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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과체시의 글쓰기 방식에 관한 연구

        이상욱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7599

        본 논문은 조선 과체시(科體詩)의 글쓰기 방식에 관한 연구이다.과체시는 진사시(進士試)에 고시(考試)되던 시체(詩體)로, 현재 제가(諸家)의 많은 작품들이 여러 과체시집 등을 통해 전하고 있으며, 현재 전하고 있는 과체시는 대략 16세기 중반부터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공시적 관점에서, 과체시의 ‘텍스트 구성의 원리’, 즉 글쓰기 방식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과체시는 외형적으로 7언 한시(漢詩)와 흡사하다. 보통 7언 2척(隻)이 한 구(句)가 되고, 보통 18구가 하나의 작품을 이루며, 일운도저(一韻到底)하는 특징이 있다. 평측법은 본래 고시(古詩)와 같이 특별히 정해진 규칙은 없으나 배율체(排律體)나 행시체(行詩體)도 작자의 선택에 따라 쓰이기도 한다. 특히 행시체는 과체시에만 발견되는 특이한 구법(句法)으로, 내구(內句)의 첫 두 글자에 평성을 쓰고, 외구(外句)의 첫 두 글자에 측성을 쓰는데, 이 구법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특징이 있다.그리고 과체시에는 입제(入題), 회제(回題) 등의 포치 형식도 있는데, 이는 과문(科文)의 일반적 속성으로, 글의 전체적인 구성을 지시하는 규식이다. 이 포치 형식은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것처럼, 특정한 위치에, 특정한 의미적 기능을 가진 구를 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글의 짜임새를 의도한 규식이다. 예를 들어 회제(回題)는 과체시에서 제 12구에 위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실제로 회제 되는 위치는 상당히 다양하며, 대략 작품의 중후반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과체시에 있어서 포치 형식은, 율시에 있어서의 평측법처럼, 그것을 결정적으로 변별하는 자질은 아니다. 단, 과체시 글쓰기에 있어서, 많은 작자들이 이 포치 형식을 염두에 두고 창작한 것은 사실이다.과체시가 다른 한시(漢詩)와 다른 점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제목에서다. 과체시의 제목은 기본적으로 다른 구체적인 텍스트에서 출제되는 특징이 있다. 여기서 ‘다른 텍스트’는 상당히 다양하다. 가장 선호된 것은 역사(歷史)와 시문(詩文)이지만, 이 외에도 경전(經傳), 전기(傳奇), 소설(小說), 전설(傳說) 등의 다양한 텍스트에서 출제되었다. 제목에서는 이 텍스트들 중, 하나의 상황과 이 상황을 직면한 주체에 대한 정보가 주어진다.과체시는 ‘대신 말하기(代言)’를 서술 방식의 근간으로 삼는다. 대신 말하는 서술 방식은 제목에서 제시된 고사(故事)를 배경으로 제시된 인물의 입을 대신해, 텍스트를 구성하는 방식을 말하며, 과체시의 모든 작품에 이 서술 방식이 채용된다. 대신 말하는 서술 방식의 구성은 작품에 따라 다소의 편차를 보이기도 한다. 보통의 경우 처음의 제 2구와 3구, 즉 파제(破題) 부분에는 객관적 시점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이 삽입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중국 팔고문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작품에 따라 다양한 구성을 보이기도 한다. 처음부터 대신 말하기가 이루어지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대신 말하기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포치 형식인 파제(破題)와 포두(鋪頭)는 작중화자(作中話者)의 작품 내에서의 등장 방식을 구성하는 형식이다. 그리고 과체시에서는 자주 보이는 서술 상의 특이점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모두 ‘대신 말하기’와 관련이 있는 기법들이다. 집구(集句)의 사용과 접신(接神) 모티브가 그것이다.과체시는 결국 ‘의고(擬古)’적 글쓰기이며, 의고적 글쓰기는 본래 교육적인 목적에서 습작되었다. 과거 제도 자체도 물론 취사(取士)의 기능도 있지만, 국가 전체의 글쓰기 교육 방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런 점에서 과체시는 특히 조선의 글쓰기 교육의 방향과 영향을 보여줄 수 있는 글쓰기가 된다. 과체시는 그 소재의 다양성으로 인해, 사서(四書)만을 대신 말하기의 대상으로 하는 중국의 팔고문(八股文)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팔고문이 성현(聖賢)의 미덕들 자체의 체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과체시는 대신 말하는 기법 자체에 비교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이 대신 말하는 방식은 그 양식적 특징으로 인해, 개별 문자들의 의미들을 과거에 용례화된 의미로 한정시키는 기능을 지닌다. 따라서 공시적 관점에서 봤을 때, 과체시는 한문(漢文)이라는 상징체계를 현실 세계를 재현해 내는 기능에 보다, 하나의 고정된 규범으로 남기려는 의도를 내포한 글쓰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송곡 이서우의 시문학 연구

        임미정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7 국내석사

        RANK : 247599

        본 논문은 17세기 후반 남인 문단에서 종장으로 평가받았던 송곡 이서우의 삶과 시문학의 면모를 밝히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서우는 미수 허목의 추천으로 대북 출신으로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청직에 진출한 뒤, 예문관제학까지 역임하며 당대 정치적인 입지가 높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성취를 이루어 시명 또한 상당하였다. 또한 그는 성호 이익·연초재 오상렴·희암 채팽윤의 스승으로서, 후대에 남인시맥을 계승하는 종장으로 평가 되면서 남인 내의 주요 인사로 위상이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서우의 정치적 입지와 문학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그를 대상으로 한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아래의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였다.제1장 서론에서는 송곡 이서우라는 작가에 대해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살피고, 연구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서우 관련 연구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에, 그간의 연구에 대해서는 이서우가 남인시맥의 일원이었다는 것 정도만 확인하였다. 그리고 본 논문의 자료인『松坡集』의 소장처와 내용을 자세히 검토하였다.제2장에서는 이서우의 문학의 배경으로서 그의 가계를 살펴보고, 이서우에게 영향을 미쳤던 교유를 정리하였다. 이 시기에는 가계를 통해 당파가 자연스레 세습되었는데, 부친대의 ‘대북’이라는 오명이 이서우의 초기 관직 진출에 큰 제약으로 작용하였다는 것, 그러나 선대의 교유관계와 인척관계에서 파생된 인간관계는 이서우의 생에 있어 교유인물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서우의 교유 관계를 비중 있게 다루어 보았다. 이는 이서우의 위상을 확인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허목과의 사승관계를 통해 이서우가 관직에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음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이서우와 가장 친했던 이하진과의 교유를 검토해보고, 이 교유가 그의 아들인 이익까지 이어진 점에 중심을 두었다. 다음으로는 권유와의 관계를 통해 이서우와 권유가 당대 문학적인 명성을 얻고, 남인을 대표하는 문사로 인정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이서우의 제자인 채팽윤과 오상렴과의 교유를 통하여 그의 문학이 제자를 통해 전승되는 과정까지 살펴보았다.제3장에서는 이서우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는 동시에 함께 영유되고 있었던 시문학의 양상을 검토하였다. 이 부분에서는 시기를 방편적으로 나누어 수학기, 초기 관직생활, 유배 시기, 해배와 복관 후의 자취, 말년 칩거 생활로 각 시기별 양상에 주목하였다. 먼저 수학기의 면모에서는 청년기의 주요 인물들과의 교유와 시의 영향관계에 의미를 두었고, 특히 학시(學詩)의 과정에 주목하였다. 이서우는 이시기 다양한 시체를 수용하고 실험했음이 확인되며, 특히 잡체시의 창작이 눈에 띄었다. 다음으로는 초기 관직생활에서의 모습이다. 남인의 당색으로 활동을 한 이서우는 서인의 정국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주로 외직을 전전했었다. 그러다보니 이 시기 우울하고 위축된 모습이 포착되었다. 자신의 내면을 솔직히 드러낸 시를 통하여 부침이 심했던 17세기를 거쳐 간 인물의 고민을 통감할 수 있었다. 허목과의 교유로 인정받은 후, 중앙 정국에 진출하여 희작과 영물시 등으로 변화된 위상과 활동을 보여주는 모습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이서우는 경신환국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 시기의 내면을 확인하고, 이어 변방 유배지에서 지은 기속시 창작을 부각시켰다. 이후 해배 후의 칩거기에는 본인의 인생을 정리한 시를 제시하여 그 내력과 생각을 살폈다. 그리고 기사환국으로 복관한 이후에는 업무상 지은 시들이 많았는데, 이는 제외하고 관찰사로 지방에 내려 가 지은 시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주변 경물을 고시로 읊어 자유로이 시를 풀어내는 시인의 모습에 주목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다시 환국으로 인하여 얻게 된 말년의 칩거시기를 연구하였다. 이서우는 이 시기에 현실을 고발한 사회시를 새로이 창작하였는데, 변화된 생각을 새로운 양식에 대입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마지막으로는 노년기의 집안 아이들과의 시를 주고받는 모습을 포착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의미와 시의 양상, 그 내면을 알아보았다. 이어서 청계 퇴거지로 찾아오는 남인 제자들에게 준 격려의 시를 보면서, 그를 중심으로 하여 후대에 남인 시맥이 계승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제4장에서는 이서우 시에서 보이는 특징적인 면모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다작 시인이었던 이서우는 다양한 시형식과 내용을 작품에 드러내었는데, 잡체시와 영물시, 기속시에 특징이 있었다. 먼저 잡체시를 통하여 여러 시체를 골고루 창작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기 힘든 현실에서 시를 통하여 시재를 표현한 점에 의미를 두었다. 다음으로는 후대 시화에서 장처로 언급된 영물시를 제시하였다. 특히 그는 소재 선택에서 특징이 보였는데, 온전하지 못한 사물에 애정을 두고 창작한 것과 영물시에 자신의 내면을 의탁한 점에 주목해 보았다. 부침이 심한 생애에서 영물시에 골몰한 시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기속시를 들었다. 기속시는 유배 시기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나기에 그 시기를 대변하기도 하지만, 낯선 지방의 풍물을 묘사했다는 점과 이서우가 18세기 이전에 위치하는 기속시의 작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는 변방 유배 생활에서 기속시를 통하여 야만적인 모습과 이질감을 주로 드러내었다. 제5장에서는 이서우 시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남인 내에서의 그의 위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후대의 평가에서 이서우는 특히 영물시와 과시로 호평을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그는 사후 남인시맥의 일원으로 추숭되며 남인 문단의 종장으로 자리 잡았는데, 여기에는 본인의 시명도 상당했었지만, 이어진 제자의 명성에서 기인한 것도 무시할 수 없으며, 후대에 남인의 입지와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채제공의 문자정치를 통해 이서우가 당대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는 과정까지 검토해 보았다.?篇?文?究了17世?后期被??南人文?宗匠的松谷李瑞雨的生涯和?文?。李瑞雨由眉??穆推?,作?大北出身的人是50年?第一次?入要???任?文?提?的人物,??的政治地位和文名相?高。李瑞雨又是星湖李瀷、燕超???濂、希菴蔡彭胤的老?,被??是?承南人??的宗匠。作?南人派主要人物,他占有相?高的地位。 本篇?文主要?究了李瑞雨的?。?李瑞雨的正式的?究, ?篇?文是首次, 所以用作家?的方法?行?究,以???原作家生涯, 同??究各??期?的特征, ?果探明了李瑞雨在南人??中占有重要地位。 第一章??中主要提示了?究李瑞雨的必要性。由于?是首次?究,?究史的整理主要?明了李瑞雨是南人??的一?,?介?了?文主要?料《松坡集》的??。 第二章主要?究了李瑞雨的文?背景?家系,?整理出他的交游?系。父?'大北'的?名成了李瑞雨?入官?的障碍。但交游?系中,??穆的?承?系奠定了他?入政界的基?。他?李夏?的交游?系一直延?到李夏?的?子李瀷。他又通???愈的?系在??的文?上得到名?,?被??是南人的代表文士。最后考察了他?弟子蔡彭胤、??濂的交游,由此看到他的文?通?弟子而?承下去。第三章主要?究了李瑞雨的生涯和?的特征。生涯分?受?期、初期官?生活、流配期、解配和?官后的踪迹、?年的?居生活,由此?究了各??期?的面貌特征。作?南人的李瑞雨,他的生涯?着政局的?化而??了?多起伏,于是他的?具有多?多??富的形式和?容,代言他的生涯。 第四章主要?究了李瑞雨的???、?物?和?俗?及其意?。?些??是他?文?的主要特征。李瑞雨?作了各?形式的????示了他的才?。 他的?物?在后代??中被??是他的??。他?作了?多?物?,主要特点是?心那些被冷落的、不完全的事物?以此??作?材。他的?俗?的主要特点是描?了流配地的?方?俗,注重?言表?和事???。 第五章主要?究了后代?李瑞雨?的?价和他在南人?的地位。李瑞雨的?物?和科?受到后代的好?。他死后,被追崇?南人??的一?,成?南人文?的宗匠。

