, you can be a freedom to enjoy yourself. However, the ideal life does not take place in the post world. Because of anyone can not leave in the world. The ideal life takes place in everyday life. However, the ideal life seems to not good in everyday life. But the ideal life that we want to pursue may be a human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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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에서의 생태적 삶을 위한 존재론적 근거 - `사물`의 의미와 인간의 `거주하기` -

        문동규 ( Mun Dong-kyu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6 호남학 Vol.0 No.60

        이 글의 목적은 `사물`의 의미와 인간의 `거주하기`를 지리산에서 생태적 삶을 살기 위한 존재론적 근거 내지는 지평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 근거를 하이데거의 작품 「사물」,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등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사실 그 작품들에는 생태적 삶의 존재론적 근거가 될 수 있는 `사물`의 본래적인 의미와 인간의 `거주하기`가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사물`은 우리의 인식론적 대상이나 우리가 이용하고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자들`이라는 `넷`의 하나로 포개짐인 `사방`을, 그리고 이 사방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모으는 `장소`이다. 그리고 `거주하기`는 `보살핌`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것 그대로 놔두는 마음 씀이며, 더불어 사방을 소중히 보살피며 사는 삶이다. 그렇다면 거주하기의 실현은 사방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모으는 사물 `곁에` 체류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지리산에서의 생태적인 삶은 인간이 사물 곁에 체류하면서 그것들을 소중히 보살필 때 실현될 수 있다. 생태적인 삶이란 인간이 `인간, 다른 생명체, 그리고 사물`과 상생하는 삶,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공생하는 삶이므로, 지리산에서의 생태적인 삶은 당연히 그것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소중히 보살피는 삶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In this article, I try to show that the meaning of things and the dwelling of human is the ontological ground to live a ecological life in Mt., Jiri. In this article, I examine the grounds through the “things” and “Building Dwelling Thinking” in M., Heideggers. In fact, that is because the original meaning of things and the dwelling of human has revealed well in those works. So to speak, the ontological ground that we can live the ecological life has revealed well in those works. Here the meaning of a `thing` is not an object of epistemology, or a tool or means for something. Thing collect the `every direction(Geviert)`, that is the onefold of four elements `land, sky, god-like things and people who will die`, and all things what exist in the `every direction(Geviert)` in itself. So a thing is a place. The dwelling is to care something in its essence. The `dwelling as care` is a life to care the `every direction`. Accordingly, the realization of dwelling can be achieved only when humans stay to near the things. If so, the ecological life in Mt., Jiri can be achieved when humans stay to near the things. That is because the ecological life is a life to win-win human beings, other living things and a thing. So to speak, that is because the ecological life is living in harmony with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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