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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대학원생들의 선교관 연구 :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중심으로

        권오훈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9711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선교할 것을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런 하나님의 간절한 원하심을 21세기의 일군들이요 선교 한국을 이끌어갈 기독교 대학생을 특별히 그 중에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1∼3학년을 중심으로 본 논문은 현재 기독교 대학의 선교의 열망을 제시하겠다. 본 연구의 서론부분에서는 연구의 배경 및 목적 그리고 연구의 중요성에 대해 제시하였다. 제 2 장 선행연구 고찰에서는 선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통해 선교의 어원을 찾아 선교에 대한 정의를 내렸으며 성경에서 나타난 선교의 방법과 근거를 각출해 보려고 노력했다. 구약과 신약 그리고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선교를 강조하셨고, 계속적인 하나님의 일군을 세우기 위해 기독교 대학을 세워 복음화의 역군을 양육하고 계신다. 세상이 변해감에 따라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 위에 세워진 기독교대학도 일반 대학과 비슷한 대형화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세속화되어가고 있던 시점에서 개혁주의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생들의 전체 선교관을 2장 3절에서 알아봄으로 현재 한국의 기독교 대학의 선교관을 검토하였다. 제 3 장에서는 더 자세한 기독교 대학생들의 선교관 적용을 위해 선교교육을 통한 준비 그리고 선교 헌신자 동원에 대해 연구 설계를 하였고, 본 연구를 위한 연구 대상과 견본 추출, 연구 도구, 자료 수집 절차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제 4 장에서는 자료 분석으로,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1∼3학년들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에 참여하고 있는가, 선교사를 돕고 있는가, 선교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설문지를 통하여 연구 분석 하였다. 설문지 처음에 대한 분석은 설문 대상자 학년 및 참여 여부, 두 번째는 선교사를 돕는 데에 대하여 연구 분석하였고, 3번째는 개인의 선교교육 만족도와 선교 헌신자 동원을 위해 필요한 프로그램을 설문지에 답하게 하였다. 그리고 위 3가지를 분석하였다. 설문지를 통한 자료 분석 결과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설문 대상의 선교 참여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응답한 수는 총 120명이었으며, 선교 동참은 53명이 보내는 선교사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 단기 선교사 29명이었다. 선교사역에 동참하고 싶은 대륙권은 68명이 아시아권으로 가장 많았고, 아프리카권이 27명이었으며, ‘현재 선교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는 60명이 예라고 답하였고, 가장 많았다. 아니요는 30명, 그 외에는 무응답이었다. 둘째, 학년에 따라 선교사를 돕고 협력하는 여부를 살펴보았다. 결과는 질문에는 60명이 5분이라고 답하였고, 30명은 10분, 그 다음은 무응답 이었으며, ‘선교사를 위해 한 달에 선교 헌금은 어느 정도 하십니까?’라는 질문에는 60명이 1만원이라고 답하였고, 15명이 2만원으로 집계되었다. 셋째, ‘선교 헌신자 동원에 필요한 프로그램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40명이 선교 세미나라고 답하였고, 30명은 선교 간증이라고 답하였으며, 선교사에 관한 책을 1년에 몇 권 읽느냐는 질문에 55명이 1권이라고 답하였고, 30명은 2권이라고 답하였다. 마지막으로 ‘선교 헌신자 지원동기 위한 프로그램은?’ 이라는 질문에 48명이 선교 간증이라고 답하였다. 이 응답은 선교 헌신자는 무엇을 통하여 가능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 대학은 예수님이 명령하신 선교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본 논문에서 밝힌 바대로 하나님이 기독교 대학을 세운 목적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한 강좌와 세미나를 통하여 도전을 주고 기도합주회나 선교 소그룹모임, 선교 간증집회를 통하여서 복음에 대한 열정을 주어야 한다. 신학대학원생들은 21세기를 이끌어갈 제일의 일군들이다. 이들은 교회, 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이 사회를 이끌어갈 장차 지도자요 리더들이다. 하나님은 당장이 아니라 미래를 보신다. 기독교 대학은 미래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한다. 기독교 대학이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질 때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살고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것이다.