      • 歐陽修 산문의 한국 전래와 수용

        김춘란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247599

        이 연구는 歐陽修 문집의 한국에의 전래로부터 시작하여 간행된 규모 및 전파에서 주요 역할을 한 문선집들을 소개하고, 문인들의 반영과 인식을 규명하여 歐陽修가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쳤는가를 그 연구목적으로 삼았다.우선 歐陽修 산문의 전래와 전파과정을 고찰하였다. 歐陽修 문집은 늦어도 1214년부터 고려에 유입되기 시작하여 고려 말(1386년)에 初刊 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널리 성행되었다. 그 뒤, 成宗·宣祖·肅宗 연간에도 유입되고 成宗·中宗·明宗 연간에 간행되었다. 歐陽修 문집의 간행을 그 유입 상황과 아울러 보면, 고려 말과 成宗 초에 집중된다.歐陽修 산문이 전파되는 데에 있어서 문선집이 큰 역할을 하였다. 《詳說古文眞寶》는 고려 말부터, 《文章軌範》․《文章正宗》은 조선 전기부터 간행·전파되었는데, 도학적 문학관에서 출발하여 오직 성리학 기준으로 先秦~宋代 글을 선별하였다. 《唐宋八大家文抄》는 조선 중기부터 간행·전파되었는데 초간시부터 歐陽修의 《新唐書》가 增補되었다. 《歐陽文抄》, 《歐文》 등 書名으로 된 歐陽修 글은 《唐宋八大家文抄》와 별도로 간행된 적도 있다. 그 뒤 이루어진 개인 문선집이나 《唐宋八子百選》은 모두 道를 중시함과 동시에 文의 독자성과 작가의 개성을 인정한 茅坤의 《唐宋八大家文抄》를 전범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고찰을 통해 歐陽修 산문이 조선 중기 전에는 士林派를 중심으로 한 도학의 발전과 밀접히 관련되고, 조선 중기로부터는 고문 이론·창작의 발전과 관련될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려 말의 李齊賢·李穡 등 고문가들은 歐陽修 글의 사상과 내용을 익숙히 파악하여 李齊賢은 그 유교사상과 창작 작법을 실제에 맞게 수용하였고, 李穡은 政事에는 ‘與民同樂’ 사상을 수용하고 개인적으로는 ‘心性修養’을 수용하였다.조선 초기 金宗直은 ‘與民同樂’의 ‘樂’에 道的詩文을 추구하는 역사사명을 부여하였고, 沈義는 歐陽修를 聖人으로 구가하면서 ‘至樂’의 전제를 밝혔으며, 金麟厚는 〈醉翁亭記〉의 창작배경을 밝히고 당시 작가의 심적 상태를 조명하여 歐陽修의 도덕 경지를 보여주고 행동에 옮겨 실천하였다. 그 뒤, 사회 부조리가 점차 심해지자, 정치적 비리를 비판하고 私利와 私慾을 없애는 心性修養의 지침으로 되었다. 주체의 내재적인 덕을 수양하여 전반적 국면을 돌보는 歐陽修 사상 및 실천적 행동은 바로 도학가들이 이상화하는 경지였다.壬丙兩亂 후, 歐陽修 글의 간결성과 서정성, 특히 《歐蘇手簡》은 척독 산문의 형성·발전에 단서가 되었으며 歐陽修가 문의 독자성을 ‘立言’으로 설명한 바에 주목하여 張維는 ‘詩能達人’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글의 문예미를 추구하여 刻意潭思하는 창작태도에 동감하였다. 張維는 歐陽修 등 고문가들의 ‘文道幷重’을 ‘華實兼備’로 달리 표현하고 歐陽修의 ‘文簡意深’의 창작원칙을 ‘詞約意盡’으로 표현했다. 金昌協은 歐陽修 글의 풍격과 그 원리를 밝히고 善學의 古文精神을 계승하였으며, 碑誌文의 篇章構造와 敍事技法을 분석하여 碑誌文이 실용성으로부터 문예성으로 전변하게 하였다. 이 시기는 산문이론과 비평, 창작 범위에서 수용되었다.歐陽修 글은 文體反正 때 正祖에 의해 순정한 고문으로 평가되어 완전히 정착하는 단계에 들어서는데, 洪奭周·金邁淳 등 관각문인을 중심으로 문장작법의 기준이 되었다. 문체반정의 희생자 李鈺은 《歐文約》을 엮었고, 또 〈秋聲賦〉를 본떠 〈蟲聲賦〉를 지어 사회의 부조리와 민생의 처지를 반영하였으며 전문문인으로서의 갈등, 고뇌와 함께 글쓰기 의의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었다.본 연구가 歐陽修 산문 수용의 進展되는 흐름을 파악하게 하여 唐宋八大家의 문장수용에 대한 상황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一助하고, 최종적으로 한국 산문발전에 영향을 준 주요 요인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계미통신사 필담 연구

