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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년의 中國 : 동시대 한국인의 시각 同時代的韓國人的認識

        백영서 중국근현대사학회 2000 중국현대사연구 Vol.9 No.-

        爲了能更好地接近1949年在中國展開的飜天覆地的曆史現實, 本人力圖在這篇文章中再現生活在那個時代的人們, 特別是韓國人的實際見聞和感受。事實上, 所謂韓國人的中國認識, 幷不是說當時韓半島對中國的認識是完全一致的, 而且本文也不打算對此進行整體性的硏究。本文所選擇的方法是對在韓半島南部影響非常大的兩種日報---《京鄕新聞》和《朝鮮日報》所刊載的同時代的韓國人的看法進行比較分析。 雖然這兩家報紙對內戰時期中國政治形勢的關心主要集中在中共和國民黨政府誰掌握主導權問題上, 但實際上都不將共産黨的勝利看作必然的趨勢, 不以孤立的, 靜止的態度來看待1949年中國的政治形勢, 而是將其作爲不斷進行的革命過程中的一環來看待的, 因而在某種程度上擺脫了勝利與敗退這種觀點的局限。當時韓國人的這種認識特征, 具有引人注目的曆史價値。那요, 韓國人爲什요持這種從長期的曆史發展過程來看待中國現實的觀點니? 首先可以想到的是韓國人長期以來一直是以一種主體的姿態來看待作爲同時代各種問題之一的中國政治形勢的。至遲19世紀末以來, 韓國知識分子卽認爲中國的變化和政治形勢與韓國的命運直接相關, 一直十分關注, 因而對中國的理解也由于長期的歷史積累而十分深刻。特別是以‘客觀的, 宏觀的視野’ 報道中國革命性質的韓國輿論遺産, 應該受到應有的重視。盡管解放後獲得情報的條件十分惡劣, 但韓國輿論界仍然是將中國問題與韓國問題相聯係, 以比較的, 長時段性的觀點來進行觀察的。 也無可諱言, 正是這種在韓國問題的延長線上來把握中國問題的立場, 可能是同時代韓國人的中國認識存在局限性, 甚至歪曲事實的主要因素。這也表明當時韓國的輿論界已經開始受到兩大陣營冷戰理論的影響。以冷戰的眼光來展望中國政治形勢的傾向已經在整個韓國輿論界發揮了巨大的影響力, 後來經過韓國戰爭而進一步得以强化, 幷長期支配着南韓人對中國的認識。 事實上, 韓國人的中國認識形成史, 可以說是韓國人對中國“已經了解的事情”與“希望了解的事情(或者說是希望發生的事情)”兩個側面相互삼透, 動態的認識過程。從這點上來說, 在東亞冷戰秩序形成過程中, 在韓半島南北間的衝突日益頻繁的情況下, 以冷戰的視角來理解(或者說是希望理解)1949年的中國, 也許是不可避免的。但是, 中國大陸的改革開放, 以及韓中建交, 使中韓關係進入脫冷戰階段, 也使韓國人的中國認識發生變化。現在, 認識過去的50年, 特別是作爲這一時代起點的1949年的中國, 爲我們打開了重新解釋這段歷史的方便之門。

