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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종교신학에 대한 칼 라너의 기여

        이냐시오 사나,이영덕(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08 神學展望 Vol.- No.162

        본고는 칼 라너(Karl Rahner) 신학의 권위자인 이탈리아의 이냐시오 사나(Ignazio Sanna)가 독일 신학잡지 Theologische Quartalschrift에 기고한 것으로서, 우리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진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관한 연구논문이다. 라너가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면, 그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아마도 그의 명성에 걸맞게 많은 동의를,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논란을 가져온 이론이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열띤 동의를 얻는 이유는 그것이 현대인의 신관(神觀) 및 인간관(人間觀)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논란이 될 때에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정체성, 그리고 선교의 필요성 등이 논란이 될 수 있다는 염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중심으로 얽혀 있는 다양한 신학 주제들 때문에, 그것은 그와 연관된 영역들에 대한 연구 없이는 결코 올바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이를 언급하지 않지만, 필자는 이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성령론적, 사목신학적, 선교신학적 그리고 라너 고유의 초월신학적 관점을 비롯한 다양한 관점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비판?옹호하며, 교회가 라너의 신학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지를 그간의 교회 문헌들을 통해 밝힌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올바로 이해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로 작용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답을 준다.

      • KCI등재

        하이데거의 실존철학 개념에 대한 연구

        칼 라너,이영덕(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1 神學展望 Vol.- No.172

        우리들이 라너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 가운데 하나는 그가 하이데거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라너 본인도 자신의 학문에 스며든 하이데거의 영향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또 하이데거로부터 방법론적인 면에서 영감을 얻었음에 감사함을 표하지만, 자신의 신학을 내용면에서 하이데거의 사상과 연관시켜 해석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한다[참조: Karl Heinz Neufeld, Die Bruder Rahner: Eine Biographie(Freiburg: Herder 2004<SUP>2</SUP>), 110-123]. 우리는 이 논문 안에서 라너가 하이데거에 대해 취한 이러한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라너는 하이데거가 시도한 형이상학적 연구의 초월론적 전환에 호감을 보이며,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을 매우 체계적으로 요약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분석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며, 이것이 “무(無)를 위해 신을 희생”시키는 극단적 무신론으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고 이 위험을 경계하는 선에서 하이데거에 대한 수용이 종교적인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입장은 이 논문이 작성되기 전후로 출간된 「세계 안의 영」(Geist in Welt, 1939)과 「말씀의 청자」(Horer des Wortes, 1941)가 왜 무(無,Nichts)가 아닌 존재(Sein)의 지평에서 인간과 하느님,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밝혀내려고 시도하는지를 설명해주며, 동시에 하이데거에 대한 방법론적인 수용과 내용적인 거부가 이미 젊은 라너의 의식 안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논문의 특성상 저자가 프랑스어로 작성하면서 붙인 각주(이하 ‘저자 주’) 가운데 몇몇은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기에 한글 번역의 과정에서 생략했으며, 편집자 라펠트의 각주(이하 ‘편집자 주’)는 번역을 하되 편집이 아닌 논문의 내용과 관련된 각주만을 번역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역자 역시 각주(이하 ‘역자 주’)를 달았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 KCI등재

        오리게네스의 발자취를 따라서

        만프레트 하우케,이영덕(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2 神學展望 Vol.- No.176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의 작품을 접하는 독자 들은 그 내용의 난해함에 난감해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 내면으로 향하는 입구 조차도 찾지 못해 아쉬워하면서 발타살 독해를 다음으로 미루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독일어권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발타살 연구가인 만프레드 하우케(Manfred Hauke)는 이처럼 발타살에 접근하려 하지만 그의 방대하고 난해한 저서들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들을 위해 이 짧은 논문을 저술했다. 저자는 발타살의 신학의 출발점이요 핵심구조를, 이 스위스 신학자가 전통 형이상학의 주제인 ‘초월 범주들’(Transzendentalien)을 어떻게 이해, (재)해석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개괄적으로 그려낸다. 발타살의 창의성과 탁월함은 하느님의 계시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주제들을 그의 ‘삼부작’(Trilogie)[영광(Herrlichkeit), 하느님의 드라마 (Theodramatik), 하느님의 논리(Theologik)]을 통해 신학적으로 해석 및 재구성해낸 그의 업적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발타살은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단지 선험적인 영역에서 발생한 비주제적 사건이 아닌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이로써 발타살은 칼 라너(Karl Rahner)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발타살의 이 철학적, 신학적 경향은 오리게네스(Origenes)의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더 풍부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논쟁을 피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우케는 특별히 발타살의 ‘만유구원 론과’과 ‘지옥’에 대한 관점을 비판적으로 소개하는데, 이로써 발타살 역시 오리게네스와 마찬가지로 위대하지만 논쟁이 되는 신학자들의 반열에 들어선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타살이 여전히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KCI등재