        장진엽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박사

        RANK : 247599

        本稿は、第11次朝鮮通信使(宝暦甲申信使。以下、通信使)の48種の筆談唱和集を対象に当時の筆談の様子を検討し、通信使の筆談交流の特徴とその意義を明らかにすることを目的とする。この研究は東アジア交流研究の新しい方法論および視点を確保するための試しみでもある。 第一章では、問題を提起し研究史を検討する。この時期の筆談唱和集の最新目録を提示し、研究の対象範囲を確定した。第二章では、通信使の筆談テキストの性格について概括し、通信使交流の主体として筆談唱和に参加した日朝文士の特徴を確認した。さらに南玉、成大中、元重擧の三人の筆談態度がこの時期の交流の特徴を形成したことを明らかにした。 第三章では、筆談の話題を礼樂と文物制度、歴史と地理、言語と文学、医学と技術の四つのカテゴリーに分類し、各カテゴリーに属する対話の内容から見られる交流の様子を叙述した。第四章では、学術交流の経過とその意義について考察した。まず学術交流の過程に関しては、旅程を三つの段階に分け各段階別に特徴を見出した。次に、学術討論の具体的な内容を‘程朱の経書註解と程朱學の批判’、‘先王の道と博学の追求’、‘日本の学術史と見解の多様性’という三つの争点を中心に検討した。以上の分析をもとにこの時期の学術交流の意義を導き出した。第一に、通信使の三人の文士が日本の学術に対して開放的な態度で探求し、またその意義についても客観的に評価したという点、第二に、日朝文士が活発な学術討論をきっかけに、東アジア共通の知識の場という感覚を得ていたという点である。 第五章では、以上の分析をもとに通信使の筆談交流の特徴と意義を考察した。その意義は、第一に、通信使の筆談交流は様々な実証的・実用的な情報を交換することで、朝鮮と日本の文士らが東アジア世界に対する知識や認識に新段階を切り開いた過程であった。なかでもこの時期の日本の儒者は徂徠学の影響から文明の中心という意味での中華の制度を詳細に検討していたため、朝鮮の礼楽文物を探し求める傾向が強かった。第二に、通信使の筆談交流は彼らの疎通のコードであった中華表象をめぐる日朝文士の競い合いの過程であった。朝鮮側は礼の精神を体得した小中華を自ら認めることで、また日本側は自国の古代文物および学術文学の発展を自負することで、それぞれ中華表象を占有しようとした。第三に、この時期の日本の文士は以前に比べるとかなりの漢文の実力を有しており、その数も大きく増えていた。そのため筆談唱和に対する需要が高まり、朝鮮側としては様々な階層の筆談交流に参加することとなり、さらに筆談の内容もまた世俗の風潮を帯びるようになった。第四に、筆談交流を通してアジア文明の構造を再編した。日本人に文雅を見出すことで日本と東アジア文明の中心としての中華という表象を共有できるということを、朝鮮の文士は確認した。一方で、日本側は武ではなく文で、両国儒者が共有している中華という価値を基準に、自身の優越性を認めさせようとした。このような日本側の試しみは東アジア文明内での日本の儒教文化の座標を設定する過程だと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 通信使の筆談交流に対する以上の分析は、異なる地域/文化圏の人物らが共同の文化を共有するという認識がいかに形成されたかを見せてくれる。すなわち通信使の交流は“日朝の儒者間の交流という‘実行’を通して、東アジアの文化共同体、そして東アジアの儒教という不変的な文明という観念上のカテゴリーを‘創出’そして‘拡大’していく過程”だったと言える。前近代の東アジア世界に存在した多様な制度の実践および思想の変遷への総合的な考察を通して、このような論議はその妥当性が証明される。通信使交流に対する本研究もまたこのような作業の一環である。 This study takes forty-eight anthologies of written conversations and poetry exchanges (筆談唱和集) of the 1763 Chosŏn Mission to Japan (通信使) and examines the progression of these conversations in that period to observe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these written conversations. This is also an attempt to establish a new research methodology and perspective for studying East Asian cultural exchange. Chapter One of the dissertation contains a literature review and discusses the problems of research on the subject, while also presenting a new catalogue of the period’s written conversation anthologies and determining the range of the study. Chapter Two summarizes the nature of written conversation texts of Chosŏn missions to Japan and identifies the characteristics of the Korean and Japanese literati who participated in these conversations as the main actors of exchange in the 1763 mission. Moreover, it addresses how the attitudes of Nam Ok (南玉), Sŏng Taechung (成大中), and Wŏn Chungkŏ (元重擧) established the main characteristics of this period’s written conversation exchanges. Chapter Three categorizes the topics of the conversations into (1) propriety, music, institutions and systems (2) history and geography (3) language and literature and (4) Chinese traditional medicine, while describing the nature of the exchanges in these conversations. Chapter Four examines the progress of scholarly exchange and its significance. First, it divides the process of scholarly exchange into three stages based on the mission’s route and describes the characteristics of each stage. Next it examines primarily three points of scholarly debate: (1) The Cheng-Zhu annotations of the classics and criticism of the Cheng-Zhu school (2) the way (道) of the sage-kings and the Japanese literati's pursuit of erudite learning and (3) the history of Japanese scholarship and the diversity of opinions in it. The chapter extracts the significance of this period’s scholarly exchange based on analyzing the above. The first characteristic is that the three literati mentioned above explored Japanese scholarship with an open approach and objectively assessed its significance, and the second is that the literati of both countries created a sense of shared space for knowledge in East Asia through lively scholarly debate. Finally, Chapter Five addresses the importance and characteristics of the exchange of written conversations in the 1763 mission to Japan based on the above analyses, which is as follows: first, the written conversations of the mission were a process where Korean and Japanese literati were expanding their horizon of perception and knowledge of the East Asian world through exchanging various positive/practical information. In this process, there was a strong tendency to study the propriety, music, institutions, and systems of Chosŏn with the intention of reviewing the systems of China, the center of Confucian civilization (中華), thanks to the influence of the Sorai school among Japanese Confucians at the time. Second, each country sought to claim themselves as the sole representative of Confucian civilization, with Chosŏn literati claiming their civilization as the “little China” (小中華) that acquired the spirit of propriety and Japanese literati flaunting their cherished ancient institutions and development of their literature and scholarship. Third, there were many more Japanese literati with greater Classical Chinese proficiency than previously, and their numbers significantly increased during this period; as this raised the demand for written conversations and poetry exchanges, Chosŏn men of various classes came to participate in these exchanges, which was reflected in the tendency of vulgarization in their content. Fourth, the literati of both countries were reorganizing the structure of East Asian civilization through the exchange of written conversations. The three Korean literati verified that Chosŏn could share the status of representing Confucian civilization with Japan through the discovery of their “literary elegance” (文雅). Moreover, the Japanese sought that their superiority be recognized on the merits of their literature rather than their martial strength by linking them to the cultural standards of Confucian civilization shared by both countries. This attempt can be seen as a process where Japan sought to install itself as a site of Confucian culture within East Asian civilization. The above analysis of the exchange of written conversations in the 1763 Chosŏn Mission to Japan demonstrates how people from different regions and cultures created a perception of sharing a common culture/civilization. In other words, the exchange in the 1763 Chosŏn Mission to Japan can be seen as an East Asian cultural community created through the “practice” of exchange between Chosŏn and Japanese literati or the “production” or “expansion” of the conceptual category of an East Asian universal (Confucian) civilization. The validity of this discussion can be amply demonstrated through a comprehensive exploration of the various systemic practices and ideological changes that existed in the world of premodern East Asia, and this study on the exchange of Chosŏn missions to Japan is one such example. 본고는 계미통신사(癸未通信使) 필담창화집(筆談唱和集) 48종에 수록된 필담(筆談)을 대상으로 이 시기 통신사 교류의 전개 양상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계미통신사 필담 교류의 특징과 의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1장에서는 문제 제기와 연구사 검토에 이어 계미통신사 필담창화집의 최신 목록을 제시하고 연구대상의 범위를 확정하였다. 다음으로 제2장에서 통신사 필담 텍스트의 성격에 대해 개괄하고 계미통신사 교류의 주체로서 필담창화에 참가한 양국 문사들의 특징을 확인하였다. ‘통신사 필담창화집’은 12차에 걸친 통신사 필담창화의 결과물을 엮은 자료로 정의할 수 있다. 필담의 화제는 양국 문사들의 관심사 가운데 정치·외교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선택되었다. 특히 일본 문사들은 이전 시기의 필담창화집에서 대화의 주제를 가져오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일본 내에서 필담창화집의 유통이 각 시기 통신사 교류에 연속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해왔던 사실을 보여준다. 매 시기마다 유사한 화제들이 등장하였으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은 시기별로 상이했으며, 특정한 쟁점이나 화제가 새롭게 출현하기도 하였다. 필담에 참여한 일본 문사들은 자신의 필담창화 원고를 직접 편집하여 성책, 출판하였다. 이들은 보통 필담집의 저자로 지칭되지만 사실상 그 역할은 편자에 가깝다. 이들 저/편자에 의한 필담의 편집 과정을 고려할 때 필담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다. 한편 필담 교류에 참가한 모든 인물들은 ‘필담 교류의 주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일본 측 참가자들은 번이나 막부의 유관들, 일반 문사들, 의원들로 분류할 수 있으며 조선 측 참가자들은 문인 계층, 양의(良醫)와 의원, 기타 필담 가능자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 측 인물 가운데 제술관 남옥과 정사 서기 성대중, 부사 서기 원중거의 필담이 가장 많으며, 따라서 이 시기 필담 교류의 특징은 대체로 이들 세 문사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제3장에서는 이 시기의 필담을 예악과 문물제도에 관한 논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논의, 언어와 문학에 관한 논의, 의학과 의술에 관한 논의의 네 개 범주로 분류하고 각 범주에 속하는 대화들에서 발견되는 교류의 양상을 서술하였다. 각 범주별 대화의 전개 양상은 다음과 같다. 1)일본 문사들은 의관복식, 그리고 국가의 전례나 관혼상제, 과거제와 같이 조선의 예악문물에 관해 열의를 갖고 탐구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예악문물이 중국의 옛 제도를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 중국의 서적에서 본 유교식 제도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알고자 하였다. 한편 조선의 문사들은 ‘용하변이(用夏變夷)’의 관점에서 일본의 유자들이 풍속 개혁의 의지를 가질 것을 기대했으나, 일본인들은 그러한 의도에 공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일본에 남아 있는 고대문물을 과시하며 자신들이 중화의 정수를 간직하고 있음을 보이려 하였다. 2)양국인은 조선과 일본 및 중국의 역사·지리에 관한 실증적 정보를 교환하였다. 조선의 문사들은 강남과 나가사키에 관한 흥미를 표출하였으며, 일본인들은 북경 관련 정보 및 조·청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또, 드물긴 하지만 동아시아 세계 바깥의 해외 정보에 대한 문답도 발견된다. 한편 일본 문사들이 조선인들과의 필담을 통해 왕인이나 진구황후에 관련된 사적 등 자국 고대사(古代史)의 증거를 확보하고자 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3)일본 문사들은 조선의 언문과 그것의 쓰임새에 관심을 보였다. 또, 조선인의 한문 독서법을 일본의 훈독(訓讀)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의 문사들은 일본의 훈독을 비판하며 한문의 직독을 제창한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공적에 주목하였다. 문학 관련 논의에서는 두 가지 양상이 발견된다. 첫째는 일본 문사들이 자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필담창화집의 서발에서 양국의 작시 경향을 비교하며 일본의 시문이 더 우수함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둘째는 이반룡·왕세정 문학의 가치를 놓고 양국 문사들이 대립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4)의술 및 의학 교류 분야에서는 본초 및 처방법에 대한 실증적 정보의 교환, 의학 경향의 차이로 인한 대립이라는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 당시 일본의 의원들은 대체로 고방파(古方派), 혹은 절충파·고증파의 경향을 보이고 있었기에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를 중심으로 임상에 치중하는 조선 의원들과는 그 성격이 달랐다. 이 때문에 양의 이좌국은 일본의 의원들이 문사에 치중하고 박학을 일삼아 의원의 본령에 소홀하다며 비판하고 있다. 제4장에서는 계미통신사 필담 교류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주제인 학술 관련 대화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계미통신사 학술 교류는 기존 연구에서도 여러 차례 다루어졌으나 그 의의에 관해서는 설득력 있는 답변이 제출되지 않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이 시기 학술 관련 필담 전체를 대상으로 그 구체적인 전개 양상을 검토하고 이 시기 교류가 갖는 의의에 대해 재고하고자 하였다. 1절에서 학술 교류의 과정을 여정에 따라 세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별 전개 양상을 서술하는 한편, 각 단계에 속하는 학술 관련 필담을 각각 표로 제시하였다. 2절에서는 학술 토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세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즉, 정주(程朱)의 경서 주해와 정주학 비판, 선왕(先王)의 도와 박학(博學)의 추구, 일본의 학술사와 견해의 다양성이다. 이상의 두 단계의 분석을 통해 이 시기 학술 교류의 의의를 1)일본 학술에 대한 개방적 자세와 객관적인 평가, 2)동아시아 공동의 지식 장(場)의 형성이라는 두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제5장에서는 이상의 분석을 바탕으로 계미통신사 필담 교류의 특징과 의의를 밝혔다. 그 의의는 다음과 같다. 1)계미통신사 필담 교류는 다양한 실증적·실용적 정보의 교환을 통해 조선과 일본의 문사들이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지식 및 인식의 지평을 확대해 가는 과정이었다. 그중에서도 이 시기 일본의 유자들은 문명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띤 ‘중화(中華)’의 제도를 상고한다는 취지에서 조선의 예악문물을 탐구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2)양국 문인들의 소통의 코드는 ‘중화’라는 표상이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중화 문물의 담지자’로 인식되었으며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로서 중화문물을 체현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또한 일본인에게 ‘예(禮)’를 가르치는 역할을 자임하며 일상 속에서의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조선의 문물을 지식과 고증의 차원에서 관찰하고 있다. 또, 일본이 중국 고대의 의관문물과 음악, 고경(古經)을 간직하고 있으며 학술과 문학에서도 동아시아의 가장 선진적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이는 곧 양국 문인들이 각자 중화 표상을 전유하기 위해 경합을 벌이는 모습이다. 3)이 시기 일본 문인들은 이전에 비해 월등히 높은 한문 실력을 갖고 있었으며 그 수도 크게 늘어났다. 필담창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조선 측에서는 다양한 계층이 필담 교류에 참여하게 되었고, 필담의 내용 역시 속화(俗化)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는 문인들 간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본인들의 한문 구사력이 높아지면서 구어를 주고받듯이 자연스레 필담을 나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4)조선의 세 문사는 일본인들의 ‘문아(文雅)’를 발견함으로써 일본에도 교유할 만한 선비들이 존재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즉,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으로서의 중화라는 표상을 일본의 지식인들과 공유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한편 일본인들은 필담 과정에서 자국 학술과 문단의 발전에 관해 조선인들의 인정을 얻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또, 필담창화집 서발에서 자신들이 조선인과 문(文)으로써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음을 주장하였다. 또, 고대문물의 보존과 학술의 발전을 내세워 자신들이야말로 중화의 정수를 체현하였음을 입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동아시아 문명 내에 자국 유교문화의 좌표를 설정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계미통신사 교류의 결과 양측 모두 동아시아 문명 구도의 재편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계미통신사 필담 교류에 대한 이상의 분석은 서로 다른 지역/문화권의 인물들이 공동의 문화/문명을 공유한다는 인식을 어떻게 형성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즉 계미통신사 교류는 “조·일 양국의 유자 간 교류라는 ‘실행’을 통하여 동아시아 문화공동체 혹은 동아시아의 보편(유교)문명이라는 관념상의 범주를 ‘창출’, 혹은 ‘확대’해 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물론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에 존재했던 다양한 제도적 실천들 및 사상의 변천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서 그 타당성이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통신사 교류에 대한 필자의 연구 역시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 1896년 러시아 사절단의 기록 연구

