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Prognostic factors in patients with locally advanced breast cancer treated with neoadjuvant taxane-anthracycline combination chemotherapy

        Chang-Eun Jang(장창은),Je-Ryoung Kim(김제룡) 대한종양외과학회 2015 Korean Journal of Clinical Oncology Vol.11 No.2

        Purpose: The aim of this study is to evaluate the prognostic factors of the group who received neoadjuvant chemotherapy with a taxane-anthracycline combination regimen. Methods: We retrospectively analyzed for locally advanced breast cancer patients who received neoadjuvant chemotherapy with adjuvant extension with taxane-anthracycline combination regimen. 101 patients received neoadjuvant chemotherapy with docetaxel and doxorubicin, 46 patients received with epirubicin and paclitaxel. After curative surgery, adjuvant chemotherapy with the same regimen was performed. The adjuvant chemotherapy regimen was adjusted when the response to neoadjuvant chemotherapy was in disease progression. Results: The disease free survival is 78% after 5 years and 71% after 10 years for good response group; the disease free survival is 23% in 5 years and 23% in 10 years for the no response group (P<0.001). The overall survival is 93% after 5 years and 90% after 10 years for the good response group; the overall survival is 47% after 5 years and 38% after 10 years for the no response group (P<0.001). 13 patients of 17 patients who to be appeared in complete response were triple negative for breast cancer. Conclusion: In order to predict an oncologic outcome from locally advanced breast cancer patients who are treated with neoadjuvant chemotherapy with taxane-anthracycline based regimen, we can use pathologic complete response, an early response to neoadjuvant chemotherapy.

      • KCI등재

        『삼국사기』 백제본기 耽羅의 실체 검토

        장창은(Jang, Chang?eun) 신라사학회 2023 新羅史學報 Vol.- No.57

        『삼국사기』에 따르면 탐라는 문주왕 2년(476)과 동성왕 20년(498)에 백제와 관계를 맺었다. 이에 대해 전통시대 역사가들은 탐라가 고대 제주도 국가에 대한 명칭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근우는 탐라와 백제가 508년 12월에 처음 통교했다고 되어 있는 『日本書紀』 계체기와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상충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백제본기의 탐라를 제주도로 보는 데 의구심을 가졌다. 탐라가 제주도라면 동성왕이 무진주[광주]로 출정하기보다 강진・해남 등으로 가야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서 백제가 도륙한 忱彌多禮를 강진・해남으로 비정했는데, 이 지역이 백제본기의 耽羅와 부합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근우의 문제의식은 공감을 얻어 이를 기반으로 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강봉룡・문안식・김병남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백제의 영산강 유역 진출과 탐라를 관련지어 연구를 진전시켰다. 신설이 탄생한 것이다. 다만 통설을 지지하는 연구도 계속되었다. 백제본기 탐라의 실체에 대한 논의는 통설과 신설이 대립한 채 논란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탐라는 비슷한 시기 백제의 외교 상대국으로서 기록되었다. 같은 명칭의 耽羅를 다르게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신설에서 ‘탐라(탐모라)’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의 ‘忱彌多禮’, 『梁職貢圖』의 ‘下枕羅’를 동일한 실체로 본 것은 논리적 기반이 약하다. 탐라 명칭을 검토해보면, ‘耽羅’는 忱彌多禮의 ‘忱彌’와 下枕羅의 ‘枕羅’로 표기된 사례가 없다. 고대에 탐라와 영산강 간 직항로가 있었다면 동성왕의 무진주 출정과 탐라 사신의 사죄는 납득의 여지가 생긴다. 문헌 사료를 통해서 고려~조선 전기까지 강진과 해남 이외에 나주-제주 간 항로가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고자료를 탐색한 결과 3~5세기 대로 비정되는 나주 월양리 구양 유적, 나주 장동리 수문패총 등에서 제주도산 현무암 석재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5~6세기 대에 영산강 유역에서 유행한 鳥足文土器가 제주 종달리 패총에서도 출토되었다. 탐라가 교류・교섭의 대상으로 백제를 선택한 까닭은 제주도에 없는 철제품과 소금・곡물 등 각종 생필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탐라는 서남해안 제해권의 동향에 민감했으며 기민하게 대응하였다. 그 결과가 문주왕~동성왕대 탐라 사신의 행보였다. 영산강 유역의 주요 나루에는 탐라 사신이 드나드는 장소가 마련되었을 법하다. 그렇다면 동성왕이 무진주로 온 것과 탐라 사신이 이곳에 찾아와 동성왕에게 사죄함으로써 사태가 무마된 것이 이해가 간다. 『일본서기』 계체기 2년 12월조의 紀年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필요는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탐라를 고대 제주도 국가로 보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 The first relationship between ancient Tamna(耽羅) and the Three Kingdoms was recorded in the 476 of King Munju and the 498 of King Dongseong in the Baekje Annals of the Samguk Sagi. The compilers of the Samguk Sagi a nd historians of the traditional period did not doubt the name of the ancient Jeju Island state of Tamna in the Baekje Annals of the Samguk Sagi. Meanwhile, Lee Geun-woo reviewed this. Lee understood that the Nihonshoki(日本書紀) which is said to have first communicated between Tamna and Baekje in December 508, contradicts the original period of the Baekje Annals of the Samguk Sagi . He had doubts about s eeing Tamna in the Baekje Annals of the Samguk Sagi as Jeju Island. If Tamna is Jeju Island, it is natural for King Dongseong to go to Gangjin and Haenam rather than to go to Mujinju(Gwangju). He was also surpri sed that the envoy of Tamna came and apologized even though the distance between MuJinju and Tamna was not a threat. He designated the Tamna of the Baekje Annals of the Samguk Sagi as Gangjin and Haenam areas. Lee Geun–woo’s problem consciousness gained sympathy and research results based on this were accumulated. In this article, Imaintained a cautious position to see the Tamna of the Samguk Sagi and the Tamna of the Nihonshoki separately. It is questionable whether Tamna, which was recorded under the same name as Baekje’s diplomatic partner at the same time, can be grasped differently. In the new theory, the connection between ‘Tamna(Tammora),’ ‘ChimmiDarye(忱彌多禮)’ by Nihonshoki, and ‘Hachimra(下枕羅)’ by the Liang–Zhigong–Tu(梁職貢圖) has a weak logical basis. In ancient times, if there was a direct route between Tamna and Yeongsangang River, King Dongseong’s appearance in Mujinju and the apology of Tamna envoy are convincing. From literature data, it can be seen that the route between Naju and Jeju was used in addition to Gangjin and Haenam from Goryeo to the early Joseon Dynasty. As a result of searching for archaeological data, basalt stone and earthenware from Jeju Island were excavated from the Guyang ruins in Wolyang–ri, Naju, where the date of the ruins was not determined from the 3rd to 5th centuries. In addition, bird–footed pottery, which was popular in the Yeongsangang River basin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was also excavated from the shell mound in Jongdal–ri, Jeju. Tamna was sensitive to trends in the southwestern coastal waters and responded quickly. The result was the actions of King Munju and Tamna envoys of King Dongseong.

