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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서기(日本書紀)』 소위 "임나(任那) 4현(4縣) 할양" 기사에 대한 고찰

        홍성화 ( Sung Hwa Hong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6 사총 Vol.87 No.-

        본고는 6세기 백제가 남부 가야 지역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日本書紀』繼體6년조에 나타나는 소위 任那4縣의 할양 기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단 『日本書紀』에서는 야마토 왕권이 백제에 任那 4縣을 할양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이는 일본중심적 사관에 의해 윤색된 것으로서 본래는 백제에 의한 가야 진출의 정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任那4縣의 고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지역을 어디에 비정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들 지역이 어디로 비정되는가에 따라 6세기 당시 백제의 판도 및 한반도 남부 정황과 관련하여 전반적인인식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任那 4縣의 지명 비정에 대한 연구 경향을 보면, 일본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전라남도 지역의 영산강 유역 일대에 비정하고 있으며 한국학계에서는 섬진강 以西지역인 전라남도 동부 지역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재까지의 통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 任那4縣에 해당하는 上치唎, 下치唎, 娑陀, 牟婁에 대해 관련 문헌 및 고지명의 음운의 분석으로 면밀히 검토한 결과 고성, 창원을 비롯한 경남 서부 일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고고학적으로도 고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일대는 6세기초를 분기점으로 횡혈식 석실의 수용, 분구묘의 도입, 왜계 고분의 축조 등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도 백제의 영향력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지역은 문헌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백제와 왜의 교류해상루트 상에 위치하고 있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繼體紀에 나타나고 있는 한반도 관계 기사는 백제가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 일원을 직접 통제 하에 넣고 점차적으로 任那 4縣및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소위 임나 4현 할양의 기사도 이러한 일련의 백제의 가야 진출 실태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instate place names of Imna (任那) 4 prefectures (縣) written in Ilbonseogi (日本書紀) and analyze relationship of Baekje (百濟) and Kaya (加耶) in the early 6th century. In the meantime, most of Japanese historical academic circle asserted that Imna (任那) 4 prefectures (縣), that is to say Sangdari (上치唎), Hadari (下치 唎), Sata (娑陀), Moru (牟婁), were ancient Youngsan river (榮山江) area in South Julla Province (全羅南道). On the other hand, Korean historical academic circle asserted that they were ancient Yeosu (麗水), Soonchun (順天), Kwangyang (光陽) near Sumjin river (蟾津江) area in South Julla Province (全羅南道). But, according to the study of philological and historical geography, we could find out that Imna (任那) 4 prefectures (縣) correspond to ancient Kosung (固城), Changwon (昌原), Sachen (泗川) in South Kyungsang Province (慶尙南道). Therefore, we could understand that Baekje (百濟) began to extend its power in Kimun (己汶) and Daesa (帶沙) of Nakdong-river (洛東江) area, after it occupied Imna (任那) 4 prefectures (縣) in western South Kyungsang Province (慶尙南道) in the early 6th century.