        이효정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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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대관식에 파견된 사절단에 대한 연구이다. 조선 최초로 유럽에 파견된 이 사절단의 구성원은 민영환, 김득련, 윤치호, 김도일, 손희영, 슈테인 등이며, 이들은 배를 타고 중국, 일본, 북미 대륙, 유럽 대륙을 거치는 세계 일주를 통해 러시아에 들어갔다. 세계 여러 지역을 견문했던 이들의 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인의 세계 체험과 인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사절단의 기록으로는 민영환의『해천추범(海天秋帆)』과 김득련의『환구음초(環球?艸)』와 3통의 편지 그리고 윤치호의 일기가 있다. 이 가운데『해천추범』은 민영환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그의 유고집인『민충정공유고(閔忠正公遺稿)』에 수록되어 있지만, 책의 실제 저자는 2등 참서관 김득련이라고 추정된다. 즉,『해천추범』은 김득련의 사행산문인『환구일록(環球日錄)』을 윤색하여 만든 책이다. 조선시대 사행록은 공적인 성격도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사행시의 기록을 갖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대표되는 견문록을 공유하곤 했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러시아 사절 때 민영환은 러시아와의 교섭 문제로 글을 지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김득련의 산문을 그대로 빌려 자신의 문집에 넣었던 것이고, 김득련도 이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김득련은 러시아 사절단 시절에『환구일록』과 기행 한시집인『환구음초』를 남겼다. 이와 더불어 그가 사절단 여정 중 사촌에게 보냈다고 추정되는 편지가 The Korean Repository에 실려 있지만, 윤치호가 패러디(parody)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윤치호는 60여 년간 일기를 남겼는데 본고에서는 그 중 영문으로 된 1896년 부분을 참조하였다. 사절단의 임무 수행 과정 중, 봉건 질서에 충실했던 민영환, 김득련과 근대적 분위기 속에 사회 개혁을 주장하던 윤치호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개화당에 가까웠던 윤치호가 러시아와의 교섭 과정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절의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갈 막바지에 이들은 극적으로 화해하고, 민영환도 개화적인 성향의 관료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자결을 선택하고, 윤치호는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지만 조선을 자체적으로 근대화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3·1운동 무렵부터 총독부에 협력하는 친일적 행적을 남겼다. 위와 같은 배경지식을 갖고 사절단 기록에 나타난 서구 체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사절단들은 사절의 여정에서 서구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몽골 등 동양지역에서도 단지 서구식 문물에만 집중하여 관찰하였다. 이들이 본 서구의 풍물들은 전등, 서구의 공연, 박람회와 박물관, 동물원과 식물원 등이 있다. 이들은 이러한 서구의 풍물들을 신기하고 기이하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즉물적인 감상 태도는 서구 문물을 비판적으로 볼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서구의 여인들도 관찰대상으로써 서술하였다. 서구의 남성들을 제외시킨 채, 여성들만을 견문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남성 중심의 서구 근대문화가 조선 사절단과 대등한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관찰될 수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들은 또한 서구의 질서와 제도에도 관심을 보여, 그들의 시간의 표준화 체계와 규율 기관 등도 기록하였다. 사절단은 학교, 감옥 등을 비롯한 서구의 질서 유지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며, 구국을 위해서는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여겼다.이러한 체험 기록을 바탕으로 사절단의 기록에 나타난 세계 인식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세계를 ‘서구식 문명’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인식하였다. 중국과 일본을 경유할 때에도 그 나라의 풍습보다는 서구화 정도에 집중하여 견문하였고, 유럽을 지나갈 때에도 각 지역의 특수성 보다는 ‘서구’라는 커다란 단위로 이해했다. 윤치호는 서구 중에서도 특히 미국과 영국을 최고의 모델로 삼았으며, 그와 비교하여 러시아를 후진 국가로 인식하기도 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근대화를 향해 진보하는 러시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도 서구문명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른 사절단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사절단은 약소 지역이나 이미 식민지가 된 국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서술하였다. 문명개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그 후진성을 비난하고, 폭력적인 제국들의 침략 행위에 대해서는 ‘개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하는 등 제국주의적 시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일본과 러시아 등 제국들에 의해 언제 국권이 침탈당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했던 개화기 조선 지식인들에게 국가 보존은 중대한 과제였다. 이 시기 문명화된 서구의 모습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생각되었고, 이러한 맹목적인 추종은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의 논리를 갖고 있던 ‘문명개화’의 계몽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하였다.本論文は俄館播遷時期の1896年にロシアのニコライ二世戴冠式へ派遣された使節?に?する?究である。朝鮮で初めてヨ?ロッパに派遣されたこの使節?の構成員は閔泳煥、金得?、尹致昊、金道一、孫熙榮、シュタイン等で、彼らは船で中?、日本、北米大陸、ヨ?ロッパを?る世界一週をし、ロシアに着いた。世界のいろいろな地域を見聞した彼らの記?を通じ、?時朝鮮人の世界??と認識を見てみようとした。 使節?の記?としては閔泳煥の『海天秋帆』と金得?の『環球?艸』と3通の手紙、そして尹致昊の日記が存在している。この中、『海天秋帆』は閔泳煥の名前で?り、彼の遺稿集『閔忠正公遺稿』に??されているが、この本の?著者は二等三書官金得?だと推定される。つまり、『海天秋帆』は金得?の使行散文『環球日錄』を潤色した本である。朝鮮時代使行?は公的な性格もあり、誰かが使行時の記?を持っていなかった場合は代表的な見聞?を共有し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統の中でロシア使節の時、閔泳煥はロシアとの交?問題で文を作る余裕がなかったので、金得?の散文をそのまま借り、自分の文集に入れた。金得?も事前に同意したとみられる。 金得?は使節?の時『環球日錄』と紀行漢詩集『環球?艸』を?した。また、彼が使節?の旅程中、いとこに送ったと推定される手紙がThe Korean Repositoryに??されているが、尹致昊がパロディ?(parody)した可能性もある。また尹致昊は60余年間の日記を?したが、本稿ではその中、英文で書かれた1896年の部分を?考にした。 使節?の任務遂行の過程中、封建秩序に充?した閔泳煥、金得?と近代的雰??の中で社?改革を主張した尹致昊の間に葛藤が起った。開化?に近かった尹致昊がロシアとの交?過程から除かれたのである。しかし、使節の任務を終え、朝鮮に?ることになった時に、彼らは劇的に仲直りをし、閔泳煥も??後開化性向の官僚に?わるようになる。しかし、乙巳條約が締結されると、閔泳煥が自決を選?した反面、尹致昊は最初には「愛?啓蒙運動」に?加したが、朝鮮の自主的近代化に?疑を抱き、3·1運動の頃から?督府に協力する親日的行績を見せた。 このような背景知識を持ち、使節?の記?に現われた西???に?して見てみた。この使節?は使節の旅程で西?のみならず、中?と日本、モンゴルなどの非西?地域も通ったにもかかわらず、ただ西?の文物だけに集中し、?察した。彼らが見た西?の風物は電燈、西?の公演、博??と博物館、動物園と植物園などである。彼らはこのような西?の風物を不思議で奇異だと言い、このような卽物的な感想態度は西?文物を批判的に判?できないようにした。そして、西?の女人も?察?象として敍述した。西?の男性を除外させたまま、女性だけを見聞の?象としたのは男性中心の西?近代文化が、朝鮮使節?と?等な立場で客?的に?察さ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反?でもあった。使節?はまた、西?の秩序と制度にも?心を見せ、西?の時間標準化?系と規律機?なども記?した。彼らは?校、監獄などを含めた西?の秩序維持制度に?して批判的な見解を全然現わさなかったし、救?のためには必ず?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思った。 このような??記?をもとに使節?の記?に現われた世界認識を見た。彼らは世界を「西?式文明」という一つの基準で認識した。中?と日本を?由する時にも、その?の風習よりは西?化の基準に集中し、見聞した。また、ヨ?ロッパを通り過ぎる時も、各地域の特殊性よりは「西?」という大きな?位で理解した。尹致昊は西?の中でも特にアメリカとイギリスを最高のモデルにした。それに比べ、ロシアを後進?家だと認識したが、根本的に近代化に向け、進?するロシアを肯定的に評?した。彼も西?文明を最高の?値だと判?したという点で、他の使節?員と一?であった。 使節?は弱小地域や、もう植民地になった?に?しては否定的に敍述した。文明開化が成立してない所ではその後進性を責める反面、暴力的な帝?の侵略行?に?しては「開化」のための政策だと言うなど、帝?主義的視?をそのまま見せた。日本、ロシアなどの帝?により、いつ??が侵奪されるのかわからない?況であった開化期朝鮮の知識人たちに?家保存は重大な課題であった。この時期、文明化された西?の姿はそれに?する解決策と考えられ、このような盲目的な追?は本質的に帝?主義の論理である「文明開化」の啓蒙論理を無批判的に?容する結果をもたらしたと思う。

