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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균(金玉均)의 사상과 행동 : 그 역사적 교훈

        김영작 국민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3 社會科學硏究 Vol.16 No.-

        갑신정변으로 집약되는 개화파의 '내셔널리즘' (민족주의) 사상과 그 운동형태는 그 지향성으로 보아 자본주의 열강에 반(半)종속적 상해에 놓인 조선이 이를 이용하여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도모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일본의 오꾸보(大久保) 정권의 부국강병책이나 중국 양무파의 운동과 그 역사적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패한 원인으로 아래와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개화파의 민족주의 운동을 밑에서부터 지탱해 줄 사회·경제적 기반이 나약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개화파의 사상적 제약성(制約性)에서 비롯된 운동방법상의 약정인데, 「위로부터의 개혁사상」 이 갖는 본질적 약점이 운동의 실천과정에도 나타났다. 셋째로, 갑신정변 직전의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판단을 하고, 청불전(淸佛戰)이 미칠 영향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정세판단의 오류를 지적할 수있겠다. 역사적 교훈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내셔널리즘 운동 및 그와 관련된 근대화 운동은 사상의 진보성이나 주관적 의도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옥균 등 개화파의 활동은 사상적으로 시대를 앞지른 것이고 '내셔널리즘'에 자극된 것이지만, 이 '내셔널리즘'을 떠맡을 정치적 주체가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외세의 간섭에 봉착했을 때, 이를 저지해 줄 광범한 민중세력이 없이는 '내셔널리즘'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내셔널리즘'에 의한 근대화운동이 단순히 부국강병이나 경제성장이라는 물질적 발전의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운동에 대한 광범한 민중의 참여라는 의미에서의 정치적 확산 즉, 정치적 민주화의 문제와 표리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즉, 물질적 근대화와 정치적 근대화가 결합되지 않는 한 '내셔널리즘'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국내여건이 미비한 상황에서 외세의 힘을 빌려 자국의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넷째, 한국 '내셔널리즘'에 대한 특이한 교훈 혹은 과제인데, 개화파의 내셔널리즘 운동은 구미자본주의열강의 외압에 더해, 후발국인 청일 양국에 의해서도 억압당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 후진자본주의 일본과 「차 식민지(次 植民地)」 청국의 각축장이었다. 1882년 이후 1884년까지의 시기를 통해 보더라도, 청국 스스로 서구열강의 외압을 받고 국내적으로는 자본주의화와 근대화를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팽창 수단은 조선 내부에 봉건적 정치권력을 유지시키거나 완전히 내정간섭을 하는 것이었다. 개화운동이 민족적 모순에 대한 투쟁에 머물지 않고, 국내의 권력투쟁을 수반하게 된 것도 이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이러한 딜레마 때문에 식민지화의 전후부터 한말의 내셔널리즘은, 「자주」 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근대」 의 성격까지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이 저항적 내셔널리즘의 단계를 넘어 진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근대성과 자주성이 양립해야 한다. 진보성이 없는 자주성은 맹목적이며, 자주성이 없는 진보 근대화는 공허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내셔널리즘에는 아직도 어려운 과제가 남아 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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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의 國家進路와 東北亞 秩序

