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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艮齋 田愚와 醒菴 李喆榮의 性理思想의 同異와 特徵

        임옥균 간재학회 2012 간재학논총 Vol.14 No.-

        이 글에서는 간재 전우와 성암 이철영(1867~1919)의 성리사상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간재학회의 활동을 통해 간재는 많이 알려졌으나, 이철영은 많이 알려진 학자는 아니다.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다룬 논문으로는 최효식의 「성암 이철영의 생애와 사상」이 있고, 금장태·고광직이 『유학근백년』에 그 대강을 설명하였다. 성암의 성리사상을 단독으로 다룬 논문은 아직 없으며, 이상익의 석사논문이 호락논쟁과 그의 성리사상을 연결하여 연구한 유일한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 백원철은 성암의 항일 행동을 다루었고, 박우훈은 성암이 부녀자 교육을 위해 쓴 저술인 『內範要覽』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는 간재와 성암의 성리사상의 동이와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두 사람이 직접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했던 명덕설에 관한 논변을 먼저 검토하고, 기호학파라는 공통의 입장에서 같이 비판했던 화서 이항로와 노사 기정진의 학설에 대한 비판을 검토한 다음,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의 심성론을 나름대로 정리하고자 했던 간재의 성사심제설과 성암의 성삼양설을 검토하는 순서로 논문을 진행하고자 한다.

      • 瑞巖 金熙鎭의 학문과 사상

        노평규 간재학회 2012 간재학논총 Vol.14 No.-

        본고는 간재학이 근현대에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의 일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간재의 재전 제자 중 瑞巖을 택하여 그가 무슨 공부를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를 밝혀보려고 한 것인데 다만 선행 연구가 없으므로 극히 초보적인 연구만을 진행하였다. 서암은 西坪 金基尙을 통해 율곡을 유학의 정맥으로 알게 되었고 悳泉 成璣運과 陽齋 權純命의 인도로 간재학으로 들어갔다. 다만 덕천, 양재에게 배웠기에 간재학파의 2파중 敎學을 더욱 중시하는 학맥을 이었다. 서암은 간재 이래의 명덕심설을 견지하고 松潭 李柏淳의 명덕성론을 비판하였다. 서암은 夷狄禽獸인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性을 실현하는 정치라고 한다. 그는 서양의 유물론이나 유심론으로 나라나 세계를 바로 다스릴 수 없고 오직 유학의 惟性論으로만 가능하다고 한다. 서암의 생애에서 가장 두드러진 서당교육은 다분히 종교적, 유교적인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극복해야 할 몇 가지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서암은 본래 종교성이 강한 간재학이 현대에 서당교육을 통해 현실에 적응해간 좋은 실례이다. 현대 유교의 중흥책이 넓게는 간재학 안에서, 좁게는 간재의 재전세대인 서암 등의 세대 안에서 찾아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 裕齋 宋基冕의 性理思想 -「病中散筆」을 중심으로-

        소현성 간재학회 2012 간재학논총 Vol.13 No.-

        간재사상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간재 사상 자체에 대한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간재 이전의 유학사상이 간재에게 어떻게 계승되고 해석되는지 그리고 간재의 사상이 그의 후학들에게 또 어떻게 전승되고 이해되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전자는 간재의 유학 사상에 대한 철학적․구조적 그리고 분석적 연구라면, 후자는 간재사상의 성립 배경과 후학들에 의한 계승의 양상을 사상사적이고 지성사적인 시각에서 연구하는 일이다. 특히 후자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개항과 국권침탈, 일제의 식민통치, 민족분단과 한국동란으로 이어지는 엄중한 역사 현실에서 유학 특히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전통과 사상이 어떻게 그 명맥을 유지하며 끈끈하고 내밀하게 전승되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연구이기도 하다. 유재 송기면의 성리사상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간재 이후 조선의 유학은 더 이상 생산적이고 새로운 담론체계와 이론을 구축하지 못한 채 극복과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그렇다고 그 명맥마저 끊긴 것은 아니었다. 간재 문인과 후학들은 한반도는 물론이거니와 멀리 만주와 간도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흩어져 간재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 전파하며 살았다. 유재 역시 그런 역할을 자임했고 훌륭하게 수행했던 인물이다. 유재는 40세 전후를 기점으로 석정 이정직 문하에서 간재 전우의 문하로 학문적 방향을 전환한 인물이다. 석정 문하에서 그는 주로 세상을 경영해 보겠다는 적극적인 경세의 의지를 갖고 있었으며, 시문과 서화에 관심을 쏟았다. 특히 석정을 종학하면서 훈도된 실학적 경향이 그의 학문과 사상에도 비교적 강하게 드러났던 시기였다. 그에 비해 후반기의 유재는 간재를 종학하면서 성리학으로의 사상적 전환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裕齋集卷」2 「雜著」에 수록되어 있는 「病中散筆」이다. 「病中散筆」은 성리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유재의 유일한 저작이다. 이 글은 「病中散筆」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유재 성리사상의 내용과 특징을 밝혀보려는 시론적 작업이다. 「病中散筆」은 그 내용이 소략하고 유재의 성리학적 관점이 상세히 제시되지 않아 그의 성리사상을 새롭게 구조화하기는 어렵지만, 그 특징은 비교적 선명하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유재는 “性”을 핵심 개념으로 하여 간재의 性師心弟說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 石農 吳震泳의 衛正斥邪 義理精神