      • 洪世泰의 使行文學 연구

        장진엽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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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의 목적은 洪世泰(1653-1725) 使行文學의 특징과 의의를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작가의 신분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여 홍세태 사행문학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하였다. 이를 통해 통신사 문학의 흐름 속에서 그의 사행문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홍세태는 1682년 임술사행에 부사 이언강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통신사 사행문학에 대한 종래의 연구에서는 홍세태를 역관 시인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가 역과에 합격한 중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세태는 이 시기에 역관으로 수행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역관으로 활동한 적이 없다. 그는 일본에서 제술관 및 서기와 함께 學士로 인식되었으며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여겼다. 따라서 그의 사행문학은 역관 문학이 아니라 제술관 및 서기 문학으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하다. 임술사행은 안정된 국제관계를 바탕으로 朝日 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광범위한 儒者 층이 형성되어 조선 문사들과의 필담창화에 대한 요구가 이전 시기에 비해 크게 증가하였다. 이때 홍세태는 특별한 직임을 띠지 않고 사행에 참가했지만 제술관과 함께 시문창화를 전담하는 후대의 서기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비록 중인이었지만 후대의 서얼들이 주로 맡았던 서기라는 직책을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홍세태는 아무런 직임을 띠지 않고 사행에 참가한 것이므로 사행을 개인적 차원의 遠遊로 바라보는 태도가 있었다. 이는 홍세태 사행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한 특성이다. 작품의 구체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풍광 묘사를 통해 기대와 포부를 표출하고 있다. 둘째, 일본의 자연과 풍속을 묘사할 때 평가를 배제하고 대상이 주는 흥취에 주목하고 있다. 셋째, 자유롭고 개방적인 태도로 일본 문사들과 교유함으로써 양국 문사 간 교유의 이상적인 상을 형성하고 있다. 넷째, 그 시기에 이루어진 일본 한문학의 발전상을 포착하고 일본인의 한문학적 소양에 대해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임술사행은 양국 간 필담창화가 증대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하는 제술관 및 서기 문학의 성격이 확립된 시기이다. 홍세태의 사행문학은 임술사행 시기 통신사 문학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제술관 및 서기 문학의 초기 형태를 제시한다는 의의가 있다.