      • KCI등재

        2020 발행 『중학교 역사 ②』 교과서 「선사문화와 고대국 가의 형성」 지도·그림자료 검토

        장창은 ( Jang Chang Eun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1 한국학논총 Vol.55 No.-

        이 논문은 2020년에 발간된 『중학교 역사②』 교과서 제Ⅰ장 「선사문화와 고대국가의 형성」에 나오는 지도·그림자료를 검토하였다. 분석 결과 다음과 같은 문제점과 개선사항이 있었다. 학계의 연구성과가 미흡하게 반영된 경우이다. 「선사문화와 고조선」에서는 한반도의 구석기 유적 분포도에서 순천 월평 유적 같은 전라도 지역의 최근 발굴성과를 반영하지 못했다. 「삼국의 성립과 발전」에서는 백제가 4세기 근초고왕 대에 마한을 병합했다는 주장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영산강 유역 진출은 5세기 후반~6세기 중반으로 보는 것이 현재 통설이므로 교과서 내용도 이를 반영할 때가 되었다. 5세기 고구려의 영역지도에서도 북방과 남방 진출의 범위에 있어 일부 교과서가 학계의 연구를 흡수하지 못해 수정이 필요하다. 「삼국의 문화와 대외교류」에서는 삼국 및 가야와 서역 간 문화교류를 지나치게 단선적인 직접 교류로 한정하였다. 학계의 연구는 직접적인 인적 교류보다는 중국과 북방세력을 매개로 한 전래로 파악하는 것이 다수 설이다. 오류 및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 「선사문화와 고조선」에서는 고인돌의 분류와 분포지도에서 개석식(덮개식) 고인돌을 다루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현존 고인돌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개석식 고인돌이 교과서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것은 고인돌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개선할 사안이다. 고조선의 문화범위 지도에서는 고조선의 시기 변화를 반영하지 않아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삼국의 성립과 발전」에서는 6세기 진흥왕대 북방 진출 범위를 표시한 지도에서, 568년 신라가 상실한 것으로 추정되는 안변 이북의 영역을 표시하지 않은 교과서가 있었다. 4~5세기 고구려의 국제관계를 도식화한 그림에서는 백제와 남조의 관계가 단절된 것으로, 고구려와 북위는 친선관계로 단순하게 제시하였다. 이 시기 다변화된 국제관계가 생동감 있게 드러나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 「삼국의 문화와 대외교류」에서는 삼국 및 가야와 일본 간 관계가 우리 측문화의 일본 전파만이 강조됨으로써 초래되는 오해가 컸다. 고대 한·일 관계는 문화 전파라는 시혜적 측면이 아닌 호혜적 교류의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그려내야 한다. This paper reviewed the map and picture data from Chapter I of the history textbook for middle school students published in 2020 in the 「Prehistory Culture and Formation of Ancient Nations」. As a result of the analysis, there were the following problems and improvements. It is a case in which the authorized research achievements of academia are insufficiently reflected. 「prehistoric culture and Gojoseon」 did not reflect the recent excavations in Jeolla-do, such as Suncheon and Wolpyeong sites, from the distribution chart of Paleolithic sites on the Korean Peninsula. 「In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he Three Kingdoms」, it is still repeated that Baekje annexed Mahan in the 4th century during the reign of King Geunchogo. However, Baekje's entry into the Yeongsangang River basin was considered to be in the late 5th and middle 6th centuries, so it was time to reflect this in the contents of the textbook. In the 5th century map of Goguryeo, some textbooks cannot absorb academic research and need to be revised. 「The cultural and foreign exchanges of the three kingdoms」 were limited to direct exchanges between the three kingdoms, Gaya and the West Asia. Academic research is widely believed to be based on the tradition of China and the northern forces rather than direct human exchanges. There were many cases of errors and misunderstandings. 「prehistoric culture and Gojoseon」 did not deal with the covering dolmens in the classification and distribution map of dolmens. The failure of the textbooks to deal with the top portion of Korea's existing dolmens is an urgent improvement in recognizing dolmens. The map that deals with the cultural scope of Gojoseon does not reflect the change in the timing of Gojoseon, which has led to misunderstanding. 「In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he Three Kingdoms」, there were some textbooks that did not indicate the area north of Anbyeon, which was presumed to have been lost by Silla in 568. A schematic diagram of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f Goguryeo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shows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Baekje and the Southern Dynasties was severed,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Goguryeo and the Northern Wei was simply presented as a friendly relationship. It is necessary to improve diversified international relations during this period so that they can be more lively. In the culture and foreign exchanges of the three countri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hree countries and Gaya and Japan was largely misunderstood by the emphasis on the spread of Korean culture to Japan.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in ancient times should be portrayed objectively in terms of reciprocal exchanges, not in the poetic aspect of spreading culture.

