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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唐의 西域經營에 관한 一考察 : 西州의 설치와 운영을 중심으로

        이태희 고려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박사

        RANK : 1562

        The Tang (唐) Dynasty is famous in Chinese history for ushering in the golden age of the Silk Road by conquering an immense swath of territory towards the west. The Tang army led by brave foreign generals known for their organizational skills conquered territory reaching even beyond the boundaries of present‑day China. As a result, people and goods from diverse regions were drawn into Tang China, further enriching the culture. From its defeat of Eastern Turks in 630 until the outbreak of a large‑scale civil war known as the An Shi Rebellion in 755, the Tang Dynasty maintained to occupy a dominant position in what was then known as the Western Regions (西域). The Tang government adopted new systems to rule this area, including the “bridled and haltered prefectures” (羈縻府州, jimi fuzhou) where the Chinese administrative system was applied to pastoral peoples. The Tang Dynasty also created a zhengzhou (正州, directly ruled prefecture) in some of the areas within the present‑day Xinjiang Uygur Autonomous Region. These prefectures were established in what is now Turfan or Turpan (吐魯番), Hami (哈密), Jimsar (吉木薩爾), Xizhou (西州), Yizhou (伊州), and Tingzhou (庭州). This paper intends to shed light on the Tang‑era management of its directly ruled prefectures in the Western Regions by examining the case of Xizhou. Starting in the third century, immigrants fleeing wars in China began to settle in the Turfan region. In the late fifth century, these Chinese immigrants displaced the local residents and founded the independent kingdom of Gaochang (高昌). In 640, Tang Dynasty forces attacked and destroyed the Gaochang Kingdom. China justified its invasion on the grounds of Gaochang’s military provocations and diplomatic discourtesies, asserting the right to intervene in the complex internal affairs of the kingdom. In essence, however, the invasion was simply a product of Emperor Taizing’s desire to extend his territory. The surrender of Turkic generals and Sogdian merchants helped justify the invasion. Tang China absorbed the independent kingdom of Gaochang as a directly ruled domain. In order to eliminate the existing ruling class and establish a new order, the king and leading officials of the Gaochang Kingdom were transported to the Tang capital and poor farmers and prisoners from Tang China were sent in return. As lingering fears in the wake of the war and mass migrations caused social disturbances in Gaochang, the Tang government sought to create social stability by granting Gaochang residents the right to gain social status as an official, administrative assistant, or regular army soldier. The frontier region of Xizhou required considerable numbers of people to manage its defense, traffic, and communications. The residents who had been displaced within the Gaochang Kingdom during the rule of Qu Clan regarded these measures as an opportunity to sustain or improve their social standing. Accordingly, a majority of residents in Xizhou participated in the military administration system imposed by Tang China. Tang China actively utilized manpower from Xizhou to govern the Western Regions. However, in the late seventh century the Tibetan Empire (吐蕃) advanced north into the Tarim Basin and the struggle intensified over the four garrison stations of Anxi, leading to considerable loss of life in Xizhou. Moreover, as