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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와 개혁 - 플라톤의 초기대화편에서 보이는 소크라테스의 ‘논박(e)/legxoj)’을 이데올로기 비판적으로 평가해 보려는 시도

        주광순 대동철학회 1999 大同哲學 Vol.4 No.-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체계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작업이 보수적 반동적인 것이 아니라 개혁적이었다고 여긴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그의 ‘논박’에 있다. 그의 시대에 한 때는 사회를 이끌어 나가던, 이상적 규범들이었던 ‘덕’들이 더 이상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모순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덕’들을 그냥 폐기처분하고 새로운 정치체제와 새로운 이상들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일차적으로 한 작업은 그것들이 부적절함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단지 소극적으로 비판에 그치고 만 것은 아니다. 비록 새로운 대안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대안으로 나아 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대화상대방에게 특정한 덕에 대해서 그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그의 답변을 논박한다. 그 논박의 과정은 덕이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참으로 ‘좋아야’ 한다는 점을 우선 환기시키고 나서, 이데올로기화한 전통적인 덕들이 과연 좋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 우스꽝스러운 실례를 든다. 예컨대 절제란 은인자중 하면서 천천히 행동하는 것이라는 귀족적인 견해에 대해서 만약에 격투하는 마당에 천천히 행동하는 것이 좋으냐고 반문한다. 이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이 절제관은 고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한 덕들의 허구를 보여주기 위해서 토론자들을 일상적인 콘텍스트를 떠난 상황에다 몰아 넣어서 이래도 좋으냐고 묻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에는 기술과의 유비를 통해서 제대로 된 덕이 갖추어야 할 원리를 제시하고 전통적인 덕개념이 이 원리에 맞지 못함을 보여 준다. 예컨대 정의가 일상적으로는 지배계급의 이해타산을 반영하기 때문에 피지배계급의 불이익이고 그 때문에 불의를 행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 기술의 예로부터 유비추론하여 논박한다. 기술이란 기술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대상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에 상응하자면 정의도 정의의 기술자인 정치가의 이익이 아니라, 시민의 이익을 도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통적인 덕개념들을 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Sokrates hat keine neuen gesellschaftlichen Systeme als Ersatz der alten dargeboten. Trotzdem ist er meiner Meinung nach weder reaktionä noch konservativ, sondern progressiv. Meine Behauptung stüzt sich auf die Struktur seiner Widerlegung. In seiner Zeit haben die Tugenden, die als Ideal einmal die Gesellschaft geleitet haben, ihre Macht verloren und sogar als Ideologie fungiert. Er hat aber nicht die veralteten Tugenden aufgeben und sie durch die neuen ersetzen; eher wollte er sie von dem ideologischen Charakter reinigen und sie verteidigenswert machen. Er hat die alten Tugendbegriffe wegen ihrer Ungütigkeit und der Unzulälichkeit kritisiert. Aber seine Arbeit geht üer ihre bloße Kritik hinaus; wenngleich es zu einer positiven Beantwortung nicht kommt, fehlen Ansäze zur richtigen Löung nicht. Sokrates fragt nach einer bestimmten Tugend und widerlegt falsche Begriffsbestimmungen. Oft beginnt der sokratische Elenchos mit der Feststellung, daß jede Tugend wirklich gut sein muß, und zeigt daß die ideologisierte Tugend nicht so sein kann. Fü den Ringkäpfer z.B. könen 'Bedähtigkeit und Langsamkeit` gar nicht gut sein, und daher kann die traditionalen Auffassung der Besonnenheit als 'Bedähtigkeit und Langsamkeit` unmölich stimmen. Durch solche merkwüdige Widerlegung konnte Sokrates zeigen, daß sich die gewönlich als selbstverstädlich hingenommene Auffassung unter einer anderen Situation als ein Irrtum erweist. Außerdem benutzt er den Analogieschluß, um das richtige Prinzip fü die Ethik zu finden. In der Wirklichkeit dient die sogenannte Gerechtigkeit dem Nutzen der Herrschenden. Das kritisiert Sokrates durch den Analogieschluß der Gerechtigkeit mit der Kunst; jede Kunst ist fü ihren Gegenstand nüzlich, analog soll die Gerechtigkeit auch ihren Gegenstand födern. Auf diese Weise hat Sokrates die veralteten und ideologisierten Tugendbegriffe reinigt und wieder zum wirklichen Ideal zu machen versucht.