      • KCI등재

        7세기 전반~중반 백제·신라의 각축과 국경 변천

        장창은(Jang, Chang-eu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한국고대사탐구 Vol.33 No.-

        이 논문에서는 7세기 전반~중반 백제·신라의 각축과 그에 따른 국경 변천의 추이를 교통로별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먼저 전북 동부지역~낙동강 유역에서의 각축과 국경 변천이다. 신라는 562년 대가야를 복속한 후 운봉고원에 진출해 이곳에 대백제 거점성으로 阿莫城[남원 아영면]과 小陀城등 4성을 축조하였다. 이에 무왕이 602년 8월 좌평 해수를 보내 步騎4만으로 아막성 등을 공격했지만, 신라군에 대패하였다. 백제가 611년 椵岑城을 공격할 때까지 10여 년 간 군사 동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아막성 전투 패배의 영향은 컸다. 605년 2월 角山城[임실 성미산성]을 축조함으로써 방어체계를 마련하는 정도였다. 백제는 무왕 17년(616) 아막성을 재공격해 함락한 후 팔량치를 넘어 東進해 624년 10월 신라의 速含城[함양] 등 6성을 차지하였다. 백제는 함양에서 안의‒거창을 거쳐 합천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에 642년 7월, 의자왕이 親征하여 함양거창에서 대야성 서쪽에 소재한 獼猴城등 40성을 함락하였다. 결국 백제는 642년 8월 大耶城[합천]을 차지하였다. 대야성 전투 패배 후 선덕여왕은 합천에 있었던 下州의 치소를 狎梁州[경산]로 옮기고 김유신을 軍主로 삼았다. 김유신은 그동안의 방어적 상황을 공세적으로 전환해 644년 9월, 加兮城등 7성을 攻取한 후 加兮津[고령 우곡면·개진면]을 개통하였다. 또한 買利浦城[함안 칠북면] 전투 등에서 연승하였다. 이로써 아막성 전투에서부터 시작된 옛 가야 방면에서의 백제의 동진은 낙동강 유역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백제는 추풍령로 방면의 공세도 지속하였다. 두 나라 간 각축의 분수령이 되었던 곳은 椵岑城[영동군 양산면]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가잠성을 둘러싸고 611~628년 3차례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는데, 결국 신라가 승리하였다. 신라가 가잠성을 차지하고 있는 한 백제가 금산‒영동 방면에서 신라에 공세를 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추풍령로에서의 백제와 신라 간 충돌은 648년에서야 재개되었다. 이때 김유신이 上州行軍大摠管으로서 백제의 進禮城[금산군] 등 9성을 함락하였다. 백제와 신라 간 충돌은 소강국면을 맞다가 655년에 助川城[영동 양산면] 전투에서 재현되었다. 이곳에서 백제와 신라는 2~3차례 공방전을 벌였는데, 결국 신라가 차지함으로써 영동‒금산 방면에서 백제 수도 사비로 진격할 수 있는 거점성을 확보하였다. 무왕은 나·제통문로의 무주‒김천 방면에서도 신라에 공세를 가했다. 636년 5월, 백제 장군 우소가 獨山城[성주 독용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玉門谷[합천 가야면]에 주둔했다가 신라군의 급습을 받아 몰살당했다. 의자왕은 647년 10월, 장군 의직을 보내 步騎3천으로 신라의 茂山城[무주 무풍면]을 포위한 후, 甘勿城[김천 서쪽]과 桐岑城[김천]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이 1만 명의 군사로 저항했고, 비령자·거진 父子의 전사로 신라군의 사기가 진작되어 백제군이 전멸하였다. 김유신은 648년 4월에 발생한 대야성과 옥문곡 전투도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을 대야성 전투 때 사망한 김품석 부부의 유골과 교환하였다. 김유신은 649년까지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도 연승하며 백제군 3만 명 이상을 죽이고, 1만명을 사로잡았다. 신라는 그동안 백제에게 당했던 수세적 국면을 공세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655년 조천성[영동 양산면] 전투의 승리는 사비도성으로의 진격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였다.