the Eastern Turks enjoyed a resurgence in the early eighth century, the Tang Dynasty relocated its local strategic center to Tingzhou to the north of Xizhou. The regional military governor of Beiting (北庭節度使) was stationed at Tingzhou, and Xizhou came to be under the authority of Beiting. As Beiting with its low population became a strategic center, Xizhou lost its previous status and its capacity to superintend the Western Regions. The draining of regional population resulting from the Tang government’s management of Xizhou can be demonstrated by epitaph tablets (誌石), which are considered an indicator of the composition of local residence groups in Xizhou. An analysis of 379 epitaph tablets excavated in Turfan ranging from the Gaochang Kingdom era through the Tang Dynasty indicates that in the late seventh century powerful Chinese families that had been designated as traditional local residence groups began to decline and new groups failed to replace them. This disappearance of local residence groups meant a reduction in the resources that the Tang Dynasty government could utilize in Xizhou. Even after the An Shi Rebellion (安史之亂), a turning point during which the Tang Dynasty lost its influence over the Western Regions, Xizhou continued on for more than half a century. This was not an indication that the ruling systems of Tang China were particularly stable, but a result of Xizhou’s withholding of soldiers for the suppression of the rebellion and thus maintaining of its military strength. Moreover, Xizhou became a major strategic target for the Tibetan Empire only relatively late. When the Tibetan Empire turned toward Xizhou after conquering Hexi (河西; present‑day Gansu), Beiting was captured in 790. In 792, Xizhou also collapsed. Accordingly, China lost all of its directly ruled prefectures in the Western Regions. In the late tenth century, an envoy of the Song (宋) Dynasty visited this region occupied by the Uygur (回紇). During his visit, he observed the legacy left by Tang Dynasty, including Buddhist temples and calligraphy by Tang emperors, but could not find any Chinese residents. The Tang Dynasty had utilized manpower from Xizhou as a resource for ruling the Western Regions by incorporating it into its military administration system. It shifted a strategic point from Xizhou to Tingzhou in response to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In consequence, Tang Dynasty China was able to achieve several accomplishments in the management of the Western Regions. On the other hand, it ended up destroying the longstanding Chinese society that had resided in the area. 중국 역사에서 唐은 서쪽 방면으로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여 실크로드의 황금기를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다. 당은 용맹한 외국인 장군과 조직력 있는 군대를 바탕으로 현대 중국의 국경 너머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로 유입된 유라시아 각지의 사람과 물자는 당의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630년 동돌궐 격파 이후 755년의 ‘安史의 난’이 발발하기 전까지 당은 ‘西域’에서 수월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당은 서역을 새로운 방식으로 지배했다. 유목사회에 중국 행정제도를 적용한 羈縻府州 제도는 당대 서역경영의 대표적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여기에 더해 당은 오늘날 신장위구르자치구 일부에 正州를 설치했다. 吐魯番(Turpan), 哈密(Hami), 吉木薩爾(Jimsar)에 각각 西州, 伊州, 庭州를 설치했다. 본고는 서주를 중심으로 당의 서역 직할령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살펴보고 이를 통해 당의 서역경영의 일면을 살펴보고자 했다. 투루판 지역은 3세기부터 중국의 전란을 피해 온 중국인 이민자들이 정착했고 5세기 후반에는 토착 주민을 통합하여 독립국가인 高昌國을 건설했다. 고창국은 640년 당의 침입을 받고 멸망했다. 당은 원정의 동기로 군사적 도발, 외교적 결례, 가혹한 내정 등을 꼽았지만 실은 太宗의 강력한 영토 확장 의지에 따른 것으로 여기에는 阿史那社爾 등의 蕃將과 소그드 상인[商胡] 등의 지지가 있었다. 