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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奉使日本時聞見錄』을 통해 본 조일문사 간의 필담과 그 의미

        황현우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24 石堂論叢 Vol.- No.88

        종사관 자격으로 무진사행(1748)에 참여했던 조명채는 ‘報告’와 ‘復命’의 의도를 목적으로 한 사행록 『봉사일본시문견록』을 저술하였다. 특히 조명채는 조선 문사와 일본 문사 간의 필담 내용을 미야케 타케시(三宅斌), 막부 유관인 린케(林家) 문인, 나카무라 란린(中村蘭林)이라는 세 그룹을 중심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통신사 부사 서기 유후는 오사카(大坂)에서 이즈미(和泉) 지역의 어린 문사 미야케 타케시와의 필담에서, 그에게 의복·석전·학교 등 여러 예악제도에 관해 질문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서 그의 독서목록의 파악을 통해 그의 학문적 지향에 대해 확인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일본 학술 문단의 상황에 대한 질문을 통해 주자학 존숭 의지에 대해서도 확인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통신사 문인들은 에도(江戶)에서 막부 유관인 린케(林家) 태학두 부자와 함께 나카무라 란린이라는 일본 문사를 함께 만나게 된다. 조선 문사들은 막부 유관인 린케(林家)와의 필담을 통해 그들이 오랫동안 무사정권의 문형을 세습하며 무사안일하게 그들의 명예만 지키려 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 문인들은 주자학을 통해 동류의식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문 실력이 날로 떨어지고 있다고 여겼으며, 오히려 고학파 계열 문인들보다도 못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조명채는 린케의 시문 실력과 일본 문단, 막부에서의 영향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 상황을 사행록에 기록하였다. 오히려 조명채는 후에 고학파를 따르는 이단으로 치부된 나카무라 란린과의 필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명채는 란린과의 필담에서 그가 통신사에게 일본 고서의 목록들을 제시하여 일본에 중국·조선에도 전하지 않는 고서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도 하며, 삼국의 역사서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도 한다. 이를 통하여 조선 문사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조명채는 그의 과시를 평가절하하기도 했지만, 중화문명을 흠모하며 삼국의 역사서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명채는 필담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고증을 중시하는 고학파의 성향을 드러낸 란린에 대해 최종적으로는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조명채는 『봉사일본시문견록』을 통해 ‘미야케 타케시’라는 幼學을 통해 일본의 국속을 탈피하고 예악문명을 실천하는 일본인의 존재를 포착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통신사 문인들은 주자학적 이념과 질서를 통해 일본을 예악문명으로 교화시키겠다는 입장으로 그들을 바라봤고 이를 사행록에 남겼다. 그리고 막부 태학두인 ‘린케(林家)’와의 필담을 통해 오랫동안 무사정권의 문형을 세습하며 무사안일하게 그들의 명예만 지키려 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나카무라 란린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존숭하는 자로 인식하지만, 나중에는 이토 진사이를 따르는 고학파로 인식하고 있다. 일본 문단에서 경서 및 조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통해 점점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고학파에 대해 의심과 비난 위주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통신사 문인들이 겉으로는 란린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실력에 대해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경계하고 탐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명채의 『봉사일본 ... Cho Myoung-chae(曺命采), who participated in the Mujin-Sahang(戊辰使行), wrote a meandering book, Bongsailbonsimungyeollok(奉使日本時聞見錄) , with the intention of 'reporting' In particular, The contents of the writing between Joseon and Japanese writers are recorded centering on three groups: Takeshi Miyake(三宅斌), Rinke(林家), and Ranrin Nakamura(中村蘭林). In a written conversasion with Takeshi Miyake, a young literary man in the Izumi area of Osaka, Yufu(柳逅) of Joseon asks questions about various institutions. In the following question, he shows an attempt to grasp his academic orientation through his reading list. It also shows an attempt to confirm the will to honor Zhu Xi(朱子) through questions about the situation of the Japanese academic literature. In Edo(江戶), Joseon writers met a Japanese literary man named Ranrin Nakamura with the shogunate-related father and son Rinke(林家). In their written conversations with the shogunate-related Rinke, Joseon writers describe them as those who have long succeeded in the form of the samurai regime and try to keep their honor carelessly. Joseon writers did not necessarily have a positive view of them just because they formed a sense of similarity through Neo-Confucianism(性理學). They thought that their poetry skills were falling day by day, and rather they were evaluated as inferior to those of the high school. Cho Myung-chae recorded this situation after learning that Rinke's poetry skills and influence in the Japanese literary world and the Japanese regime were becoming weaker. Rather, Cho Myoung-chae records in more detail his writing stories with Ranrin Nakamura(中村蘭林), who later followed the ancient studies. Cho Myoung-chae also shows off that there are old books in Japan that were not delivered to China and Joseon by presenting a list of old Japanese books to the news agency, and shows that they are trying to gain recognition from Joseon literature. Although Cho Myung-chae played down his display, he admired Chinese civilization and recorded an important interest in the history books of the three countries. However, as the writing progressed to some extent, Cho Myoung-chae became aware of Lan Lin, who expressed a tendency to value archaeology. Cho Myoung-chae's Bongsailbonsimungyeollok has the following meanings. Joseon writers, who had not recognized Japanese writers as counterparts of literary exchanges, recognized them as counterparts of literary exchanges to some extent through their writings and tried to find the possibility that Japan could be edified from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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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隨槎日錄』을 통해본 홍경해와 에츠 슈(越緝)와의 필담과 그 의미