      • KCI등재

        상호문화철학과 자신학화(self-theologizing)

        주광순 대동철학회 2021 大同哲學 Vol.94 No.-

        이 글은 자신학화(self-theologizing)를 상호문화철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한국의 보수적 선교학계에서 서구 신학의 전통을 벗어나서 스스로 신학하고자 하는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것이 자신학화이다. 한국 교회가 급속히 성장 하기는 했지만 그 신학은 서구 신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신학적 식민주의이 다. 이런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히버트는 자신학화를 요청한다. 이것은 상호문화철학의 노력과 많이 유사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편에서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자신의 상황 하에서 주체적으로 신학하려는 노력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 극단적인 문화상대주의도 비판 하여 기독교를 사회적 유용성에 의해서만 평가하지 않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학화가 신학을 상황화하지만 종교다원주의나 문화상대주의 는 반대한다. 상호문화철학적으로 볼 때 자신학화는 강자의 중심주의인 서구 중심주의 비판이면서도 약자의 중심주의인 민족주의 비판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식민 제국주의의 단일문화주 의에 반대하면서도 민족주의의 단일문화주의도 비판한다. 자신학화가 한쪽 극단인 경직된 절대주의인 비상황화(non-contextualization)와 다른 극단인 상대주의인 무비판적 상황 화를 모두 피하는 비판적 상황화이다. 이것도 역시 상호문화철학과 같은 생각이다. 비판적 상황화는 결국 초문화 신학을 목표로 한다. 초문화 신학은 개별 신학들이 자기 문화의 상 황 속에서 신학하는 것은 허용하면서도 문화적 다양성과 특수성을 초월해서 신학하려는 노력이다. 이것은 상호문화철학이 온건한 상대주의는 긍정하지만 보편을 지향하는 것과 일치한다. 다만 보편적인 초문화 신학의 실현 가능성은 의심스럽다. This article is an attempt to critically examine self-theologizing from the perspective of intercultural philosophy. In the conservative missionary world in Korea, the need to study theology on its own outside the tradition of Western theology is emerging. It is self-theologizing. Although the Korean church has grown rapidly, its theology has not separated from Western theology. This is theological colonialism. In order to escape from this situation, Hebert asks for self-theologizing. This is very similar to the efforts of intercultural philosophy. This is because, on the one hand, it is an effort to criticize Western-centrism and theologize subjectively under one s own circumstances, and at the same time, on the other hand, an effort to criticize extreme cultural relativism, trying to maintain its identity without evaluating Christianity only by its social usefulness. In other words, selftheologizing contextualizes theology, but opposes religious pluralism or cultural relativism. In terms of intercultural philosophy, self-theologizing means a criticism of Western-centrism, which is the centrism of the strong, and nationalism, which is the centrism of the weak. It also opposes the monoculturalism of colonial imperialism and criticizes the monoculturalism of nationalism. Selftheologizing is a critical contextualization that avoids both non-contextualization, which is rigid absolutism, which is one extreme, and uncritical contextualization, which is relativism, which is the other. This is also the same idea as intercultural philosophy. Critical contextualization ultimately aims at transcultural theology. Transcultural theology is an effort to transcend cultural diversity and specificity while allowing individual theology to theologize in the context of their own culture. This is consistent with intercultural philosophy affirming moderate relativism but aiming for universality. However, the possibility of realizing universal transcultural theology is doubtful.

