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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분쟁의 신학적 요인 분석 연구 : 고전 1장13절의 수사적 질문 해석을 중심으로

        황동하 安養大學校 神學大學院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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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논자는 고린도 전서에 나타나고 있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과 파당의 주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들로 나타났으며, 더불어 바울은 이 문제들에 관하여 어떤 가르침을 제시했는지에 관해 고찰을 하였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분쟁과 파당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분쟁과 파당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신학적인 특성이 반영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쟁의 신학적인 원인으로 알게된 기독론과 교회론, 세례론이 고린도전서 전반에 걸쳐 어떻게 고린도 교회에 영향을 미쳤었는지, 그리고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침을 베풀었는지에 관하여도 고찰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론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첫째,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것은 단순하게 그들의 상황을 나열하기 위함이 아니라 분쟁과 분열에 휩싸여 있던 고린도 교회를 '하나'로 연합하려는 목적에서 기록을 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다루면서 '다 같을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였다. 사도 바울의 목적은 처음부터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만들려는데 있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분쟁과 파당을 형성하게 된 주된 원인으로 그 분파들 간의 신학적인 차이인 기독론, 교회론, 세례론(고전 1:13)을 지적하면서 이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오해를 바르게 제시함으로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분열, 파당 문제를 해결하여 교회를 하나되게 하려고 본 서신을 기록한 것이다. 둘째,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통해 자신의 기독론을 그리스도는 한 분 그리스도임을 강조한 형태로 제시한다(고전 3:11, 3:23, 8:6, 11:1, 3, 12:5, 12:27). 지금 고린도 교회는 한 분 그리스도를 여러 명의 그리스도 혹은 한 분 그리스도를 여러 갈래로 쪼개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나누지 말라고 교훈 하였던 것이다. 셋째, 고린도 전서의 교회론에서 사도 바울은 사역자들의 사역의 결과를 가지고 나누이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가 되라고 강조한다(고전 3:4, 5, 11, 4:2, 12:4-31, 14:26-33). 사역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들이며, 이들은 단지 주인 되신 하나님과 그 일에 충성할 뿐 그들의 사역의 결과로 나누이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교훈 하였다. 넷째, 고린도 전서의 세례론에서 사도 바울은 세례를 집례한 사람을 두고 분쟁하고, 파당을 형성하여 나누이는 것은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세례는 한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이 되었음을 확인시켜 교훈 하였다(고전 10:3-4). 이상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접한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분열, 파당 문제를 고린도 교인들 간의 신학적인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음을 고린도 전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고전 1:10).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으로 행하기를 바랬다(고전 16:14). 우리의 몸이 하나인 것처럼 고린도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몸에 지체가 많은 것처럼 고린도 교회 안에도 각자의 직임과 은사에 따른 많은 지체가 공존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 지체들은 서로가 유기적인 연합을 이루며, 몸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져 통일체를 이루어야 됨을 제시했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되어야 됨을 교훈해 주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분열, 파당 문제를 그 원인이 신학적인 문제에 있었음을 즉시하고, 이 신학적 주제의 바른 해석을 통해 교회를 하나되게 하려고 했었던 것임을 결론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고린도전서를 대하는 분들은 항상 이 신학적 문제를 염두에 두고, 연구하고 설교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이제 본 연구를 통해 바울 사토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가졌던 마음과 자세, 그리고 그가 제시한 교회의 하나됨에 관한 교훈들은 현금의 한국 교회에 귀한 도전과 경각심으로 나가옴을 제시해 본다. 즉,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뱌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가졌던 그 마음은 이 시대의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 사려된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섬겨 나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진심으로 힘써야 하겠다.

      • 도르트 회의에 있어서 "예정의 대상에 대한 구원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에 대한 고찰