      • 칼빈의 교회론을 통해서 본 한국교회 예배의 문제점에 대한 연구

        안성욱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2009 국내석사

        RANK : 249663

        “개혁하는 교회”,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갱신을 위한 목표였다. 그런데 그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개혁의 범위는 잘못된 제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성직자 및 신자들의 신앙과 삶 전체였다.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교회개혁은 가능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바로 예배개혁에 달려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진정한 교회로 존재하려면 ‘예배를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예배 안에는 뜨거운 기도, 열심 있는 찬송, 헌신적인 감사, 열정적인 선교 등의 많은 장점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을 통해서 한국교회 예배 안의 문제점들을 제기하는 이유는 한국교회가 더욱 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숙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형식이나 의식보다는 말씀중심 예배로, 그리고 들려지는 말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실천하는 말씀으로, 또한 의식이 강조되는 성만찬이 아닌 본질을 분명히 하는 성만찬의 예배로의 갱신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적지 않은 지난 세월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양적 성장과 영적 성장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교회는 다음세대를 위해서 자만하였던 자세를 벗어버리고 겸손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한국교회를 향한 질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한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시대나 예배의 형식이나 예전의 의식이 강조되었을 때, 그 때가 바로 개혁과 부흥이 필요한 때였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인 전환점에 서 있다. 토속 신앙으로부터 시작된 잘못된 신앙과 가면 갈수록 더해만 가는 이단들의 활동 속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예배의 형식이 아닌, 본질을 우선시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갱신은 어떤 프로그램의 도입이나 의식만의 개혁이 아니라, 예배의 개혁이 되어야한다. 예배의 개혁은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며 앞으로 한국교회에 생사가 달린 문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배자’를 찾으신다. 참된 예배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완전히 무릎 끓어 경배하는 예배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는 삶을 추구하겠다는 결의가 충만한 예배이다. 본 논문을 통해서 예배에 대한 성경적 고찰과 함께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형태와 회중의식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갱신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본 논문의 연구를 통하여 얻게 된 내용의 요약과 결론은 다음과 같다 예배는 모든 죄에서 구속해주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영광을 돌리는 신앙의 행위이다. 따라서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는 매우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우선이며, 예배는 살아 계시고 초월하시고 내재하신 하나님과 성육신 하셔서 구속하시고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드려져야한다. 또한 그러한 예배가 드려지는 교회는 선택된 자들의 총화로서의 교회, 신자들의 어머니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공동체로서 교회가 되어야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예배 중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인정하고, 설교자는 복음 선포자로서의 설교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말씀과 성만찬의 균형 있는 조화가 절실하다. 그리고 예배에는 신학이 결코 빠져서는 안 된다. 물론 신학이 성경을 앞서서는 안 되지만, 신학 없는 예배는 자칫 잘못하여 비성경적인 예배에 빠지게 하는 위험성을 낳는다. 한국 개신교회 예배는 초기 선교사들이었던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미국 자유교회의 예배가 전해진 예배이다. 이러한 예배에는 장점들도 있었지만 문제점 또한 많았다.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해진 예배는 한국교회 안의 예배가 즉흥적인 부흥 전도 집회 형태의 설교와 예배가 되게 만들었다. 즉 설교중심의 예배가 되게 한 것이다. 그래서 회중들은 점점 설교에만 의존하게 되었고, 예배 중에 자발적인 참여는 줄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예배자의 참여의식을 줄어들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영적예배’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경적인 예배와 거리가 먼 것이 되었다. 또한 기독교가 한국에 정착될 즈음에는 한국적 토양자체가 각종 전통신앙이 있는 이교적인 토양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마저도 전통적 신앙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성경적인 바른 예배를 알게 하는 데 지장이 매우 컸다. 또한 한국 국민들의 사상 속에 개인주의적인 경향과 기복주의 사고, 그리고 감상주의 및 주정주의적 경향이 짙게 나타나면서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한 인식은 매우 수동적이고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논문은 이러한 한국적 토양에서 비롯된 잘못된 신앙과 거기에서 생성된 예배를 갱신하고자 칼빈의 교회론과 예배신학을 기초로 하여 회중들의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를 촉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연구되었다. 예배에 대해 회중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인식과 문제점을 갱신하기 위한 갱신방안으로는 첫째는 물량주의적 사고 및 기복주의적 사고로부터 벗어나서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이는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의 회복을 주장했으며, 둘째는 예배에 대한 왜곡된 현상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회중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함을 제안했고, 셋째는 교회 안에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려서 너무 엄숙하고 굳어져버린 예배를 부활의 기쁨과 승리감에 찬 축제의 예배로 바꾸어야한다고 제안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축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예배가 개신교회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공동체 의식의 회복을 제안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한 몸으로 섬기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공동체 의식의 변화에서 시작됨을 강조했다. 다섯째는 예배와 삶의 조화를 제안했다. 예배는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드려져야 진정한 예배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보여주고 나아가 예수의 증인으로서 복음 증거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진정한 예배임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우리의 자녀세대와 후손들이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예배 및 성례전의 교육을 바르게 시행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임을 제안했다. 이상의 제안들은 앞으로 한국 개신교회 회중들이 예배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로 말미암아 예배갱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지금 한국교회가 정체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이상 정체되어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해서도 민감해야겠지만,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더 민감해져야 한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더 민감해져야 한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결과를 가져온 예배형태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과감하게 그러한 예배를 시도해보려는 구상을 버리고, 예배의 본질과 바른 의식을 회복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다. 예배의 본질은 변해서는 안 된다. 아니 절대 변할 수 없다. 하지만 예배 전통과 원리를 무시하지 않은 선에서 현대 상황에 맞는 창조적 시도는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영적 지도자들이 바른 예배를 드리고 인도하기 위해서 성령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예배에 대한 영적 긴장감을 늘 유지한다면 한국교회는 매우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루터와 칼빈의 예배음악에 대한 이해