        선병삼 간재학회 2011 간재학논총 Vol.12 No.-

        石農 吳震泳(1868-1944, 字: 而見, 號: 石農)은 조선의 국운이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에 접어든 그 시절, 조선왕조의 실질적 마지막 황제인 고종 5년 2월에 忠北 鎭川 栢谷面 葛月里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조부의 훈육을 받고 학문에 매진하던 그는 18세에 조부의 명으로 艮齋를 만나게 되고 마침내 30세에 정식으로 글을 올려 師生의 의리를 맺는다. 10여 년의 숙고와 연마를 거친 후에 맺은 사생의 의리는 석농의 일생을 두고 한 치도 어긋나지 않으며 결국 스승의 의발을 전수받은 수제자가 된다. 이후 석농은 스승이 세상을 등지자 艮齋가 마지막으로 기거하며 강학했던 繼華島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忠北 陰城에 지은 望華齋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한해 남긴 1944년 8월에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석농이 살았던 시대는 외세의 침입과 국내의 모순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혼란하기 그지없던 시대이요 우리민족에게는 다시없는 비극의 시대였다. 이 시기 조선유자들의 대표적인 논쟁은 心論이었다. 성주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의 寒洲學派에서 주장하는 心卽理, 퇴계의 정맥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영남지역의 定齋學派에서 주장하는 心合理氣, 위정척사의 맹장들을 많이 배출한 기호지역의 華西學派에서 주장하는 心主理, 존화양이를 소리 높여 외친 호남과 강우지역의 蘆沙學派에서 주장하는 心之明德, 그리고 독선수훈과 순정의리에 기반하여 후진양성에 매진한 호남과 충청지역의 艮齋學派에서 주장하는 心是氣. 이들은 모두 비록 심설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강조점이 달랐지만 절대가치로서의 理를 최고이념으로 삼는 主理論에 기반한 성리설에서는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理가 곧 華요 正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理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성리학자들의 의지가 서로 다른 심설로 전개되었듯이 尊華攘夷와 衛正斥邪에 대한 구체적인 전개에 있어서도 다소 상이한 모습을 갖는다. 특히 일본이 조선왕조를 좌지우지한 이후에, 어떤 식으로 衛正하여 尊華하고 攘夷하여 斥邪할 것인가에 대해서 艮齋學派는 한주학파나 화서학파와는 비교적 다른 입장을 보인다. 한주학파와 화서학파가 參與鬪爭에 적극적이었다면 艮齋學派는 獨善垂訓을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이 일반적으로 艮齋學派의 의리론을 논할 때 늘 거론되는 대목이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艮齋學派의 의리론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艮齋學派를 繼承한 석농의 의리론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서, 석농이 주장한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의 요체는 “출처의리의 엄정함.”과 “성리학의 분명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때가 아니면 물러나와 獨善其身하는 守身이 바로 출처의리의 엄정함이요. 主理論을 주장하면서도 太極無動靜을 주장하고 心是氣를 주장하는 것이 바로 주자 성리학의 분명함이라고 할 수 있다.

      • 艮齋의 朱子經學思想에 대한 繼承發展 : 艮齋?論語講說의 朱子?論語集註에 대한 보충

        傅武光 간재학회 2010 간재학논총 Vol.11 No.-

        艮齋선생이 朱子의 학문을 계승하여 저술한?四書講說?은 朱子?四書章句集注?를 보충함이 대담히 크다. 대체로 간재선생은 朱子의 理氣論과 心性論을 기초로 하여 朱子?集注?중의 중요한 개념과 핵심 용어들을 검증하고 논술하였다. 본 논문은 간재선생의?論語講說?부분에서 朱子?論語集注?에 보충의 공로가 어디에 있는가를 논술하였다.요약하면, 대략 네 방면이다:첫째는 “주자로 주자를 설명하는 것”(以朱申朱), 즉 주자의 학술로 朱子注釋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둘째는 “주자에서 잘못된 것을 보충하는 것”(裨補朱失), 즉 朱注에 확실하지 못한 곳은 다른 관점으로 검증하여 바르게 보충하였다. 셋째는 “程說의 실마리를 잡는 것”(紬繹程說), 즉 주자는 二程子를 私淑하였고, 集注는 程說을 인용하였으니, 착오가 많은 부분을 간재선생이 대부분 이를 疏解하여 朱注를 검증하였다. 넷째는 “이단을 반박 배척하는 것”(闢斥異端), 즉 佛家와 道家및 陸王學派를 배척하였다. 네 방면을 종합하면, 간재선생의 朱子?論語集注?보충에 위대한 공헌을 모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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