      • KCI등재

        ‘임나 4현’의 위치 비정

        백승충(Baek, Seung-Chung) 부산경남사학회 2012 역사와 경계 Vol.85 No.-

        본고는『일본서기』계체 ? 흠명기에 전하는 ‘임나 4현 할양’ 기사의 ‘4현’의 위치 비정을 목적으로 한다. ‘4현’의 위치는 ‘할양’ 당시의 가라국과 백제의 ‘경계지대’는 물론 신라 및 제왜의 동향을 밝히는데 있어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전남 동부해안을 중심으로 한 가라국과 백제의 ‘경역적 범주’, 가라국의 대외진출과 백제의 남진 루트, ‘임나 4현 할양’과 신라의 남가라 병합의 상관성,‘할양’ 과정에서의 야마토 등 제왜와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형고분’ 피장자 집단의 ‘역할’의 유무 등이 그것이다. ‘임나 4현’의 위치에 대한 종래의 지명 비정은 대개 남부해안과 영산강 ? 섬진강 ? 낙동강 등 큰 강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영산강유역설’은 일본학계의 통설이 되었고, ‘섬진강하류설’은 한국학계의 통설로서 전남 동부해안 지역이 새롭게 주목받았다. 그러나 ‘영산강유역설’은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할 점이 많다. 백제의 남진과정에서의 왜와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분형고분’ 피장자 집단의 일정한 ‘역할’을 상정한다든지, ‘광역의 임나관’을 바탕으로 ‘4현’의 위치를 영산강유역까지 넓혀 비정하는 등의 편향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임나 4현 할양’ 기사는 ‘己汶?帶沙사여’ 기사의 전제로서의 성격을 가지는데, ‘기문 사여’ 직후의 ‘대사 사여’ 사건이 소급된 기사이다. ‘대사 사여’ 사건의 핵심은 ‘임나 4현의 할양’이고, ‘多沙津사여’로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일본서기』의 ‘縣?邑?村?牟羅’와 ‘任那’ 용례를 함께 검토해 본 결과 ‘임나 4현’의 위치는 ‘己汶國’과 동렬선상에서 언급되고 있는 ‘帶沙國’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사국’은 섬진강 하류와 전남 동부/경남 서부해안의 광양 ? 순천 ? 여수/하동 ? 악양 등의 지역을 포괄한다. ‘임나 4현’의 위치는 ‘대사국’의 범주 내에서 구했는데, 음상사?고고 자료?지리적 특징 등을 감안하여 비정했다. ‘4현’ 가운데 핵심지역인 ‘上?下?唎’는 ‘?唎’를 두 지역으로 나눈 것인데, 각각 ‘여수시’와 ‘돌산읍’에 비정한다. ‘娑陀’의 위치는 섬진강 중 ? 하류의 ‘구례’와 ‘순천’ 모두 가능하지만, ‘구례’는 가능성만 남겨두고 ‘순천’에 비정한다. ‘牟婁’는 일단 우륵 12곡명 가운데 하나인 ‘勿慧’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古名이 ‘馬老’인 ‘광양’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았다. ‘임나 4현’의 위치 비정에 있어 ‘4현’의 범주 설정, ‘대사국’의 상정, 문헌?고고자료에 대한 미시적인 분석 등 필자 나름대로의 방법론을 시도해 보았다. ‘4현’의 위치를 ‘대사국’의 핵심 지역에서 찾았고, ‘대사국’의 범주를 종래의 ‘하동’ 일변도에서 벗어나 악양 및 ‘임나 4현’이 위치한 여수반도 ? 순천 ? 광양 등을 포괄하는 광역으로 본 점은 종래와는 다른 시각이다. 향후 ‘임나 4현’ 전반에 대한 연구가보다 확장, 심화될 때 일정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한다.

      • KCI등재

        6세기 백제의 가야 진출에 대하여

        장미애(Jang, Miae) 한국고대사학회 2020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97

