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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역사 교육체계 확립과 민족해방운동사 인식

          김재웅 ( Kim Jae-woong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21 사총 Vol.102 No.-

          신생 국가들 대부분이 그렇듯 북한에서도 역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과제와 직결된 중대 관심사였다. 북한의 정치인들은 자국의 역사적 정체성과 관련해 그들이 직접 참여한 항일투쟁의 경험에 주목했다. 그것은 그들의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영예로운 소재였다. 따라서 어느 시기의 역사보다도 민족해방운동사를 비롯한 최근사가 중시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연구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역사 교육체계가 재건되는 과정과 민족해방운동을 둘러싼 사관이 변모해가는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그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은 북한 역사학이 발원하고 그 성격이 형성되는 양상을 드러낼 수 있다. 오늘날 독자적 학문 영역에 위치하기보다 정치적 목표에 봉사하는 경향이 있는 북한 역사학의 성격 형성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그 시원을 추적하는 일은 현시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After liberation from colonial rule by Japanese Imperialism, Korean schools focused on Korean language and history education. Like Hangeul education, history education tended to be emphasized in terms of nationality recovery. Like most emerging countries, history in North Korea was a major concern, directly connected to the task of remembering and inheriting its identity. North Korean politicians paid attention to the experiences of the anti-Japanese Imperialism struggle in which they directly participated in relation to their own historical identity. It was an honorable subject that could be taken pride in as their new tradition. Therefore, the recent histories including the history of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s tended to be regarded more important than the histories of any period.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process of establishment of the history education system in North Korea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and the transformation of historical view surrounding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s. The work of tracing the process can reveal the aspect in which North Korean history originated and its characters were formed. It is a very meaningful work to trace the origin of the character formation of North Korea’s history, which tends to serve political goals rather than being positioned in its own academic field today. In short, this study intends to examine how the historical science and the history education system in North Korea were born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and how North Korea’s historical science created a new tradition and its own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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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전 경제학의 대안적 경로 -군나르 뮈르달의 경제학적 사유의 특징과 한계-

          오경환 ( Oh Kyung Hwan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20 사총 Vol.99 No.-

          20세기 중반 이후 경제학적 사고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 것은 소위발전경제학(development economics)이었다. 냉전 초기의 첨예함과 맞물려 발전경제학은 근대화 이론(modernization theory)의 핵심적인 경제적 내용이 되었다. 하지만 발전경제학의 역사 전체를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서사로 환원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발전경제학의 역사에 대한 단선적 서사는 냉전 시기에 대한 특정한 견해, 즉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형성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냉전 시기가 담보한 다양한 역사적 가능성과 실천적 모색을 은폐시킨다. 이 논문은 발전경제학의 발전경로를 보다 복잡한 맥락에서 추적하려는 시도로 스웨덴의 대표적 경제학자인 군나르 뮈르달의 발전경제학을 검토한다. 뮈르달은 1930년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정권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그였을 뿐 아니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적 재건에 참여한 관료였고 미국의 인종주의에서 아시아 경제 개발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에 정력적으로 참여했던 지식인이었다. 발전경제학의 역사에서 뮈르달이 갖는 중요성은 그가 미국적 자본집약형 모델이 아닌 사회민주주의적이고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적 유럽형 모델을 구축했으며 발전을 단순한 거시적 지표의 성장이나 서구 역사적 발전단계의 답습으로 보는 입장을 엄밀한 경제학적 입장에서 거부하고 이러한 지표의 상승이 전 사회적인 변화와 순환적이며 누적적으로 결합되었음을 밝혀내었다. 하지만 뮈르달의 발전경제학에서 역시 사회공학적 이상의 근원적으로 폭력적인 성격에 대한 반성이나 복잡하게 재구성된 “발전”을 가능케 할 실천적 입론, 발전 자체에 대한 반성을 찾아 보기는 어렵다. The developmental economics was of crucial importance in the unfloding of the economic thought in the later half of the twentieth century. In the acuity of the Cold War, developmental economics formed the fundamental economic insight in the body of knowledge, “modernization theory.” Yet delineating history of developmental economics in a linear lopsided narrative, as many historians often do, is to privilege certain historical vantage regarding the Cold War and the US global capitalist hegemony, which in turn hides many vibrant historical possibilities and explorations in the Cold War. To resuscitate nuances in the development of developmental economics, this article turns to Gunnar Myrdal, who was not only a Nobel laureate and premier economist but also a central theorist for Swedish social democratic party. Myrdal’s intellectual path threaded a variety of issues: traditional macroeconomic and econometric problems, population questions, American racism and development of South Asia. His importance in the history of developmental economics is that he pursued a social democratic and social-engineering model of development, distinct from the American capital-intensive model, while denying the concept of development as simple increase in the productive outcomes and recasting development in very culturally specific circular cumulative causations. However, it is also hard to find in his writings consideration of the fundamentally violent nature of social engineering, reaslistic and policy measure to pursue his own reconstructed concept of development, or reflection on the possibility of development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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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철(姜晋哲)의 전시과체제(田柴科體制) 이해와 그 의미 -『고려토지제도사연구(高麗土地制度史硏究)』를 중심으로-