        황현우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23 石堂論叢 Vol.- No.85

        Hong Kyung-hae(洪景海), who participated in the Mujinsahang(戊辰使行) in 1748, had many opportunities to talk with various Japanese writers due to his free position. It is recorded in “Susaillok(隨槎日錄)” in a large amount of content that he had written talks with Etsu shu, a Japanese writer who respects Zhu Zhuology(朱子學), on various topics. In Mujinsahang(戊辰使行), Conversation by writing is meaningful in that it shows an aspect of literary exchange between Joseon writers and Japanese writers in the 18th century, and that the perception of the Emperor's Yangwi(天皇讓位) system and criticism of koeuihakpa(古義學派) lead to vigilance and search for another sect, komunsahakpa(古文辭學派). 자제군관 자격으로 무진사행(1748)에 참여했던 홍경해(1725~1759)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직책으로 인하여 일본 사행 노정에서 여러 일본 문인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특히 이 중에서도 정주학을 존숭하는 일본 문인 에츠 슈(越緝)와 여러 주제로 필담을 나누었던 내용이 수사일록 에 많은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경해는 에도(江戶)에서 만난 에츠 슈를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그가 홍경해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통신사의 문사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을 내비친 점, 정주학을 힘써 존숭하는 태도와 조선의 예악문물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가졌던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 이를 통해 에츠 슈에게서 일본의 예악문물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하였다. 이후 이러한 동류의식과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여러 필담을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그는 에츠 슈에게 현재 일본 천황에 대해서도 질문하였다. 통신사로 선발된 문인들은 파견 이전 관련 서적을 익숙하게 읽어 천황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문사들은 약 1000년이나 지속되었던 천황의 독특한 양위제도인 인세이(院政)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는 고의학파의 이토 진사이(伊藤仁齋)와 그의 저서 동자문 에 대해 언급하며 정주를 헐뜯고 특이한 말을 앞세운다라고 비난하였다. 겉으로는 주자학를 존숭하는 태도를 보이며 통신사와 필담을 나눈 나카무라 란린(中村蘭林)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주자학을 존숭하지만 이토 진사이의 무리와 같다라고 비난하고 에츠 슈와의 필담에서 그의 학술적 경향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진사행의 두 사람 간의 필담은 18세기 통신사 문인들과 일본 문사와의 문학교류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 조선의 시각과 필터로 바라본 천황 양위제도에 대한 인식, 고의학파에 대한 비난이 경계와 탐색으로 이어지며 또다른 유파인 고문사학파에 대한 경계와 탐색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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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8년 通信使行 筆談唱和集 『星軺餘轟』에 관하여