        본고에서는 6세기에 이루어지는 백제의 가야 진출 과정과 목적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우선 백제가 가야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가 되었던 임나 4현의 위치 및 기문·대사 지역의 위치를 추정하였다. 그 결과 이들 지역은 섬진강 유역의 여수, 순천, 남원, 하동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백제의 가야 진출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1단계에는 섬진강 유역의 임나 4현 및 기문·대사에 대한 군사적 진출과 이후의 영역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 시기 백제와 충돌하였던 가야 세력은 주로 伴跛 혹은 加羅로 표현된 대가야였던 것으로 보인다. 2단계에는 함안 지역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東進을 추진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다만, 2단계 진출이 이루어지는 540년 대는 고구려와의 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군사적 점령의 형태보다는 함안의 안라를 중심으로 한 가야 諸國을 회유하는 방식으로 진출을 꾀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방식은 『日本書紀』에서 안라국제회의 혹은 사비국제회의의 개최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백제의 가야 진출은 섬진강 하류를 거쳐 남해안 경로를 따라 東進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1차적으로 왜와 보다 원활한 교섭을 위한 남해안 항로의 확보를 위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와 함께 신라의 西進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가야 진출은 고구려와의 전쟁과 가야 諸國의 저항, 신라의 西進에 따른 대립관계 형성의 부담 등으로 인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후 가야 제국이 신라에 편입되면서 백제는 남해안 경로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In this paper, I looked at the process and purpose of Baekje’s entering into Gaya in the 6th. To this end, I estimated the locations of ImNa 4prefectures(任那4縣) and Gimoon(己汶)·Daesa(帶沙), which were the bridgeheads of Baekje’s entry into Gaya. As a result, these regions can be estimated from Yeosu, Suncheon, Namwon, Hadong. Baekje’s entry into Gaya was divided into two stages. The first stage is the process of military advancement and subsequent territorialization of ImNa 4prefectures(任那4縣) and Gimoon(己汶)·Daesa(帶沙) in the Seomjingang River basin. In the second phase, the company continued to make its way to the east to the Haman region. However, the war with Goguryeo began in earnest in the 540s, when the 2nd stage advanced. Therefore, Baekje attempted to enter the Gye way rather than military occupation. Baekje’s entry into Gaya was first made to secure a southern coastal route for smoother negotiations with the Japanese(倭). At the same time, it was aimed at countering Silla’s advance to the west. However, due to the resistance of Gaya and the burden of the war against Goguryeo, Baekje failed to advance to Gaya. And as Gaya was subjugated to Silla, Baekje lost most of the transportation routes leading to the southern coastal route.

      • KCI등재

        『일본서기』 소재 ‘임나 4현 할양’기사의 재해석

        위가야 ( Wee¸ Ka-ya ) 부경역사연구소 2021 지역과 역사 Vol.- No.48

        이 논문은 ‘임나 4현 할양’ 기사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점검하여 각각의 異見을 통해 확인된 ‘위치 비정’의 난맥상을 확인한 후, 관점을 달리하는 ‘임나 4현 할양’ 기사 이해를 시도해 보려 한 것이다. 관점을 달리한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내용에 ‘사실’과 ‘인식’이 섞여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종합적 반영의 결과가 사료의 조작이라면 그 조작 이전의 실체를 검증하고 조작이 배태된 동기를 이해할 때 비로소 사실의 복원이 가능하다는 지적 또한 중시하면서 ‘임나 4현 할양’ 기사를 재해석했다. 이러한 재해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에서 大伴金村大連의 실각 원인을 기술하면서 신라 방면에서의 실책이라는 실상에 덧붙여 『일본서기』 편찬 당시의 한반도관에 입각하여 임나의 멸망 또한 大伴氏의 실책에 따른 결과라는 내용을 부가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에 전해지고 있던 임나 관련 지리적 정보에 의거하여 ‘임나 4현’의 지명이 부가되면서 513년 ‘기문·대사 분쟁’의 전제로서 ‘임나 4현 할양’이라는 가공의 사실이 창출된 것이다. 따라서 관련 지명의 비정을 통해 당시의 역사상을 복원하는 것에는 좀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This article aims at reviewing the disorder in the “specification of location” identified through different views by examining previous studies on the article “Cession of Imna Four prefectures(任那四縣)”, and comprehending the article interpreted from different perspectives. Different perspectives mean that the content of Nihon Shoki can be approached from the point of view that “facts” and “recognition” are mixed and reflected comprehensively. This article attempts to approach the actuality of the article by placing importance on the comment that if the result of the comprehensive reflection is the falsification of historical records, the fact can be restored only when the substance before being falsified is verified and the motive that bears fabrication is understood. While describing the cause of Ohotomo no Kanamuran Omuraji(大伴金村大 連)’s downfall in Nihon Shoki, in addition to the fact that it was a mistake of Ohotomo in the Silla region, additional content was added. The additional content is that the fall of Imna was also the result of Ohotomo’s mistake, based on the view of the Korean Peninsula at the time of the compilation of Nihon Shoki. The place name of “Imna Four prefectures” was added based on the geographic information related to Imna that was transmitted to Japan at the time, and the historical fact of “Cession of Imna’s Four Prefectures” was created as the premise of the “Gimun and Daesa dispute” in 513. Therefore, this article argues that it is necessary to be more cautious when restoring the historical fact of the time through the specification of related place names.