          오치훈 ( Oh Chihoon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7 사총 Vol.91 No.-

          강진철(1917.7.6.~1991.3.20.)은 한국사회를 발전시킨 내적 요인을 구명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고려시대 토지제도에 관한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1980년에 출판된 『高麗土地制度史硏究』는 지금도 고려시대 토지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보아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다. 강진철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고려시대 경제사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高麗土地制度史硏究』를 중심으로 강진철의 연구를 재평가하고 향후 연구 방향을 설정하려고 한다. 한국의 중세 사회인 고려시대에 모든 토지는 국왕의 소유이며 개인은 소유권이 없었다는 것이 일제 강점기 식민사학의 학설이었다. 강진철은 이를 비판하고 양반전을 중심으로 私有地라는 의미로서 私田이 있었음을 증명하였다. 民田도 사유지이기는 했지만 고려시대에는 民田을 公田이라고 불렀다. 또한 강진철은 촌락공동체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다.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공동 단위의 농업 경영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토지의 소유도 공동 단위로 형성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아직 소가족 단위의 개별 토지 소유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고려 후기에 들어서 공동체가 해체되고 토지지배관계가 성장하면서 개별 소유가 가능해졌다. 전시과의 붕괴와 농장의 형성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의 연구 수준에서 강진철의 학설 중에는 비판을 받아 수정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公田과 私田의 구분 문제, 공동체와 농업 경영의 상관성은 여전히 유효한 연구 주제이다. 앞으로 이에 대해서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고 보다 많은 연구를 진행하기를 바란다. Jin-chul Kang (1917.7.6.-1991.3.20.) devoted his life to researching the land system of Goryeo dynasty as a way of seeking an inherent momentum that drove development of the Korean society. His book `Goryeotojijedosayeongu (高麗士地制度史硏究: A Study on History of Land System in Goryeo Dynasty)` was published in 1980 and remains a must-read to understand the subject. In centenary commemoration of his birth, we reassess his research based on the said book and suggest future research directions, hoping to revitalize research on the history of the Goryeo economy. The Goryeo dynasty corresponds to the Middle Age in Korean history, and the dominant view of the historiography of colonialism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was that all lands were owned by the king and individuals did not have ownership. Jin-chul Kang criticized this view, and demonstrated that there was privately held land called `sajeon (私田),` quoting from a literary work, `Yangbanjeon (兩班田)`. `Minjeon (民田)` was also privately held, but during the Goryeo dynasty, it was called `gongjeon (公田).` Jin-chul Kang was also deeply interested in the issues of village community. In a society with limited agricultural productivity, community-wide agricultural management was necessary, and accordingly, land ownership was also made at a community level. In Goryeo dynasty, the timing was not ripe yet for small families to individually own land. However, by late Goryeo dynasty, communities were disassembled and as land controlling relations evolved, individual land ownership became available. The collapse of Jeonsigwa and emergence of the farm(農莊) took place during this time. Some of Jin-chul Kang`s arguments have been criticized and revised. Still the distinction between `gongjeon` and `sajeon`, as well as the relationship between community and agricultural management continue to be relevant research topics, and further research need to be condu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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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논문 : 대송(對宋) 외교 활동에 참여한 고려 수군 - "파한집(破閑集)"과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타나는 사례를 중심으로

          이창섭 ( Chang Seop Lee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4 사총 Vol.83 No.-