        진교소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49663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천지창조 이후에 시작된 예배는 그 예배와 함께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음악이 함께해왔음을 우리는 안다. 찬양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인간 창조의 목적을 밝히시는데 "이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이사야서 43:1절에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찬송 중에 거하신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 창조의 목적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창세기에서부터 나타난 찬양은 예배음악으로 자리 잡았으며 예배는 하나님과 의 만남을 통해서 예배자의 응답은 찬양과 헌신으로 나타났다. 예배에서 예배 음악은 하나님 되심을 드러냈고, 사도바울이 고백처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고 영으로 마음으로 찬미하는 찬송시가 가득하였다. 회중찬송은 교회음악의 정수이다. 회중찬송은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을 인하여 인간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 중에 최고의 인격적인 표현이다. 이 회중찬송은 교회의 최상의 목적이며 또 이 목적을 이루는 최선의 수단이기도 하기에 회중찬송 안에 교회의 예배가 바로 설 수 있다. 회중으로 하여금 음악적인 경험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여 그 열매인 희락을 통하여 축제의 분위기가 된다. 회중 찬송은 예배에서 풍성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게 해 주는 중요한 도구이다. 루터가 이해하는 음악은 신학과 버금가는 위치로 생각을 하였다. 음악과 신학은 매우 가까운 것이어서 회중들에게 말씀과 음악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씀과 음악이 회중의 영혼에 동시에 작용한다고 루터는 말한다. 음악은 인간을 조정하고 또한 자주 그들을 압도한다. 슬픈자 에게 평안을 주고 경솔한 자에게 자제를 주고 절망한 자에게 용기를 주고 교만한 자에게 겸손을 주며 흥분되어 있는 자에게는 차분함을 주고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자에게는 유화한 마음을 주는데 음악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음악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선포된 복음은 구원된 백성들의 입술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 열매로 거둬들인다 했다. 회중찬송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인정한다. 교회의 찬양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객체는 회중이다 모든 회중의 찬송이 드려짐의 찬양이 될 때에 회중 찬송의 진정한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예배음악에 대하여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시대가 변화되면서 예배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그래서 역사의 변화 속에서 예배음악의 변천은 동일하게 움직여 가고 음악의 형태와 기보법 등이 발달하고 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음악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발전해가게 된다. 루터와 칼빈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음악에 대하여 건전하고 거룩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찬양하는데 집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루터는 예배음악의 발전을 가져오면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고, 반면에 칼빈의 경우에는 교회에서의 악기사용을 금하였고 루터와는 달리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태도를 더 보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음악은 교회적인 것이든지 방탕한 것이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고 했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 이외의 것은 모두 비난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칼빈이 음악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취진 것은 그가 음악이 진정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개혁주의적인 예배자로서 서기 위해서 오직 말씀만을 바라보고 그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본 필자는 칼빈또한 찬양에 대한 갈급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박사는 말하기를 철학은 소수의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예술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대로 "우리는 예술적 본능이 보편적인 인간 형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국가 형태나 풍토와 나라들에 따라서 그 예술적인 본능발전의 정도는 차이가 난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하였다. 칼빈은 그가 개혁자가 되기 전에는 예술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칼빈이 예술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시각 예술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러기에 순수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할 것을 요구했다. 칼빈은 예술의 정당한 사용을 장려하고 권장하였다. 칼빈의 주장은 이렇다. 성경이 예술의 최초의 출현을 언급하면서 유발이 그 장막에서 수금과 퉁소를 발명했을 때라고 했다. 그것을 성령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했다. 