      • KCI등재후보

        4세기 후반~6세기 중반 단양지역을 둘러싼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

        장창은(Jang, Chang-eu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5 한국고대사탐구 Vol.21 No.-

        삼국 간 단양지역의 영유권 향방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기는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곧 광개토왕이 영락 6년(396)에 백제로부터 58성 700촌을 빼앗았는데, 이때 고구려가 단양지역을 포함한 죽령로를 차지하였다. 이후 단양지역은 4세기 후반~5세기 중반의 신라·고구려 간 우호기에는 대외교섭과 문물교류의 중간 기착지로서 자리매김했고,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의 갈등기에는 고구려 최남단 군사요충지로서 부상했다. 고구려의 주요 남진경로로 죽령로가 활용된 문헌적 정황은 춘천-홍천-원주-충주 등지의 죽령로 도상에서 고구려 유물·유적이 지속적으로 발굴됨으로써 실증되고 있다. 다만 단양지역의 고구려 고고자료는 아직까지 미흡한 실정이다. 이는 단양지역과 그 인근에 남아 있는 관방유적에 대한 향후 발굴성과에 따라 보완될 여지가 많다. 한강 유역의 영유를 주도했던 고구려에 대해 나·제동맹군이 반격을 개시한 것은 551년 9월이었다. 이때 신라는 죽령 이북의 북진 교두보였던 단양을 출발해 죽령로를 경유해 삭주(우수주) 관내의 10군을 장악하였다. 곧 신라는 한강 유역 공략에 나섰던 551년 9월 이전에 이미 단양지역을 차지하였다. 신라의 단양지역 진출시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시사해주는 자료가 「단양신라적성비」이다. 「적성비」의 내용에는 신라가 적성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교전을 했고, 그 때 적성에 있었던 야이차의 도움을 받아 적성을 차지한 듯한 문면이 남아 있다. 「적성비」가 야이차의 공을 포상함으로써 향후 북진의 향방을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선전포고문의 성격이 짙은 점을 감안할 때, 비의 건립연대와 신라의 적성 진출시기가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적성비」의 건립연대에 대한 기왕의 견해는 545년 이전, 545~550년, 551년 이후로 나뉘어 논란이 분분했었다. 이에 대해 550년 정월과 3월에 벌어진 신라의 도살성·금현성 함락, 그리고 이어진 진흥왕의 낭성 순수와 이사부의 군사행적을 계기적으로 분석한 결과, 550년 중후반 무렵 신라가 적성지역에 진출한 후 비를 세운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신라의 적성 진출경로로는 죽령로를 작전의 중심선으로 삼아 벌령로(적성로)에서 협공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했다. 더불어 신라가 단양보다 국원[충주]에 먼저 진출했을 경우를 가정해 국원 방면과 남한강 상류의 정선·영월 방면 등 전방위적으로 압박한 결과일 수도 있음을 환기하였다. Territorial Trend among Three Kingdoms over the Danyang area was appeared in the late 4th. In 396 years, King Gwanggaeto(r.391~412) occupied 58 castle and 700 village by Baekje. At This time Goguryeo occupied Danyang area and Jungnyeong route. Since then Danyang area has established itself as a stopover for foreign negotiations Between Silla and Goguryeo in the late 4th century~middle 5th century. Also It was emerged as Goguryeo’s southernmost military hub in the middle 5th century~middle 6th century. In 551.9, Silla attacked with Baekje The Han River Basin it was occupied by Goguryeo. At This time Silla occupied 10gun(郡) by Danyang departure to the via Jungnyeong route. Finally Silla occupied Danyang area in more than 551.9 ago. If we look a little more specific, Silla occupied Jeokseong Fortress in the middle and late 550 years. Jeokseong Monument of Silla in Danyang(「丹陽新羅赤城碑」) was erected at the same time. Meanwhile, The Route of Advance to Jeokseong Fortress was rich possibilities that used Jungnyeong route and Beolnyeong route at the same time.

      • KCI등재

        고대(古代) 탐라국(耽羅國) 연구의 쟁점과 이해방향

        장창은 ( Jang Chang-eun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2018 탐라문화 Vol.0 No.57