          고려 시기의 수군은 전투 외에도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글에서는 『破閑集』에 나타나는 李子淵의 宋 使行 기록을 통해, 海路를 이용한 使行에 고려 수군이 동행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수군은 운항을 담당하고, 유사시에는 사절단의 안전도 책임졌으며, 송에 도착해서는 현지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때 송에 간 수군은 운항과 의례 수행을 주요한 임무로 하였다. 외교는 중앙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고, 수행원들은 외국에 나가서 고려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려에서는 使行에 군인이 필요한 경우 지위가 높고 전문성을 갖춘 이들을 뽑아 파견하고자 하였다. 해로로 사신을 파견할 때에는 이같은 조건을 충족시키는 중앙군 소속의 수군을 동원하였는데, 고려 중앙군에는 의례를 담당하는 千牛衛 휘하에 해상에서의 의례를 맡는 海領이라는 수군 부대가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해로를 이용한 외교에 참여한 수군은 중앙군인 천우위 해령에 소속된 군인이었다. 고려 수군은 송에 가는 사신을 수행할 뿐 아니라 반대로 송에서 온 사신을 고려에서 맞이할 때에도 동원되었다. 이때의 수군 또한 해령 소속이었다. 송 사신이 고려에 올 때에는 儀典이라는 측면에서 고려가 세심하게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았는데, 의례를 담당했던 해령은 그러한 임무 수행에 적합하였다. 송 사절 영접에 투입된 수군은 고려에서 영접하는 관원들의 배를 운항하였고, 송 사절과 조우한 뒤에는 그들과 여정을 함께 하면서 群山島, 馬島, 紫燕島 등 주요 거점에서 의례를 행하였다. 고려 수군은 고려에서 송으로 사신을 보낼 때에 이를 수행하며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고, 송 사신이 고려에 올 때에는 이들에 대한 영접 관련 의례 등을 담당함으로써 麗宋 교류의 현장에서 여러모로 기여하였다. Goryeo Navy performed various duties in addition to battle. It was confirmed that Goryeo Navy was accompanied by envoy’s maritime journey through Yi Ja-Yeon(李子淵)’s records of envoy’s journey to Chinese Sung Dynasty described in Pahanjip(破閑集, which means a book breaking idle hours; Goryeo book of poetry and tales written by Yi Il-Lo(李仁老)). The Navy was responsible for sailing and the safety of delegation in case of emergency, and secretly collected the information after arriving at the Sung. At that time, the Navy who went there had major duties of sailing and the performance of ceremony. Diplomacy was done at the level of central government and the envoy and entourage were representative of Goryeo after visiting foreign countries. Thus, Goryeo intended to reinforce high-ranking soldiers with professionalism if soldiers were required in the envoy’s journey to the Sung. Consequently, the Navy belonging to the Central Command was mobilized. There were naval forces called Naval Command(海領, Haeryeong) in charge of maritime ceremony under the command of Cheonu Guard(千牛衛) in the Goryeo Central Command. In this respect, the Navy who got involved in diplomatic visit by sea route belonged to the Naval Forces Central Command. Goryeo Navy was mobilized when greeting envoy from the Sung as well as when accompanying Goryeo’s envoy visiting the Sung. The mobilized Navy also belonged to the Naval Command. When the envoy of the Sung visited Goryeo, Goryeo had to pay careful attention to many things in terms of protocol, and the Naval Command in charge of ceremony was suitable for the performance of such a duty. The Navy mobilized to greet the envoy and delegation from the Sung drove a ship carrying government officials greeting them in Goryeo. And it performed ceremonies at the major stopping points such as Koonsando Island, Mado Island and Jayeondo Island during journey with the envoy and delegation after meeting them. Goryeo Navy made contributions to the exchange between Goryeo and the Sung in various ways by implementing many duties when dispatching envoy and delegation to the Sung and performing ceremonies related with the reception when greeting envoy and delegation from the 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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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몽골의 일본인식과 몽여(蒙麗)관계

          고명수 ( Myung Soo Koh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4 사총 Vol.83 No.-