        황현우 동양한문학회 2016 동양한문학연구 Vol.45 No.-

        This paper discusses the 1748 Tongshinsa(通信使) seongchoyeogoeng(星軺餘轟), A collection of Written Conversations and Poems introduce briefly on the features the composition and content. As a collection of data in Nagoya hosa, Bookstore (名古屋市 蓬左文庫) is seongchoyeogoeng appendix(附錄) of Two in the first volume of books. the author of the seongchoyeogoeng(星軺餘轟) is KINOSHITA Ranko(木下蘭皐,1681~17 52), and Owari Domain (the Nagoya area, 尾張藩) role of the entertainment and Tongsinsa. And these exchanges with literature did to Joseon scholars, PARK-Kyeon gHang(朴敬行), LEE-MyeongGye(李命啓), and LEE-BongHwan(李鳳煥), Yoo-hoo(柳逅). This book is again when they first arrived in Nagoya(名古屋) and choseon(朝鮮) to return to Nagoya when you arrived at the noted literary exchanges between the two days of the book. seongchoyeogoeng(星軺餘轟) the configuration you look at conversation(筆談) and the poem(詩) to disconnect can see it. The conversation(筆談) is being placed in front of choosing compilation of the criteria to placed in the rear. In addition, opponents have separate content, but according to the ranko(蘭皐) and choseon scholar between a contents is located on the front. his son kigen(希元) and choseon scholar between a contents is located on the back. This is intentionally pildamchanghwa the choseon scholars came, and ranko and kigen pildamchanghwa with a man of letters and an intentionally can be seen as an attempt to separate. seongchoyeogoeng(星軺餘轟) features the contents of speaking, the 1748 tongsinsa (己亥使行), ranko to scholars of the former tongsinsa(1719年 通信使行) when tongsinsa jesulgwan(製述官) SHIN-YooHan(申維翰) and Seogi(書記) KANG-Baek(姜栢), and JANG-EungDu(張應斗),SEONG-MongRyang(成夢良) ties woven the exchanges at the time did while introducing the records gathered all the pildamchanghwa(筆談唱和). The ranko(蘭皐) the boundaries of the seam through these two carriers may coordinate to aiming the effect of being broke. Often reflect concern at the time of publication, but is seongchoyeogoeng(星軺餘轟) If you look at somebody's conversation by writing can read the signs for such attention. Who was recognized as just until the 17th and 18th century paintings and signature injang(印章) and inbo(印譜) are getting collection and hobby among writers, became the subject of study. In record book about this appearance. regimen(攝生) and healthy lifestyle(養生), medical publishing pildamchangwhazip(筆談唱和集) are actively used to be when made a healthy interest in life and of the background and writers. Will appear together. Who started to emerge since the early 17th century pildamchangwhazip(筆談唱和集) was published as showering when he entered the 18th century. Configuration that was not perfect in the 17th century and topics into the 18th century that was located only the writers of simunchanghwa(詩文唱和) when constructive in terms of some structured to start in. Started in the form and, music, literature as medicine, music, painting, not only began to diversify. These pildamchangwha in changes in seongchoyeogoeng(星軺餘轟) this settled, and seongchoyeogoeng(星軺餘轟) for changes in construction or the subject of pildamchangwha(筆談唱和集), changes in the 18th century through.Side can to some estimates. 본고는 1748년 通信使行의 筆談唱和集 『星軺餘轟』의 구성과 내용적 특징에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星軺餘轟』은 나고야시 호사문고(名古屋市 蓬左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로 「附錄」을 포함하여 1권 2편(전편, 후편)의 필담창화집이다. 『星軺餘轟』의 저자는 키노시타 란코(木下蘭皐, 1681~1752)이며, 오와리 번(尾張藩, 지금의 나고야 지역)의 藩士이며 通信使 접대의 역을 맡은 인물이다. 그리고 란코와 그의 아들 希元과 함께 筆談唱和를 나눴던 조선 측 문사는 제술관 박경행과 삼사 서기 이봉환, 이명계, 유후 등이다. 『餘星軺轟』은 이들이 나고야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고야에 도착했을 때의 이틀 간의 筆談唱和를 기록한 책이다. 『星軺餘轟』의 구성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筆談과 唱和詩를 따로 분리하여 筆談을 앞에 배치하고 詩를 뒤쪽에 배치하는 편찬기준을 택하고 있다. 또, 필담창화 상대에 따라서 내용이 분리되어 있는데, 란코와 조선문사 간의 筆談唱和를 한 내용이 앞쪽에 배치되어 있고 그의 아들 希元과 조선문사 간의 筆談唱和를 한 내용이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의도적으로 란코와 조선문사들과의 필담창화, 希元과 조선문사와의 필담창화를 의도적으로 분리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星軺餘轟』의 내용적 특징을 몇 가지 언급하자면, 란코는 1748년 사행의 문사들에게 이전 通信使行인 己亥使行(1719) 때 통신사 제술관인 신유한과 삼사 서기 강백, 장응두, 성몽량과 筆談唱和를 했었던 인연을 소개하면서 당시에 시문창화를 했던 기록들을 엮은 필담창화집을 주었다. 란코는 이 두 가지를 통해 통신사의 경계심를 허물고 필담창화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筆談唱和集은 간행 당시의 관심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星軺餘轟』의 필담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관심에 대한 흔적을 읽을 수가 있다. 17~18세기 이전까지는 단지 몇 명의 신분의 증명이나 서화 따위로 인식되던 印章과 印譜가 문인들 사이에서 점점 收藏과 趣味, 硏究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에 대한 기록이 筆談唱和集에서도 출현하는 것이다. 攝生이나 養生에 대한 언급도 당시 의학관련 筆談唱和集의 출판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때의 시기적 배경과 문인들의 攝養에 대한 관심이 함께 맞물리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7세기 초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던 筆談唱和集이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쏟아지듯이 출간되었다. 17세기의 완벽하지 않았던 구성과 문인들의 시문창화에만 몰려있었던 주제가 18세기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부터 구성적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정형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으며, 주제도 문학 뿐만이 아니라 의학, 음악, 회화로 다양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필담창화집의 변화 안에 『星軺餘轟』이 자리잡고 있고, 『星軺餘轟』을 통해 18세기의 필담창화집의 주제나 구성의 변화 등에 대한 측면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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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8년 通信使行 筆談唱和集 󰡔星軺餘轟󰡕에 관하여