        고대 탐라국에 대한 호칭은 ‘州胡’에서부터 ‘耽羅’·‘託羅(托羅)’·‘?羅’·‘涉羅’, 그리고 ‘耽牟羅’까지 다양한 표기로 사서에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 모두를 동일 대상인 탐라국에 대한 이표기로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耽羅와 『魏書』 고구려전에 나오는 ‘涉羅’의 실체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三國志』 東夷傳의 韓傳에 나오는 州胡는 ‘오랑캐 마을’ 내지 ‘섬 오랑캐’로 해석된다. 문면으로 보았을 때 중국 측에 의한 타칭이다. 『後漢書』 東夷列傳에는 州胡國으로 표기되어 있어 탐라국 이전 제주의 고대국가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주호국이 제주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한 연구자는 없다. 다만 주호가 교역한 韓中의 실체는 연구자 간 견해 차이가 있다. 韓의 실체 규명은 주호가 제주로 비정될 수 있는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 제주시 산지항에서 출토된 貨泉등 王莽錢은 주호국이 1세기 대에 중국과 교류했음을 시사한다. 중국 화폐의 한반도 유입은 본토와의 직접적인 교역보다는 漢郡縣(樂浪郡)을 매개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주도가 漢郡縣과 弁·辰韓-倭로 이어지는 교역경로 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산지항과 용담동·삼양동 등에서 화폐와 철제 무기류·옥환 등 중국이나 진·변한 계통의 위신품이 출토되는 까닭은 주호국이 이들의 교역체계에 능동적으로 동참했기 때문이다. 주호국의 교역범위는 전남지역의 마한을 중심으로 진·변한 지역을 망라하였다. 제주도산 토기가 나주시 수문 패총, 해남 군곡리 유적, 사천 늑도에서 출토된 것은 그 실증적인 고고자료이다. 제주의 고대국가가 耽羅國으로서 한반도 국가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三國史記』 백제본기가 최초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5세기 후반인 문주왕~동성왕대에 탐라국은 백제에 공납을 바치는 종속관계에 있었다. 이와 달리 『日本書紀』에는 탐라와 백제의 통교가 508년에 처음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기왕에는 백제본기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면에는 백제가 4세기 후반인 근초고왕대에 전남지역까지 진출해 영역지배 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다만 백제본기의 탐라를 제주도로 보는 데 회의적인 견해도 있다. 『일본서기』의 해당 기록이 백제계 계통이어서 사료가치가 높다는 점, 동성왕이 정벌하려 했던 耽羅가 제주도라면 무진주[광주]에 도착한 백제 군사에 대해 탐라가 스스로 와서 죄를 빌었다는 내용이 어색하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그 결과 백제본기의 탐라를 전남 강진과 해남지역에 있었던 소국으로 비정하였다. 백제본기 탐라의 실체는 향후 검토할 여지가 남아 있다. 『魏書』 열전 고구려전에 따르면, 504년에 고구려 문자명왕(491~519)이 북위 선무제에게 사신을 보내 그동안 조공했던 황금과 珂를 더 이상 바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황금은 夫餘에서 나고, 珂는 涉羅에서 나는 것인데, 부여는 勿吉에게 쫓기는 바가 되었고, 섭라가 백제에게 병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涉羅’의 실체이다. 한진서가 『海東繹史』에서 ‘섭라’를 제주로 비정한 후 많은 연구자들이 이를 계승 하였다. 특히 珂를 말 재갈 장식에 사용하는 소라와 전복으로 보거나, 마노로 보되 그 생산지를 제주도로 이해하였다. 이와 달리 珂를 (백)마노로 보거나, 涉羅[신라]가 백제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珂를 바칠 수 없다는 문구도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탐라의 관계를 입증해 줄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점, 『晉書』 부견전에 사용된 신라 국호 ‘薛羅’가 ‘涉羅’와 음운상 같다는 신경준의 주장에 근거해 涉羅=新羅일 가능성이 마련된 점, 珂의 실체가 말 재갈 장식보다는 옥의 범주에 포함되는 마노가 더 유력하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涉羅’는 제주도보다는 신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 The Name for Tamna was recorded variously ‘Juho(州胡)’, ‘Tamna(耽羅)’, ‘Takra(託羅)’, ‘Damra(?羅)’, ‘Tammora(耽牟羅)’, ‘Seobra(涉羅)’ etc. First of all, The Juho(州胡) recorded in Samgukji Dongijeon(三國志東夷傳) is almost certain that now Jeju-do. Juho-guk made an exchange with Three Han States(三韓) in 1st to the 4th century. The important exchange goods Juho-guk gained was iron prestige, Chinese Coins, salt, etc. According to Samguk Sagi (三國史記), Tamna(耽羅) paid tribute to Baekje in the late 5th century. But At this time of Tamna was unsured whether to Jeju-do. Some researchers argued that Tamna located in Gangjin and Haenam region, Jeollanam-do. The Recorded in Weisue(魏書) for Seobra(涉羅), Many researchers think the substance is Jeju-do. Because They understood that Ga(珂) is Products made of Abalone or Conch. But Ga(珂) may be Agate or Jade. Seobra(涉羅) was used for the name of Silla. Therefore The substance of Seobra(涉羅) Silla as it might be appropriate.

      • KCI등재

        660~662년 고구려와 신라 · 당의 전쟁

        장창은(Jang, Chang-eun) 신라사학회 2016 新羅史學報 Vol.0 No.38

        In 660.11, Goguryeo attacked Territory of Silla which named Chiljungseong Fortress[Paju-si Jeokseong-myeon in Gyeonggi-do]. Goguryeo occupied the Chiljungseong Fortress using the time Silla"s main force Subdued recovery of Baekjae. But Goguryeo Give up sovereignty of Chiljungseong Fortress. Because There geographical conditions was disadvantageous to defense. In 661.5, Goguryeo reattacked Bukhansanseong Fortress [Gwanggin-gu in Seoul]. That Battle ended in a Victory for Silla. In 660.11~662.2, The second War broke out between Goguryeo and Tang. At this time Tang organized 6 Armed forces 35 Battalion. In 661.8, Su Dingfang"s army occupied the Wido. There was strategic position in Daeryeonggang and Cheongcheongang basin. After this, Su Dingfang"s army Into Pyeongyangseong and laid siege to go there. Yeon gaesomun dispatched main force to the Amnokgang. At this time, because Amnokgang was froze Tang"s army crossed the river. Finally Goguryeo"s 30,000 military suffered annihilation. By the way, Tang was withdrawn from the Amnokgang basin. Because unexpected riot of Cheolleuk had Tang. As time goes on, Su Dingfang"s army was isolated. Finally Su Dingfang"s army had to request for assistance from Silla. In 661.8, King Munmu(r. 661~681) went to the Wongjin Fortress with Troops for the relief of Tang"s army. In that process, Kim Yu-sin led the Battle of Ongsan Fortress[Boeun-gun Hoein in Chungcheongbuk-do] to victory. Also King Munmu spent the provisions to Su Dingfang"s army in Pyeongyangseong. Kim Yu-shin, assumed the mission. As a result, Su Dingfang"s army return to Tang safely.