          제국 성립 시기 몽골 지배층은 지상의 모든 지역과 사람들을 복속과 전쟁의 대상으로 양분하고 복속하지 않은 민족·나라를 향후 무력을 동원하여 반드시 복속시켜야 할 ‘적국’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그들은 쿠빌라이 시기 일본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집요하게 복속을 요구했다. 일본이 이에 응하지 않자 미복속국을 정벌의 대상으로 삼는 전통적 대외정책 방침에 따라 두 차례 일본을 침공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쿠빌라이 사망을 계기로 일본정벌 계획이 완전히 방기되었지만 몽골 지배층의 관념 속에서 미복속국 일본을 ‘유일한 적국’으로 보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일찍부터 동남해안 지역에 방어체계를 구축하여 항시 일본의 침입을 경계했다. 또한 개방적 대외무역 정책에 의거하여 입항을 허용한 일본 민간상인들의 약탈·방화행위가 점차 심해지고, 일본첩자의 정탐활동이 그치지 않음에 따라 일본에 대한 그들의 적국인식은 오래도록 유지·강화되었다. 이러한 몽골의 일본인식은 일본에 가장 인접한 복속국 고려의 지정학적 조건과 역할을 규정짓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쿠빌라이 즉위 시기 고려의 복속이 이루어졌을 때부터 몽골 지배층은 고유한 영토관념에 근거하여 고려를 자국의 영역 안에서 동쪽 끝에 위치한 번병으로 간주하고 일본에 대한 초유·정벌 사무 전반을 위임했다. 그리고 전쟁 종료 후 고려에 방어체계를 구축하여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 최전선 군사기지로 삼았다. 이에 고려는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과 임무를 정확하게 인지하여 항시 일본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그들에 관한 사안을 몽골에 충실하게 보고했다. 고려는 일찍부터 몽골과 일본초유·정벌에 관한 사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고유한 세계관과 일본인식을 수용했다. 그리고 몽골과 교섭할 때 ‘유일한 적국’ 일본의 존재와 그로 인해 자신에게 부여된 특유의 존재성을 외교적 수단으로써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충렬왕은 몽골 지배층 사이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을 제고하기 위해 일본정벌에 적극 협력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후에도 고려는 자주성을 위협하는 입성책동에 저항하거나 국왕의 즉위·환국에 대한 몽골의 허가를 구할 때 그들의 대외인식에 부합하는 논법을 개발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 이에 그것이 몽골 지배층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하여 고려는 소기의 외교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논법의 개발과 활용은 고려의 능동적·성공적인 대몽 외교활동의 한 사례로 평가될 만하다. During the foundation period of the empire, the ruling class of Mongol divided all regions and people on the earth into the targets of subjection and war, and recognized the peoples and nations that didn’t surrender as “enemies” that must be defeated by force later. Based on this dichotomous world view, they sent envoys to Japan several times and persistently demanded subjugation during Khubilai period, and when Japan didn’t respond to it, they attacked Japan twice, both of which ended up as failure. After Khubilai’s death, the plan to conquer Japan was completely abandoned, but the ruling class of Mongol had started to think that Japan, the nation that had not yielded, was ‘the only enemy.’ This understanding worked as the main factor to define the geopolitical condition and roles of Goryeo, the subjugated country closest to Japan. The governing class of Mongol regarded Goryeo as the defending fence located on the eastern boundary in their domain, based on their own concept of territory, and delegated all the work of appeasement and conquest to Goryeo. And after the war ended, they established a defense system in Goryeo and made it a military base at the front line in preparation for Japan’s attack. Goryeo naturally accepted Mongol’s unique view of the world and understanding of Japan in the process of discussing the matters with Mongol to appease and conquer Japan. In addition, when Goryeo negotiated with Mongolia, they developed logics corresponding to their recognition of Japan, and made an active use of it as the means to achieve their position. They succeeded in gaining the Mongolian governing class’s sympathy through this, so Goryeo could accomplish their intended diplomatic go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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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회의주의와 영국 역사 교육 -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제3단계 역사 교과서 분석 -

          원태준 ( Won Taejoon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7 사총 Vol.91 No.-