칼빈을 통해서 얻는 교훈은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표출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칼빈주의적 예술가들은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 예술에 대해서 진정한 예술을 위한 소명을 가져야 한다. 또한 루터는 그의 신학적 주장을 찬송을 통해서 효과 있게 전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 루터의 신학적이 흐름이 그의 찬송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찬송시는 그대로 한편의 설교였고 신학 논문이었다. 루터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개혁자들과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교회를 갱신시킨 사람들은 반드시 새로운 찬송을 만들었고 이를 통하여 교리를 정착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110년의 역사동안 거의 갱신이 없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거의 대부분이 서양 찬송가라는 사실에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발전시키고자하는 의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찬송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교회에는 갱신이 없다. 결국 한국교회의 갱신을 원하는 자들은 목회자든 신학자이든 평신도든 간에 성경적인 새로운 찬송을 만드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대의 교회는 교회음악의 대중성을 강조하면서 그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피조성과 구속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였다는 가치 있는 사실을 증명하고 진리가 담긴 음악행위가 지속되어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찬송의 방향은 회중을 의식하여야 하며 회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찬송은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찬송하는데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 찬송을 하는 개인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개인에 초점이 맞추어 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찬양하는데 그 찬양이 쓰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찬양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영원히 찬양 드리는 삶으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려야 하고 더 나은 찬양을 드리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심이며, 영광의 주님이 재림하셔서 영원한 천국에 인도하시면 그곳에서 성도의 할 일은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날마다 산송으로 화답하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본 논문을 통해서 개혁주의 예배음악이 갖어야할 것이 어느것이고 버려야할 것이 어느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개혁주의 예배음악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을 근거로 하여 교회의 공적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을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이름으로"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드려지는 예배만이 참 예배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배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며, 예배의 기본과 공동된 기독교 전통은 성경이 제공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성경은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이루는데 필수요건임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1항에는 예배의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참하나님을 예배하는 기꺼이 수납될 방법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되어서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이나 사단의 시사에 따라, 어떤 유형한 표현이나 기타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 받지 않게 하셨다." 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볼 때, 음악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방법으로 교회예배에 사용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자들의 외침처럼 "성경으로 돌아가자" 예배 중에 음악의 사용이 성경에 근거하여 그 위치를 정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개혁주의 교회는 예배음악을 사용할 때 사상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둔 신학적 평가와 지침을 통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한다. 개혁주의 예배음악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이 성경에 기초하여 사용되어지는 음악이기 때문에 성경적인 교훈을 찾는 것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예배음악에 대한 객관적이며 건전한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 '교회사적인 조명'을 통하여 예배음악의 모습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올바른 지침을 제공받는 일도 중요하다 생각한다. 우리 개혁주의 예배음악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서 구원자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성경과 2000천년의 기독교 역사는 매우 중요한 요건으로 생각한다. 이때만이 참된 예배의 요소로서 예배음악이 자리를 잡게 될 것이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게 될 것이다.