      • KCI등재

        현행 『중학교 역사 ②』 교과서 「남북국시대의 전개」 지도·그림자료 검토

        장창은 ( Jang Chang-eun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2021 탐라문화 Vol.- No.67

        이 논문은 2015 개정 교육과정이 반영된 현행 『중학교 역사 ②』 교과서 제Ⅱ장 「남북국시대의 전개」에 나오는 지도와 사진ㆍ그림자료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문제점과 개선사항을 도출하였다. 학계의 연구 성과가 미흡하게 반영된 경우이다. 6세기 후반~7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그린 모식도가 돌궐『고구려』백제『왜의 남북세력과 수ㆍ당』신라의 동서세력 간 대립구도로 단순화되어 있는 문제가 있었다. 고구려와 돌궐의 우호관계는 인정하기 어렵고, 수와의 우호관계도 신라뿐 아니라 백제도 함께 고려해 수정할 필요가 있다. 신라가 676년 당나라를 물리치고 얻은 결과물로 그린 대동강 유역의 영유권도 무리가 있다. 신라의 대동강 유역 확보는 676년 이후 계기적 진출의 산물이었다. 현행 교과서 모두 요동지역 대부분을 발해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요동지역이 당과 발해 간 완충지대였다고 주장하는 연구가 많으므로 이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 장보고 사망 연도를 학계의 다수설인 841년이 아닌 846년으로 표시한 것도 재검토해야 한다. 발해의 5도 명칭 중 ‘조공도’를 발해를 주체로 한 용어이면서 행선지가 담겨 있는 ‘압록도’로 표기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 발해 영광탑이 당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해의 독특한 문화로 규정한 일부 교과서를 비판하였다. 오류 및 오해의 소지도 있었다. 고구려와 수․당 전쟁 지도의 문제가 많았다. 전쟁의 경과를 수와 당의 공격 중심으로만 묘사하고 있어 고구려의 대응 양상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또한 수․당의 水軍 발진처를 산동성 登州로 표시한 지도가 많았는데, 이는 萊州로 수정해야 한다. 고구려 千里長城을 지도에 어떻게 그릴 것인지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이름 그대로 長成 형태로 그린 교과서가 있었는데, 최근 연구동향은 ‘장성설’에 회의적인 견해가 많다. 점선 형태로 하면서 ‘천리장성 추정지’ 정도의 표시가 무난하다. 고구려 부흥운동 지도에서 고연무의 활동지역이 오골성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성인 듯 표시한 교과서도 있었다. 또 고연무와 연합군을 이룬 신라 설오유를 누락시킴으로써 오골성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진단할 수 없는 한계도 드러냈다. 신라 말 사회혼란 양상을 표시한 지도에서 시대적 배경이 다른 8세기 후반~9세기 전반의 중앙권력 다툼과 9세기 후반 농민봉기로 야기된 혼란을 함께 다루었다. 이는 구별해서 설명해야 할 부분이다. 후삼국 영역을 표시한 지도 대부분에서 나주를 후백제 영토로 표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나주는 903~918년 궁예의 후고구려가 주도적으로 차지했으므로 지도에 이를 표시해야 한다. 남북국시대와 후삼국기에 탐라를 통일신라ㆍ후백제와 같은 색상으로 표시한 것도 적절치 않다. 통일신라와 탐라는 복속을 논할 정도의 관계가 아니었고, 긴밀하지도 않았다. 탐라는 10세기 전후까지 독립국가의 국제적 지위를 누렸다. 탐라 지도의 색상은 별도로 표시해야 한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소장처(불교중앙박물관)도 잘못되었다. 2018년 9월 20일 석가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일체는 불국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 전시 중이다. This paper reviewed the map and picture data from Chapter Ⅱ of the history textbook for middle school students published in 2020~2021 in the 「the development of the North and South Sates Period」. As a result of the analysis, there were the following problems and improvements. This is a case in which academic research results are insufficiently reflected. In the late 6th and mid-7th centuries, paintings of international relations in East Asia were simplified into confrontations between the south-north forces of Türk『Goguryeo』Baekje『Wae and the east-west forces of SuㆍTang』Silla. The friendly relationship between Goguryeo and Türk is difficult to recognize, and the friendly relationship with Su needs to be revised in consideration of Baekje as well as Silla. The Daedonggang basin, which Silla drew as a result of defeating the Tang Dynasty in 676, is also too much. Silla's securing of the Daedonggang basin has been a product of instrumental expansion since 676. All current textbooks include most of the Liaodong area in the Balhae area. However, there are many studies that claim that the Liaodong area was a buffer zone between the Tang and Balhae, so this needs to be reflected. Jang Bogo death year should also be reviewed, marking 846 years instead of 841, the majority theory in academia. Among the names of the five provinces of Balhae, 'Jogongdo' is also problematic. It should be written as 'Aprokdo' contains the destination. Despite the fact that the Younggwangtap of Balhae was influenced by the Tang's culture, it also criticized some textbooks that defined Balhae as a unique culture. There have been many cases of error and misunderstanding. There was a problem with the map of Goguryeo and SuㆍTang war. Goguryeo's response was not well revealed as it depicts the progress of the war only centered on Su and Tang's attacks. There were many maps that marked the starting point of Su and Tang's naval forces in Shandong Dēngzhōu (登州) Province. This should be revised to Láizhōu(萊州). How to draw Goguryeo Cheolli Jangseong on a map was also controversial. As the name suggests, there was a textbook drawn in the form of a Great Wall. However, recent research trends have many skeptical views on 'the theory of the Great Wall.' It is easy to mark the 'estimate site of the Cheolli Jangseong' in the form of dotted lines. In the map of the Goguryeo Revival Movement, there was also a textbook that misrepresented Ko Yeonmu's active area as a Guknaeseong, even though it was Ogolseong Fortress. It also omitted Seol Oyu of Silla, which formed a coalition with Ko Yeonmu. As a result,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Battle of Ogolseong was revealed. The map, which displays aspects of social turmoil at the end of the Silla Dynasty, deals with the conflict of central power in the late 8th and early 9th centuries with different backgrounds and the confusion caused by the peasant uprising in the late 9th century. This is something that should be explained separately. Most of the maps that marked the territory of the Later Three Kingdoms made mistakes in marking Naju as the territory of Later Baekje. Naju was dominated by Gungye's Later Goguryo from 903 to 918, so it should be marked on the map. It is not appropriate to mark Tamna in the same color as Unified Silla and Later Baekje in the North and South Sates Period and later Three Kingdoms Period. Unified Silla and Tamra were not close enough to discuss subjugation. Tamna enjoyed international status as an independent nation until around the 10th century. The color of the Tamna map should be marked separately.