          본고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만 11-14세 학생들이 사용하는 옥스퍼드대학교출판사와 호더교육사의 제3단계 역사 교과서들을 분석함으로써 영국에서의 역사 교육과 영국의 유럽회의주의 간의 연결고리를 설명하고, 영국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럽의 역사를 누락한 영국의 현역사 교육 과정은 학생들이 영국 역사를 정확하고 제대로 배우는 데에 중대한 걸림돌이 될 정도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066년부터 1509년까지의 경우, 역사 교과서들은 영국 해안가를 프랑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프랑스 북부를 통치하에 두고자 한 잉글랜드 정부가 반프랑스 동맹을 지속하고자 치룬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로 1215년 대헌장이 탄생한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백년전쟁의 원인이 프랑스왕 필립 6세의 영토에 대한 욕심에서 기인한다고만 서술할 뿐 당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의 서약을 어긴 것에 대한 내용 또한 기술하지 않고 있다. 1509년부터 1745년까지의 경우, 역사교과서들은 헨리 8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 실패가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원인 중 하나였음을 기술하지 않고 있고, 윌리엄 3세가 주도한 “금융혁명”이 유럽 대륙의 정세에 관한 윌리엄의 유별난 관심에서 유발되었다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이 스코틀랜드에서의 스튜어트 왕조 복귀라는 프랑스의 위협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설명 또한 하지 않고 있다. 1745년부터 1901년까지의 경우, 역사 교과서들은 이 시기의 런던 정부가 유럽 대륙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 했다는 이유로 자주 교체되었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고, 프랑스 혁명 정부와의 전쟁을 치루기 위한 자금 도달을 위해 처음으로 소득세를 부과했다는 내용 역시 서술하지 않고 있으며, 1846년 곡물법 폐지 및 1867년 선거법 개정 등이 영국에서의 자유주의 정신을 강화하여 유럽의 평화에 기여하고 유럽 대륙에서 불어오는 군국주의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도입되었다는 사실 또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20세기와 관련하여 역사 교과서들은 파시즘의 발현과 나치 독일의 만행에 대한 내용을 아주 자세히 서술하고 있으나, 전후 70년 넘게 유럽 대륙에서의 평화와 부흥에 기여한 유럽 통합 과정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This article, by analysing the European content in the most recent Key Stage 3 history textbooks for England and Wales - the KS3 History by Aaron Wilkes series from Oxford University Press and the Making Sense of History series from Hodder Education - seeks to demonstrate a link between euroscepticism and history education in Britain and argues that the omission of European history in the context of the education of British history is a gross misrepresentation of essential facts which fundamentally does not allow the student to understand the full picture as to why British history has evolved the way that it has. Despite the 1215 signing of Magna Carta as a result of medieval England`s defeats in its attempt to establish an anti-French alliance on the continent in order to maintain military pressure on the French and thus strengthen its control of the key ports in Northern France for the security of English shores, the two textbooks make no mention of the security reasons behind the English desire to maintain control of northern France. Furthermore, the textbooks fail to mention that the outbreak of the Hundred Years` War was not so much a result of Philip VI trying to grab whatever English possessions he could get his hands on simply to satisfy his own rapacious desires, but more a result of Philip reacting to the problem of Edward III`s opportunistic volte-face in abandoning his intial oath as a loyal vassal of France. For the period from 1509 to 1745, the textbooks fail to mention that Henry Ⅷ`s failure to become Holy Roman Emperor was a contributing factor the English Reformation, that England`s “Financial Revolution” under William Ⅲ occurred due to the king`s preoccupation with continental European affairs, and that the 1707 Act of Union with Scotland was undertaken as a response to the French threat of a possible Stuart succession in Edinburgh. For the period from 1745 to 1901, the textbooks do not talk about the changes in British administrations due to their failures to deal with European matters, the introduction of Britain`s first income tax because of Britain`s need for funds in fighting Revolutionary France, the 1801 Act of Union with Ireland that came about as a result of the 1798 Irish Rebellion that was assisted by Revolutionary France, the repeal of the Corn Laws and the passage of the 1867 Reform Act which were implemented with the intention of strengthening liberalism in Britain and ensuring peace in the international arena in the face of challenges in Europe. Finally, in regards to the 20th century, the textbooks greatly emphasize fascism and the actions of Nazi Germany while providing almost no information on the historical process of European integ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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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버풀 국제노예제박물관의 전시내러티브 -노예제 역사의 기억문화 만들기-

          염운옥 ( Woonok Yeom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6 사총 Vol.88 No.-

          이 논문은 두 차례 리버풀 현지 방문조사를 수행한 결과물로서, 국제노예제박물관의 전시내러티브를 분석했다. 국제노예제박물관은 2007년 8월 23일 리버풀 머지사이드 앨버트독에 개관한 신설 박물관이다. 앨버트독은 1980년대 문화유산산업 개발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였다. 국제노예제박물관은 노예제 역사와 유산, 노예제 과거사 극복이 영국 사회에서 공적 담론으로 부상하게 되는 정의로운 전환을 이끌어낸 주역인 동시에 그 결과이기도 하다. 1994년 대서양노예제전시실에서 발전한 국제노예제박물관은 해양박물관 3층에 위치하고 있다. 국제노예제박물관은 세 개의 주전시실 전시를 통해 노예제 폐지의 역사에 주목해왔던 기존의 노예제 인식을 극복하고 노예제 자체의 역사에 주목하는 전시내러티브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노예를 수동적 존재로 재현하던 기존 이미지에서 탈피해 능동적으로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려 노력한 존재로 보는 등 재현의 문법을 바꾸는데 공헌했다. 하지만 노예선 브룩스와 같은 백인 노예제폐지운동 진영에서 발명한 스테레오타입적인 이미지를 반복하고, 심지어 상업적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국제노예제박물관의 전시내러티브는 노예제 역사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노예제 역사의 전체상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제노예제박물관’이지 ‘노예제역사박물관’은 아닌 것이다. This study analyses the Exhibition Narrative of the International Slavery Museum. The Museum newly opened in August 23, 2007 at Albert Dock, Merseyside, Liverpool. The refurbishment of Albert Dock was the typical case of Heritage Industry development in 1980s. The Museum is located in the 3rd floor of the National Merseyside Maritime Museum. In 1994, the Transatlantic Slavery Gallery started in the Maritime Museum and expanded into the International Slavery Museum in 2007. The three main galleries of Slavery Museum focuses on the history of slave trade not on the history of white abolitionism. Through the exhibition of the museum, slavery history and legacy included in the public discourse of British society. The Exhibition Narrative of the Museum shows the agency and resistance of Enslaved Africans and tries to overcome the victimization of slave. However the project of out of victimization is only partly successful because the controversial slave ship Brookes image still exists in the Museum. Furthermore, the case of commercialization and consumerism is found in the Museum shop. Consequently the International Slavery Museum does not represent the totality of the History of Slavery.