      • 논문(論文) : 국공내전시기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의 독자성 모색

        손승희 한국중국근현대사학회(구 중국근현대사학회) 2010 중국현대사연구 Vol.48 No.-

        改革開放之后, 中國在經濟方面的改革及其取得的成果要求對政治方面也進行相應的改革。中國政府主張要强化共産黨領導下的民主黨派的作用。但是, 民主黨派爲了較好的發揮對執政黨牽制與監督的作用, 保證其政治上的地位與作用, 至少要確保其獨特性。在此, 有必要探索作爲中國一個民主黨派-民主同盟的起源, 井從現在中國多黨合作制的曆史持續性側面對其進行把握。本文將從19世紀40年代民主同盟的獨自性確立方面對其作用及意義進行探討。民主同盟最爲重視的是民主與和平。他們制定憲法與召開國民大會的過程都體現了其對民主秩序的要求。在國共分裂與內戰的情況下, 他們所主張的依然是和平。民主同盟將自身定位爲民主與和平的守護者。因爲他們所追求的是, 在任何情況下都要以和平爲前提用政治協商的放式來解決問題, 其程序與過程都應當是民主的, 井且也要用這樣的方式來建立國家。民主同盟將自身定義爲`非武裝政黨`。他們通過輿論活動, 用呼우群衆理性的方式來制約國共的武裝力量。他們的原則是徹底的民主與和平。他們希望通過民主的程序與操作方式來組建國共兩黨與少數民主黨派共同組建的聯合政府。倂且, 他們將實現中國的民主化看作是民主同盟的作用與曆史任務。爲此, 首先就要阻止國共的武力沖突, 民主同盟的作用依然隨之逐漸凸顯出來。民主同盟흔樂於站在中立的立場上對國共兩黨進行調和。爲此就需要維持民主同盟的獨立性與中立性。在當時有可能爆發國共內戰的情況下, 民主同盟積極促成了國共政治協商會議, 爲了和平建國采取了五項決議。但是對於反對這些決議的國民黨, 民主同盟力求實現反對內戰、改造政府、召開國民大會等解決方案。此外, 民主同盟還往來於國民黨、共産黨及美國特使馬歇爾之間, 努力調和國共沖突與內戰。但是最終內戰還是爆發, 調和國共阿黨的努力還是失敗了。在二中全會上, 民主同盟也不得不承認調和國共兩黨這一任務的失敗。但是民主同盟仍然沒有放棄對於解決國共沖突這一問題的期望。爲了應對國共兩黨厭倦內戰重新協商談判情況的出現, 民主同盟不斷强化其組織能力, 最大化集聚人民的力量。但是民主同盟也開始認識到, 自身應該從爲調和國共兩黨而存在的黨派聯合體的位置中脫離出來, 開始准備成爲獨立的政治團體或者是政黨的組織與力量。民主同盟確信, 到了那個時候, 自己不僅要發揮國共兩黨之間調和者的作用, 同時也要發揮出將中國引領到和平民主之路的決定性作用。爲了應對"那一天", 可以흔好地實現國共兩黨間的調和作用, 民主同盟認爲關鍵是要維持在國民黨與共産黨之間的獨立性。民主同盟不參加國民大會也是`爲了維持其獨立的立場與調和者的身빈`。因爲只有站在超然而獨立的第三者的立場上, 才能對國共兩黨之間的政治斗爭進行調和。民主同盟顯示出了持接以合法公開的方式來爲民主與和平斗爭的意志。但是由於國民黨政府持續的獨裁政治與對民主人士的鎭壓, 民主同盟成爲非法化的組織, 總部也被解散。民主同盟在成立之時, 倂沒有准備關於國家建設的長期大策。伴隨調和國共兩黨的失敗, 民主同盟開始了更爲長期的和組織化的准備。民主同盟不同於爲了獲得政權實現自己政治理想的一般政黨。民主同盟在國共兩黨之間對其進行調和, 爲了建立新的國家, 有着過渡時期的特征。民主同盟雖然在調和國共兩黨的過程中可以維持其獨立的平衡作用, 但是當國共兩黨投入內戰井拒絶政治協商之時, 民主同盟的作用也開始被弱化。通過維持在國共兩黨間的獨特性與中立性來用和平與民主的方式實現中國統一的民主同盟的目標與意圖, 最后以失敗告終。

