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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터와 칼빈의 예배음악에 대한 이해

        진교소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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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천지창조 이후에 시작된 예배는 그 예배와 함께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음악이 함께해왔음을 우리는 안다. 찬양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인간 창조의 목적을 밝히시는데 "이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이사야서 43:1절에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찬송 중에 거하신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 창조의 목적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창세기에서부터 나타난 찬양은 예배음악으로 자리 잡았으며 예배는 하나님과 의 만남을 통해서 예배자의 응답은 찬양과 헌신으로 나타났다. 예배에서 예배 음악은 하나님 되심을 드러냈고, 사도바울이 고백처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고 영으로 마음으로 찬미하는 찬송시가 가득하였다. 회중찬송은 교회음악의 정수이다. 회중찬송은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을 인하여 인간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 중에 최고의 인격적인 표현이다. 이 회중찬송은 교회의 최상의 목적이며 또 이 목적을 이루는 최선의 수단이기도 하기에 회중찬송 안에 교회의 예배가 바로 설 수 있다. 회중으로 하여금 음악적인 경험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여 그 열매인 희락을 통하여 축제의 분위기가 된다. 회중 찬송은 예배에서 풍성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게 해 주는 중요한 도구이다. 루터가 이해하는 음악은 신학과 버금가는 위치로 생각을 하였다. 음악과 신학은 매우 가까운 것이어서 회중들에게 말씀과 음악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씀과 음악이 회중의 영혼에 동시에 작용한다고 루터는 말한다. 음악은 인간을 조정하고 또한 자주 그들을 압도한다. 슬픈자 에게 평안을 주고 경솔한 자에게 자제를 주고 절망한 자에게 용기를 주고 교만한 자에게 겸손을 주며 흥분되어 있는 자에게는 차분함을 주고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자에게는 유화한 마음을 주는데 음악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음악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선포된 복음은 구원된 백성들의 입술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 열매로 거둬들인다 했다. 회중찬송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인정한다. 교회의 찬양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객체는 회중이다 모든 회중의 찬송이 드려짐의 찬양이 될 때에 회중 찬송의 진정한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예배음악에 대하여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시대가 변화되면서 예배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그래서 역사의 변화 속에서 예배음악의 변천은 동일하게 움직여 가고 음악의 형태와 기보법 등이 발달하고 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음악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발전해가게 된다. 루터와 칼빈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음악에 대하여 건전하고 거룩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찬양하는데 집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루터는 예배음악의 발전을 가져오면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고, 반면에 칼빈의 경우에는 교회에서의 악기사용을 금하였고 루터와는 달리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태도를 더 보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음악은 교회적인 것이든지 방탕한 것이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고 했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 이외의 것은 모두 비난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칼빈이 음악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취진 것은 그가 음악이 진정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개혁주의적인 예배자로서 서기 위해서 오직 말씀만을 바라보고 그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본 필자는 칼빈또한 찬양에 대한 갈급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박사는 말하기를 철학은 소수의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예술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대로 "우리는 예술적 본능이 보편적인 인간 형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국가 형태나 풍토와 나라들에 따라서 그 예술적인 본능발전의 정도는 차이가 난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하였다. 칼빈은 그가 개혁자가 되기 전에는 예술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칼빈이 예술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시각 예술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러기에 순수하고 바르게 사용해야 할 것을 요구했다. 칼빈은 예술의 정당한 사용을 장려하고 권장하였다. 칼빈의 주장은 이렇다. 성경이 예술의 최초의 출현을 언급하면서 유발이 그 장막에서 수금과 퉁소를 발명했을 때라고 했다. 그것을 성령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했다. 칼빈을 통해서 얻는 교훈은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주신 가능성을 표출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칼빈주의적 예술가들은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 예술에 대해서 진정한 예술을 위한 소명을 가져야 한다. 또한 루터는 그의 신학적 주장을 찬송을 통해서 효과 있게 전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 루터의 신학적이 흐름이 그의 찬송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찬송시는 그대로 한편의 설교였고 신학 논문이었다. 루터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개혁자들과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교회를 갱신시킨 사람들은 반드시 새로운 찬송을 만들었고 이를 통하여 교리를 정착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110년의 역사동안 거의 갱신이 없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거의 대부분이 서양 찬송가라는 사실에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발전시키고자하는 의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찬송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교회에는 갱신이 없다. 결국 한국교회의 갱신을 원하는 자들은 목회자든 신학자이든 평신도든 간에 성경적인 새로운 찬송을 만드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대의 교회는 교회음악의 대중성을 강조하면서 그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피조성과 구속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였다는 가치 있는 사실을 증명하고 진리가 담긴 음악행위가 지속되어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찬송의 방향은 회중을 의식하여야 하며 회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찬송은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찬송하는데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 찬송을 하는 개인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개인에 초점이 맞추어 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찬양하는데 그 찬양이 쓰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찬양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영원히 찬양 드리는 삶으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려야 하고 더 나은 찬양을 드리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하심이며, 영광의 주님이 재림하셔서 영원한 천국에 인도하시면 그곳에서 성도의 할 일은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날마다 산송으로 화답하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본 논문을 통해서 개혁주의 예배음악이 갖어야할 것이 어느것이고 버려야할 것이 어느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개혁주의 예배음악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을 근거로 하여 교회의 공적예배에 사용되는 음악을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이름으로"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드려지는 예배만이 참 예배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칼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배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며, 예배의 기본과 공동된 기독교 전통은 성경이 제공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성경은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이루는데 필수요건임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1항에는 예배의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참하나님을 예배하는 기꺼이 수납될 방법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의해 제한되어서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이나 사단의 시사에 따라, 어떤 유형한 표현이나 기타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 받지 않게 하셨다." 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볼 때, 음악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방법으로 교회예배에 사용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자들의 외침처럼 "성경으로 돌아가자" 예배 중에 음악의 사용이 성경에 근거하여 그 위치를 정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개혁주의 교회는 예배음악을 사용할 때 사상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둔 신학적 평가와 지침을 통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생각한다. 개혁주의 예배음악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이 성경에 기초하여 사용되어지는 음악이기 때문에 성경적인 교훈을 찾는 것은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예배음악에 대한 객관적이며 건전한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 '교회사적인 조명'을 통하여 예배음악의 모습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올바른 지침을 제공받는 일도 중요하다 생각한다. 우리 개혁주의 예배음악의 기본적인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서 구원자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성경과 2000천년의 기독교 역사는 매우 중요한 요건으로 생각한다. 이때만이 참된 예배의 요소로서 예배음악이 자리를 잡게 될 것이고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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