        • KCI등재

          냉전사 연구의 궤적: 정통주의에서 담론적 전회에 이르기까지

          오경환 ( Oh Kyung-hwan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8 사총 Vol.95 No.-

          이 논문은 냉전에 대한 기존의 역사적 접근을 정리하고 최근 대두한 새로운 인식론적 전회(들)을 분석하며 이 특집에 실린 다른 논문과의 연계 속에서 냉전사에 대한 담론적 전회를 모색한다. 지금까지 냉전사 연구는,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냉전 자체의 설명력의 과도한 활용을 통해 냉전 시기 전개된 다양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동어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냉전사의 기획은 이제 냉전 자체의 재정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냉전 시기라는 단순한 시대 지정에 의한 기술(記述)과 냉전적 구조라는 환원론적 분석을 넘어 냉전 자체의 역사화와 해체, 재구성이 필요한 지점이다. 냉전의 역사화와 해체적 재구성을 위해서는 국제정치학이 상정한 냉전의 행위 주체, 특히 국민국가를 보다 작은 단위의 실천(practice)로 분절화하고 이들 안에서 다양한 행위 주체성을 발굴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복수의 행위 주체성이 추동하는 냉전의 역사화는 이미 진행되어온 냉전사의 “문화적 전회(cultural turn)”와 “전지구적 전회(global turn)”를 더욱 심화시키며 나아가 “담론적 전회(discursive turn)”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냉전 기간 생산되는 지식, 특히 사회과학 지식은 냉전적 상황에 대한 반응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냉전 구조 자체를 강화하거나 재생산하기도 하고, 나아가 냉전적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기도 하며, 냉전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져왔다. 냉전 기간 지식의 진리-주장(truth claims)과 정치가 맺는 복잡한 관계를 탐색하는 것은 냉전의 복잡다단한 구조와 전개를 비-환원적으로 분석하는 단초가 될 것이며 냉전이 우리 시대에 갖는 지속적인 지적 영향력과 함의를 유추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될 것이다. 나아가 냉전사의 담론적 전회는 지식 자체 뿐 아니라 지식생산·유통 제도와 기제에 초점을 맞추어 냉전을 분석하여 냉전이라는 역사적 대상 자체가 담론적 구성물(discursive construct)이며 냉전 체제가 생성하는 지식은 냉전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 냉전 자체를 “구성”하였음을 밝히고자 한다. 냉전 당대의 냉전사의 성립과정과 소련 문서고 개방 이후 냉전사 연구 동향을 정리하고 냉전의 사회과학 지식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이 논문은 냉전사의 담론적 전회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This article aims at surveying existing literature in Cold War history and analyzing epistemological turns, for the possibility of a discursive turn in Cold War history. Despite its accomplishments, the Cold War history so far cannot escape tautological explanations of a variety of Cold War phenomena through reciting the Cold War. The enterpis of the Cold War history requires a radical redefinition through historicization, deconstruction and reconstruction of the Cold War, beyond simple description according to chronological designation as well as reductive analysis. The historicization and deconstructive reconstruction of the Cold War re-articulates the nation-states, primary agencies in the Cold War history, into multiple practices and rediscovers a variety of hitherto overlooked agencies. The historicization of the Cold War based on multiple agencies will further the cultural and global turns, while pointing to a possibility of the discursive turn. The knowledge, especially social specific corpus of knowledge, produced in the Cold War was not simple reaction to the Cold War: it also fortified, reproduced or even cause cleavages in the Cold Wat structure, while having lasting impacts in the post-Cold War societi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ruth-claims of the Cold War knowledge and the Cold War politcis may be the starting point for non-reductive understanding of the Cold War. This discursive turn may also inform us of the fact that the emphasis on the knowledge production and circbulation in the Cold War reveal the very discursive nature of the Cold War itself, testifying that the Cold War knowledge was not only “about” but also “constitutive of” the Cold War itself.