      • <주생전>과 <운영전>의 비극적 성격과 소설사적 의의

        이은봉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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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본 한문소설집선현유음과 화몽집에 수록된 17세기 비극적 애정소설 <주생전>과 <운영전>의 비극성에 기여하는 서사요소인 구성과 인물의 갈등양상, 공간의 기능과 삽입시문의 기능에 대해 살펴보았다.<주생전>과 <운영전>은 비극적 애정소설로 작품의 미학적 구조와 소재의 현실성을 획득하여 17세기 소설로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 작품이다.두 편의 작품은 인간본연의 애정추구를 여러 차원에서 드러내지만 서사의 주체들은 끝내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좌절되는 것으로 서사를 마감한다. 두 작품을 통해 17세기 애정에 대한 풍속과 사회상의 변모를 읽을 수 있다.작품의 구성면을 보면 <주생전>은 가탁의 형식인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로 보이는 서술자를 등장시키면서 그간의 주생의 이야기를 실화인 것처럼 유도하고 있는 구조라면 <운영전>은 도입부와 결말부 모두 액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몽유록 형식의 액자구성이다.<주생전>이 삼각 애정구도를 중심으로 중심인물인 주생의 패퇴한 삶과 인식이 비극성을 창출하는 작품이라면 <운영전>은 삼각애정구도를 바탕으로 보다 다양한 주변인물이 등장하는 구조가 복합적인 서사양식으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공간의 비극성 측면을 보면 두 작품에 등장하는 주 공간이 주는 이미지는 등장인물의 추구하는 욕구에 맞추어져 작용한다. 또한 두 작품의 결말에 등장하는 공간의 공통된 이미지도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던 서두의 공간과 대비되어 이루지 못한 주인공의 좌절된 욕망을 공통적으로 느끼게 하는 곳으로 표현된다.또한 두 작품에는 상당량의 시가 삽입되어 서사 흐름에 변화를 주며 표현의 미학에 기여한다.<운영전>에서는 시와 편지가 <주생전>에서는 시와 사가 많이 삽입되면서 등장인물의 내면심리를 표출할 뿐만 아니라 서사구조의 요약적 처리 및 긴장과 위기의 이완과 당김의 기능을 동시에 맡으면서 비극적 애정소설의 표현 미학에 기여한다.소설의 기교나 구성면이나 등장인물의 갈등양상, 주변인물들의 성격부여와 형상화가 <주생전>보다 <운영전>이 소설적 역량에 의해서 쓰였다고 보인다. <주생전>이 뛰어난 당대 시인이 권필의 시관과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라면 <운영전>은 전문적인 소설가로서의 자질을 지닌 작가에 의해서 치밀하게 구조화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주생전>은 17세기 애정전기소설로서 발전된 미학과 형태를 보이는 작품이며 <운영전>은 <주생전>에서 더 나아가 서사갈래의 구조화된 모습을 17세기에 성취한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완성된 소설구조와 긴장미를 나타내며 다양하게 형성된 부수적 인물의 긴장과 갈등이 작품의 서사구조를 보다 탄탄하게 이끄는 작품으로 후대의 소설발달에 토대를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두 편의 작품은 17세기 초반을 대표하며 <금오신화> - <주생전> - <운영전> - <구운몽> 등으로 이어지는 소설계통의 한 흐름을 형성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This thesis reviews and analyzes literary tools, such as narrative structure, character emotion and conflict, the use and function of space, and finally, the role of interpolated poems, that are respectively found in both, the romance novel, <Ju Saeng Jeon> and the epic tragedy, <Wun Yeung Jeon> which are part of the [Seon Hyeon Yu Eum] and [Hwa Mong Jip] anthologies.Today, <Ju Saeng Jeon> and <Wun Yeung Jeon> are highly acclaimed novels of the 17th century for their themes and subject matter that emulate reality and aesthetic value that stems from structure.Both works depict many layers and dimensions of the human pursuit for love but ultimately conclude their narratives with the protagonists failing to acquire their love interest. Through this common pattern and formula, one can easily grasp a sense of cultural attitude and the society''''''''''''''''s atmosphere towards love in 17th century Korea. Structure wise, <Ju Saeng Jun> incorporates a 'ga-tak' style, where at the final act the narrator himself makes an appearance in the text, therefore allowing the reader to feel the effect and a sense of the story being true to life, while <Wun Yeong Jun> follows a frame structure in its beginning and end as found in the 'mong you-rok' style.While <Ju Saeng Jeon> uses a simplistic love-triangle structure, mainly focusing on the themes of romantic tragedy and corruption for only its few main characters, <Wun Yeung Jeon> has a more complex and diverse setting as it employs a grand cast of characters all heavily explored on their many layers of human emotion, thus making it an epic.A constant subject matter that is explored in both works is character conflicts that result from space, distance and location. This concept of space is a reoccurring literary tool found in both works as it fluidly shifts itself to initiate and set up conflicts for characters to overcome in order to pursue their needs. In addition, images of space shown in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story are of a contrasting and opposite nature, thus, contributing effectively to convey tragedy.Another common characteristic found in both works is its substantial and considerable amount of poems inserted in various parts of the story, which helps heighten drama and elevate narrative quality and aesthetic value.<Wun Yeong Jun>''''''''''''''''s story is complimented by many poems and personal letters, as <Joo Seng Jun> is known for its poems and frequent references to historic events that contribute to expressing the inner thoughts and emotions of many characters. Such stylistic choices as above, not only boasts literary prowess but also helps summarize an epic narrative and serves as a great tool for controlling tension and creating suspense for the reader. Considering <Wun Yeung Jeon>''''''''''''''''s carefully thought-out narrative structure and story-telling techniques, it can be regarded that <Wun Yeung Jeon> reigns superior in literary and artistic value to that of <Ju Saeng Jeon>''''''''''''''''s. Also its efficient ability to accurately capture personal conflicts between characters and establish character emotion brings characters to life as all characters are written along obvious novel-like elements and guide lines. Also,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Ju Saeng Jeon> was written by a great poet of the period, which simply aimed to convey the writer''''''''''''''''s view of the world and his concept of time and space through a simple but emotional narrative treatment. On the other hand, <Wun Yeung Jeon> can be seen as having been written by a talented novelist relying on structure and paying attention to character study.Therefore, while it is safe to say that <Ju Saeng Jeon> is a great 17th century romance novel known for its literary complexity for its time, <Wun Yeung Jeon> can be viewed as a more fully accomplished work, since it incorporates an organized structure of a sophisticated novel as well as a huge scale and scope of an epic. <Wun Yeung Jeon> manages to complete the three act structure and accomplish a dramatic arc, thus demanding the reader''''''''''''''''s attention and allowing itself to bring the reader constant suspense. Furthermore, its detailed exploration of a full cast of characters along with their human emotion and conflict brings the characters to life and manages not to let them dwell as mere plot devices unlike many other novels of the period and even of today.In conclusion, <Wun Yeung Jeon> and <Ju Saeng Jeon> can be seen as landmark works of literature of the early 17th century at its finest. It gave birth to a new era of novels and paved the way for many epics to come, as its predecessors borrow and emulate the styles founded by <Ju Saeng Jeon> and <Wun Yeung Jeon>, these significant pieces of literature play a crucial part of a long line of novels that start from <Kem Oh Shin Hwa> - <Ju Saeng Jeon> - <Wun Yeung Jeon> - and ends with <Gu Un Mong>.

