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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말(淸末) 봉천(奉天)의 경찰과 도시관리

        김택경 중국사학회 2018 中國史硏究 Vol.114 No.-

        淸末奉天警察作爲管理城市的行政機構,在維護地方統治方面得到了決定性的地位. 但是, 對於奉天警察在城市管理方面執行的功能和角色, 幾乎沒有具體的硏究事例. 因此, 本文從城市管理方面考察在俄日戰爭結束後有效實行的奉天警察制度. 在奉天,奉天警察制度是在俄日戰爭之後正式實施的. 歷任東三省總督試圖將新設的警察組織變成壹個强大而眞誠的組織. 巡警總局負責各種城市管理工作, 不僅擔當治安管理, 還幹涉了有關城市管理的幾乎所有業務. 奉天警察爲有效掌握管轄區而努力. 從而, 警察對管轄區的認識提高到前所未有的水平. 以這樣的力量爲基礎, 奉天警察能勾制定系統管理街道的基本方針, 開始重點管理. 奉天警察是管理城市社會各個領域的重要機構. 本文將奉天警察的諸多城市管理功能分爲治安管理、戶口管理、衛生管理、消防管理、設施管理、救濟管理等6個方面, 而進行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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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末 鴨綠江採木公司의 설립을 둘러싼 淸과 日本의 분쟁과 협상

        김택경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23 동국사학 Vol.76 No.-

        This paper analyzed the results of diplomatic negotiations between the Qing and Japan, which were developed over the establishment of the Yalu Timber Company(鴨綠江採木公司) after the Russo-Japanese War, through several issues. In the early days, research was conducted mainly in Japanese academia, but recently, due to the disclosure of large amounts of historical materials and easier access to data at the Asian Historical Data Center, research is actively being conducted in Chinese academia. Prior research in Chinese academia maintains the existing perspective of emphasizing the invasion of forest resources by Japanese imperialism, but sheds light on the Yalu River mining work in various fields such as diplomatic negotiations, company management, production structure, and market formation. This paper summarizes the debate between Qing and Japan, which took place during the negotiation process of the establishment of the Yalu Timber Company, in the following two aspects. First, it is a debate over the scope of logging. Second, it is a debate about supervision and taxation. Among them, the debate over the scope of logging was the biggest issue in negotiations between Qing and Japan. The Qing government tried to limit the scope of logging to the main stream of the Yalu River and limit it to a specific area adjacent to the river. On the other hand, Japan tried to expand the scope of the collection to the entire area of 右岸, which included all tributaries such as the 渾 River as well as the main stream of the Yalu River. In the course of negotiations, Qing focused on securing the authority to manage and tax the Yalu Timber Company as much as possible. In response, Japan failed to fulfill the initial demands, but it also took care of the 渾 River basin by intervening in the production of logging in the 渾 River basin and receiving additional recognition of the authority to resell wood in the area. Since the Russo-Japanese War, Japan has completely controlled the production, distribution, and consumption of wood in the Yalu River basin through the installation of military forces, and various disputes over wood have developed sharply in the region. In response, Qing actively negotiated the establishment of the Yalu Timber Company to resolve disputes raised at home and abroad and to ensure the livelihood of timber merchants and residents along the Yalu River. The Qing government limited the outflow of interest by defending the Yalu River Vegetation Corporation from monopolizing the Yalu River forest resources, and tried to prevent the infringement of sovereignty by controlling the Yalu Timber Company inside and outside. 본고는 러일전쟁 이후 鴨綠江採木公司의 설립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청과 일본 간의 외교 협상의 결과를 몇 가지 쟁점을 통해 분석하였다. 압록강채목공사에 관해서는 초창기 일본 학계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최근에는 아시아역사자료센터 등에서 사료가 대량으로 공개되고 자료의 접근이 이전보다 용이해진 덕분에 중국 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학계의 선행연구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삼림자원 침탈을 강조하는 기존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외교 교섭과 회사 경영, 생산 구조, 시장 형성 등 다양한 방면에서 압록강채목공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본고는 압록강채목공사가 설립되는 협상 과정에서 진행되었던 청과 일본의 논쟁을 다음의 두 가지 방면에서 정리하였다. 첫째, 채벌의 범위를 둘러싼 논쟁이다. 둘째, 관리와 징세에 관한 논쟁이다. 이중 채벌 범위에 관한 논쟁은 청과 일본간 협상에서 최대의 현안이었다. 청은 채벌 범위를 압록강 본류로 제한하고 강과 인접한 특정 지역으로 국한시키고자 하였다. 반면 일본은 채벌 범위를 압록강 본류는 물론 渾江 등 지류를 모두 포함시킨 右岸 전체 지역으로 확대하려고 하였다. 협상의 과정에서 청은 압록강채목공사를 안팎으로 관리하고 징세하는 권한을 확보하는 데에 최대한 주력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은 최초에 구상하였던 요구를 관철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청으로부터 渾江 유역의 채벌 과정에 개입하고 동지역의 목재를 수매하는 이권을 추가로 인정받는 등 渾江 유역과 관련된 利權도 챙기는 성과를 거두었다. 러일전쟁 이래 일본이 軍用木材廠 등의 설치를 통해 압록강 유역 목재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전면적으로 통제하면서 동지역에서는 목재를 둘러싼 각종 분쟁이 첨예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청조는 국내외로부터 제기된 분쟁을 해결하고 목재 상인과 압록강 변경 주민의 생계유지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압록강채목공사 설립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청은 압록강채목공사가 압록강 삼림자원을 독점하지 못하게 방어함으로써 이권의 유출을 제한하였으며, 압록강채목공사를 안팎으로 통제함으로써 주권의 침해를 막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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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淸末 "韓淸境界地域" 行政體制 構築과 韓人 管理 -輯安,臨江,長白 地域을 중심으로-

