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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후보

        Hydraulic Theory and Hydraulic Engineering Projects of the Wusong River (吳淞江) Basin Between the Sixteenth and Nineteenth Centuries

        Chung Chulwoong(정철웅)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5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20 No.1

        이 논문은 명ㆍ청시대 강남 지역의 전반적인 수리 체계와 당시 활발하게 전개된 수리 공사가 지닌 의의를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명ㆍ청 두 왕조는 대규모 준설 공사의 지속적인 시행을 통해, 국가 세수의 확보와 농민의 생산 활동 보장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그러나 수리 체계 자체의 악화, 과다한 비용, 여러계층의 이해관계 때문에 대형 수리 공사는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이미 16세기부터 단편적이며 현실성이 있는 소규모 수리 공사에 대한 관심이 등장했다. 한편 사회경제적 변화가 한층 더 진전된 청대에는 강남 지역에서 폭넓게 전개된 상업 작물의 확대로 수리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수리 시설에 의지한 단순한 곡물생산이 아닌 다양한 경작을 통해, 개선의 여지가 희박했던 수리시설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6세기 이후 강남 지역의 다양한 상업 작물 재배나 수공업 발전은 비효율적이었던 수리시설에서 비롯된 또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제약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형 수리 공사가 반복적으로 진행된 이유는 분명 江南 지역이 지닌 경제적 중요성과 함께 治水가 지닌 본래의 理想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attempts to explore the significance of the overall water control system and numerous water control projects in the Jiangnan region. Through a series of large-scale dredging projects, the Ming and Qing Dynasties attempted to achieve the goals of securing national tax revenue and guaranteeing the production activity for the farmers. However, due to the weakened hydraulic system, excessive expenses, and interests on various levels, large-scale hydraulic engineering projects were unable to achieve their original goals. Starting in the sixteenth century already, interests about practical one-time hydraulic engineering projects on a small scale began to surface. Meanwhile, in the Qing Dynasty, when the socio-economic transformation developed more, a new awareness of hydraulics surfaced due to the expansion of commercial cultivation over a large amount of land in the Jiangnan region. This was the result of an attempt to break away from the heavy dependence on water control facilities that had little room for improvement by growing a variety of plants and crops instead of focusing solely on simple grain production. Therefore the cultivation of a variety of commercial crops and plants and the development of the handicraft industry in the Jiangnan region since the sixteenth century are two aspects of Chinese society that resulted from ineffective water control facilities. However, despite these limitations and failures, large-scale hydraulic engineering projects were carried out repeatedly due to the economic importance of the Jiangnan region and to the efforts to achieve the ideals of flood control.

      • KCI등재

        “양순음역(陽順陰逆), 승극출겁(乘隙出劫)”

        정철웅(Chung Chulwoong) 동북아역사재단 2017 東北亞歷史論叢 Vol.- No.58

        이 논문에서는 상서 지역 일대에서 발생한 소수민족 반란을 통해 명초(明初) 이래 유지된 토사제도(土司制度)의 한계를 반란과정에서 드러난 토관(土官)들의 행태를 통해 살펴봤다. 오채(五寨)와 간자평(筸子坪) 장관사(長官司)의 설치과정에서 드러나듯, 매우 불완전한 채로 시행된 명 초 토사제도는 대토사(大土司) 위주의 정책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소토사(小土司)들과 생묘(生苗)는 소수민족지역에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명 왕조의 군사력에 도전했으며, 이러한 군사적 도전에 명 왕조는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명(明) 가정(嘉靖) 연간의 묘족 반란을 통해, 토관들의 결합, 이해관계에 따라 자주 태도를 바꾼 토사들의 이반 현상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일부 토관들은 대담하게 관군에게 인질을 요구하거나,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대가로 반란 지역 토지를 요구하는 사례도 등장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당시 토관들이 소수민족 지역에서 상당한 정치적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명 왕조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심지어 토관에게 금전을 지급하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토관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데 골몰했다. 당시 명 왕조는 이런 토관들의 행태와 토사제도의 문제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군사적 진압으로 일관했다. 결국 토관들의 이러한 비협조로 반란을 완전히 진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따라서 명 왕조는 명 중엽 이후 많은 군사 시설물의 신설과 확충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사실상 그것은 소극적인 방어 전략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명 중엽 건설된 변장(邊牆)이 방어적 기능 외에, 생묘(生苗) 지역에 대한 통제를 의식적으로 회피한 일종의 군사 경계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생묘·숙묘(熟苗)·한인(漢人)들이 뒤섞여 있었으며, 반란 진압에 나선 관군조차도 다양하게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명대 이 지역은 분명히 착종(錯綜)의 세계였다. 이처럼 다양한 사회를 토사제도를 통해 일률적으로 통치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렇게 볼 때, 강희(康熙) 19년(1680) 진주지부를 지낸 유응중(劉應中)이 변장의 재건에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변장 문제는 진주(辰州) 한곳이 아닌, ‘전초지보장(全楚之保障)’의 문제라는 사실을 강조한 건 매우 의미있다. 결국 강희제(康熙帝)가 개토귀류의 전면적인 실시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청초(淸初)를 지나, 옹정(雍正) 연간에 이르러 전면적인 개토귀류(改土歸流)를 단행한 이유는 무엇보다 호광(湖廣) 지역은 물론 소수민족 지역 모두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외견상 개토귀류는 토사제도에 내포된 토관·위소(衛所)·생묘·숙묘·한인 등의 다의성을 소수민족 대(對) 한족이라는 단일성으로 환원시킨 조치라 할 수 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자세한 규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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