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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초가 본 인도와 중앙아시아

        정병삼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0 동국사학 Vol.49 No.-

        Hyecho(慧超) made a pilgrimage to India in early 8th century, and wrote a record WangOcheonchukgukJeon(往五天竺國傳). The record which was extent is the center part of complete version. And this record seems to be a draft copy. WangOcheonchukgukJeon is a particular record on India and Central Asia. It is an unique description in early 8th century, and an only record which comes to India by sea and back to China by land. In this record, Hyecho wrote more about Central Asia than India. This is the distinctive character among other pilgrimages like FuguoJi and DatangXiyuJi. At that time India and Central Asia were in the era of change. In WangOcheonchukgukJeon, Hyecho wrote the circumstances of Buddhism, geography, customs, products, language and political condition of each countries he passed. These descriptions showed the real political conditions of the countries. The descriptions of Persia, Arab, Byzantine, Sogd and Turks are very important meanings in the point of cultural exchange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Moreover, WangOcheonchukgukJeon contains 5 poems which express the emotion of the pilgrimage, relatively other records have no poem. Hyecho explained the fact of pilgrimage in prose style, and the religious emotion in verse style. 혜초는 8세기 전반에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순력한 후 『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앞뒤가 떨어져 나간 일부분의 짧은 분량으로서 草稿일 가능성이 많지만 현존본만으로도 『왕오천축국전』의 8세기의 유일한 주요 순례기이고 海路로 가서 陸路로 돌아온 유일한 기록이라는 등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존 『왕오천축국전』에는 인도 지역보다 중앙아시아에 대한 서술이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는 혜초가 佛蹟 순례를 위한 인도 여행 못지않게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중앙아시아는 아랍의 지배가 굳어지는 격변을 겪던 시기였고, 혜초는 아랍 주도 시기의 정치적 질서의 변화를 작은 분량이지만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는 『대당서역기』나 『불국기』등과 비교할 때 두드러진 특징이다. 인도 지역의 서술에서 『왕오천축국전』은 오천축에 대한 서술이 이곳저곳에 나뉘어 있고, 불교 유적에 대한 기술도 정연하지 않는 등 아직 구조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아랍의 지배력이 확대되는 격변기의 중앙아시아를 순력한 혜초가 남긴 아랍과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 소그드 제국과 투르크 등 중앙아시아 일대의 광범위한 나라들에 대한 탐방과 인상적인 傳聞 기록은 동서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왕오천축국전』에는 다른 순례기에서 볼 수 없는 詩가 5편 실려 있다. 혜초는 주관적 편견을 제거하고 여행지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산문 부분에 중점을 두면서도, 순례 중 만났던 여러 난관을 헤쳐 나가 순례의 誓願을 완성하고자 하는 생생한 감정을 시에 진솔하게 담아 구도자의 정서를 표현함으로써 전편에 걸쳐 견실한 짜임새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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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의 불교 이해와 차 문화 향유