      • KCI등재

        5~6세기 가라국과 백제의 섬진강 유역 쟁탈

        정현주(Jung, Hyun-Ju) 부산경남사학회 2021 역사와 경계 Vol.118 No.-

        가라국은 백제의 쇠락으로 힘의 공백이 생긴 호남 동부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가라국은 섬진강로를 통해 중국의 南齊에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임나 4현’과 대사는 지금의 전라남도 동부지역과 경상남도 하동 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모두 오랜 세월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던 세력이었다. 이들은 가라국의 대외 교섭을 지지하고 도우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대사의 경우, 가라국의 유일한 항구로 기능하게 되면서 ‘임나 4현’ 등 주변 지역을 통솔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백제는 동성왕 시기를 거치면서 대내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동성왕 이후 집권한 무령왕은 더 적극적인 대외 공략에 나서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섬진강 유역에 대한 공격이었다. 백제는 먼저 ‘임나 4현’ 지역을 공략하여 손쉽게 성공했다. 이후 백제는 기문을 지배하고 이어 대사를 공격하였으나 쉽게 얻지 못한다. 가라국은 백제의 위협으로 유일한 항구인 대사가 위험해지자 이미 ‘임나 4현’의 이탈로 세력이 줄어든 ‘대사국’을 해체하고 다사진으로 격하시켰다. 하지만, 529년을 기점으로 대사를 백제에 빼앗기고 만다. 섬진강 유역의 재지 수장층들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든 후 백제의 지방 제도에 포함되어 사라져갔다. 가라국과 백제의 섬진강 유역 쟁탈은 오랜 세월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던 섬진강 유역 세력들을 와해시킨 대사건이었다. Gara-guk(加羅國) influenced the eastern part of Honam, where a power gap was created due to the decline of Baekje. Gara-guk was able to receive a reward from Nam-je(南齊) by sending an ambassador through the Seomjin River. Meanwhile, ‘Imna(任那) 4 prefectures(縣)’ and Daesa(帶沙) were the forces that maintained their own power for many years. They were able to grow up supporting and helping Gara"s foreign ministries. Especially in the case of Daesa, it served as the sole port of the country, and it was able to direct the surrounding area such as ‘Imna 4 Prefectures’. Baekje was able to achieve domestic stability through the period of Dongsung(東城王). King Muryong(武寧王), who ruled after Dongsung, was more aggressive in attacking the Seomjin River basin. Baekje first succeeded in easily reaching ‘Imna 4 Prefectures’. Baekje then dominated the Gimun and attacked the Daesa, but not easily. When the Daesa, the sole port, became dangerous, Gara dismantled the ‘Daesa-guk(帶沙國)’ and downgraded it to Dasa-chin(多沙津). However, from 529, Gara-guk lost Daesa to Baekje. The leaders of the Seomjin River basin were included in the local system of Baekje after the influence of Baekje. The struggle over the Seomjin River basin of Gara and Baekje was a great event that broke down the Seomjin River basin powers that had maintained their own power for many years.