        • KCI등재

          역사교육적 관점에서 본 문화관광해설사의 역사해설 -홍성지역을 중심으로-

          안주홍 ( Juhong Ahn ),박현숙 ( Hyunsook Park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6 사총 Vol.88 No.-

          그 동안 역사교육에 대한 연구는 초 중등교육의 측면에서 주로 다루어졌다. 따라서 학교 현장 이외의 역사교육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교육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의 문화재를 해설하는 문화관광해설사 역시 넓은 의미의 지역사교육의 실천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교육의 측면에서 이들의 역할 인식과 ‘역사해설내용’의 형성과 해설 방법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역사교육의 지평을 넓힌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역사해설내용’을 고찰하기 위해, 이들의 ‘역사해설내용’을 ‘역사내용지식’과 ‘역사현장지식’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들은 ‘역사내용지식’을 바탕으로 ‘역사현장지식’을 활용하고 있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역사현장지식’은 해설 과정에서 이들만이 활용하고 있는 특징적인 지식이다. 이들은 ‘역사현장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역사교사와 차별화된 존재로 인식하였고, 방문객들이 흥미를 가지고 집중하도록 해설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전문성의 부족과 해설기준안의 미비, 그리고 적합한 교육 시스템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문화관광해설사 교육을 체계화하려는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방안으로 이들에게 부족한 ‘역사내용지식’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과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현장지식’의 기록 보존, 그리고 해설기준안과 보수교육의 마련 등이 요구된다. 역사교육적 측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의 전문성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질 때, 이들의 역량이 극대화되고 제대로 된 역사현장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 질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문화재나 유적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확장시킴으로써 학교 밖에서도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All the while, most researches on history education have emphasized the aspect of elementary and middle school education. Therefore, there has been relatively little concern for the subjects of history education besides school field. In the midst of extending the scope of history education besides school field, the culture tourism interpreters, who are placed at local cultural properties to explain history, can be also regarded as the subject of history education in a broad sense. Accordingly, it might be meaningful to look into their role perception, acquisition of ‘Knowledge of Interpretation History’ and method of interpretation from the aspect of history education. The culture tourism interpreters have conducted interpretation targeting visitors from various backgrounds while making use of ‘Knowledge of History Contents’and ‘Knowledge of on-site History’ through ‘Knowledge of History Interpretation’ in their interpretation activity. However, there have been many hardships due to the background, such as the lack of knowledge of individual historical accounts, inappropriate education, and insufficiency in systematized interpretation guidelines, etc. Here, the ‘Knowledge of on-site History’ possessed by the culture tourism interpreters is the characteristic knowledge, which is utilized by the interpreters only, in interpretation activity. They have perceived themselves as differentiated from history teachers, and helped visitors to concentrate on their interpretation with interest. However, the culture tourism interpreters have experienced many realistic hardships. Accordingly, the effort and support to resolve their difficulties and to systematize their advantages are needed. Solutions to this may include continuous and proper education of ‘Knowledge of Interpretation Contents’ that they need, record preservation of ‘Knowledge of on-site history’ possessed by the interpreters only and interpretation guidelines, and arrangement of refresher training. When an approach to a culture tourism interpreter’s professionalism is made from the aspect of history education on the basis of this, not only their capabilities could be maximized as well but it will be also possible to arrange a foundation for extending the concern for history of a wide variety of visitors to cultural properties or relics, and for conducting proper history education even at the outside of school field.