당은 독립국이었던 고창국을 직할령으로 개조했다. 당은 기존 지배층을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고창국의 왕과 관료를 중앙으로 불러들이는 대신 貧農과 죄수를 보냈다. 대규모 이주는 전쟁 전후의 공포와 맞물려 지역에 불안을 조성했다. 당은 주민들에게 勳官, 職役, 衛士 등의 신분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사회 안정을 꾀했다. 특히 교통의 요지이자 邊州인 서주에는 행정 관사 및 關防 시설이 촘촘하게 설치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다. 새로운 질서에 참여하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유지, 상승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되면서 서주 주민 다수가 당의 軍政體制에 복무했다. 당은 서주의 인력을 서역경영에 투입했다. 서주 출신 병사들은 사진진수에 복무했고, 전쟁 발생 시 원정에도 참여했다. 7세기 후반 吐蕃이 타림분지로 북상하면서 安西四鎭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고 이에 따라 많은 사상자가 발생면서 서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더하여 8세기 전반 東突厥이 재기하자 당은 전략 중심을 天山北麓의 庭州로 옮겼다. 庭州는 北庭都護府로 개편되고 이어 北庭節度使의 駐箚地가 되면서 서주는 북정의 지휘를 받았다. 주민이 많지 않던 북정이 중심이 되자 서주 인력은 북정의 운영에도 투입되었다. 서주는 서역 3주의 중심이었던 기존의 지위를 상실하고 역량도 분산되었다. 당의 서주 운영이 지역의 역량을 고갈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서주 재지세력의 지표라 할 수 있는 墓塼에서도 볼 수 있다. 투루판에서 발견된 고창국시대부터 당대까지 379건의 묘전을 분석한 결과, 서주에서는 7세기 후반 전통적 재지세력이었던 高昌 大姓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들을 대체할 새로운 세력의 등장도 볼 수 없었다. 재지세력의 소멸은 당이 이곳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이 서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는 분기점인 安史의 난 이후에도 서주는 반세기 더 유지되었다. 그 이유는 당의 지배체제가 우수했다기보다는 반란 진압에 많은 군대를 보내지 않아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다 비교적 늦게서야 토번의 주요 전략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河西 점령 이후 토번의 전략 목표가 되면서 790년 군정 중심인 북정이 함락되고 792년 서주마저 몰락하면서 당은 서역에 설치했던 직할령을 모두 상실했다. 10세기 후반 투루판 지역은 위구르 왕국(高昌回鶻)의 치하에 있었다. 이때 이곳을 방문했던 宋의 사신은 당 황제의 필적, 불교사원 등 당이 남긴 유산을 보았으나 중국인 주민은 만날 수 없었다. 당은 서주의 백성을 군정 체제에 대거 편입하여 서역경영의 자원으로 활용하여 서역경영에서 여러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는 지역 역량을 소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던 중국인 사회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 尤庵 宋時烈의 碑誌文 硏究

        박관규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1 국내박사

        RANK : 1547

        본 論文은 557편에 달하는 尤庵 宋時烈(1607-1689)의 碑誌에 초점을 맞추어 尤庵 碑誌의 主人公인 墓主의 性向과 主題의 主要 領域 및 時代的 位相을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尤庵 碑誌의 具體的 面貌를 파악하였다. 그 결과 17世紀 朝鮮의 知性界에서 碑誌의 制作이 전대에 비하여 활성화되게 된 文化的 實狀과 原因, 特徵의 實態를 감지할 수 있었다. 尤庵은 17世紀 朝鮮 性理學의 수준을 대변하는 巨儒이자 山林으로서 그 학문적 位相과 정치적 지위가 뚜렷하다. 그는 文章에만 치력한 文士가 아니었다. 그러나, 평생 동안 講學과 作文 活動을 왕성하게 전개하여 그의 문집 󰡔宋子大全󰡕에는 그 누구보다도 한문학의 제 문체가 풍부하고 충실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551 편에 달하는 碑誌는 그 양적 부분이 매우 압도적이다. 특히 우암의 碑誌文은 淸陰 金尙憲(1570∼1652)과 谿谷 張維(1587∼1638)의 계보를 이어받아 당대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그의 필력은 웅혼하였고 韓愈와 歐陽脩의 영향 하에 주자의 문체를 參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尤庵 硏究는 朝鮮 後期를 이해하는 關鍵, 혹은 關門이라는 전제 하에 현재까지 철학과 사학 분야에서 연구가 꾸준하게 진행되어 왔으며 2007년 ‘우암 탄신 400주년’을 전후하여 학술 발표와 토론회가 개최되는 가운데 우암에 대한 여러 방면의 학술적 관심이 고조된 바 있다. 그러나 우암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17세기 이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전제로 하여 우암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것으로 양 극단에 치우쳐 그 실상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부족한 실정이다. 우암에 대한 褒貶은 주로 그의 정치적 처신과 행적에 대한 후인들의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객관적이며 심도 있는 접근 방식과 연구 결과는 현재 미진하다. 본 논문은 기존의 우암 연구에 있어서 제한적인 시각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한 일환으로 작성되었다. 일단 우암의 저작 가운데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550여 편에 달하는 尤庵의 碑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우암 비지가 획득한 존재의 실태와 문학적 수준, 시대적 위상을 도출해 내어 아직까지 활성화되지 못한 碑誌 硏究에 대한 한 대안을 모색, 17세기 비지 찬작의 정채로운 한 현장의 단면을 우선 밝혀내었다. 