      • KCI등재

        과학기술 사회에 대한 푸코의 비판적 입장 ― 상호문화철학적 관점에서

        주광순 대동철학회 2013 大同哲學 Vol.65 No.-

        우리 정부의 창조경제는 지식창조산업을 통해서 모든 사람의 행복에 도달하겠다고 주장한다.그런데 이는 베이컨의 과학적 유토피아와 유사해 보인다. 베이컨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발명을 통해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예상했던 것 못지 않게 과학기술과 발명이 넘쳐났지만 이상사회는 오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의 사회적 비전이 푸코가 계보학적으로 파악한 ‘통치성의 전개’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에 따르자면 근대국가에서 권력이 국가이성, ‘생명권력’, ‘통치성’으로 변해왔다. 그런데 베이컨은 국가이성을 지지한 학자이었다. 그러므로 해서 그의 과학사회는 이상적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경쟁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사회, 국가 간 무한 경쟁이 벌어지는 세계, 자연과 인간이 착취되고 파국으로 치닫는 세계로의 길을 열어 준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창조경제를 통해서 상호문화철학에서 우려하는 타자의 배제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진다. Die Kreativitätswirtschaft dieser Regierung behauptet, durch die Industrie des kreativen Wissens alle Menschen glücklich zu machen. Und diese Politik scheint der Utopie der Wissenschaft F. Bacons ähnlich zu sein. Bacon versuchte durch die Entwicklung der Wissenschaft-Technik und die Entdeckung eine Utopie aufzubauen.Aber obwohl unsere Gesellschaft voll von Wissenschaft und Technik und Entdeckung ist, wird die Utopie Bacons nicht realisiert. Der Grund dafür ist, dass seine soziale Vision einer Kategorie der Entfaltung der Gouvernementaltität angehört, die Foucault nach seiner Genealogie analysiert. Diesem gemäß hat die Machtsform des modernen Staates von der Staatsräson durch die Bio-Macht in die Gouvernementalität übergegangen. Und Bacon gehört zu der Bio-Macht. Daher ist seine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 kein Eingang zur Utopie, sondern zu der Gesellschaft der Konkurrenz und Leistung, der Welt, wo Staate unendlich sich gegeneinander konkurrieren, und der Welt, wo die Natur und der Mensch ausgebeutet werden. Daher scheint die Kreativitätswirtschaft unfähig zu sein, die Ausschließung des Anderen zu vermindern, um den sich die interkulrurelle Philosophie so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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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사회로서의 코로나 사회 - 가까움과 멂의 관점에서

        주광순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22 코기토 Vol.- No.96

        This paper hopes to contribute to overcoming the corona disaster. What we want is not simply to restore our daily lives, but to provide an opportunity for a better world. We will look at this problem in terms of proximity and distance, using Heidegger and Ulrich Beck as the framework of analysis. Ulrich Beck argues that industrial societies systematically and continuously produce risk factors, which, if exceeding the critical point, become global risks. This is a risk society. However, since risk is a social construction, it is not considered as a risk without social recognition. The industrial society has continued to grow by treating risk merely as a secondary result of growth, and has become a risk society as it is today. But Beck argues that if the risk becomes global, cosmopolitan would act in solidarity and engage in political action in the face of a common fear. Differently from Beck, Heidegger attacks the conventional notion that technology is a tool. Ethical and political requests like Beck's are possible because of this, but this is an illusion. Because technology is more than just a tool: it changes people's attitude to the world and enslaves them to it. And the technological worldview of our time sees the world as something human can grasp and arbitrarily change. This has created a risk like the corona virus. Therefore, in order to overcome the risk, we must step outside the technological worldview and see the world as it is(die Gelassenheit zu den Dingen) and open to its secrets(die Offenheit für das Geheimnis). 이 논문은 코로나 재앙을 극복하는 데에 기여하기 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가까움과 멂이라는 관점으로 볼 것이며 하이데거와 울리히 벡을 분석틀로 이용할 것이다. 울리히 벡은 산업사회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위험요소를 생산하는데, 이것이 한계를 넘으면 세계적인 위험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위험사회이다. 그러나 위험은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인정이 없으면 위험이 아닌데, 산업사회는 위험을 단순히 성장의 부차적 결과로 치부하여 성장을 계속해 오다가 현재와 같은 위험사회가 되었다. 그런데 벡은 위험이 점점 커져서 세계적이 되면 공통의 공포 앞에서 세계시민들은 연대해서 정치적 행동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서 하이데거는 기술이 도구라는 통상적 관념을 공격한다. 이 통념에 근거해서 벡과 같은 윤리적, 정치적 요청이 가능한데, 이것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기술은 단순한 도구 이상이어서, 사람들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변경하여 거기에 얽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시대의 기술적 세계관은 세계를 인간이 파악할 수 있고 임의로 변경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이 코로나와 같은 위험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술적 세계관을 벗어나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놓고 보며 세계의 비밀에 개방되어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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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고대 존재론과 용수의 존재론의 비교적 고찰