        황현우(黄,鉉堣,)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6 동양한문학연구 Vol.45 No.-

        본고는 1748년 通信使行의 筆談唱和集 󰡔星軺餘轟󰡕의 구성과 내용적 특징에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星軺餘轟󰡕은 나고야시 호사문고(名古屋市 蓬左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로 「附錄」을 포함하여 1권 2편(전편, 후편) 의 필담창화집이다. 󰡔星軺餘轟󰡕의 저자는 키노시타 란코(木下蘭皐, 1681~1752)이며, 오와리 번(尾張藩, 지금의 나고야 지역)의 藩士이며 通信使 접대의 역을 맡은 인물이다. 그리고 란코와 그의 아들 希元과 함께 筆談唱和를 나눴던 조선측 문사는 제술관 박경행과 삼사 서기 이봉환, 이명계, 유후 등이다. 󰡔餘星해 나고야에 도착했을 때의 이틀 간의 筆談唱和를 기록한 책이다. 󰡔星軺餘轟󰡕의 구성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筆談과 唱和詩를 따로 분리하여 筆談을 앞에 배치하고 詩를 뒤쪽에 배치하는 편찬기준을 택하고 있다. 또, 필담창화 상대에 따라서 내용이 분리되어 있는데, 란코와 조선문사 간의 筆談唱和를 한 내용이 앞쪽에 배치되어 있고 그의 아들 希元과 조선문사 간의 筆談唱和를 한 내용이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의도적으로 란코와 조선문사들과의 필담창화, 希元과 조선문사와의 필담창화를 의도적으로 분리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星軺餘轟󰡕의 내용적 특징을 몇 가지 언급하자면, 란코는 1748년 사행의 문사들에게 이전 通信使行인 己亥使行(1719) 때 통신사 제술관인 신유 한과 삼사 서기 강백, 장응두, 성몽량과 筆談唱和를 했었던 인연을 소개하 면서 당시에 시문창화를 했던 기록들을 엮은 필담창화집을 주었다. 란코는이 두 가지를 통해 통신사의 경계심를 허물고 필담창화가 원활히 이루어질수 있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筆談唱和集은 간행 당시의 관심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星軺餘轟󰡕 의 필담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관심에 대한 흔적을 읽을 수가 있다. 17~18 세기 이전까지는 단지 몇 명의 신분의 증명이나 서화 따위로 인식되던 印 章과 印譜가 문인들 사이에서 점점 收藏과 趣味, 硏究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에 대한 기록이 筆談唱和集에서도 출현하는 것이다. 攝生이나 養生에 대한 언급도 당시 의학관련 筆談唱和集의 출판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때의 시기적 배경과 문인들의 攝養에 대한 관심이 함께 맞물리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7세기 초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던 筆談唱和集이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쏟아지듯이 출간되었다. 