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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릉등처안무사 김인우의 활동에 대하여

        한성주 한국이사부학회 2020 이사부와 동해 Vol.16 No.-

        김인우(金麟雨)의 생몰년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삼척(三陟) 사람이며, 조선 초기 안무사(安撫使)로 우산무릉등처(于山武陵等妻)에 세 차례나 다녀온 인물이다. 김인우는 고려말 삼척에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남은(南誾)의 휘하에서 왜구 격퇴의 군공을 세웠던 삼척의 토착군인이었다고 보여지며, 이후 안인포만호, 판장기현사를 역임하였다. 왜구 격퇴와 수군 운영과 방어의 경험, 우산무릉과 가까운 삼척 사람이 라는 점이 김인우가 안무사로 발탁되어 우산무릉등처에 다녀오게 된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인우의 우산무릉등처 파견은 1416년(태종 16), 1417년(태종 17), 1425년(세종 7)에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그의 역할과 관련하여 구분이 필요하다. 1차인 1416년의 파견은 직접적인 안무(按撫) 활동으로, 그 목적은 무릉도의 두목(頭目)을 깨우쳐서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릉등처 안무의 필요성이 김인우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제기되었으며, 그 안무를 실행한 최초의 실무책임자가 김인우였다. 김인우를 무릉등처안무사로 삼은 1차 파견은 조선의 구체적인 무릉도 안무를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였다. 1417년과 1425년에 이루어진 2 · 3차 파견의 목적은 ‘거민쇄출(居民刷出)’이었다. 김인우는 1차 파견에서 거주민 3명을 데리고 오고, 호구와 인구수를 조사하였는데, 이것이 ‘거민쇄출’의 배경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재차 김인우를 안무사로 삼아 다시 우산무릉등처에 들어가 그곳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하였다(2차 파견). 그런데 다시 무릉도에 남녀 28명이 도망하여 들어가자, 8년 뒤인 1425년에 김인우를 안무사로 삼아 그들을 다시 쇄환하게 하였다(3차 파견). 김인우는 안무사로 조선의 ‘거민쇄출’ 정책을 두 차례에 걸쳐 수행한 실무책임자였다. 김인우의 3차 파견은 ‘거민쇄출’을 목적으로 했지만, 이미 태종 때 주민들을 육지로 나오게 한 이후 세종 때에 다시 각종의 역을 피하기 위해 우산무릉도에 숨어 들어간 사람들을 찾아내서 잡아오는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김인우의 마지막 안무사로서의 활동, 즉 3차 파견의 복명 기록은 ‘수포(搜捕)’라는 용어를 쓰 로 있다. 따라서 김인우의 우산무릉등처의 안무사로의 활동은 ‘안무(按撫) → 거민 쇄출(居民刷出) → 수포(搜捕)’로 이어졌고, 이것은 조선 후기 ‘안용복 사건’ 이후 조 선의 우산무릉등처에 대한 수토(搜討) 정책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Kim In-Woo had lived in Samcheok(三陟), though it was not known when he was born and passed away. He had visited WoosanMooreung and such(于山武陵等妻) even three times as Anmusa(安撫使) in the Early Joseon period. Kim In-Woo was a soldier who contributed to defeating Japanese invaders under the command of Nam Eun(南誾)in the Late Goryeo. He also had careers of Aninpo Manho(安仁浦萬戶), Panjanggihyunsa(判長鬐縣事). Kim In-woo was appointed as Anmusa considering that he had experience to defeat Japanese invaders and to operate naval forces. Furthermore, he lived in Samcheok near Woosan Mooreung. Kim In-woo was sent to WoosanMooreung and such three times - 1416(the 16th year of Taejong), 1417(the 17th year of Taejong), 1425(the 7th year of Sejong). The purpose of the dispatches is different each other. The purpose of the first dispatch in 1416 is to cultivate a boss of Mooreungdo and bring him to the mainland. The necessity of pacifying Mooreung and such was actively suggested by Kim In-Woo. The first person in charge of pacifying Mooreung and such was Kim In-Woo. The first dispatch to Mooreung and such by Kim In-Woo as Anmusa was the first example to show concrete pacifying of Mooreungdo in Joseon. The purpose of the second and third dispatch in 1417 and 1425 was to bring residents to the mainland(居民刷出). In the first dispatch, Kim In-Woo brought three residents and surveyed number of houses and population of Mooreungdo. This was a background of ‘bringing residents to mainland(居民刷出)’ in Mooreungdo. Joseon government sent Kim In-woo as Anmusa to WoosanMooreung and such again(the second dispatch). He brought people to the mainland. But 28 women and men ran away to Mooreungdo. So 8 years later, Kim In-woo was sent as Anmusa in 1425 (the third dispatch) and they were brought to the mainland again. Kim In-woo was in charge of pacifying the island, carrying out policy of ‘bringing residents to mainland(居民 刷出)’ two times. The third dispatch aimed to ‘bringing residents to mainland (居民刷出)’ . However, it is thought that Kim In-woo played a role to arrest people who ran away to WoosanMooreungdo in Sejong period and stayed there to avoid various duties - they brought to the mainland in Taejong. Accordingly, his mission(復 命) record for the third dispatch, his last activity as Anmusa shows the term ‘seek and arrest(搜捕)’. Activity of Kim In-woo as Anmusa can be summarized thus - ‘pacifying(按撫) → bringing residents to mainlan(居民刷出) → seek and arrest(搜捕)’. This would be related to the policy to patrol periodically(搜討) for WoosanMooreung and such in Joseon after ‘An Yong-bok(安龍福) activity’ in Late Joseon.