      • 청일전쟁에 대한 중국의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의 방향

        朴正鉉 중국근현대사학회 2004 중국현대사연구 Vol.20 No.-

        中日兩國對甲午戰爭持有截然相反的理解, 其評價也, 隨着兩國的歷史展開過程, 出現過完全不同的情況。因此, 韓中日三國對甲午戰爭的認識不容易達到比較合理的結論, 最好我們首先槪括各個國家如何理解甲午戰爭, 然後再比較分析其認識。 韓國不但是個甲午戰爭的直接受害國, 而且其領土成爲戰場。진管如此, 韓國歷史學界硏究타與東學農民戰爭的關係, 更重視因戰爭的結果所進行的甲午改革。甲午戰爭暴發時, 韓國不能堅持自我主張, 只不過근着中日兩國的利害關係接受타們的要求而已。韓國學界仍然重視東學農民戰爭與甲午改革, 這種傾向, 不是正確反映當時的歷史現實, 而是他們有强調近代性的目的。 就日本而言, 在甲午戰爭得勝, 此後, 在走上帝國主義道路起了決定性作用。日本經過甲午戰爭, 成爲亞洲唯一達到近代化國家, 還達到可與西方國家競爭的地位。因此, 日本不太重視甲午戰爭本身內在的性質, 反而主張他們不可避面地參與戰爭。與此同時, 日本主要提起甲午戰爭暴發的原因, 卽나個國家發動戰爭, 試圖擺脫戰爭的責任。 在評價同一事件甲午戰爭, 韓國强調近代化的連續性, 日本理解爲近代化的契機, 中國解釋爲近代化的危機, 這些評價不同引起認識不同。這些認識明確說明, 韓中日三國還不能擺脫以自國爲中心的歷史認識。繼着, 探討中國對甲午戰爭認識。 흘今爲止, 中國對甲午戰爭的視角基本上未有흔大的變化, 但是按時情出現過稍微的差別。甲午戰爭一般被定爲圍繞朝鮮的宗主權, 淸日兩國所發動的侵略戰爭。這種性質可以看出于馬關條約第一款“朝鮮爲完全自主國”。淸日兩國全然不考慮朝鮮的主權, 發動侵掠朝鮮的戰爭。日本開始侵略大陸後, 就中國而言, 戰爭的性質變成衛護國家的。中國主要强調日本的侵掠, 相當忽視戰爭的本質。可見, 中國對甲午戰爭的歷史認識明顯顯示出以自國爲中心的思考。換句話說,中國的歷史認識仍然不擺脫侵掠與反侵掠或加害國日本與受害國中國的邏輯。 中國歷史學界强烈批評, 甲午戰爭前後帝國主義列强恐後爭先地侵掠大陸。不過, 一九八零年代以來, 逐漸少重視周圍國家的立場。甲午戰爭的最大受害國雖然是朝鮮。中國的歷史敍述不提起淸朝對朝鮮的宗主權所包含的不合理性, 或對朝鮮的帝國主義性侵掠, 只不過敍述朝鮮的要請或隣國朝鮮而已。在此, 需要說明的是, 從形式上看, 帝國主義國家侵略中國, 根据于條約或契約。因此, 中國學界應當明確揭露近代條約的不當性, 細心分析中國統治體制的矛盾, 但是他們却反復主張中國是西方列强侵掠的最大受害國。 中國對甲午戰爭的歷史認識之所以强調日本侵略性, 是因爲當時中國不能구克服民族危機, 使得他們感到自愧。幷且, 在中國, 意識形態還束縛學術, 不能自由發表見解, 也不能擺脫‘愛國主義’的立場。與這些學界的情況相反, 歷史敎育却出現重視市民敎育與個人的趨勢, 但是爲了變化旣存歷史認識, 還需要一定的時間。

      • 논문(論文) : 동남아를 보는 중국의 "식민주의적" 시각, 1920~30년대 여행기를 통해 본 중국인의 "남양(南洋)" 인식

        박경석 한국중국근현대사학회(구 중국근현대사학회) 2010 중국현대사연구 Vol.48 No.-

        本文考察了1920~30年代遊記中出現的中國旅行者對南洋的認識。如果考慮到旅行者的身빈或者履行的直接動機的話, 旅行者的視線흔容易集中在華僑上面。實際上, 關於華僑有흔多記述, 將華僑看作是殖民開拓者, 將南洋地區看作是中國和西方勢力爭奪殖民配權的角逐場, 這一觀點十分引人注目。我們不難發現, 對於當時的中國人來說, 以華僑爲媒介實現了特有的`殖民主義意識`。這種`殖民主義`視角有多種表現。從`未開化的土人-華人的遷入-西歐人的殖民`這樣的觀念來看東南亞曆史, 也將殖民統治的主體看作是區分界限的標准, 對`殖民地近代化`的成果給予了흔高的評價。看待南洋的`殖民主義`的視角可以在本國的敎科書及大學的敎材中得到確認, 暗示了中國社會的一貫觀點也反映在旅行者的意識之中。看待原住民的視角也同`殖民主義`的視角是一脈相同的。從`殖民主義`的視角來看, 殖民統治勢力作爲曆史的主體倂不能成爲受到殖民統治的住民的曆史的主體, 他們被看作是懶惰的, 野蠻的。愚蠢的。比起旅行者來說, 當地的華僑用一種更加消極的視角來看待原住民, 華僑的視角也對旅行者産生了影響。本文從不同的角度考察了1920~30年代中國旅行者將對南洋的認識集中在`殖民主義`視角這樣問題。這種`殖民主義`視角與到西方國家及日本等近代發達國家旅行后寫的游記中表現出的那種羨慕與憧憬的視角形成了鮮明的對比。可以確定的是, 近代中國人的外國游記中分明存在西方國家-日本-東亞-其타這種對於自我和他人認識上的等級。中國旅行者的視線在近代殖民主義及意識構造下相當一部分都是類似的。將原住民看作是下等他人, 以正面的視角看待華僑的`殖民開拓`, 給予`殖民地近代化`成果흔高的評價。倂且, 對於南洋的一貫的印象與西方國家看待非西方國家的印象十分類似。如此看來, 中國旅行者看待南洋的`殖民主義視角`是十分近代的。