        정병삼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2019 南道文化硏究 Vol.0 No.37

        Dasan Jeong Yakyong, a representative intellectual in the new era of quest, was first contacted by Catholicism then exiled to Gangjin. He accomplished many academic achievements. Dasan was somewhat related to Buddhism during the Gangjin exile, having ties with several monks such as Hyejang and Ui Soon centered on the Baeknyeonsa and the Daedunsa. He tried to teach Confucian scriptures to the monks. He led the compilation of the history of Daedunsa and Baeknyunsa, which were the centers of Buddhism at that time. And he wrote the Daedong-seongyo-go, describing early Korean Buddhist history. Despite many interactions with monks, the basic Buddhist view was as negative as previous Confucian scholars had been. Dasan strongly pointed out the Buddhist dissolution in discussing the measures that had been offered to Jeongjo. He did not recognize the monks whom he interacted with, but he did not evaluate the Buddhist study or Seon practice of the monks. The attitude is quite different from the intention of the intellectual who sought a new thought. Dasan gained much knowledge about tea from books from China. He considered tea as a medicinal rather than a favorite food. It is known that Dasan taught tea to Hyejang, Uisoon, etc. But he urged Hyejang to send tea a month after their first meeting. It means that Hyejang had already manufactured and propagated tea before meeting Dasan. It is clear that Dasan played a major role in the rise of tea culture in late Joseon. This role and the path of acquiring tea knowledge and manufacturing tea should be distinguished. 새로운 모색의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다산은 일찍이 천주교에 접했다가 강진에 귀양 가서 이후 많은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냈다. 다산은 불교와 다소 관련을 갖기도 했으나 특히 강진 유배기에 백련사와 대둔사를 중심으로 혜장과 의순 등 여러 승려들과 교유를 가지며 승려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자 노력했다. 당시 불교의 중심지였던 대 둔사와 백련사의 사지 편찬을 지도했고, 『대동선교고』를 편찬하여 한국 초기 불교사를 서술하기도 했다. 승려들과 많은 교류를 했음에도 다산의 기본적인 불교 인식은 이전의 유학자들이 그 랬던 것처럼 매우 부정적인 것이었다. 다산은 조정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정조에게 개진 했던 대책 논의에서 강하게 불교 폐단을 지적했다. 그는 그가 교류한 승려들도 자질이 낮다고 보고 승려들의 경전 공부나 선 수행을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유를 모색했던 지식인의 지향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다산은 중국의 많은 전적을 섭렵하며 차에 대한 지식을 쌓고 특히 차를 기호식품이 아닌 약용으로 생각하고 음용하였다. 