      • 「田禹治傳」의 人物 硏究

        권경화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2007 국내석사

        RANK : 247599

        This investigation makes a close inquiry into ‘Cheon-u-chi’, the hero of the novel “Cheon-u-chi Story”, with a social value and a sense of the times. First, verification was held to confirm that Cheon-u-chi existed for real based on documents. Secondly, analysis on the characters was occurred and examination was held on main characters from the novel which had an effect on Cheon-u-chi. Finally, study was taken on the meaning and the limit of Cheon-u-chi’s social consciousness. Followings are summaries of thesis.Chapter I makes mention of the purpose and the method of the investigation. “Cheon-u-chi Story” has been investigated with various dimensions and it has been evaluated as a representative literary work of Chosun dynasty which suggests social problems that feudalism embraced, together with “Hong-Gil-Dong Story”. Therefore, the printed book of “Cheon-u-chi Story”, which brought social consciousness into relief, considered to be a main source of the analysis. It is to link Cheon-u-chi’s personality and revolutionary actions with the social consciousness. On the other hand, processes that have done so far are organized clearly, and Investigations, which obtained a high level of results, are examined and evaluated.Chapter II investigated on Cheon-u-chi as a real existed person rather than as a main hero of the novel. It is clear that he really existed, however, it was difficult to figure out his date of birth and his date of death as these are not recorded on the official history. Therefore, his existence period was assumed approximately from 1470 to 1530 based on the evidences that were found in literary documents. Methods for this process were divided into two; tales on real existed man Cheon-u-chi were separated into document tales and verbal tales, and investigation on Cheon-u-chi on these tales as a real existed man. Authentication is thorough as various literary documents on Cheon-u-chi’s real lifetime, a collection of Cheon-u-chi’s poems and works and newly selected verbal documents were all gathered for the proof. Even though Cheon-u-chi did not leave many poems, he is said to be the considerable poet by every editors of his poem collection. So as to say that Cheon-u-chi may not be the main hero of the history but possibly a man who had a space to build his own world and poems. Which means that his works took a big part in the re-investigation of his value of a person. Examined thus, Cheon-u-chi, historically real-existed man was a man of many accomplishments. He was the popular hero who was connected to Taoist-hermit-trend that overwhelmed his times and was also multiple-personified. But he tragically killed himself without attaining his high aims due to his social standing, and this has some kind of coherence with the typical tragic destiny of legendary heroes.Chapter III investigated genuinely on Cheon-u-chi as a hero of the novel. Analysis was occurred on his birth, home background, context of learning Taoist-magic, several episodes of Taoist-magic and general character after he entered a mountain area as he failed on the Taoist-magic competition. Also, characters who affected Cheon-u-chi were investigated to look closer into his consideration and change in actions. This chapter concluded that the reason why Gang-Rim- Do-Ryung and Seo-Hwa-Dam put restraint upon Cheon-u-chi’s Taoist-magic, is that they denied his using of Taoist-magic for his private sake. It means that they did not deny his entire Taoist-magic which was performed for salvation of common people from his social consciousness.Chapter IV investigated on Cheon-u-chi’s social existence and its meaning rather than Cheon-u-chi in the novel. It signifies his character related to his consideration and social volition, and the present writer linked it to the social consciousness. This investigation sought successfully on the formation background of Cheon-u-chi’s social consciousness, aspects and meanings of his social resistance according to his own social consciousness, and the novel writer of “Cheon-u-chi Story”’s consciousness which is indirectly revealed in Cheon-u-chi's character. Cheon-u-chi’s social standing as a nobleman was set for the power of realistic confrontation and for avoiding tragic destiny which every legendary heroes commonly have. On the other hand, the reason why Cheon-u-chi’s realistic resistance, not only for saving people but also for challenging the ruling class, becomes weaker as the story goes, is evaluated that the novel writer had limits in writer’s consciousness. 이 연구는 「전우치전」의 主動人物인 전우치가 과연 時代的 그리고 社會的으로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규명한 것이다. 우선 전우치가 실존 인물임을 資料를 토대로 證明하였고, 작품에 形象化된 인물을 분석한 후, 전우치에게 影響을 미친 주요 登場人物을 살펴보았으며, 마지막으로 인물이 드러낸 社會意識에 대한 意味와 그 限界를 고찰해 보았다.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제Ⅰ장은 硏究의 目的과 그 方法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전우치전」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가지 側面에서 연구되어 왔다. 조선조소설 중 「전우치전」은 「홍길동전」과 더불어 封建王朝體制가 안고 있는 社會的 問題들을 제기한 작품으로 평가해 왔다. 그러므로 社會意識을 浮刻시킨 활자본을 작품 분석의 주요 대본으로 삼았다. 그것은 전우치의 性格 및 抵抗的 行爲 등을 사회의식과 결부시키고자 하는 의미에서였다. 한편 지금껏 연구되어 온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되, 硏究史의 檢討는 그 동안의 연구 중에서 成果가 높다고 평가되는 主要 硏究를 대상으로 평가하였다.제Ⅱ장에서는 작품의 주인공이기 이전에 實存的 人物로서의 전우치를 연구하였다. 그가 실존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正史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출생과 사망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헌에 남겨진 흔적을 토대로 전우치의 實存年代를 1470년경에서 1530년경으로 추정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먼저 文獻說話와 口碑說話로 나누어 實存的 人物 ‘전우치’라는 존재가 文獻·口碑說話상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실존 인물 전우치의 행적을 뒷받침하는 여러 文獻輯과 전우치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詩選輯, 家傳 그리고 최근에 새롭게 採錄된 口碑資料까지 두루 섭렵함으로써 철저한 증명을 기할 수 있었다. 전우치는 많은 시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시집의 編纂者들은 한결같이 그의 시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말한다. 즉 전우치는 역사의 중심부에서 활동한 인물은 아닐지라도 자기나름의 세계를 구축하고 시를 읊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작품으로나마 전우치의 人物에 대한 價値를 재조명할 수 있었다. 이처럼 歷史的으로 實存 人物인 전우치는 多才多能한 인물로 그 당시 風靡했던 仙風과 결부되어 異人化된 民衆的 英雄이다. 그러나 身分的 制約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悲劇的 인물이며, 이것은 傳說的 英雄의 悲劇的 運命과 그 맥을 같이 한다.제Ⅲ장은 本格的으로 작품에 구현된 등장인물로서의 전우치를 論하였다. 전우치의 出生에서부터 그의 家庭環境과 道術을 習得하게 되는 경위, 道術과 관련되어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삽화, 그리고 道術競爭에서 패배한 후 入山에 이르기까지 作品形象면에 나타난 인물 전우치에 대하여 分析하였다. 또한, 전우치에게 영향을 미친 주요 등장인물을 연구함으로써 이들로 인하여 전우치의 思考 및 行動의 變移를 살펴볼 수 있었다. 여기서 전우치의 道術的 行脚이 강림도령과 서화담에 의해서 제지당한 것은 道術이 私的인 문제 해결의 방편으로 이용된 것에 대한 부정이었지, 社會意識의 발로에서 행해진 百姓의 救濟 등 전우치의 道術的 행위 전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제Ⅳ장은 지금까지 작품 내에서의 전우치라는 인물을 살펴보았다면, 이 장에서는 인물로서의 전우치가 과연 時代的 그리고 社會的으로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어떤 존재’였는가 하는 것은 그가 어떠한 思考와 意志를 지닌 인물이었는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필자는 그것을 ‘社會意識’과 결부시켜 논하였다. 이로써 전우치가 구현하려 한 社會意識의 形成背景, 社會意識의 발로로 表出했던 抵抗의 樣相과 그 意味, 그리고 전우치라는 인물을 통해 間接的으로 드러내고자 한 作家意識까지 자연스레 엿볼 수 있었다. 작품 속에서 전우치의 신분을 양반으로 설정한 것은 現實的 대결을 위한 힘의 마련임과 동시에 傳說的 人物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悲劇的 運命의 前轍을 밟지 않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볼 수 있다. 한편, 百姓救濟의 범위를 넘어 支配倫理에 대한 挑戰的 자세로 출발한 전우치의 現實的 抵抗이 사건이 전개되어 갈수록 약화된 것은 作家意識의 限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 한중 교류 속의 건물기 연구 : 청탁에 의한 작품을 중심으로