        김택경 동국사학회 2013 동국사학 Vol.55 No.-

        본고는 淸末 鴨綠江 上流의 韓淸境界地域, 특히 輯安·臨江·長白 지역에서 淸朝에 의해 전개된 行政體制의 構築 過程과 韓人 管理의 樣相을 領土化라는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압록강 중·하류 지역은 일찍이 19세기 70년대 중반 청의 행정기구가 설치되었고, 중국 내지로부터의 이주와 개발이 비교적 원활하게 추진되었다. 이에 비해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접근이 제한되었던 집안·임강·장백 지역은 20세기 초엽에 들어서야 청의 행정기구가 설치되었고, 이주와 개발 역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19세기 중반 이후 집안·임강·장백 지역으로의 韓人의 이주는 지속되었고 규모도 점차 확대되었다. 한인의 이주로 이 지역의 성격은 크게 일변했다. 한인의 문제가 점차 수면에 떠오르게 되자 1902년 청조는 압록강 대안지역에 행정기구를 증설했다. 이에 따라 懷仁縣에서 집안현을, 通和縣에서 임강현을 분리시켰다. 1907년에는 ‘제2의 간도사태’를 방비하는 목적에서 임강 동쪽 長生堡·慶生堡와 백두산 龍岡 북쪽 지역을 관할하는 長白府가 설치되었다. 본고는 지방정부가 한인을 관리하는 구체적인 기제로 警察制度와 鄕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지방정부는 근대적 경찰제도의 도입을 통해 이전 형식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한인의 관리방식을 직접적인 통제방식으로 전환시켰다. 향촌의 자치조직인 향약 역시 지방정부의 입지에 따라 재편되었다. 지방정부는 한인 향약을 재편함으로써 관할구역을 명확히 하고, 한인의 이주를 제한하려고 했다. 이와 같이 지방정부는 경찰제도의 설립과 향약의 재편을 통해 한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청경계지역에서 한인은 청조와 大韓帝國, 日本 삼국의 힘이 교차했던 문제의 초점이었다. 1899년 청은 대한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나, 한청경계지역에 이주한 한인을 어떻게 규정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義和團 事件을 계기로 대한제국은 李容泰, 徐相懋 등을 파견하여 향약을 설치했으나, 청의 반발과 대한제국의 외교권 상실로 이들 향약은 결국 폐지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 輯安·臨江·長白 지역의 국제적인 정세는 또다시 일변했다. 奉天省 政府는 한인을 ‘화근’으로 인식했다. 일본이 한인의 보호를 구실로 청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외교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907년 ‘間島問題’가 본격화되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나면서 지방정부로서는 한인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간도문제’의 확대를 우려한 봉청성 정부는 한인의 국적관리를 위한 규정을 신설하고 필요한 법제를 확충하는 등 한인에 대한 관리를 보다 강화했다. 本稿以領土化爲視角考察了淸末鴨綠江上遊的韓淸境界地域,尤其是輯安、臨江與長白這三個地區,行政體制的設置過程與韓人的管理情況. 在鴨綠江中下流地區,19世紀70年代中期已開始設立淸朝的行政機構,竝且中國內地而來的移民與土地開墾情況較爲活躍. 與此相反,因地理要素而難以進入的輯安、臨江和長白三個地區在進入20世紀初期以後,開始設立淸朝的行政機構,移民與開發才逐漸推行. 19世紀中期以來,闖進鴨綠江上流地區的韓人移民繼而不斷,其規模也愈來愈擴大. 由于韓人的移民,此地區的性質有了番天覆地的改變. 隨著韓人問題的表面化,1902年淸廷決定在鴨綠江對岸地區增設行政機構. 從懷仁縣和通化縣分別分設輯安縣和通化縣. 至1907年,爲防止“第二間島事態”的擴散,設置長白府,用之管轄臨江東長生堡、慶生堡地區與長白山龍崗北邊地區. 本稿作爲地方政府管理韓人的具體機制,考察了警察制度與向約. 地方政府通過警察制度的實施,把原有的形式化以及間接化的手段轉換成直接控制韓人的管理方式來實施. 向村自治組織的向約按照地方政府的意圖也進行改編. 地方政府通過韓人向約的改編,明確了管轄區域與權力範圍,竝限制了韓人的移民. 如此,地方政府利用警察制度與向約的機制將轉變對韓人的强度控制. 韓人是淸朝、大韓帝國與日本三國力量在韓淸境界相互聚焦的中心點. 1899年淸朝與大韓帝國簽訂通商條約而成立外交關系,但針對搬遷于韓淸境界地區的韓人,如何認同,즘樣管理,兩國尙未作出共同合意. 大韓帝國以義和團事件爲契機,派遣李榮泰和徐相懋等人設置向約,但由于淸朝的抗議與大韓帝國外交權的喪失,這些向約最終裁撤. 1905年,乙巳條約導致大韓帝國淪爲日本的保護國,引起輯安、臨江與長白三地區的國際形勢一大變動. 奉天省政府把韓人視爲“禍根”,認爲日本借用保護韓人爲由,會侵害淸朝的主權,挑起外交上的爭端. 1907年“間島問題”的沸騰與1910年韓日合邦的發生,迫使地方政府不得不有效地管理韓人. 憂慮間島問題擴大的奉天省政府制訂韓人國籍管理的規定,擴充有關法制,進一步地强化韓人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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