      • 1930-40년대 중국국민정부의 정책결정과정 참가기

        강진아 중국근현대사학회 2004 중국현대사연구 Vol.20 No.-

        지난 11월 14일에서 15일 양일간에 걸쳐 동경 근교 逗子 湘南國際村에서 1930년대와 1940년대 중국국민정부의 정책 결정과정에 관한 워크샵이 열렸다. 이 회의는 일본 중국현대사연구회의 3년 프로젝트 「1949년 전후의 중국」의 일환으로 기획된 것이다. 원 프로젝트는 1949년을 경계로 한 이른바 「중화민국사」와 「중화인민공화국사」 사이의 연속성과 단절, 변화를 정치 경제 사회구조 각 방면에서 밝힐 것을 목적으로 한다. 동시에 건국초의 국가통합에 대한 규명 및 중국 內政에 미친 국제적 영향 등의 테마도 연구 대상에 포함된다. 이 기획은 중국현대사연구회가 지금까지 연구 발표해온 『中國國民革命史の硏究』(1974년), 『中國國民政府史の硏究』(1986년), 『戰後中國國民政府史の硏究』(2001년), 『重慶國民政府の硏究』(현재 프로젝트 진행 중, 완료 후 출판예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워 크샵은 위의 프로젝트의 첫 번째 국제회의로, 올해는 중화민국사와의 연속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시기적으로 1930-40년대로 정하였고, 주제는 정책결정 과정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책의 실행 과정 및 실태도 포괄하는 내용으로 발표가 구성되어, 國民政府 政策史에 가까운 회의가 되었다. 회의는 원래 7월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사스의 영향으로 11월에 개최가 연기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성과는 상당히 컸다. 이하 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각 발표의 내용을 차례대로 요약해 보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번 회의는 대륙학자의 참가 없이 주로 대만중앙연구원의 연구자들과 일본 중국현대사연구회의 소장 연구자가 주축이 된 회의였다. 대만연구자들은 사료를 풍성하게 구사한 실증적 연구를 선보인 반면, 일본 연구자들은 새로운 이론틀의 시도가 돋보인 회의였다. 대만학계의 경우 실증적이고 치밀한 연구를 특색으로 하지만, 일본학계의 경우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개별사례연구를 벗어나 이론적 시도가 과감하게 시도되는 것은 새로운 현상으로 보인다. 대만연구자들은 각 테이블에서 최신의 자료를 구사하며 새로운 정보 공개의 속보를 전해주어 많은 참가자들을 기쁘게 했는데, 대만에 가보지 않은 평자도 꼭 대만에 가 봐야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였다. 이번 회의는 앞서 말했듯이 「1949년 전후의 중국」이 본 주제로, 다음 해에는 1950년대를 중심으로 회의가 기획된다고 한다. 드디어 역사학의 이름으로 1949년의 담을 월장하는 본격적인 시대가 열리는 듯하다. 회의의 진행에 수고해 준 현재 도쿄대학, 히토쯔바시대학 등에 재학 중인 석사, 박사생 스텝의 대부분이 1940년대와 1950년대를 전공하고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건국초기 상해의 민간기업의 흡수문제를 委託加工, 發注 문제를 소재로 연구하는 加島潤씨, 건국초기 식량문제와 糧票 정책을 연구하는 松村史穗씨, 戰時 在華紡의 발전 양상을 연구하는 今井就稔씨 등이 다음 세대를 이끌 현대사 연구주자들이다. 이번 회의를 통해 안 사실이지만, 현재 일본의 중국현대사학회는 차세대의 연구자들 간의 국제적 교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중국 등 현지의 석, 박사생급의 젊은 연구자들과의 교류 모임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국제회의가 중견급 이상 연구자들의 정보교환의 장만이 아니라, 젊은새 세대연구자들을 위한 소개와 견문 획득의 場을 제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 KCI등재