        윤석주 安養大學校 神學大學院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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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1559)를 작성함에 있어서 제 Ⅰ권 1장에서 다루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들의 것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러면 그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였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 말하기를 '우리가 그가 모든 선한 것들의 원천이라고 확신하지 않고 즉 무엇이든지 그 자신 이외에 어떤 곳에서도 우리가 찾아서는 안된다고 확신하지 않고, 단순히 그가 모든 이들로부터 예배되고 경배되어야 할 유일한 분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그 분을 바르게 예배라고 경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한다고 하면서 만약 예정에 관한 말씀이 전파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 교리 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귀하게 간직했던 애정론에 있어서 애정의 대상과 관련하여 구원의 서정에 대한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을 다루는 일은 도르트 성직자들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더욱이 그 시대는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예정론이 심하게 손상, 혹은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본 논문의 연구를 통하여 도르트 성직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오늘의 시대에 다시 한 번 되새기고자 했던 것이다. 예정의 원인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도르트 성직자들은 전적으로 자유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뜻뿐이라는 것이다. 각 대표자들의 의견이 그러했고 합의된 신학적 입장에서도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항론파에서 예정의 원인으로 삼고자 했던 것들은 거부되었는데, 그들은 '믿을자요 그 신앙과 신앙의 순종 속에 견고히 할 자들'을 하나님께서 구원코자 했노라고 하면서 예지된 신앙을 조건으로 내세웠으며 신앙의 순종, 혹은 선행을 통한 공로를 예정의 원인으로 취하고자 했다. 하지만 도르트 성직자들에 의해서 드러난 내용은 항론파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앙, 신앙의 순종 혹은 선행을 통한 공로와 같은 것들은 선택의 원인 가운데 구원을 전달하기 위한 어떤 조건이 아니라 택자들에게 고유한 선택의 열매들과 결과들이라는 것이다. 항론파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을 선택의 공로적 원인으로 돌림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결코 포기함 없이 일관되게 주장했다. 하지만 도르트 성직자 발래우스와 17세기 개혁 신학자들, 특히 레이든 신학통론을 냈던 신학자들에 의해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의 외부에 어떤 공로적 원인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공로 자체도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의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선택의 원인라고 주장할 것 같으면 예정론을 파괴하게 만들며, 제한 속죄 교리와 같은 도르트 신조의 핵심적인 내용, 즉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을 예정의 대상에 대한 구원의 수단으로 여겨 왔다. 헷센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수단들의 의존하고 있는 특별하고 최고의 수단이라고 했으며, 고마루스는 그리스도는 구원의 수단으로서 예정 이후에 뒤따르는 선택의 후속적인 역사라고 했다. 영국신학자들은 그리스도는 택자들을 유효하게 그리고 실패함이 없이 인도하시기를 원하셨던 그런 수단으로서 택자들의 머리와 근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합의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모든 택자들의 중보자와 머리, 구원의 기초로 세움 받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에 구원의 길, 혹은 수단까지 결정하셨다. 그 어떤 다른 것이 방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도록 정하신 내용을 우리는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로마서 8장 말씀에서 우리는 그 분의 선하고 의로우신 뜻을 발견해야 될 것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이런 은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거저 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고.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4-10) 글을 바치면서, 도르트 신조의 내용이 칼빈의 5대교리로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에 대한 풍성한 자료가 많지 않다는 것, 특별히 도르트 성직자들의 글들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다는 게 안타까웠으며,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있어서 도르트 성직자들의 예정론에 관한 깊은 이해를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이 더해만 간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에 관한 이해는 오늘날 시대적으로 되새겨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그의 로마서 주석 헌사를 통해, 자신의 연구가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려는 어떤 욕구에 의해서 자극을 받거나, 증오나 야망에 의해서 그렇게 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다만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바라기는 본 논문이 그러한 정신에 조금 이나마 부합할 수 있기를 바라며, 본 논문이 미흡하지만 이후에 연구하는 자들에게 디딤돌이 되길 원한다. 연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만큼 때로는 격려 차원에서, 때로는 채찍 차원에서 아낌없는 조언이 뒤따르리라 생각한다.

      • 律法과 福音과의 關係 : 칼빈을 중심으로

        최재성 安養大學校 神學大學院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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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칼빈에 있어서 신학의 형성 배경 등을 살펴보면서 칼빈의 신학사상은 단지 한사람의 사상으로 그치지 않고, 16세기 종교 개혁의 완성이자 후대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였다. 게다가 현대의 칼빈 주의자는 물론 칼빈의 신학을 잘못이해하고 있는 타 신학에 있어서도 그의 신학이 미친 영향은 매우 크며 중요하다는 것도 언급하였다. 그리고 칼빈에 있어서의 율법과 복음과 상호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개념과 그 관계성 등을 살펴보았는데 이것은 바른 구원관과 바른 성경관, 그리고 바른 신앙관을 가지고 있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은혜의 참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논문을 쓰게 된 목적을 밝힌바와 같이, 본 논문에서 율법과 복음의 핵심이 구속주 하나님께 있음을 밝혔다.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 계시되었는데 첫째 율법아래에 조상들에게 계시되었다는 것과 둘째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그리스도와 의 관계성 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동시에 은혜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할 때, 신자로서 정체성이 형성됨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율법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만에 계시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을, 직 간접적으로 알게 함에 있어서 하나의 통일성을 갖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성취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은 계시의 명백성에는 서로 다름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율법이 거울로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거나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율법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확증하고 만족시키는 그림자로서 실체를 부여하는 기능을 갖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율법은 도덕법과 의식 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지만, 복음은 간접적으로 그를 계시함으로 명백성이 있음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새겨져 참된 영원한 의의 규범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동여매는 띠가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또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율법이 복음의 토양에 뿌리를 내릴 때 그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을 올바로 이해하므로 신약과 구약의 관계성과, 그리고 칭의와 성화와의 관계성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특히 칼빈의 성경적인 사고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의 바다로 인도하기에 충분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율법과 복음은 계시의 명백성에서 구별은 되지만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며, 구약과 신약도 구별되지만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에 있어서 불연속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나 칼빈은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칭의와 성화의 관계 역시, 역할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루터는 칭의의 입장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로 보았지만 그러나 칼빈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구속사의 입장에서 보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구약과 신약의 올바른 관계 즉, 칭 의와 성화의 올바른 관계성을 바로 이해하도록 함으로서 구속사적인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크게 공헌하리라 확신한다.