      •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이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김문수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9663

        한국장로교회의 시작은 알렌(Dr. Horace. N. Allen)선교사, 1884년 9월 20일 한반도인 제물포에 도화하여 서울에 도착함을 시작으로 장로교회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 박상훈,「승동교회 110사」, p. 57.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능력 아래 선교사들의 희생을 선두로 이어지는 신자들의 순교 가운데 세워진 거룩한 공동체임을 다시금 떠올려보며 본 논문 연구를 아래와 같이 정리 요약, 논자의 의견을 피력함으로서 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장로교회는 처음에는 하나였다. 하나 된 장로교회는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이하고 나서 교회의 분열의 조짐이 있었다. 교회의 분열의 여러 가지 원인들을 생각 해 보면, 첫째는 신사참배 문제, 둘째는 신학 사상의 문제, 셋째는 신학교 문제, 넷째는 정치적 혼란과 신학적 문제, 다섯째는 N.A.E 와 W.C.C 메큐메니칼 운동문제 등으로 분열을 들을 수 있다. 이런 다양한 문제 속에서 각 교단은 하나였지만, 자신들의 주장과 교리, 그리고 배경 등을 앞세워 학교와 지역, 교파로 분열 양상을 띄게 되었다. 그 분열의 결과로써는 1951년 고신파의 분열, 1953년 예장과 기장의 분열, 1959년 합동측과 통합의 분열 등이다. 그 외 위 서술한 내용과 같이 여러 가지 문제점 안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는 진보주의 신신학자들(예: 김재준 목사), 보수주의 신학과의 분쟁, 그리고 에큐메니칼 문제가 근본적으로 한국교회의 교파와 분파를 촉진시킴으로 현재까지 그 격차가 좁혀 들지 않고 있음을 우리는 간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 후 문제점이 도출된 가운데서도 각 교단의 성장방법으로 신학교가 건립되어졌고 그로 인하여 신학도를 많이 배출함으로서 교회의 급성장이 이루어졌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분열이 오히려 성장을 이루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바라볼 때에 이것은 전적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분열이 성장의 통로로 작용, 선교와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지속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성경의 이해 부족이나 신학의 이해부족에서 또는 믿음의 차이로 말미암아 오는 이해득실 등, 본 논문을 연구함으로 밝혔듯이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 모두가 인지한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시키는 사단의 놀음에 놀아나는 어리석음을 제거함으로서 앞으로 분열이 아닌 성장을 위한 올바른 대책을 한국교회 전체가 세워 나가야할 과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지의 대안으로는 한국교회의 영적 회복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영적회복은 한국교단의 교파주의를 뛰어넘어 말씀의 참 회복과 기도의 회복, 섬김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각 교단의 신학교육의 신실성과 헌신, 봉사 및 희생의 교육이 바탕이 된 사명자의 배출과 각 교회 목회자들의 끊임없는 성경연구 및 영적권위 회복, 그리고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각 성도들의 삶 가운데 바로 적용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외치고 싶다. 이제 한국교회가 더 많은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교파간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분파가 아니라 자칭 대표교단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및 그 외 교단들과 지속적 연대를 통하여 성경을 올바르게 연구하며 영적회복과 함께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교회일치운동을 전개함으로서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연합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교회사 속에서의 평신도의 이해와 연구