尤庵의 碑誌文에 대한 구체적이며 본격적인 접근은 17세기 비지 찬작의 실태와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우암은 栗谷의 생애 및 학문과 관련된 碑誌 2편, 孝宗(1619∼1659)의 생애를 정제된 구조 안에서 펼쳐 낸 「寧陵誌文」 등 陵誌 3편을 포함하여 약 557 편의 비지를 찬작하였다. 우선 조선시대를 통 털어 가장 다수의 작품을 찬작해 낸 점에서 그 사적 위상과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尤庵 碑誌가 양적으로 풍부하게 된 배경에는 이미 20대에 沙溪 金長生(1548∼1631)의 문하에 입문한 이후 西人系 名家 및 名人들과 인적·학적·정치적 교류의 범위가 확대되고 심화된 점과 무관치 않다. 청탁과 수락의 과정에서 우암은 비지에 대한 자신의 기본 관점과 서술 과정에 있어서 撰作의 動機와 敍述의 方向, 墓主-被撰者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평가의 방향, 교정의 세부 내용 등 비지에 관한 제반 미학적, 수사적 담론을 치밀하고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557여 편의 방대한 양을 자랑하는 尤庵의 碑誌 전체에 우선 초점을 맞추어 찬작의 주요한 배경을 간파하기 위하여 우암 및 그 주변 인물들이 전개한 방대한 담론의 양상을 검토할 뿐만이 아니라 우암 비지와 직접 관련된 기사를 우암의 詩, 疏箚, 書, 祭文, 序文, 記文, 跋文 등에서 우선 두루 섭렵함으로써 당시 우암과 교류의 양상이 뚜렷한 17세기 지성들의 증언까지 함께 고찰하였다. Ⅱ장에서는 우선 17세기에 비지의 찬작이 유행하게 되는 분위기 속에서 비지의 功效에 대한 당대 인식과 우암 비지에 있어서 주요한 인물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이 검토를 통하여 우암이 비지를 다작하게 된 이유와 당시 우암의 지위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설명해 보았다. 우암이 다작을 하게 된 일차적인 배경에는 王室의 요청 및 17세기 西人系 家門의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특히 우암 및 그 주변 인물들의 비지에 대한 소통의 양상을 우암의 서간문 전체와 주변 인물들의 언급 등 방계 자료를 면밀히 조사하고 검토하여 비지의 功效와 찬작의 일반적인 관행, 우암의 기본적인 찬작 성향을 중심에 두고 찬작을 둘러싼 제반 논의들을 통하여 17세기 서인계 문인 사회에서 비지에 대한 제반 주요 논의의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Ⅲ장에서는 우암 비지에 形象化된 主題의 主要領域을 時代相의 反映, 君臣 知遇와 尊周大義의 追求, 正學 守護와 時流 批判, 政治的 危機와 晩節의 闡揚 네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밀도 있게 고찰하여 보았다. 이들 주제의 주된 영역은 尤庵의 碑誌에 있어서 가장 비중 있는 墓主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데, 우선 17세기 시대적 한계와 특수성 속에서 당대 명인들의 인상적인 삶을 양상과 지향, 시대에 대한 고민을 파악 가능케 한다. 우암은 시대의 폭압 속에서 명멸해 간 명인들의 삶을 애도하고 동조하였으며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는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가운데 시대와 인간 가치에 대하여 當爲의 準則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이들 조선 명인들의 삶을 통하여 우암이 지켜내고 현양하고자 한 삶의 가치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17세기 사대부 사회에서의 삶의 지향이 갖는 보편적 분위기와 전후의 시대와는 매우 변별적인 특성 등을 파악하는 가운데 우암 비지의 주요 작품이 획득하고 있는 미적 수준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암이 채택된 어휘의 심각성, 시대상의 면모를 통하여 비지의 찬자로서 우암의 시각과 문제의식 등이 구조적, 형식적으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 지 그 미적 수준의 정도를 간파되는 것이다. Ⅳ장에서는 17세기 비지의 찬작 현장에서 우암 비지의 위상을 정리하였다. 우암은 당시 정치와 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한 서인계 명가 뿐만 아니라 왕실과 학계로부터 비지의 찬작이 쇄도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비지의 문체 자체에 대한 인식과 그 사적 전개 양상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였다. 그리고 당시 557편에 달하는 비지를 요청 받아 생산해 내는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여타 문장가들보다 비지의 서술 방향과 표현 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담론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17세기 비지의 찬작 현장과 작품 활동 양 측면에서 우암 비지의 위상은 간과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본 장에서는 우암 비지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비지에 대한 우암의 기본 시각이 갖는 의미, 우암 비지에 관류하는 주제의 영역이 보여주고 있는 시대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17세기 비지의 정채로운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우암 비지의 성격을 도출하였다. 우암은 그의 일생 동안 문장가로 자부했던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의 인생 목표는 문장가로서의 삶이 아니라 전도된 시대의 가치를 교정하고 正學의 계보를 정립, 수호하는 학인으로서의 삶이었다. 우암 비지는 17세기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대변하는 주요한 시대적 소산으로서, 時代의 價値를 고수하면서 生死를 불고하다 명멸해 간 17세기의 지성과 명인들에 대한 尤庵의 哀悼이자 獻辭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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