      • 舊約에 나타난 言約思想에 관한 考察

        김태식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199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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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urpose of this studies is focused on the Covenant of the Old Testaments importance. A large number of church preach the gospel in New Testament. BUt for Old Testamnet, New Testament is no more than a mere ornament. Therefore It is impossible to overestimate the importance of Coventant on Old Testament. We shall consider some Old Testament scholar (Such as Wellhausen, Mendenhall, Kline) and the scope and the method of this thesis compare to Culture, social, language, religion of Greek and Hittite's clan. The first chapter introduces history of Covenant in the Old Testament. The Second chapter, section one refiects concept of Covenant through background and studies the etymology of berit(ㅁㅁ). The Second chapter, section two deals with telationship between a treaty and a Covenant. The Second chapter, section three reflects significanse in Covenant and Theology. The Third chapter studies advance of Covenant through Noah, Abraham, Moses, David and criticize and define a conservative theology's positive about Covenant of liberalism. The Fourth chapter summarizes the results of this thesis. and it leaves the task of the study on some problems of Covenant in other that we may studies thesis of Theology in other views.

      • 정통적 입장에서 본 K. Barth 기독론의 문제점

        이승철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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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론의 역사를 보면 초기부터 대두되었던 문제들이 현재에도 계속 되어짐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특히 기독론의 내용은 더욱 그렇다고 말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 생각한바와 같이 바르트의 기독론은 진보적인 신학자나 목회자들에게 더 큰 영향력이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회자들을 교육하여 배출하는 신학대학들의 형편을 보면 더욱 이 문제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크다는 교단의 신학교나 진보적인 신학교들은 이 바르트의 신학이 정통적인 교리로 익혀지고 있음이 현실이다. 정통적으로 기독론은 인격과 사역에 관하여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구분하지 않고 계시란 측면에서 양자를 연결시키는 그 특징으로서 그 아버지 하나님을 창조자로, 아들을 하나님의 화해자로, 성령 하나님은 구속자로 각각 이해하며 각 인격은 계시 사건 이전부터 있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바르트의 기독론은 정통적인 기독론과는 달리 계시론, 신론, 인간론 등이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있어 이 교리들을 취급 할 때마다 반복됨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칼빈은 초대 교부들의 공의회, 어거스틴 등 정통적 삼위일체론에 근거하여 정통적 용어들을 그대로 존중하여 사용하였다. 이점이 아주 중요한 점이다. 용어를 분명하고 쉬운 것을 씀으로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도 중요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구별과 본질의 하나되심을 일관되게 명확히 정의 내리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출발과 근거를 성경과 성령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사변과 이성을 배제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영광 돌리게 한다. 그는 니케아 신조와 아다나시우스의 정통교리에 확고히 근거해서 삼위일체론을 정립했다. 이에 반해 바르트의 그리스도 일원론적 말씀의 신학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만을 강조하여 마치 성부 하나님이 성자 안에 갇힌 듯한 인상을 준다. 칼빈은 창조주와 구속주라는 이중적인 신인식론을 통해 그리스도 일원론적인 지나친 하나님의 초월성을 극복할 수 있었다. 칼빈은 참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생명력 넘치는 삼위일체론을 가르쳐 준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문제는 그의 독특한 그리스도 중심적 방법론과 용어 사용의 애매함에서부터 발생되었다. 즉 그가 쓰고 있는 '존재 양식' 이라는 용어이다. 그가 인격 대신에 이 용어들을 씀으로 인해 인격의 구별이 약화되고 일원론적 양태론적 '그리스도론적 집중'의 체계로 빠지고 말았다. 그가 말씀을 강조하였지만 신앙을 그리스도로 대치하여 신앙의 본질적 의미를 깨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차이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와 그리스도를 논할 때 성령께서 동시에 역사하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모범을 따라야 하겠다. 우리는 칼빈처럼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성경대로 믿고 예배해야 하겠다. 그리고 바르트의 은총의 신학으로 널리 알려진 기독론의 중심의 화해론은 너무나 정통주의에서 볼 때 혼란스럽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각각 분리해서 다루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에서 출발한다. 전통적인 두 본성론에 의하면 신적 실체와 연합이 되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서로 분리되어 이루어 진다. 이에 대해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존재와 역사를 불가분적으로 연결시켜 다룬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화해하시는 하나님과 화해된 인간이 동시에 현존하시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성론과 인성론을 하나님의 아들의 낮아지심과 사람의 아들의 높아지심으로 밀접하게 연결한다. 