      • KCI등재

        삼국시대 ‘難民’의 발생 배경과 동향

        장창은(Jang, Chang-eu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0 한국고대사탐구 Vol.36 No.-

        이 논문에서는 한국 고대의 移住民을 고대적 ‘難民’으로 개념화해 유형별로 난민의 발생 배경과 동향을 검토하였다. 자발적으로 이주한 난민은 ‘정치 난민’·‘종교 난민’·‘경제 난민’으로 나누었고, 타율적으로 사민된 난민은 ‘외교 난민’·‘전쟁난민’으로 유형화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전후한 시기 발생한 遺民은 자발적인 이주와 타율적인 사민이 혼재되어 있어 별도로 분석하였다. 난민의 발생 동향은 삼국 상호 간, 삼국에서 중국으로 간 경우, 중국에서 삼국으로 온 경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삼국 간 ‘정치 난민’은 고구려에서 백제와 신라로 이주한 난민 규모가 많았다. 백제와 신라 간에는 백제에서 신라로 망명한 난민이 302명으로 신라에서 백제로 온 2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삼국에서 중국으로 간 ‘정치 난민’은 발생 빈도와 규모에 있어서 고구려가 백제·신라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았다. 고구려는 멸망할 때까지 18차례에 걸쳐 114,000명 이상의 난민이 중국에 정치적으로 망명하였다. 난민자의 신분은 왕족부터 문·무인 신료와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중국에서 삼국으로 온 ‘정치 난민’도 고구려가 신라와 백제보다 훨씬 더 많다. 고구려는 중국의 여러 왕조로부터 10차례에 걸쳐 5천여 명 이상의 ‘정치 난민’을 수용하였다. 난민자의 신분도 국왕에서부터 무인을 중심으로 한 신료집단과 백성까지 다양하다. 다만 삼국에서 중국으로 간 백성들이 신료들에 귀속된 난민이었다면, 漢(한군현)에서 삼국(삼한)으로 온 백성들은 독자적·산발적이다. 삼국시대 ‘종교 난민’의 사례는 고구려에서 신라(혜량법사)와 백제(보덕화상)로 간 2건이 남아 있다. ‘경제 난민’은 백제에서 신라와 고구려로 간 인원이 12,000명 이상으로 많았다. 대부분 4세기 말~6세기 전반, 특히 한성도읍기 이후에 발생하였다. 중국에서 삼국으로 온 경우는 385년에 後燕의 幽州와 冀州에서 다수의 유랑민이 고구려에 투항해 왔다. 경제 난민자의 신분은 모두 일반 백성들로 국한되었다. 타율적으로 이주하게 된 ‘외교 난민’은 인질(質子)로써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삼국 간에는 신라의 사례가 4건 4명으로 가장 많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야에 각각 인질을 보냈다. 삼국에서 중국으로 간 외교 난민의 사례는 고구려가 4건 4명으로 신라와 백제에 비해 많다. 고구려의 외교 난민은 모두 4세기대 鮮卑族이 세운 慕容部와 前燕에 보낸 質子였다. 외교 난민자의 신분은 왕족이거나 고위 신료의 자손으로 국한되었다. 삼국시대의 ‘전쟁 난민’은 발생 빈도와 규모 면에서 다른 난민의 사례를 압도하였다. 고구려의 전쟁 난민은 백제·신라·중국으로 215,601명 이상이 발생하였다. 백제 난민은 신라로 10,178명, 고구려로 13,011명 등 25,089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신라의 경우는 백제로 41,801명 이상, 고구려로 8,000명, 중국(당)으로 2,170명 등 52,000명을 초과하는 전쟁 난민이 발생하였다. 중국에서 삼국으로 온 전쟁 난민의 규모는 고구려(47,302명+)와 신라(1,600명) 등 49,000여 명에 달했다. ‘전쟁 난민’의 규모는 전쟁의 결과와 국가 간 우위를 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遺民 난민’은 動因 측면에서 ‘자발적 이주’와 ‘타율적 사민’의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660년 9월 백제 의자왕과 왕족, 신료 93명과 백성 12,000명이 당으로 끌려갔다. 백제에서 신라로 간 유민도 많았다. 멸망 직후인 661년에는 달솔 조복 등이 신라에 항복했고, 670년에는 백제 부흥군의 전쟁 유민포로들이 신라로 강제 사민되었다. 고구려 유민도 668년 멸망 시에 보장왕과 왕자 복남, 대신과 백성 20만 여명이 당에 강제로 끌려갔다. 고구려 유민 중 1만여 명 정도는 북방의 突厥로 망명하였다. 고구려에서 신라로 이주한 유민도 3만여 명에 달했다. 668년 11월에는 문무왕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 유민 7천명을 데리고 수도 경주로 돌아왔고, 670년 6월에는 보장왕의 서자로 알려진 安勝이 4,000여 戶, 2만여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해 왔다.