17세기의 완벽하지 않았던 구성과 문인들의 시문창화에만 몰려있었던 주제가 18세기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부터 구성적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정형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으며, 주제도 문학 뿐만이 아니라 의학, 음악, 회화로 다양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필담창화집의 변화 안에 󰡔星軺餘轟󰡕이 자리잡고 있고, 󰡔星軺餘轟󰡕을 통해 18세기의 필담 창화집의 주제나 구성의 변화 등에 대한 측면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있을 것이다. 本稿は1748年通信使行の筆談唱和集󰡔星軺餘轟󰡕の構成と内容的特徴に 簡単に紹介したい。󰡔星軺餘轟󰡕は名古屋市蓬左文庫に所蔵されている資料 で 附錄 を含めて1冊2編(前編、後編)の筆談唱和集である。 󰡔星軺餘轟󰡕の著者は木下蘭皐(1681~1752)であり、尾張藩の藩士であ り、通信使の接待を担当した人物である。そして蘭皐と彼の息子希元とと もに筆談唱和をした朝鮮側の文士は、通信使製述官朴敬行(1710~?)と三 使書記李鳳煥(?~1770)、李命啓(1714~?)、柳逅(1690~1780)である。󰡔 餘星軺轟󰡕は、彼らが名古屋に初めて到着した時と再び朝鮮に帰るために 名古屋に到着した時の二日間の筆談唱和を記録した本だ。 󰡔星軺餘轟󰡕の構成を簡単に見れば、この本では両国の文士の筆談と唱和 詩が一緒に載せているが、筆談と唱和詩を別に分離して筆談を前に配置し て詩を後に配置する編纂基準を選んでいる。 また、筆談唱和相手によって 内容が分離されているが、蘭皐と朝鮮文士間筆談唱和をした内容が前に配 置されていて、彼の息子希元と朝鮮文士の間の筆談唱和をした内容がの後 に配置されている。これは意図的に蘭皐と朝鮮文士たちとの筆談唱和、希 元と朝鮮文士との筆談唱和を意図的に分離しようとする意図と見ることが できる。 󰡔星軺餘轟󰡕の内容的特徴をいくつか言及すれば、蘭皐は以前通信使行の己亥使行(1719)際、通信使製述官だった申維翰(1681~1752)と三使書記 だった姜栢(1690~1777)、成夢良(1673~?)、張應斗(1670~1729)と筆談 唱和をした縁を紹介し、当時に筆談唱和をした記録をつづった筆談唱和集 を与えた。蘭皐はこの二つを通じて、通信使の警戒心を崩して筆談唱和が 円滑に行えるような効果を狙っているのだ。 筆談唱和集は刊行当時の関心を反映する場合が多いが、󰡔星軺餘轟󰡕の筆 談を見ると、このような関心についた痕跡を読むことがある。17~18世紀 以前まではわずか数人の身分の証明や書画などと認識された印章と印譜 が、文人たちの間でだんだん收藏と趣味、硏究の対象になっており、こう した流れに関する記録が筆談唱和集でも出現することだ。摂生や養生に対 する言及も、当時医学関連筆談唱和集の出版が活発に行われた時の時期的 背景と文人たちの摂養に対する関心が一緒にあいまって、行われるように なったのだ。 17世紀初期から登場し始めた筆談唱和集が18世紀に入ってから降るよ うに出版された。17世紀の完璧ではなかった構成と文人たちの筆談唱和に 集中していた主題か18世紀に入り始めてから構成的側面でもある程度定型 の形をし始め、主題も文学だけでなく医学、音楽、絵画として多様化され 始めた。このような筆談唱和集の変化の中に󰡔星軺餘轟󰡕が形成されてい て、󰡔星軺餘轟󰡕を通じて18世紀の筆談唱和集の主題や構成の変化などに対 する側面をある程度推定できる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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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산유체역학 기반의 아음속 풍동 벽면효과 및 보정인자 분석