다산이 혜장과 의순 등에게 차를 가르쳐주었다고 알려졌지만, 그가 혜장을 만나 지 한 달 만에 차를 보내주기를 재촉한 걸명시는 혜장이 그와 만나기 전에 이미 차를 제조하여 전파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더 크게 한다. 다산이 차문화 부상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역할과 다산의 차 지식 습득 경로와 제다 관련 사실은 구분지어 이해해야 한다.

      • KCI등재

        신라 약사신앙의 성격 : 교리적 해석과 신앙활동

        정병삼 韓國佛敎硏究院 2013 불교연구 Vol.39 No.-

        삼국시대의 불교 수용과 발전기를 거치면서 불교 신앙은 석가불신앙과 미륵신앙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불교사상이 정립되고 신앙이 보편화되자 이전의 신앙에 더하여 미타신앙과 관음신앙 그리고 지장신앙 등 다양한 신앙이 널리 성행하였다. 특정 종파에 특정 신앙이 결부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각종 신앙이 중복 실천된 것이 이 시기 불교신앙의 특정이다. 그중에서 약사신앙은 미타와 관음과 더불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신앙의 하나였다. 미타신앙이 기본적으로 내세신앙이며 관음신앙이 현세기복적 신앙인데 비해 약사신앙은 현세적 성격과 정토신앙적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약사신앙의 일차적 성격은 治病 신앙과 관련된 現世祉福적 의의이다. 불구자나 질병자의 치료나 형벌이나 굶주림 또는 빈곤 등 현실 생활에서의 구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개인적인 橫死나 침략이나 내란 천재지변 등 국가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것도 내용으로 한다. 신앙인들은 이를 주재하는 약사여래의 동방 淨琉璃 淨士에의 往生을 기원하며, 특히 극락왕생에서 탈락한 자도 미타정토로 인도하기도 한다. 수명 연장을 위해서는 죽어갈 때 칠층등과 五色續命幡을 달고 경을 독송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초기 약사신앙에서는 치병을 위해 『관정경』의 일부 등 밀교계통 경전을 사용하여 약사신양에 밀교적 성격을 연계시켰다. 선덕왕 때 密本은 『약사경』 독송으로 왕의 병을 치료하였고 신문왕대 惠通은 주술로 왕의 병을 치료하였다. 이와 더불어 신라 약사신앙의 특징은 사상적 체계를 바탕에 두고 전개되었다는 데 있다. 중국에서 靖邁·窺基·智開 등 여러 유식승들이 『약사경』 주석서를 찬술했는데, 唐 慧觀의 『藥師經疏』(682년)가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신라에서는 憬興과 道倫이 『약사경소』를 지었는데 남아 있지는 않고, 大賢(-752-)이 『本願藥師經古迹』 2권을 지었다. 대현의 저술은 당과 신라에서 저술된 약사경 주석서 중 현재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일본 저술로는 동시대에 善珠(724∼797)의 『藥師經疏』가 있어 대비된다. 대현은 현장역의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을 대본으로 경전 순서에 따라 치밀하게 구조적 해석을 하였다. 신라에서 조성된 많은 수의 약사여래상은 약사신앙의 성행을 대변한다. 신라에서는 약사상의 儀軌가 갖추어지기 전에 寶珠를 든 약사상을 조성하여 그 특징으로 삼았다. 보주가 갖는 치병 영험은 약사상의 지물로서 인식되어 藥器로 구체화되었다. 약기를 갖춘 신라 약사상은 통일 이전과 중대 그리고 하대에 각각 10기 이상의 조성예를 보인다. 그중에는 사방불의 동방불로 조성된 경우도 있는데, 불탑의 탑신에 조각된 예도 많다. 이렇게 사상적 배경을 갖춘 약사신앙은 현세기복적 성격과 정토왕생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면서 신라 불교의 주요한 흐름을 이루었고, 이때 정착된 약사신앙의 성격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약사신앙의 전형을 이루었다.