        • KCI등재

          고려시대 화폐정책의 변화와 물가산정 방식

          김도연 ( Kim Doyeon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7 사총 Vol.90 No.-

          본고에서는 고려시대 화폐제도 변화와 그 기간 동안 물가산정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의 화폐가 제도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갔으며, 같은 기간 물가산정의 변화를 살핌으로서 고려시대 화폐유통의 단면을 살피고자 했다. 고려왕조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금속화폐의 유통을 시도했다. 성종은 동왕 15년에 철전을 유통했고, 숙종은 동왕 7년에 공식적으로 동전을 유통했다. 그러나 두 금속화폐는 모두 유통에 실패했다. 다음 왕인 목종과 예종이 화폐유통이 실패했다 선언했다. 이러한 사실은 물가 관련 사료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려초에서부터 동전이 유통되던 숙종 때가지 철전과 동전으로 물가가 계산된 기록은 전혀 없다. 이는 실제도 시장에서 두 화폐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금속화폐 주조 이전처럼 물가기록은 米와 布의 교환 비율로 서술되었다. 반면 숙종 6년에 표인되어 유통되었던 은병은 조금 다르다. 은병은 시장에서 은의 가치대로 유통되던 일종의 물품화폐였던 것을 명목가치를 부여해 국가에서 직접 주조하고 유통함으로써 법정화폐에 편입한 것이다. 은병제도는 충혜왕 원년에 소은병제를 실시할 때까지 큰 제도적 변화없이 유통되었다. 그래서인지 예종의 후사인 인종 10년의 기사에서는 물가산정시에 제일 먼저 은병을 기준으로 미곡의 가치를 계산하였다. 그리고 충혜왕 원년까지의 물가산정에서는 은과 은병이 기준이 되어 미곡의 가치가 계산되었다. 이전까지 布와 米의 교환가치를 기준으로 계산되었던 물가산정 방식이 은 혹은 은병이 포함되는 구조로 바뀌었던 것이다. 특히 원간섭기였던 고려 후기에는 원의 지폐인 보초까지 유입되어 고려화폐 유통에 변화가 생겼지만, 은병제도는 계속 유지되었고 물가산정 방식도 은병 혹은 은과 米혹은 布의 교환비율로 산정되었다. 다만 은의 해외 유출과 보초의 유입은 은가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에 따라 가치가 보다 작은 소은병제도가 충혜왕때에 등장하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공민왕대에 이르면 이전 시기보다 은가가 무려 3배 이상 등 귀한 상태에서 은병을 기준으로 하는 기존의 화폐제를 유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듯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살피겠지만, 결국 공민왕대에는 은전 주조 논의가 있었지만 실패했고, 그 뒤에는 저화 유통 논의도 있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기존의 은병제도도 없어지고, 새로운 화폐제도는 논의에만 그치던 이 시기에는 물가산정 방식도 변화하였다. 바로 布대 米의 교환가치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 당시는 실질적으로 국가가 유통하던 화폐가 없던 시기였던 고려 전기와 마찬가지로 물가산정 방식이 布대 米로 표현되었다. 다만 고려 전기에는 다양한 포의 종류와 다양한 곡물이 언급되었던 것에 반해 이 당시는 간결하게 布와 米로만 표현되었다. 다양한 종류가 아니라 한가지로 통일되었다는 것은 이들 물품화폐가 단일품목으로 가치 표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물품의 화폐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고려시대는 시기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米와 布중심의 물품화폐와 금속화폐인 은병, 칭량화폐인 은, 원간섭기 외부에서 유입된 원의 寶?등 다양한 화폐가 공존하며 유통되던 시기였다고 하겠다. The Goryeo Dynasty tried to distibute metallic currency for the first time in Korean history. Seongjong(성종) coinaged iron coins, and Sukjong(숙종) coinaged copper coins. But peolple of Koryeo didn`t use those coins, two kinds of coins were failed. Mokjong(목종), the next king of Seongjong and Yejong(예종) the next king of Sukjong declared those coins were failed. We can reconfirm those historical fact by the record of price estimations. From the early era of Goryeo to Sukjong era when copper coins were tried to be circulated, there is no price calcualtions record expressed by iron coins or copper coins. This means that those coin`s role in the market was very restrictive. Sukjong tried to another kind of metallic currency called Eunbyung (은병). Eunbyung is silver currency that was circulated well in Goryeo Era. That is the differency between those coins and Eunbyung. Especially, the price estimations were expressed by silver or Eunbyung those periods. This means silver currency was acting its role in Goryeo Era. But the situation was changed by Yuan Empire(원). Yuan intervened in the domestic affairs of Goryeo not only politics but also economy. Yuan`s paper money Boacho was inflowed in Goryeo. But Goryeo Dynaty kept their monetary policy of silver currency. Especially king Choonghye(충혜왕) coinaged Soeungbyung(소은병)- light silver currency. And during the same period, price estimation expressed by silver currency. When Yuan lost its power in both china and Goryeo, Goryeo was also losing it power in Korea. And value of silver rised up very high. So Goryeo Dynasty gave up its silver currency and price estimations were recorded by rice and fabr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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