        황현우,태명식,정신규,박종서,박동훈 한국항공우주학회 2024 韓國航空宇宙學會誌 Vol.52 No.1

        다양한 항공기 모델 형상과 받음각, 풍동 시험부 크기의 풍동 시험 상황에 대한 전산유체역학 해석을 수행하였다. 작업 과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형상 모델링과 격자생성, 해석 과정을 자동화하였다. 시험부 벽면에서 얻어진 압력계수 결과와 벽면압력측정법의 개념을 사용하여 벽면효과 보정인자(△α, ε)를 획득하였다. 공력계수 비교와 계산된 보정인자 분석으로부터 벽면효과를 식별하고 확인하였다. 또한, 유동장 분석을 통해 벽면효과의 발생 원인을 분석하였다. 획득한 결과들로부터 잘 알려진 특성을 확인함으로써 보정인자 획득을 위해 구축한 방법의 신뢰성과 타당성을 확인하였다. Computational fluid dynamics analyses are performed for situations of wind tunnel testing with various aircraft model geometries, angles of attack, and wind tunnel test section sizes. To enhance the efficiency of workflow, the geometry modeling, mesh generation, and analysis processes are automated. Wall interference correction factors(△α, ε) are obtained by using the resulting pressure coefficient along the test section wall and the concept of the wall pressure measurement method. The wall interference effects are identified and confirmed from the comparison of aerodynamic coefficients and analysis of computed correction factors. The origin of the wall interference is also investigated by flow field analysis. By confirming well-known characteristics from the obtained results, the reliability and validity of the established method for the obtaining the correction factors are confir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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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성굴절검사의 방법적 비교

        황현우,신영민,박경일,김동현,윤민화 대한시과학회 2017 대한시과학회지 학술대회 Vol.2017 No.06

        목적: 현성굴절검사에서 조절력의 개입이 검사 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방법: 안과적 시술경험이 없고 안질환이 없는 성인 19명 38안을 대상으로 10분간 운무 후 강한 근시 상태에서 피검사자가 현성굴절검사에서 1.0시표를 읽을 때와 운무를 생략하고 1.0시표를 읽을 때를 비교하여 굴절이상도를 비교하였다. 결과: 양안의 S값의 합 평균이 2.24±2.50 D에서 2.47±2.08 D로 늘어나고, C값의 합 평균이 0.803±0.778 D에서 2.47±2.08 D로 늘어났다. S값의 변화에서는 운무를 사용하지 않을 때와 10분 운무를 했을 때의 변화는 약 0.2로 늘어나 유의한 차이가 있었다(P<0.05). C값의 변화에서는 운무를 사용하지 않을 때와 10분 운무를 했을 때 변화가 늘어났지만 유 의한 차이는 없었다(P>0.05). 하지만 축 값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결론: 현성굴절검사를 할 경우 피검사자의 조절력 개입이 최소화 된 상태에서 검사를 실시 하는 것이 정확한 시력측정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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