      • 웅진시대(熊津時代) 백제(百濟)와 왜(倭)의 관계

        홍성화 ( Hong Sung-hwa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8 사총 Vol.94 No.-

        본고는 백제의 熊津時代에 있어서 倭國과 관련한 전반적인 외교 관계의 추이와 양상을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熊津時代의 백제와 왜의 관계는 한성시대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왕실 간에 왕족 외교를 수행하고 있으면서 倭가 군원을 보낼 때마다 백제에서 선진문물의 전달과 전문지식인의 파견이 이루어졌던 외교적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패턴이 존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삼근왕대에 곤지계의 피살로 인해 백제와 왜가 알력 관계에 있었다든지, 동성왕대에 왜국의 정세 변화에 따라 일부 소원했을 가능성이 타진되고 있다. 『日本書紀』의 소위 任那4縣과 己汶, 帶沙의 문제를 통해서는 백제가 가야 지역 서남부 방면의 낙동강 유역으로까지 진출했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야마토 정권이 외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또한 『日本書紀』에 등장하는 近江毛野臣의 파견 기사와 관련해서도 신라는 백제와 한반도 남부에 대한 주도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지지하는 외교적 입장에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The objective of this article is to study relationships between Baekje (百濟) and Wa (倭) in Woongjin (熊津) period. As we analyzed relationships between Baekje (百濟) and Wa (倭) in Woongjin (熊津) period, we could understand that the royal family and nobles were dispatched continuously to Japan and that during Japanese military aids professional intellectuals including doctors and Buddhist monks etc. were dispatched from Baekje since Hansung (漢城) period. We could only gauge the trend of estrangement between Baekje (百濟) and Wa (倭) during Gonji(昆支)'s killing and King Dongsung (東城) period briefly. As we observed Imna (任那) 4 prefectures (縣) and Kimun (己汶), Daesa (帶沙) written in Ilbonseogi (日本書紀), we could understand that Baekje (百濟) occupied Nakdong-river (洛東江) area of Kaya (加耶) in the early 6th century. Furthermore, we could find that Yamato Wa (倭) sticked to its position supporting Baekje (百濟) during the war between Baekje (百濟) and Silla (新羅) because of the competitive landscape for the southern Korean peninsula in the early 6th century.

      • KCI등재

        계체․흠명기 ‘임나(국) 4현 할양’ 기사의 성격

        백승충 부경역사연구소 2012 지역과 역사 Vol.- No.31

        「日本書紀」 継体ㆍ欽明紀に伝える‘任那(国) 4県割譲’事件は物部氏家伝の氏族説話を骨子とした史書編纂の当時の認識が反映された典型的な記事である。この記事は資料構成的な面から見ると、‘任那日本県邑’百済民召還、己汶ㆍ多沙津賜与、そして南加羅併合記事と密接に関連しているなど、継体代のヤマト王権の韓半島関連ある諸事件の始末を貫く象徴性を持っている。‘任那4県割譲’の史的意味の手がかりは‘別表請’と‘別奏云’形式的に記述された継体紀の「百済本記」の叙述内容、‘割譲’の展開過程、そして‘割譲’に対する継体ㆍ欽明代それぞれの‘認識’から探すことができる。特に欽明紀記事は継体紀とは違って百済に対する言及は全くないし、対新羅敵対意識を前提とした新羅とヤマト王権の問題である‘任那滅亡’と‘任那復建’に直ぐに繋ぐ。任那4県割譲’記事の性格問題は‘事実’を論じる対象ではなくて「日本書紀」編纂段階の‘認識’の観点から接近しなければならない。すなわち、この記事は‘多沙津賜与’事件が片鱗で残っている‘帯沙(国)事件’が遡及したと推定されるが、このような理由にこの事件に直接関与した人物に出てくる‘(下)哆唎国守穂積臣押山’の役割も‘己汶(国)’事件に続き出てくる‘多沙津賜与’事件に限定作るのが合理的である。‘任那4県割譲’記事は少なくとも形式的には百済の南進過程だけではなく新羅の南加羅併合すなわち‘金官4村’抄掠とも対応する。すなわち、ヤマト王権と友好的な關係を維持した百済には‘割譲’の正当性を強調しながら己汶ㆍ多沙津の賜与まで続いたが、敵対的な新羅には‘任那滅亡’の始めを4村抄略だといいながらその起源を‘任那4県割譲’と直結した以後の‘任那日本府’活動と‘任那復建会議’開催の前提に活用され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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