그래서 두 본성론은 두 상태론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면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화해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부분에 있어서 화해론의 시작과 중심과 끝이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화해론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시간공간 안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화해의 사건으로 보기 보다는 영원이라는 초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함으로서 성경적 역사적 사고라기 보다는 희랍적 초역사적 사고에 지배되고 있다. 배타적 화해론의 근거는 주권적인 언약론으로서 하나님의 은총 승리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은총일원주의 사고에서는 인간편에서의 신앙적 응답이란 그 독자적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신앙과 불신앙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총이 지배함으로써 교회의 복음선포와 신앙의 기능이 도외시된다. 바르트가 인격으로서 그렇게 강조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조에서 구속에 이르는 모든 사건에 침투되어 사고함으로써 창조의 계시, 구체적인 구속의 적용,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신학적 사고의 원리로서 지배하고 있다. 여기서 화해론은 인간의 죄 대속을 위한 사건이기보다는 영원한 언약을 실현하기 위한 테두리가 되어 버리고 극단한 기독론적 사고는 후기에 이르러 인간의 신앙의 행위까지 배제해 버리는 배타적 화해론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바르트는 형벌 개념과 충족 개념과 죄에 대한 전통적인 속죄론을 거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 대한 바르트의 해석에는 하나님의 의와 은혜의 수행이 지배적이며 전통적 개혁신학이 주장하는 형벌대리적 행위와 죄 대속을 위한 희생의 표상이 퇴색하고 있다. 이러한 바르트 사고의 이면에는 십자가의 사건을 원죄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대속행위로 보기보다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원래적으로 결정한 은총 언약의 실현으로 보는 은총일원 사상이 깔려 있다. 그가 만인 구원설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하나님이 인간 예수를 선택했고 예수 안에 대표된 모든 인간들을 선택했다고 말함으로 유기는 선택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처럼 논리를 전개하여 나가게 되어 일종의 만인 구원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르트는 예정의 모든 문제 역시 철저히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인식하려고 한다. 결국 바르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공의와 자비의 속성을 균형 있게 보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의 측면만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적으로 편향하여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을 오해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야기 시켰다. 이는 잘못된 신앙과 인간의 교만이 만들어 낸 편견으로써 정통적 신학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이러한 바탕에서 시작된 그의 예정론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 것을, 결코 확신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선택의 과정을 회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택의 교리는 모든 면에서 오직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공적과 성령의 사역을 높이 인정하게 하며, 오직 주의 자비에 의해서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인식시켜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며, 경외함으로써 찬탄하시기를 원하신다고 했다. 비록 바르트의 내용이 인간의 이성을 설득하고, 모든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예정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동조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결국 진리가 될 수 없다. 바르트의 신학이 이렇게 흐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난무하던 자유주의 신학과 이성 중심의 신학 사고를 격렬히 비판하며, 자유주의에 맞서 자신을 보수적이라 하였지만 그의 한계는 지나친 변증법적 신학을 가지고 있는 내용으로 17세기를 보고 개혁주의를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이지 않고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주관적인 신학 방법론으로 신학을 할 때 분명 문제가 대두 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바르지 못한 내용이 진리처럼 많은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는 이때에 우리가 바른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학을 가지고 신학을 하기보다는 개혁주의의 유산들을 먼저 살피고 근래에 가장 바른 역사적 개혁사상을 지켜 온 신학자들을 통해서 17세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개혁 신학자)의 바른 신학적 입장을 거쳐서 칼빈의 신학과 함께 어거스틴으로 그 다음 교부시대로 돌아가야만 성경적인 바른 개혁주의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적으로 혼잡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통신학을 바로 알고 현재의 신학사조의 기류를 잘 파악하여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참된 복음과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의 유혹과 타협에서 우리의 정통 신학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역사적 개혁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신앙을 표명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임을 알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신앙고백서를 지켜왔고 드러내려고 노력하였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들의 자녀들의 종교적 교훈을 위한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도로 활용했으며, 성경의 진리 체계를 완벽하고 견고하게 진출함으로써, 오류를 막는 방파제가 되게 함으로 교회의 교제와 협력의 기초가 되게 했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고백하는 개혁교회의 성도로서 이 진리를 더럽혀지거나 오용되어지지 않도록 수호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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