        주광순 대동철학회 2003 大同哲學 Vol.21 No.-

        서양의 존재론은 불변과 실체의 존재론이다. 불변과 동일성을 존재론의 최고 원리로 삼은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시작해서 플라톤이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변화와 다양성의 현실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존재란 불변의 일자라고 주장했던 것을 플라톤은 현실의 다양성은 인정하여 불변하는 무수한 이데아들로 발전시켰다. 이를 변화와 관련해서 실체 중심의 존재론으로 바꾼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이데아 대신에 실체를 중심에 내세움으로써 변화와 불변을 모두 해명하려고 했다: 변화 속에 있는 불변이 실체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는 서양철학적 전통 내에서는 자명하게 받아들여져서, 존재론적 논의의 중심을 이루어 왔다. 이와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존재론을 용수가 전개했다. 어떠한 것도 그 자체로는 無自性, 空이다. 다만 서로 서로 의존하여 성립한다. 그는 사물들이 서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통찰했다. 예컨대 선과 악, 인식과 인식주관, 실체와 속성, 실체와 질료, 실체와 형상, 원인과 결과 등이다. 그리고 이들 각각은 모두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 의존되어 성립한다. 그 때문에 이 둘은 완전히 하나라고도 그렇다고 해서 서로 전적으로 다르다고도 말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보자면 空하다. 다만 서로 서로 의존하여 성립될 따름이다. 이 전통은 또한 불교 속에서 이어져 내려온다. 이렇게 전혀 다른 그리스적 존재론과 용수의 존재론이 이어져 오며 발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전통은 모두 가능한 존재론적 선택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Die eleatische Seinskonzeption wie z.B. Unveränderlichkeit oder Identität hat die ontologischen Grundlagen des europäischen Denkens bestimmt. Parmenides ist der erste, der behauptet, dass das Sein unwandelbar und mit sich selbst absolut identisch sei, und das entwickelt Platon mit der Modifikation; während jener trotz aller Veränderlichkeit und Mannigfaltigkeit der Welt das Sein als das kugelförmige Eine auffasst, behauptet dieser in der Berücksichtigung der Vielheit der Erfahrungswelt die vielfältigen, unzähligen Ideen als wahrhaft Seiende. Und den Begriff Ousia verwendet Aristoteles, der den Wandel der Welt in seine Ontologie einbeziehen will, für das wahr Seiende. Er versucht, nicht nur die Unveränderlichkeit, sondern auch die Veränderlichkeit in seine Ousiologie aufzunehmen, indem er die Ousia für das Unwandelbare in dem Veränderungsprozess hält. Die Unwandelbarkeit ist also die Grundkonzeption der europäischen Ontologie. In dem radikalen Gegensatz steht die Ontologie des Nagarjunas. Nach seiner Auffassung ist jedes Seiende, in und an sich betrachtet, keine Substanz, sondern bloß Leerheit. Nagarjuna stellt fest, dass Dinge gegeneinander abhängig seien. Z.B. das Gute und das Schlechte, die Erkenntnis und das erkennende Subjekt, die Substanz und die Eigenschaft, die Substanz und die Materie, die Substanz und die Form, die Ursache und die Wirkung. Jedes davon kann nicht selbständig bestehen, sondern entsteht nur bedingt von dem anderen gegeneinander. Deshalb sind z.B. das Gute und das Schlecht weder absolut identisch, noch absolut verschieden. Das heißt, dass jedes Ding in sich selbst leer ist. Diese Konzeption ist in der buddhistischen Tradition ununterbrochen weiter überliefert und entwickelt worden. Also sind die abendländische Ontologie und die des Nagarjunas beide als bloß eine Option von den möglichen zu bestäti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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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 철학과 나가르주나에 있어서 변화와 자기동일성 문제