      • KCI등재

        고려초 탄문의 불교계 활동과 보원사

        정병삼 한국사학회 2018 史學硏究 Vol.0 No.132

        고려초 광종대는 고려불교의 운영 체계가 갖추어지던 중요한 시기이다. 승과(僧科)를 시행하여 합격한 승려에게 교종과 선종으로 구분된 승계(僧階)를 주어 주지 등 교단의 중심 인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했고 후일 별사과(別賜科)의 경제적 기반을 받을 토대도 만들었다. 고승들은 왕사와 국사로 초빙하여 우대하기도 했으며, 사상적으로는 선과 교를 아우르는 경향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다. 법인(法印)국사 탄문(坦文)은 이와 같은 교단 형성기에 교종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탄문은 화엄종 출신으로 사상적으로 큰 역량을 발휘했던 균여(均如)와의 각축 관계 속에서 교단 운영의 한 중심을 이루었다. 탄문과 균여의 행적과 사상적 경향은 상호 대비되는 면모를 보인다. 둘 다 신이한 능력으로 왕권과 연결된 점은 동일하다. 탄문은 광종 탄생 기도와 해충 퇴치, 태자를 위한 천불도량 기도 등 신이한 기도 능력을 발휘했고, 혜종 즉위시의 경찬법회 주관과 정종 즉위시의 구룡산사 법회 법주 및 내도량 대장경법회를 주관하는 등의 활동으로 교종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사와 국사에 책봉되어 교학 활동보다는 기도와 강설에 관련된 족적을 주로 남겼다. 탄문이 왕사에 책봉될 때 선종의 혜거(惠居)가 국사에 책봉되었다. 이는 과거제 실시와 더불어 시행된 승과와 교단의 운영을 교종과 선종의 두 축으로 의도한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균여 또한 왕비의 치병에 관여하고 장마를 중지하는 강연과 벽력을 중지하는 기도 등 신이한 활동도 보였으나, 화엄초기 교학의 중심 전적을 강의하고 저술을 펴내 신라 화엄학을 종합 체계화하고 화엄절대주의 사상을 제시하였다. 탄문이 교종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지만 사상면에서 적극적인 교선일치 경향을 보인 흔적은 찾기 어렵다. 고려 전기의 선교일치를 모색하는 주도적인 분위기에서 탄문이 이를 적극 제창했던 전거는 명확하지 않다. 탄문의 활동 근거지는 개경의 구룡산사(九龍山寺)와 서산 보원사(普願寺)였다. 혜종과 정종대에는 개경 가까운 구룡산사에서 활동하며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으나, 탄생부터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광종대 초반에는 보원사에 머물며 광종의 안정된 왕권 운영을 위한 기도와 불사에 치중하였다. 만년에 왕사로서 개경의 귀법사(歸法寺)에서 활동했고, 입적에 즈음하여 다시 보원사에 내려왔다. 보원사는 화엄십찰의 하나로 신라말 관단(官壇)이 설치된 주요 사원으로서, 탄문은 이곳에서 화엄 강학 활동을 하며 사원 경영에도 힘을 기울였다. 광종 초반에 탄문이 삼존금불과 석탑을 조성한 곳은 보원사로 판단되며, 탄문이 광종의 원만한 국사 운영을 위해 조성했던 불상과 석탑의 존재는 불교 조형사상 큰 의미를 갖는다. The period of King Gwangjong in early Goryeo, the Buddhist operating system was established. The Buddhist monastic examinations was held for the first time, and those who passed this examinations were given the dharma ranks, and the ranks were devided to Gyojong, doctrinal school, and Seonjong, meditation school. They could get the head position of temples and important roles in Buddhist order. Even they got economic properties afrer. King Gwangjong held preferential treatments to venerable monks and supported new trends of harmonious thought which combound Gyo and Seon. Tanmun lived very actively during this period. He was a most important monk of Hwaeom school. And he competed with Gyunyeo who wrote several important notes of Hwaeom thought. Tanmun and Gyunyeo compared in religious life and academic activity. They also had eccentric powers which joined to King. Tanmun showed eminent praying power in birth of prince, get rid of harmful insects and pray for crown prince. And he took the lead in Buddhist council which celebrating accession to the throne of King Hyejong and Jeongjong, and Buddhist council of Tripitaka held at palace. Tanmun was the first monk who became the Wangsa, teacher of the King and Guksa, teacher of the state in doctrinal school. When he became the Wangsa, Hyegeo of meitation school became the Guksa. This situation means that monastic examinations and the Buddhist operating system were operated with two branches of Gyojong and Seonjong. Gyunyeo also had a relationship with royal family to treat Queen’s disease and stop the continuous rain and lighting. And he wrote several important Hwaeom notes and established organization of Hwaeom thought and presented with the idea of the Hwaeom absoluteism. Tanmun showed the most important activity of doctrinal school, but it is hard to find the new trend of harmonization of Gyo and Seon even the general trends of early Goryeo Buddism was the harmonization of them. Tanmun lived hje most life at Guryongsansa temple near Gaegyeong and Bowonsa temple in Seosan of Chungcheong province. In the periods of King Hyejong and Jeongjong, Tanmun lived at Guryongsansa and connected with royal court. But in King Gwangjong’s period, he lived at Bowonsa which is far away from royal court. In Bowonsa, Tanmun made Buddhist statue and pagoda to pray for King Gwangjong. In late life he lived at Gwibeopsa as a Wangsa, and retired to Bowonsa and died. Bowonsa was one of most important temple of Hwaeom, and in Silla period there was a state vinaya system. Tanmun lectured in this Bowonsa, and he put forth great effort to manage the temple. In early King Gwangjong’s period, Tanmun made Buddhist statue and pagoda at this Bowonsa. So the eminent evidence of making objects of Buddhist service which connected to royal court is a meaningful event.

      • KCI등재후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교장의 성별에 따른 교사의 인식과 학생의 학업성취의 차이: 중학교를 중심으로