        신해정변과 일본

        桑兵 중국근현대사학회 2011 중국근현대사연구 Vol.52 No.-

        신해혁명 전후는 일본이 근대 중국에 가장 깊고도 넓게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유학생과 유력(游歷), 일본인 고문과 교습 등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쳐서 이로 인해 언어, 학술시스템 및 정치, 사회, 교육, 사법, 군사, 재정 각 분야의 제도가 전면적으로 바뀌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형성된 지식 시스템과 제도 체계는 일찍이 일본이 동아시아에서의 언어 권력과 정신적 지배력을 손에 쥐게끔 만들었고, 청말 이후 중국인의 사유와 행위 방식을 결정지었으니, 그 영향력은 극히 깊고도 넓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모두 진화였던 것은 아니었다. 서학의 뒤를 이어 중국에 영향을 끼친 동학(東學)으로서, 중서 양쪽 모두에게 있어 비교 이해를 통해 억지로 갖다 붙이려는 부작용이 있었고, 이는 서학과 중국에 대한 오독과 착오를 낳았다. 이는 신해혁명 연구를 제약하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신해시기 일본이 중국에 미친 광범위하고도 깊은 영향력에 관해 국내외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고도의 관심을 보여 왔다. 미국 학자인 레이놀즈(Douglas R. Reynolds)는 황금10년과 신정혁명(新政革命)(The Xinzheng Revolution and Japan, Council on East Asian Studies, Harvard University, 1993)에서, 신정 전후로 중국의 지식과 제도 체계가 확연히 양분된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 이전이 하나의 체계로 거의 천 여 년 지속되어 왔고, 이 시기 이후가 또 하나의 체계로서, 점차적인 변동과 조정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1898년 백일유신 전야, 중국의 사상과 체제 모두는 중국인 특유의 고대로부터 내려온 원리만을 기계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겨우 12년이 지난 1910년에 이미 중국인의 사상과 정치 체제는 외국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근본적인 함의에서 볼 때, 이러한 변화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사상적 측면에서, 중국의 신구 저명인사들(고관에서부터 신사계층, 신흥 상공업자와 학생에 이르기까지)은 언어와 사상의 내용을 바꾸었고, 몇몇 기구들부터 주요 언론 매체에 이르기까지 이를 빌려 사상을 표현했다. 체제 측면에서, 그들은 외국의 모델을 좇아 오랜 시간에 걸쳐 중국에서 성립된 정부 조직을 고치고, 국가와 사회를 형성하는 법률과 제도를 바꾸었다. 1910년 중국의 사상과 체제를 1926년 및 현재 중국의 그것과 비교해 본다면, 기본적인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은 동일한 현실 질서에 속해 있다. 또 다른측면에서 1910년과 1989년 초를 비교해본다면 사상과 체제의 양대 영역에서 매우 분명하게 서로 단절되어있으며, 게다가 갈수록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 논문(論文) : "관리(官利) 관행(慣行)"이 중국기업 경영에 미친 영향 -1930년대 방직공업(紡織工業)의 사례를 중심으로-

        김지환 한국중국근현대사학회(구 중국근현대사학회) 2011 중국현대사연구 Vol.49 No.-

        第一次世界大戰給整個中國工業提供空前好機會, 戰爭沮碍歐洲生産品順利進口, 因而全中國發生了廣範供不應求現像. 這種現像馬上反應棉紗布等工産品價格上漲, 此後紗廠等各廠獲得空前利潤, 而刺戟中國工業全般發展, 從此可見, 一次大戰無疑成爲中國資本主義發展道路上非常重要的起点. 官利就是近代以來中國企業及工廠具有獨特籌款慣例. 舊中國社會沒具備合理代款的金融環境, 因而爲了順利引進社會游資, 中國工商資本家一向積極采取這一慣例. 在創辦企業的過程當中, 我們不得不承認其肯定一面. 盡管如此, 這一慣例沒能避開工商業發展途上非常嚴重破壞後果. 年終結帳之前, 企業一無例外給股東要支付代款利息, 這還導致經營上虧帳. 例如, 紡織工業可以說是近代以來中國代表性工業, 因而其反映中國全般工業的發展趨勢. 對紗廠資本家來說, 只要支付官利後, 才可以准備公積金以及折舊費用. 這還引起不少經營上缺點. 紗廠資本不足造成紡錘織機不備. 其不僅僅在於設備總量不足, 而更嚴重的是其直接導致商品質量下降, 進而招致流動資本不足等惡性循環. 總的來說, 由於紗廠固定及流動資本不足, 工商業資本家積極采取官利慣例. 然而這一商業慣例還加深資本不足因而導致超支缺損. 這一慣例强烈影響貯蓄利息和代款利息, 因而限制銀行等金融業對工商業投資. 從此可見, 官利慣例無疑是中國工業經濟蕭條的主要原因之一, 進而其起了中國近代工商業發展的沮碍作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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