        주광순 대동철학회 2007 大同哲學 Vol.41 No.-

        서양철학에서 변화와 자기 동일성은 피할 수 없는 요구이면서 풀기 어려운 문제로 등장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립자들의 통일을 말했다.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변화하고 서로 대립되는 다양한 존재자들을 초월하는 세계의 실상을 가르친다. 인간이 보는 것과는 달리 신에게는 모든 것이 좋다. 또한 우주 이성인 Logos를 제대로 이해하면 대립자들은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론을 통해서 변화를 해명한다. 존재하는 것들은 10개의 범주들로 분류할 수 있고 이들 중에서도 최고의 범주는 실체이다. 범주들을 계층적으로 분류함으로써 그는 사물의 변화와 동시에 자기 동일성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자란다고 하는 현상은 우연적 속성인 크기는 변하지만, 본질인 사람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철학에서 자기 동일성이 변화보다 우위에 섬을 알 수 있다. 이는 인도의 나가르주나와는 아주 다르다. 그는 자기 동일성을 부인하고 상의를 말한다. 예컨대 ‘간다’는 현상에 대해서 나가르주나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실체라고 할 사람과 그 사람의 동작을 서로서로 의존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동작이 사물에 의존됨은 당연하나 사물이 동작에 의존됨은 불합리해 보일 수 있다. 그는 이 현상을 ‘가는 놈의 감’으로 정식화함으로써 가는 놈이 감에 의존되어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냥 사람이 아니라, 가는 놈은 감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이 둘은 불일․불이이다. 동작과 사물이 같지 않음은 상식적이나, 다르지 않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다름은 나가르주나에게 단지 다르다기보다는 서로 연관성이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가 말하는 불이를 납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존재자들이 상의되어 있다는 나가르주나의 주장은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는 무자성․공이라는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누구를 크다 하고 다른 이를 작다고 할 때, 그 둘을 서로 비교했기 때문에 큼과 작음이 판단되지 그 각 사람 자체로는 크다고도 작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서양 고대철학과 인도의 나가르주나는 그 존재론에 있어서 아주 다르다. 그런데 우리가 칸트의 선험철학, 즉 실체와 속성이나 원인과 결과 같은 범주가 사물 자체나 혹은 감각경험 자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구성틀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의 분류와 계층화는 의심스럽게 되고, 그 때문에 이 계층화를 거부하는 나가르주나의 상의설은 더 설득력 있어 보이게 된다. Aus der okzidentalen Geistesgeschichte entstand das Problem von Bewegung und (Selbst)Identität als ein unvermeidliches, das aber schwer lösbar ist. Um dies zu lösen, stellt Herakleitos die Lehre von coincidentia oppositorum auf. Er lehrt die Wirklichkeit der Welt, die die von uns erfahrenen, veränderlichen und verschiedensten Dinge übersteigt. Im Gegensatz zur menschlichen Auffassung ist alles nach Gott gut. Wenn wir die Weltvernunft, den Logos, versteht, werden wir erkennen, dass gegensätzliche Dinge eins sind. Aristoteles klärt durch seine Kategorienlehre das Bewegungsproblem auf. Seiende sind in zehn Kategorien einzuteilen. Die primäre Kategorie davon ist die Substanz, und die übrigen sind von ihr abhängig. Durch die hierarchische Einteilung der Kategorien kann Aristoteles die Bewegung und zugleich die Identität erklären. Das Phänomen von Wachstum bedeutet, dass sich die Größe als die zufällige Eigenschaft verändert, während das Wesen 'Mensch' unveränderlich bleibt. Wir können erkennen, dass die Identitätsprinzip für die westliche Philosophie wichtiger als die Bewegungsprinzip ist. Ganz anders als dies ist die Philosophie eines Indienphilosophen, Nagarjunas. Er lehnt den Primat der Identität ab und behauptet die gegenseitige Abhängigkeit. Anders als Aristoteles sieht er in dem Phänomen von Gehen, dass der Geher und das Gehen voneinander abhängig sind. Die Abhängigkeit der Tat zum Täter kann man leicht verstehen, aber das Umgekehrte scheint unerklärlich zu sein. Indem er das Gehensphnomen als 'Gehen des Gehers' formuliert, kann er die Abhängigkeit des Gehers zum Gehen erklären. Denn nicht ein Mensch, sondern ein Geher ist ohne das Gehen unmöglich. Darüber hinaus sind diese zwei weder identisch noch verschieden. Dass die Tat und der Täter nicht identisch sind, versteht sich von selbst. Aber die Behauptung, dass sie nicht verschieden sind, ist sehr merkwürdig. Wenn wir versteht, dass das Verschieden-sein für Nagarjuna das Ganz-unabhängig-sein bedeutet, dann ist seine Ablehnung der Verschiedenheit erklärbar. Nun seine Annahme von der gegenseitigen Abhängigkeit des Seienden steht in einer engen Relation zu seiner Behauptung, dass jedes Seiende, an sich selbst betrachtet, nicht aufgrund eines Eigenseins existiert und leer ist. Wenn wir z.B. den einen als groß und den anderen als klein beurteilt, ist es nur durch den Vergleich von den beiden möglich. Deswegen können wir nicht jeden, an sich selbst betrachtet, schwer beurteilen. So zeigt sich, dass der europäische Denkweg verschieden von dem des Nagarjunas ist. Und wenn wir die kantische Tranzendentalphilosophie, nämlich dass die Kategorie, wie z.B. Substanz-Attribut oder Ursache-Folge, weder in der Sinneswahrnehmung noch in dem Ding an sich zu finden, sondern letztlich auf die Vernunft zurückzuführen ist, bejahen wollen, wird die aristotelische Einteilung und Hierarchisierung der Kategorien in Frage gestellt. Daher erscheint die Lehre der gegenseitigen Abhängigkeit des Nagarjunas überzeuge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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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로사회에서의 저항