        정병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23 여성연구 Vol.116 No.1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effect of female principal’s leadership on middle school students’ academic achievement in the COVID-19 pandemic situation, and to find out whether there is a significant difference between middle school teachers’ teaching activities and middle school students’ academic achievement depending on the principal’s gender. To achieve this purpose, the total average of Korean, math, and English grades of 10,653 male and female students in middle school who participated in the national level academic achievement evaluation from 2018 to 2020 was analyzed. The principal’s gender was 148 men and 64 women, and the independent variables related to the principal were gender and professional experience. In the hierarchical linear model, the principal-related variable was input as an independent variable in the school-level model while controlling the influence of student-level variables, school environment-related variables, and teacher-related variables. In order to find out the structural relationship of principal’s gender on teacher perception and academic achievement, the structural equation analysis showed that principal’s gender has a significant positive effect on teacher’s leadership recognition, teaching climate, and academic achievement. 본 연구의 목적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교장의 성별에 따라 중학교 교사의 학교장 리더십 인식과 중학생이 학업성취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를 규명하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2018~2020년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에 참여한 중학교 237개교의 남녀 학생 10,653명의 국어, 수학, 영어 성적 합계평균을 분석했다. 학교장의 성별은 남성 148명, 여성 64명이었고, 학교장 관련 독립변수는 성별, 전문직 경력 등이다. 위계선형모형에서는 학생수준 변수, 학교환경관련 변수, 교사관련 변수의 영향력을 통제한 상태에서 학교장 관련 변수를 학교수준모형에 독립변수로 투입한 결과 학교장 성별에 따라 중학생의 학업성취도에 유의미하게 차이가 있었다. 이어서 학교장의 성별이 교사의 인식과 학업성취도에 끼치는 구조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 학교장 성별을 외생독립변수, 교사의 학교장 리더십인식, 교직풍토, 원격수업준비도를 매개변수, 학업성취도를 내생종속변수로 하는 구조방정식모형 분석 결과 학교장의 성별은 교사의 학교장 리더십 인식, 교직풍토, 원격수업준비도, 학업성취도 등에 유의미하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 KCI등재후보

        육군3사관학교 생도들이 인식하는 훈육관의 핵심역량

        정병삼,이종형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2014 한국군사학논집 Vol.70 No.2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disciplinary officers' core competencies perceived by military cadets of Korea Army Academy at Yeong-choen. To best accomplish the research purpose, this project was conducted through four stages: First, an open-ended questionnaire asking to describe the competent disciplinary officers' behavioral characteristics was administered to 175 senior cadets. Total 382 items were collected and similar items were consolidated to produce a preliminary questionnaire with 85 items. The questionnaire was administered to 351 military cadets for exploratory factor analyses(EFA). At the third stage, a final questionnaire was developed based on the results of the EFA with 53 items and was administered to 439 military cadets for confirmatory factor analyses(CFA). The results of the CFA showed that the research model with 9 related factors more significantly fitted the data than the null model with unrelated factors. The reliability coefficients of each the factors were in the range of .83 ~ .93. Finally, a structural equation modeling(SEM) was conducted to fit the structural relationship among the disciplinary officers' core competencies and military cadets' life satisfaction. The results of the SEM showed that the developed core competency model has acceptable reliability and validity.

      • KCI등재후보

        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교교류

        정병삼 한국고대사학회 2002 韓國古代史硏究 Vol.27 No.-

        Baekje, Goguryo and Silla handed over various Buddhist culture to Japan since 6th century. The Three Countries sent monks and handed over Buddhist books, sculptures, things, temple buildings and other various cultures. These cultural things much influenced the progress of Japanese Buddhism. Japan received these from one country or two countries at same time. Horyuji temple and some temples showed this. Japan tried to make their own cultural progress. In 7th century, Japan dispatch envoys to Sui and Tang. With this, Japan received Chinese Buddhism directly instead of Korean route. But Korean Buddhism still continuously influenced Japanese Buddhism. So Japanese Buddhism had several receiving routes. After Silla unified Baekjae and Goguryo. the remarkable change was that Silla handed over both Buddhist culture and Buddhist thought. Japanese monks went to Silla to learn Buddhist thought. And they went back to Japan, they rose to leader position. So the influence of Silla Buddhism was maintained. In 8th century Japan Buddhism made many copies of Buddhist book scrolls. And most of them was came from Silla. Much parts of Wonhyo' hooks and many Silla monks' books introduced Japan. and those books made important foundation to the progress of Japanese Buddhist thought. So Silla Buddhism influenced Japan as before. In 9th century, Japan received Sill a Buddhism as before. On the other hand, the effort of making Japanese' own thought obtained remarkable res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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