        김영작 국민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2 社會科學硏究 Vol.15 No.-

        오늘날의 국제정치에는 <세계화> 현상뿐만 아니라 <지역화>, 그리고 종래의 <내셔널리즘>의 추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세계는 <테러와의 전쟁>이 자칫 헌팅턴류의 <문명의 충돌> 현상을 초래할 지도 모르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국은 위의 세 가지 차원 모두에서 중대한 국가적 과제를 하나씩 지니고 있다. 다시말해 한국이 실현해야 할 대외적 국가목표는 크게 보아 세 가지이다. 첫째는 <세계화에의 부응>이고, 둘째는 남북한이 평화통일을 달성하여 <통일민족국가를 실현>하는 일이며, 셋째는 통일의 실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지역 국가들의 경제발전 및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동북아지역 질서를 구축>하는 일이다. 본고에서는 <한국의 진로와 동북아시아 질서>라는 주어진 과제를 고찰함에 있어, 위의 세 가지 과제 중, 민족적 차원의 국가진로 목표인 <평화통일>문제와 지역차원의 목표인 <동북아 지역협력체제 구축>문제를 중점적으로 검토하고, 바람직한 국가전략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론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한국이 취해야 할 대외전략을 구한말기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 에서의 표현방법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곧 21세기의 <한국책략(韓國策略)>의 근간은 <親美國, 結日本, 聯北方三角同盟(北韓, 中國, 俄羅斯), 防戰爭, 成民族統一 與地域統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과 진로가 19세기말의 「朝鮮策略」 이나 20세기 후반 냉전기의 국가전략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아래와 같은 점일 것이다. 우선, <親美國 結日本 聯北方三角同盟> 전략은 19세기말 「朝鮮策略」 의 <親中國 結日本 聯美國>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나, 그 목적이 <防俄策> 곧, 특정국가(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세력균형적 대결정책이 아니라, <전쟁을 예방(防戰爭)하고 民族統一과 地域공동체 구축>을 위한 공생·공존의 Plus-Sum-Game 전략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첫번째 결론의 연장이긴 하나, 그것은 북방 3각동맹인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에 대한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이 아닌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이라는 점에서, 20세기 후반의 냉전적 국가전략이었던 세력균형정책과도 달라져야 한다는 정이다.이 <한국책략>에서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親美國 結日本>이라는 기존의 한·미·일 동맹관계를 어떻게 하면 <聯北方三角同盟> 곧, 다자간 안보협력체제로까지 연결·확대시킬 수 있을 것인가하는 점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미동맹을 견제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미 상당한 정도의 진전을 나타내고 있는 동북아에서의 경제적 지역공동체 형성과 다자간 안보협력체제의 구측을 위해 한국이 보다 적극적·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 같은 노력의 과점에 한·미 관계에는 불필요한 갈등과 오해가 발생하지 많도록 긴밀한 협의와 협조를 지속해 나가되, 종래의 한·미관계와는 다른 성숙된 동맹관계로서의 기능이 보완되어 필요한 만큼의 재편성을 수용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이후의 한·미관계는 동맹의 강화나 아니면 해체, 또는 한국의 순응 아니면 저항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양상이 아닌 안보적 상참의 변화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에 의해, 냉전적인 동맹규범(Alliance Norm)이 조절되어야 할 시점에 왔다."는 지적은 타당성을 지닌다. 이와 관련하여 안보적 이익을 공유해 나가면서 비대칭적 동맹이 갖는 위계적 성격을 지속적으로 변화시켜온 미·일관계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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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개화파의 ‘내셔널리즘’의 사상적 구조

        김영작(KIM, YOUNG-JAK)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3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2 No.2

        본고(本稿)는 개국(開國) 문제가 중대한 쟁점으로 부각된 시기(1860년대 후반)부터 1884년의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나타난 조선의 초기개화사상과 운동에 관해 ‘또 하나의 정치학적 분석’을 시도하는 글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위정척사 사상과 운동은, 그 심정적 애국주의와 서구의 침략성에 대한 통찰의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ㆍ군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 수단을 창출하기 어려운 주자학적 ‘도그마티즘’, 곧 ‘문화주의’(Culturalism)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개화적 ‘내셔널리즘’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실용(實用)에 착목하고, 목적과 수단간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정치척 리얼리즘’의 생성이 사상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즉 개화적 내셔널리즘’은 실용의 관점에서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Will to Change)’ 와 ‘변화에 대한 새로운 자세(New Attitude towards Change)’를 가지고 위기의 실체를 객관적ㆍ사실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그 위기극복을 위한 합리적 수단을 창출하려는 사상과 행동이었다. 셋째, 초기 개화파의 사상과 운동은 기본적으로 「부국 강병」을 통한 자주독립 곧 ‘내셔널리즘’의 사상과 운동이었다. 「동도서기론」은 물론이고 보다 광범한 계몽사상으로서의 「문명개화론」 역시 ‘내셔널리즘’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었다. 넷째, 초기 개화파는 「국민적 통합」이라는 내셔널리즘의 또 하나의 목적달성을 위해 「제도적 통합」방법과 「심정적 통합」방법이라는 두 개의 근간을 활용하였다. 이를 실행함에 있어, 그들은 「국민적 통합」을 위해 서구적ㆍ근대적인 것만이 아니라 「전통」과 「근대」를 조화ㆍ절충하고자 하였다. 다섯째, 초기 개화파의 ‘내셔널리즘’ 사상은 「정치적 집중」과 「정치적 확산」이라는 대립적 요소를 조화ㆍ절충함으로써 「국민적 통합」을 극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의 체제구상은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는데, ‘입헌적 요소’의 도입에 의해 「정치적 확산기능」을 기대하고 ‘군주적 요소’에 의해 「정치적 집중기능」을 기대 했다. 여섯째, 초기개화파의 ‘내셔널리즘’ 운동의 실패원인은 외세의 군사적 개업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한말 ‘내셔널리즘’에는 사상과 운동 사이의 극심한 괴리현상이 존재했다. 이는 ‘주체성’의 결핍과 ‘주체적 역량’의 결여가 가져다주는 문제점을 보여주며, 이것이 이 연구가 현재에 시사하는 역사적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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