        조혜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8 국내석사

        RANK : 247599

        This thesis focuses on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which were produced based on request during Sino-Korean exchange, with aims to illuminate its production process, functions in terms of interactions between China and Korea, and the themes of their contents. First, chapter one establishes the objective of the study and the research methodology of this thesis by reviewing former studies. Then chapter two proceeds to define what is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And based on the given definition, I will present my findings of 219 narratives that were produced during Sino-Korean interactions. Among those 219 works, narratives written on behalf of a request with their original texts intact amount to forty. In chapter three, I have elucidated the production process of these forty narratives, and their functions for the interactions between Korea and China. As for the production process of these texts, I have examined the process of making the request, the aims in doing so, the course of production, and its participants. During Chosŏn-Ming exchanges, Chosŏn literati requested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from Ming envoy for both state-owned architecture and privately-owned architecture.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would be requested to entrust the architecture to descendants, or celebrate the charitable deeds of the king who led the construction of the architecture. Then during Qing dynasty, requests were only made for privately owned architecture. While the motives of making the requests remained similar – in that literati intended to impart the narratives of their nujeong(누정) or a place – in some cases the intention was to celebrate their friendship as Chosŏn and Qing literati or to polish own reputation in both Korea and China. During Ming period, the participants of literary exchanges faced a strict restriction based on their status. Participants – both the writer and the maker of the request - were high ranking government officials with great literary skills. One who makes the request had to officially interact with the Ming envoy and gain approval of their virtues or literary prowess, to receive a narrative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And at the time, only channel of the narrative production was to request one at the scene of an official trip, and receive it before the trip ends. But during Qing period, the status of participants surrounding the narrative production diversified. Some were high ranking envoys, while some were regular envoys. Some of the participating literati had not even passed the official government examination. The writers of narratives were also not limited to the officials who were in charge of greeting the envoys; the number of regular literati who participated in the production had increased compared to the Ming period. And as for the production channels, letters allowed the literati to make requests for a writing even after the trip, and they were able to receive the writing without making a trip to Beijing. Making continuous requests for a narrative, over a long period of time, came to be possible through letter exchanges; and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came to form a genre on their own. Based on the information presented so far, it could be surmised that receiving one narrative was very difficult during Chosŏn-Ming exchanges, while the barriers of the production had softened Chosŏn-Qing exchanges, which invigorated the genre. Chapter 3.2 deals with the functions of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in terms of interactions between Korea and China. The cases of Sin Sŏku and Kim Hant'ae illustrates how the requests for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worked as an efficient instrument for the betterment of literati’s reputation, and as grounds to join a circle of literati. Next, I have identified the illustriousness of literary exchanges based on architecture themselves, or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During Chosŏn-Ming exchange, many literary exchanges were based on an influential architecture. At this time, a pivotal narrative would influence many that came after it; and as the result, following works tended to have similar contents. Chosŏn-Qing exchanges involved massive number of requests on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allowing the diversity of contents for architecture related literary exchanges. The interpretations on an architecture’s name, as well as the style of the writings, have diversified. Chapter four discusses the subject matter of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in the course of Sino-Korean exchanges. First, the main subject matter of the narratives changed over time. During Chosŏn-Ming exchanges, discussion-type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were the most produced; discussion-type texts characteristically include philosophical contemplations and theoretical discussions on the name of the architecture. On the other hand, in Chosŏn-Qing exchanges, episode-type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began to emerge; episode-type narratives refers to the texts that highlights the biographical function of the genre, by featur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wner and the writer, or the personhood and scholarship of the owner. Thus, the focus of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has shifted from the architecture to the person. Secondly, reflections on the pursuit of success and seclusion from the world had varied and changed. Literati of two countries uniformly praised the space in which both pursuit and seclusion were possible. When the two collided, literati would recommend pursuit of career – rather than seclusion – for those who have held the public office. Then in Chosŏn-Qing era, since people of various stature could partake in the literary exchange scene, literati who had no intentions of pursuing public office also came to request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In those cases, Chinese literati approved of their academic lifestyle, which involved scholarly pursuit. Overall,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texts created during Chosŏn-Ming exchanges and Chosŏn-Qing exchanges show larger similarities and smaller differences when it comes to the literati’s ideas of pursuit and seclusion. In chapter 5, I drew an inductive conclusion from the previous chapters and succinctly presented the significance of this research. First, this thesis provides an insight on the roles of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during Sino-Korean interactions. Secondly, we can once again verify the standing of Sino-Korean literary exchange. And finally, texts of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disclosed in this thesis are meaningful data that could complement the studies on the traditions of architecture related literature of Chosŏn, by providing examples of narratives about traditional architecture that were written by foreigners on Chosŏn architecture. 본고는 한중 교류 속의 청탁을 받아서 지은 건물기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고 이러한 건물기의 창작 양상과 한중 교류 차원에 있어서 지닌 기능을 밝혔으며, 나아가 이의 주제양상을 살펴보았다. 먼저 제1장에는 연구목적을 규명하고, 연구사를 검토하여 연구방법을 밝혔다. 제2장에서는 건물기의 정의를 내리고, 이 정의에 의거하여 총 219편의 한중 교류 속에 창작된 건물기를 찾아냈다. 이 가운데 청탁을 받아서 지어졌으며 현재 원문을 확인할 수 있는 건물기는 총 40편이다. 제3장에는 이 40편의 건물기의 창작 양상과 한중 교류 차원에서 지닌 기능을 서술하였다. 창작 과정에 있어서 청탁의 과정과 의도, 창작 경로, 창작의 참여자들을 살펴보았다. 명나라 때에는 중국 사신이 조선의 국가 소유 건물과 개인 건물을 위해 건물기를 창작하였다. 주로 건물을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명나라 사신에게 건물기를 청탁하거나, 국가 소유 건물을 축조한 임금의 공덕을 찬송하기 위해 청탁한 경우가 많았다. 청나라 때에 들어서는 오로지 개인 소유 건물을 위해 지어달라고 청탁하였다. 청탁의도에 있어서 명나라 때와 비슷하게 자신의 누정이나 거소를 전하기 위해 청탁한 경우도 있지만, 천애지기의 우정을 기념하고자 하는 목적과 건물기 청탁으로 한중 양국에서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자 하는 목적이 추가되었다. 조·명 교류 당시 창작 참여자의 신분 제한이 엄격했는데 저자나 청탁자가 모두 관직이 높고 문학을 잘하는 사신, 혹은 접대역을 맡은 관리였다. 청탁자가 명나라 사신과 직접적인 교류를 해서 그들에게 문학이든 인품이든 인정을 받아야 건물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명 교류 때 사행 현장에서 청탁하고 사행 끝나기 전에 건물기를 받는 단일한 창작 경로만 있었다. 한편 조·청 교류 때는 창작 참여자의 신분이 다양해졌다. 관직이 높은 사신 외에도 그냥 일반 사행 수행원도 참여할 수 있었고, 심지어 문과에도 오르지 못한 문인도 있었다. 건물기의 저자도 사신에 한정되지 않았고, 명나라 때보다 일반 문인이 많아졌다. 또한 반드시 대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신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행 이후에 기문을 청탁할 수 있고, 연경에 가지 않더라도 기문을 받을 수 있었다. 서신을 통해 오랫동안 여러 편의 건물기를 청탁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건물기 작품군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상 시기별 특징으로 볼 때 조·명 교류 시에는 한 편의 건물기를 받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면, 조·청 교류 시에는 건물기 창작 참여 장벽이 낮아지면서 건물기 창작이 활성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3.2에는 주로 한중 교류 차원에서 건물기의 기능을 살펴보았다. 먼저, 신석우와 김한태의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건물기 청탁은 한중 교류에 있어서 문인의 명성을 높이는 효율적 수단이라는 점과 건물기 청탁이 문인 그룹에 들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다음으로는 건물이나 건물기를 중심으로 문학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조·명 교류 때는 영향력 있는 건물기를 중심으로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물기의 영향으로 후속 작품들의 내용은 비교적 비슷해졌다. 조·청 교류 때는 대량의 건물기 청탁이 가능해졌고, 이 때 명나라 때와 반대로 오히려 내용면에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름에 대한 해석이나 기문의 유형이 다양해졌다. 제4장에는 한중 교류 속의 건물기의 주제 양상을 살펴보았다. 첫째, 건물기의 중심 소재가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 조·명 교류 시 건물 이름을 의론하는 의론형 건물기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론형 건물기는 건물 이름에 대한 성리학적 사유와 사변적 의론이 강한 점이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조·청 교류 때는 건물 주인 및 건물 주인과의 교류 상황을 위주로 서술한 일화형 건물기가 한중 건물기 교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화형 건물기는 건물 주인의 학문과 인품을 묘사하는 내용에 치중되어 있어서 전기적 성격이 부각되었다. 즉, 건물을 중심으로 한 건물기에서 사람을 중심으로 한 건물기로 바뀌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두 번째로, 출세와 은일 사상의 변주와 변화를 살펴보았다. 양국 문인은 출세와 은일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출세와 은일을 함께 누릴 수 없을 때는, 시대를 불문하고 관직을 가진 문인에게 출세를 권하였다. 한편, 조·청 교류 때는 다양한 신분의 사람이 양국 문학 교류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문인이 건물기를 청탁하기도 하였다. 이때 중국 문인은 그들이 학자로서 학문을 닦고 학설을 세우는 것을 삶의 흥으로 삼는 생활방식을 인정해 주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은일과 출세에 대한 생각에는 조·명 교류 속의 건물기와 조·청 교류 속의 건물기 사이에 유사한 부분이 많지만, 작은 차이점이 드러나기도 한다. 제5장에는 앞의 내용을 귀납하고 본 연구의 의의를 간단히 서술하였다. 첫째, 본고를 통해 한중 교류에 있어서 건물기의 역할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건물기 교류를 통해 한중 문학교류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본고에서 새롭게 밝힌 건물기들은 자료적 가치가 상당하여, 외국인이 조선 건물에 대해 창작한 작품으로 조선의 건물 관련 문학을 보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本文以中韓交流中由他人所託創作而成的建築物記為研究對象,揭示這些記文的創作過程,在中韓交流中發揮的作用,并進一步考察主題內容的變化。 第一章主要闡釋研究目的,梳理研究史,總結研究方法。 在第二章中筆者對建築物記下了定義,并依據這一定義整理出了219篇創作於中韓交流過程中的建築物記,其中現在可以確認原文並且是受異國文人所託完成的作品有40篇,本文以這40篇建築物記為研究對象。 第三章揭示了這些建築物記的創作過程及在中韓交流中發揮的作用。明朝時,朝鮮文人拜託明朝文人為私人建築物和公家建築物作記。一般公家建築物的記文會記錄命名緣由,讚揚君主建造建築物的豐功偉績。文人們也會為了讓私人的建築物傳於後世而特別請明朝使臣作記。清朝時,朝鮮文人只為自己的私人建築物請記,除了有讓自己的建築物流傳後世外的目的外,還有紀念自己和中國文人的友情,使自己及自己的亭台樓閣等建築物揚名中朝的目的。 建築物記交流參與者的身份明清時期也呈現不同特征。明朝時,請記者和記文作者都是身居高位且文學素養高的文人。為了得到明朝使臣的記文,朝鮮文人需要前期投入大量時間精力和明使們建立交情,并拿到一些建築物相關題詩和銘、贊、箴等體裁的文章,進而取得記文。一般只能在使行現場請記,在使行結束前獲得記文。 清朝時,參與建築物記創作的文人身份呈現多樣化特征。有身居高位的文人,也有一般的使行隨行人員,甚至還有科舉尚未成功的普通文人。記文作者也不再只是使行有關人員,也有一般清朝文人。並且,文人們可以通過書信請記,不前往中國也可以請記,創作路徑更加多樣。此外,還可以利用書信持久多次地請記,甚至出現了針對同一建築物的數篇記文。 總體來說,明·朝交流時期,獲得一篇他國文人的建築物記十分困難,而清·朝交流的時候,建築物記的創作門檻大大降低,甚至還出現了清朝文人向朝鮮文人求記的情況,雖然數量很少,但多少可以說明由明朝時的單方面求記,發展到了互相求記,清·朝交流中的建築物記創作較明朝更為活躍。 3.2則主要闡述了建築物記在中朝交流中發揮的作用。通過申錫愚和金漢泰的事例可以看出建築物記創作是提高文人在中朝兩國名聲的有效手段,也是進入一個文人集團的良好契機。緊接著,筆者考察了中韓交流中圍繞建築物及建築物記展開的文學交流。明朝時,受具有決定性作用的建築物記的影響,後續圍繞該建築的文學交流呈現相似性特征。清朝時,圍繞同一建築的多篇記文出現,此時不論是交流的內容還是記文的類型均呈現多樣性特征。 第四章主要考察了中韓交流中創作而成的建築物記的主要內容。 第一,建築物記的中心內容隨時代發展,發生了變化,由以建築物為中心轉向以主人及和主人的交流為中心,明朝時針對建築物名稱的議論型記文占絕大比重,而清朝時,則開始出現逸話型記文。逸話型建築物記主要記述和建築物主人的交流情況,對建築物主人進行評價,部分逸話型記文甚至具有了傳記的特征,而議論型記文則大幅減少。 第二,記文中對出仕和隱居進行了探討。不論是明朝還是清朝對於“市隱”都很推崇,當感受自然和做官無法同時實現時,針對已經取得官職的建築物主人,記文作者會積極勸導建築物主人“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 當然,因為清朝時也有部分無心做官,專心學術的朝鮮學者前來中國進行交流,在為這些學者所作的記文中更多的是認可他們專心學術的日常生活,而非規勸其步入仕途。總體來說,清朝建築物記對出仕和隱居的探討,相比于明朝,既有繼承又有發展。 第五章主要歸納了前文內容并闡述了本論文的意義。首先,本文揭示了建築物記在中韓交流中發揮的作用。其次,圍繞亭台樓閣等建築物進行記文請託,相互交流的過程中,可以再次確認中韓交流中兩國的文化位相。最後,本文搜集的由外國人所作的朝鮮建築物記文具有重要資料價值,有利於完善朝鮮的亭台樓閣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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