        주광순 대동철학회 2017 大同哲學 Vol.81 No.-

        We live in a fatigue society. Byung-Chul Han insists that the immunological society of binary opposition has turned into the fatigue society; society which has neuronal disorder. This has six aspects. It is a society where 1)diversity has disappeared and 2)a society of excess and 3)a society of positivity. This society appears to be 4)a society of freedom, but, in reality, 5)a society which demands overachievement. Because it’s a society dominated by 6)the power and freedom is just a self-made illusion. In this society everybody without exception experiences self-exploitation and burnout, but feels neither indignant nor resistant. This is on account of 3)the positivity and 4)the illusion of freedom. Furthermore, on the one hand, the excess of positivity mass-produces an ideology ‘yes, we can’, on the other, because people have the freedom to act according to their own desire and will, they blame themselves for their failure. Also 1)disappearance of diversity and 2)excess contributes to this tendency. With the disappearance of diversity, there is no ‘other’ to attack and to blame, so that people attack themselves. And the excess of informations and tasks leads them to lose the ability to express their indignation. Foucault regards this loss of resistance as result of governmentality. To him, the power is not prohibition but the formation of the subject. This is the meaning of Foucault’s governmentality. In other words, the neoliberal governing affirms and encourages desire. That’s why people labor pursuing their own desire without hesitation. But this freedom is subordinate to the public good, that is the expansion of achievement. The strategy of governmentality subordinating is the invention of subject, namely the invention of homo economicus. The economic man competes without limitation and eventually becomes burnout. But he cannot resist, because he is economic man. The way to escape from this outcome is to become a new kind of subject. We will consider a new idea of man of mutual dependence and of emptiness as possibility to resist against to neoliberalism. 우리는 피로사회를 살고 있다. 한병철은 이제 이항대립적인 면역학적 사회로부터 신경증적 사회인 피로사회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6 가지 측면을 가진다. 피로사회는 1)이질성이 사라져서 2)과잉과 3)긍정성의 사회이다. 이 사회는 얼핏 보기에 4)자유의 사회이지만 실은 5)성과를 강요하는 사회이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6)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자유는 그 대상이 스스로 느끼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는 누구도 예외 없이 자기 착취를 하면서 소진하지만 분노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이는 우선 3)긍정성과 4)자유 때문이다. 한편으로 과도한 긍정성은 할 수 있음의 이데올로기를 양산하며 다른 한편 자기 욕망을 따라 자유로이 노력하기에 실패도 자기 탓으로 돌린다. 여기에 1)이질성의 소멸과 2)과잉이 일조한다. 이질성의 소멸로 공격할 타자를 상실하고 자기를 공격하며 정보나 과제의 과잉은 분노하는 법도 잊게 만든다. 푸코는 이를 통치성으로 설명한다. 그에게 권력은 금지이기보다 주체 형성이다. 이것이 통치성이다. 신자유주의의 통치는 욕망을 긍정하고 부추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하면 노동한다. 이 자유는 전체의 이익, 성과의 확대에 예속되어 있다. 이렇게 예속시키는 통치성의 전략이 주체 형성, 즉 경제적 인간의 형성이다. 이 경제적 인간은 무한 경쟁하며 자기를 소진한다. 그렇지만 저항할 줄 모른다. 왜냐하면 경제적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다른 종류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필자의 선택에 따르자면 상의성과 공의 인간상이 되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저항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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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