      • KCI등재

        중·근세 조선인의 島嶼 경영과 경계인식 고찰

        손승철(Son, Seung-cheul) 한일관계사학회 2011 한일관계사연구 Vol.39 No.-

        울릉도와 독도 근해는 신라시대부터 우산국으로 기술되면서,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영토로 인식되었고, 1141년부터는 명주도의 관리구역이었다. 『高麗史』에 의하면 東界 울진현의 행정구역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350년대에 왜구의 침입하면서, 울릉도는 동해안 지역을 약탈하기 위한 중간 거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원도를 비롯한 동해안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탈은 계속되자, 울릉도가 왜구침탈의 중간거점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조처로 "居民刷出"을 했다. 그런데 이러한 "居民刷出"이 일인사학자들에 의해 조선의 해양정책으로 규정되어 "空島政策"이란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대마도에서는 일본인의 울릉도 이주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태종은 일본인의 울릉도거주를 허용하는 것은 越境이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일본인의 이주를 청한 것이나, 越境이어서 안된다고 한 것은 일본이나 조선의 울릉도에 대한 경계인식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울릉도 관리를 위해 "武陵等處按撫使"와 "武陵島巡審敬差官"을 파견하였고, 17세기 말 "안용복사건"을 계기로 搜討制가 제도화되어 1894년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공도정책"이란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거민쇄출"도 울릉도를 경영하는 하나의 시책이었다. "居民刷出"을 시행하면서 조선에서는 按撫使 - 敬差官 - 搜討官을 파견하여 울릉도에 판한 도서경영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다. 한편 于山國이 于山과 武陵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우산과 무릉이 一島인가, 二島인가 하는 문제이다. 『고려사』나 『세종실록』에는 우산과 무릉이 두 섬으로 기술되었는데, 『신증여지승람』에는 한 섬으로 되어있다. 이 사료는 조선왕조가 동해의 도서에 대해 어떠한 영토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一島說"과 "二島說"의 혼란은 『동국문헌비고』에 의해 완전히 "二島說"로 정리된다. 이는 1696년 안용복 도일사건이후 벌어진 조일간의 "울릉도쟁계"의 결과 나타난 영토인식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于山國은 于山과 武陵이며, 두 섬으로 되어있고, 于山은 독도, 武陵은 울릉도"라는 사실이 모두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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