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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rl Barth as a Scholar and Interpreter of John Calvin

        Kang, Joseph J. 칼빈대학교 2004 칼빈論壇 Vol.2004 No.-

        칼빈은 거대한 폭포, 원시림, 마력적인 힘, 거대한 산 히말라야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어떤 것 절대적으로 중국적이며, 경이스럽고, 신화적인 그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1922년 괴팅엔(Go¨ttingen) 대학교에서 여름 학기 강의를 칼빈의 신학으로 준비하면서 - 사실상 칼 바르트의 괴팅엔 대학에서의 첫 번째 임무 중 하나는 개혁자들의 신학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 그의 친구 에드아르드 투루나이젠(Eduard Thurneysen)에게 쓴 편지의 일부이다. 이러한 사실적이며, 프란쯔 카프카적인 서술이 칼빈에 대해 항거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에 대한 서술로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적절하게 제시하여 언급하는 것은 고사하고, 심지어 이러한 현상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수단, 흡입관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네. 내가 받아들은 것은 단지 가늘고 작은 개울물일 뿐이고, 그때 내가 다시 내보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이 작은 개울물 중에서도 훨씬 더 가늘어진 추출물일 뿐이네, 어쨌든 나는 즐겁고 그리고 유익하게 나의 생애의 남은 세월들을 칼빈과 함께 보내고 헌신 할 수 있을 것 같네” 칼 바르트 이러한 천명에 대한 결실은 「칼빈의 신학」 (Die Thologie Calvins) 이라는 552 페이지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필자는 본고에서 신 칼빈주의자로서의 칼빈학자이며 또한 기독론 지향적인 칼빈의 해석학자로서의 칼 바르트의 신학에 대하여 칼빈과의 첫 번째 조우(遭遇)로부터 시작하여, 칼빈의 신학에 대한 동의하는 점과 동의하지 못하는 점을 중요한 모티프로 설정하여 칼 바르트 신학의 신학적 방법론(Theologische Methode), 칼 바르트의 성경원리(Schriftprinzip) 그리고 선택교리(Doctrine of Election)에 대하여 그의 대표적 저작인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을 중심으로 논구했다. 결국 칼 바르트는 1959년 칼빈에 대하여 마르틴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천재는 아니었으나 의식있는 해석자였으며 완고하나 집요한 사상가였고, 동시에 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에 지칠줄 모르는 관심을 지닌 신학자요, 훌륭한 선생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자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한 진지한 학습자가 되어야 하며 진리에 대한 추구에 자신의눈과 귀를 사용하려는 지대한 관심 속에서 칼빈주의자(Calvinist)가 될 수 있었다고 바르트는 고백하고 있다.

      • Eine Betrachtung u¨ber die dogmatischen Entscheidungen zum Verlauf des Arianiscen Streites in der Alten Kirche

        배길수 칼빈대학교 2004 칼빈論壇 Vol.2004 No.-

        성삼위에 관한 신학적 논쟁은 318년 아리우스에 의하여 시작된다. 아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 사이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두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로고스)의 관계(relation)를 서로 달리 이해한데서 비롯된다. 아리우스는 하나님 홀로 한분만이 낳아지지 않으시고, 시작이 없으시고, 영원하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아들은 낳아지셨고, 시작이 있으시기에 영원하지 않으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알렉산더감독은 특별히 삼위의 일체("ε˙ν τeια^δι μονα^δα")를 강조한다(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임을 주장). 이런 까닭에 아리우스는 감독 알렉산더를 비난하며 그의 친구인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에게 편지를 띄우나, 그 뒤 얼마 후 아리우스는 320년 공의회에 자기의 신앙고백을 제출해야했고,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표명해야 했다. 그러나, 감독 알렉산더는 아리우스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할 수 없었고, 마침내 그는 이에 대한 신학적 표명을 위하여 감독들을 불러 공의회를 개최한다. 이로써 삼위일체교리의 결정을 위한 아리안논쟁이 시작된다. 삼위일체논쟁은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과의 동일본질에 대한 논쟁으로, 과연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에 대한 대답에 관한 논쟁이었다. 325년, 니케아공의회가 열리기 바로 직전에 개최된 안디옥공의회의 신앙고백서에서는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여 아들의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심이 주장되었고, 니케아신조와 유사한 표현이 많이 나타나며 어귀적으로 많은 일치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보아 안디옥공의회의 신앙고백서를 기초로 니케아신조가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니케아신조에서는 그리스도의 개체성과 아들의 아버지와의 일체성이 확인되었으며, 아울러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의 교리논쟁 역시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고대교회의 통일된 하나의 신앙고백이자 신학적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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