        주광순 대동철학회 2006 大同哲學 Vol.34 No.-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을 ꡔ정치학ꡕ II권에 나오는 플라톤의 단일화 경향에 대한 비판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을 얻기 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ꡔ국가론ꡕ의 정치기획을 국가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난한다. 물론 이 비난이 문자 그대로는 문제가 있으나, 자족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국가의 다양성을 강조했다고 하는 의의를 가질 수 있다. 한 국가 하나로 결합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양하기도 해야 풍요롭다. 또한 플라톤이 직업 분화와 전문화를 통치 영역에까지 적용시켜서 철학자가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의 영역을 발견해내었다. 가족이 ‘생산’과 ‘필연’의 단위인데 반해서, 국가는 ‘좋음’과 ‘행위’의 정치적 영역이다. 여기서 정치란 단지 국가를 잘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일이다. 시민들의 공론이 비록 언제나 소수의 ‘정치전문가’보다 더 낫다는 점을 보장할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시민들의 토론을 통해서 공론을 형성하고 공직자를 선출하고 감시하는 것이 정치이다. 더 나아가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무시한 가족을 포함한 하위 공동체의 긍정적인 역할을 찾아내었다: 이들을 통해서 국가는 강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자발적 통합력이 ‘우정(philia)’이다. 우정이 그에게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친근한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가 사회를 유지시킬 한 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교육이 중요하다. 플라톤이 국가의 고유한 다양성을 그 당파성 때문에, 가능한 한 해체하려고 시도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을 통해서 조화시키려고 시도한 것이다. 여기서 교육은 직업교육이 아니라, 정치성과 사회성 훈련이다. 그리고 이 점이 현대 민주주의자들이 흔히는 간과하고 있는 요소라고 여겨진다. 만약에 경쟁과 직업적 전문성만을 양육시킨다면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화해 버릴지도 모른다. 사회성도 또한 같이 함양될 때에만 사회는 진정한 조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Here geht es um die politische Philosophie des Aristoteles, die er während seiner Kritik an die einheitliche Tendenz des platonischen Denkens in seinem Buch Politik II zeigt. Durch die Konfrontation mit der aristotelischen politische Philosophie hoffen wir ein kritische Einsicht in unsere Demokratie zu gewinnen. Er lehnt den politischen Entwurf Platons in der Politieia als Versuch ab, die Vielheit des Staates zu beseitigen, die zu dessen Wesen gehört. Obwohl seine Kritik nicht unproblematisch ist, ist es zuzugeben, dass sie mit der Hilfe von Begriff ‘Autarkie’ die Vielheit als positiv beurteilt; um ihn zu erhalten, ist es für einen Staat zwar wichtig, zu eins zu werden, aber die Vielheit macht seine Mannigfalitigkeit aus. Und während Platon, indem er das Prinzip Arbeitsverteilung und Spezialisierung bis auf das Herrschaftsproblem angewandt hat, die Philosophenherrschaft behauptet, findet Aristoteles das Politische. Die Familie ist nach seiner Auffassung ein Bereich von 'Produktion' und 'Notwendigkeit'; der Staat aber ein politischer von 'Handlung' und 'Gutem'. Hier bedeutet die Politik nicht bloß die gute Führung eines Staates, sondern vielmehr die Zusammenarbeit der freien und gleichen Bürger. Wenn ihre öffentliche Meinung auch nicht garantieren kann, weiser zu sein als die Spezialistenherrschaft, besteht die Politik wesentlich darin, die öffentliche Meinung zu bilden, Beamten zu wählen und beaufsichtigen. Und ferner entdeckt Aristoteles die positive Rolle der Famile und anderer kleiner Gemeinschaften, die Platon möglichst beseitigen wollte; durch sie vereinigen sich Staatsmitglieder freiwillig. Diese Kraft nennt er ‘Freundschaft (philia)’; für ihn gewinnt philia eine politische Bedeutung, nämlich dass das Verlangen, Befreundete zu schützen, die Rolle spielt, die eine Gesellschaft erhält. Noch eins müssen wir erläutern: Wie für Platon ist die Erziehung auch für Aristoteles wichtig. Im Gegensatz zu jenem, der die kleine Gemeinschaft wie Familie wegen ihrer Parteilichkeit abschaffen wollte, versuchtt dieser, bunte Teile eines Staates durch die Erziehung zu vereinigen. In diesem Sinn ist sie keine berufliche Bildung, sondern die von Sozialität. Und dieser Point fehlt oft dem modernen Domokratiker. Wenn der Bürger nur hinsichtlich von Beruf und Konkurenz erzogen wird, liegt die Besorgnis nahe, dass die Gesellschaft zu einem Zustand ‘Wolf gegen Wolf’ werde. Erst die Entwicklung der Sozialität kann die Harmonie von Mannifaltigen erreichen, was ja die notwendige Voraussetzung für die gelungene Demokratie ist.