        탈신화화와 신화가 상실된 시대의 신앙의 진리

        레오 쉐프칙(Leo Scheffczyk),이영덕(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5 神學展望 Vol.- No.191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을 수용해 그리스화(Hellenisierung) 되었다는 아돌프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의 주장을 둘러싼 논의가 수그러들지 않은 시점에서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 脫神話化)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해석학적 입장을 표방하는데, 이로써 독일 신학계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의 자기정체성을 묻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 두 신학자의 문제 제기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동안의 혼란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한 신학적 관심사의 전환으로 인해 아쉽게도 미완의 논의로 남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세속화 신학의 방법론으로 즐겨 활용되고 있다. 이 같은 배경을 이해할 때 우리는 레오 쉐프칙(Leo Scheffczyk, 1920-2005), 알로이스 그릴마이어(Alois Kardinal Grillmeier, S.J., 1910-1998) 그리고 요제프 라칭거(Josef Ratzinger alias Benedikt XVI, 1927-)와 같은 권위 있는 가톨릭 신학자들이 왜 이 지난 세기의 주제들(‘그리스도교의 그리스화’와 ‘탈신화화’)과 여전히 씨름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그 초기부터 신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신화에 대해서 충분한 검증과정을 거쳐 능동적으로 수용 및 배격하는 과정을 통해 복음 전파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저자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초대교회의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탈신화화’ 노력에 주목하지 않고, 과거의 기록이라는 이유만으로 성경과 교의를 신화와 동일시하는 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쉐프칙은 불트만의 ‘탈신화화’ 요구는 신학적 측면에서 그 타당성에 의심이 갈 뿐만 아니라 그 시도 자체에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된 신학적 사안에 대한 불충분한 연구는 전후 유럽 신학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서구 신학계의 논의가 유입되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후속연구가 이어지지 않는 국내의 신학계 및 종교계에 ‘탈신화화’는 마땅한 반론이나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여전히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쉐프칙 추기경의 연구는 이 신학적 사안을 둘러싼 오해를 해소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KCI등재

        영과 물질의 통일성에 대하여

        칼 라너(Karl Rahner),이영덕(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3 神學展望 Vol.- No.181

        칼 라너(Karl Rahner)는 1967년 잡지 Neues Forum의 제16권에 이 논문을 기고하면서 당대에 레스책 콜라코브스키(Leszek Kolakowski)의 “부정적 신비주의로서의 유물론”(“Materialismus als negative Mystik”, Neues Forum, Juni-September, 1965), 아르민 뷜더무트(Armin Wildermuth)의 “그리스도교적 유물론”(“Christlicher Materialismus”, Neues Forum, Marz 1966),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계시로서의 유물론”(“Materialismus als Enthullung”, Neues Forum, Januar 1967)에 의해 전개된 유물론 논쟁에 참여한다. 영과 물질의 관계는 철학과 신학 안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져 왔던 주제이다. 육체를 영혼이 머물고 있는 장소로 보는 관점이 있었는가 하면, 육체가 영혼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또는 영을 그저 인간 상상력의 산물로 취급하면서 물질만을 강조하는 입장도 있었다. 이에 직면해 라너는 영과 물질이 두 개의 서로 완전히 구분되는 존재방식이 아니라 한 존재자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접근방식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므로 라너에 따르면 창조물 중에 그 어느 것도 순수한 영으로서 또는 순수한 물질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존재자는 영적인 물질이며, 더욱더 영적인 물질로 발전하는 방향으로 정향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육신의 부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논문에 나타난 라너의 입장을 이해한 후 『세계 내의 영』(Geist in Welt)이나『말씀의 청자』 (Horer des Wortes)와 같은 그의 주요 저작들을 읽는다면 이 저작들이 다소 수월하게 읽혀질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 KCI등재

        이슬람의 탄생과 초기역사

        칼 하인츠 올리히(Karl-Heinz Ohlig),이영덕(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7 神學展望 Vol.- No.196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이 세 종교는 아브라함 종교로 분류된다. 그들의 뿌리가 유다교의 시조 아브라함이기 때문이다. 이 중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교회는 유다교와의 연속성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슬람도 유다교와의 역사적 관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긍정적 수용보다는 자신의 독립적인 뿌리를 강조하면서, 최후의 예언자 모하메드와 그에게 내려진 신적 계시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슬람은 신적 의지가 직접적으로 전개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의식(自意識)을 뒷받침 하는 역사적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독일 사를란드 대학교(Universität des Saarlandes)의 종교학자 칼 하인츠 올리히(Karl-Heinz Ohlig, 1938-)의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그 결과를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그리스도교에는 이미 익숙해진 역사-비평적 연구를 코란에 적용해 이 종교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진행한다. 이제 코란은 고문서학적, 역사-비평적 접근의 대상이 된다. 이에 더해 화폐학과 건축물에 각인된 문구들에 대한 분석이 진행된다. 이를 통해 올리히는 코란이 모하메드보다 그리스도교적 주제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 그리스도교란 니케아 공의회 이전 시리아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성부(聖父) 중심적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이들은 3세기 중반 남투르크메니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지만, 그곳에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한다. 이 신앙이 주변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거치면서 이슬람 신앙으로 발전했다는 것이 올리히의 주장이다. 올리히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밝혀진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종교사적, 코란사적 이해가 오히려 이슬람을 풍성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교가 계몽기라는 도전의 시기를 자기반성의 시기로 승화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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