        나상철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9647

        지금까지 교회사를 통한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해와 관계, 그리고 왜곡되게 했던 시대적 상황들을 통해 근현대 교회의 모양들과 더 나아가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특히 한국교회 안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개념에 대한 잘못된 정의와 이해로 성직자라고 하면 교회를 중심으로 전임으로 사역하는 목회자나 선교사를 떠올리게 되고 있음을 알았다. 반면에 어원적으로 ‘백성’이라는 뜻의 ‘평신도’에 대해서는 성직자를 보조하고, 따르거나 사역의 대상으로써의 객체로 이해되었던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이러한 왜곡된 이해와 적용으로 더불어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동적인 성향으로 변모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특별히 세상을 향한 선교와 문화적 명령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인 반응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과거를 볼 수 있다.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오면서 교회가 지탱되어져 오고 있다고 할 정도로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성경적인 성장을 저해하고,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방해하는 중심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확연한 구별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교훈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통해서 교회가 기대이상의 것들을 바라고 지향하기 보다는 오히려 가정교회와 같은, 셀교회처럼 교회의 본질을 충분히 반영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교회의 구조와 조직을 연구하여 지금의 교회에 더욱 적용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통해서 성직주의와 평신도주의의 극단적 오류로부터 균형과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교회론을 정립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론에 오류로부터 범할 수 있는 과오들을 반복하여 답습함을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주의는 평등한 하나님의 백성을 불평등한 계급체제로 바꿔 사회주의적 체제형태로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반면, 지나친 평신도주의는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훈련하고 양육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자들의 기능을 무시하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이 양자 간의 극단을 피하는 동시에 교회는 신분에 있어서 하등의 차별, 구분, 구별이 없음을 인식하고 단지 각양 받은 은사를 따라서 다양한 기능적 직분이 주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도록 인식시키고 자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 현대의 평신도 신학은 또 다른 양극단에 대한 인식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흩어지는 교회와 모이는 교회의 양쪽 모두를 취하지 못하고, 이 양자의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상황은 모이는 교회 위주의 경향을 보이는 반면에 일부 진보주의 교회나 에큐메니칼 운동에 편승한 교회들은 흩어지는 교회에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모이면서 흩어지고, 흩어지면서 모이는 원심적이면서도 구심적인 사역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 하나 하나의 구성원은 교회의 존재 목적이기에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구심적 교회든 원심적 교회든,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성장이나 과업의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 안에 있는 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 재세례파 신학 연구

        국호영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2002 국내석사

        RANK : 249647

        재세례파의 급진종교개혁 운동은 16세기 종교적 대변혁기에 종교개혁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주류의 개신교 써클과는 달리 교회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었던 영적인 쇄신 및 교회개혁 운동이었다. 그러나 루터나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 등에 의하여 각인되어 온 이들에 대한 부정적이며 편향적인 이미지로 말미암아 이들의 신학과 영성이 잘못 이해되어져 왔고 간과되어져 왔다. 확실히 재세례파 급진종교개혁자들은 주류 종교개혁자들의 서자들(stiefkinder) 취급을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 질서에 알맞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는 일에 적극적으로 헌신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급진종교개혁이라는 일련의 운동을 단순히 "개신교 또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한" 종교개혁운동일 뿐만 아니라 "보다 급진적"이라는 말에 대하여 다음의 새로운 뜻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 이 말은 본래 근본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 형태에 있어서는 개신교일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카톨릭 교회와 또 다른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새로운 의미를 모색하려는 독특한 탐구이기도 하다. 그들 중 다수는 기존 질서를 벗어나 거듭난 삶을 살면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Nachfolge Christi) 추방, 고문, 사형 그리고 순교를 기꺼이 수용하려 했다. 이러한 성격은 급진종교개혁 써클의 신학과 영성에 엄격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진지하게 믿으려 했으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결코 아이들 장난이 아니라고 외치기도 했다. 실제로 급진종교개혁자들이 세운 대부분의 교회들은 16세기의 혹독함을 견디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삶을 추구하는 그들의 영성은 기존 제도권 속의 교회의 전통 안에서 상실되었거나 억제되어 왔던 많은 이들에게 진정한 기독교적 경험의 맥을 유지하게 하는 자극이 되기도 했다. 이들의 유산은 퀘이커(Quaker), 메노나이트(Mennonite) 그리고 모라비안(Moray- ian) 성도들의 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 개혁과 갱신이라는 화두(話頭)가 회자(膾炙)되고 있는 현실에 재세례파의 급진종교개혁자들의 철저한 신학과 영성을 통하여 개혁과 갱신의 단초(端礎)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며 아울러 많은 신학적 통찰(Theological insight)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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