      • KCI등재

        배아복제 논쟁에서 본 생명윤리로부터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으로 넘어가기

        주광순 대동철학회 2008 大同哲學 Vol.43 No.-

        이 글은 인간 배아의 사용이라는 문제로 시작한다. 배아 복제연구는 배아를 죽이게 된다. 그러므로 배아의 윤리적 지위가 문제시된다. 특히 14일 이전의 전배아는 세포덩어리에 불과하니 실험용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입장이 있다. 그 근거는 권리이론과 정체성이론이다. 그러나 이는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절대적(상대적이 아닌)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근거가 빈약하다. 이를테면 배아가 분열해서 쌍둥이가 생긴다고 해도 그 둘이 다른 인격이지만 모두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둘 누구에게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빼앗을 수 없다. 그러나 윤리적 논쟁은 그 결과만 논할 뿐, 근본원인은 건드리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을 이용한 더 깊은 탐구가 필요하다. 하이데거에 따르자면 기술은 응용과학이거나 인간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변형시킨다. 그리고 기술은 과학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현대 기술을 극복하는 것이 윤리적 반성이 다루는 사회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보다도 더 절박하다. 기술은 각 시대마다 다른 ‘드러냄’의 양상을 지닌다. 현대 기술의 드러냄의 방식은 ‘모아-배치하는 틀’이다. 그러므로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기술 자신이 자연과 세계의 구성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기술이 사회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키기 전에도 인간의 존재 방식과 세계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고유한 위험은 기술의 드러냄이 포이에시스와 같은 드러냄의 다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데에 있다. 단지 ‘상비물’로만 드러낸다. 기술적 행동은 자신의 작업과정 전체를 계획과 계산을 통해서 조정하고 확보해 놓는다. 사유는 이런 행동의 의미나, 더 근원적으로 말해서, 기술의 의미를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 즉 ‘숙고적 사유’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숙명적인 기술적인 행동을 극복할 길은 예술과 같은 다른 종류의 드러냄이 작동해서 사물을 사물로 놓아두는 길 뿐이다. Hier geht es um das Problem des Verbrauchs menschlicher Embryonen. Dazwischen werden sie getötet. Deswegen ist die Debatte von ihrer ethischen Stellung zu eröffnen. Einige Gelehrte meinen, der neue Embryo sei eine bloße Zellenmenge und daher dem Experiment verfügbar. Ihre Auffassung beruht auf dem Rechtsargument und dem Identitätsargument. Aber sie können schwer ein Gegenargument angeben, wenn sie den Begriff von der absoluten - nicht bloß relativen - Menschwürde - nicht Personenwürde - anerkennen. Ein Embryo kann z.B. in zwei geteilt werden und zu zwei Säuglingen werden. Doch sind sie beide Menschen. Daher ist ihnen keine Menschenwürde abnehmbar. Die ethische Diskussion hat dennoch eine eigene Grenze, nämlich sie behandelt nur Symptome oder Folgenerscheinungen, ohne das Wesentliche zu Gesicht zu bekommen. Darum brauchen wir mit Hilfe von der heideggerschen Technikphilosophie die Sache tiefer zu untersuchen. Nach Heidegger ist die Technik weder eine bloße Anwendungswissenschaft noch ein Mittel zum Zweck. Vielmehr verändert sie das Verhältnis des Menschen zur Welt. Daher ist sie im gewissen Sinne der Zweck der Wissenschaft. Deswegen ist die Überwindung der modernen Technik selbst dringender als die von deren gesellschaftlich tödlicher Folge, der die ethische Reflexionen dienen. Jeweils eine Geschichtsepoche hat jeweils eine spezifische Weise des ‚Entbergens’. Die Entbergensweise der modernen Technik ist das ‚Ge-stell’. Darum ist diese kein bloßes Mittel, sondern etwas, was Anteil an der Konstitution von Natur und Welt hat. Sie hatte also die Seinsweise des Menschen und die Sinn der Welt verwandelt, schon bevor sie das tödliche Resultat in der Gesellschaft gebracht. Die eigentliche Gefahr besteht darin, dass das technische Entbergen all die andere Möglichkeit des Entbergens wie z.B. ‚Poiesis’ ausschließt. Es enthüllt die Natur ausschließlich als ‚Bestand’. Planend und Berechnend steuert und sichert das technische Handeln sein Prozess im Ganzen. Nach dem Sinn dieses Handelns und noch ursprünglich dem der Technik fragt das Denken nicht mehr. Dadurch verliert der Mensch sein Wesen, nämlich ‚das besinnliche Denken’. Der einzige Weg zur Überwindung des verhängnisvollen technischen Entbergens ist der der Gelassenheit zu den Dingen wie bei dem Entbergen der Ku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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