      • KCI등재

        6세기 중·후반 신라·백제의 각축과 국경선 변천

        장창은(Jang, Chang-Eun) 고려사학회 2017 한국사학보 Vol.- No.67

        554년 관산성 전투를 주도한 여창[위덕왕, 554~598]은 즉위 후 한동안 패전의 후유증을 겪었다. 위덕왕이 통치활동을 재개한 것은 재위 14년(567) 부터였다. 이때부터 중국 남북조의 국가들과 대외관계를 추구했고, 577년까지 능사와 왕흥사의 사리장엄 의식을 주도함으로써 성왕을 추모하고 내부의 결속을 다졌다. 이로써 관산성 전투 패전 이후 대신라 보복전을 추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백제는 먼저 577년 10월에 신라 서쪽 변방의 주・군을 급습하였다. 이때 신라와 백제의 교전지역이 一善[경북 구미시 선산읍] 북쪽이었으므로, 백제는 ‘화령로’ 내지 ‘추풍령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전투의 결과는 백제군 3700여 명이 전사하는 신라 측의 승전으로 끝났다. 신라는 이후 백제의 침략에 대비해 內利西城을 쌓았다. 579년 2월에 백제가 熊峴城과 松述城을 쌓음으로써 신라 내리서성 등의 길이 막혔다. 웅현성이 상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교통로상에 있으므로, 내리서성의 위치는 웅현과 화령의 서쪽 곧 옥천군 청산면 내지 보은군 마로면으로 비정된다. 신라는 내리서성을 쌓은 후 백제의 閼也山城[전북 익산시 낭산면]을 급습해 빼앗았다. 옥천・영동 방면에서 진산이나 금산을 경유해 서진한 듯하다. 다만 알야산성이 백제 영내 깊숙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이를 지속적으로 영유하지는 못했다. 6세기 중・후반 화령로와 추풍령로를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가 공방전을 벌였지만, 두 나라의 방어체계는 한계를 드러냈다. 554년에 신라가 차지한 관산성은 신라가 백제를 압박하는 데 거점성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공세는 대전과 금산지역에 집중되었다.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가 금산 방면으로 진출한 정황은 분명하다. 금산군 추부면 장대리에서 28기의 횡구식석곽묘가 발굴되었는데, 부장품으로 短脚高杯와 附加口 緣臺附長頸壺가 다량으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파초리 파괴분과 만락리산성・핏재산성 등의 조성주체를 보는 관점에 따라 금산지역 영유권의 향방은 달라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금산분지 전체를 차지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그러나 파초리 파괴분과 여타 산성들의 발굴조사가 미비하고, 산성 배치양상에서 금산읍과 추부면이 구별되는 모습은 이 일대에서 신라와 백제가 장기간 대치한 듯한 인상을 준다. 신라는 옥천에서 금산 북쪽 방면으로 가한 공세가 추부와 진산 사이에서 교착되자, 추풍령로를 이용해 영동에서 서남진하여 금산분지 남쪽으로 선회하여 백제를 압박했다. 이에 백제는 596~598년에 걸쳐 백령산성을 축조했다. 이는 대가야 멸망 후 무주와 진안 방면에서 쳐들어오는 신라군의 침략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신라의 대전지역 진출시기와 범위를 분명히 하기는 어렵다. 다만 신라가 조성한 계족산성과 주산동 고분군을 고려하면, 6세기 중・후반에 신라가 대전 동쪽의 계족산-식장산까지 진출해 백제에 공세를 가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는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대전 동남쪽 방어를 위해 축성한 沙井城[대전시 중구 사정동]과 대전분지 서쪽의 갑천 동쪽 인근에 축성한 월평산성을 거점성으로 삼아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갑천 서쪽에 사비기의 무덤군이 집중 분포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6세기 중・후반 신라와 백제는 대전분지를 남북으로 흐르는 유등천과 대전천을 완충지로 삼아 국경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In 554, Yeochang[King Wideok, r. 554~598] took the lead in the Battle of Gwangsanseong fortress. But King Seong(r. 523~554) was killed by ambush of Silla. Silla won a landslide victory in Gwangsanseong fortress. King Wideok after accession to the throne, suffered the aftereffects of defeat for a while. King Wideok was ruling a reign of 14 years since(567) was to resume activities. From 577, King Wideok attacked the Silla. First, In 554.7, Baekje make a surprise attack on the western frontier of Silla. At this time Baekje went by way of ‘Hwaryeong route’ or ‘Chupungnyeong route’. A result of combat ended in a victory for Silla. Is prepared for the invasion of Baekje, Silla built the Naeriseoseong Fortress[Cheongsan-myeon, Okcheon-gun or Maro-myeon, Boeun-gun, Chungbuk]. In 579.2, Baekje built the Unghyunseong Fortress and Songsulseong fortress. Due to this, The road from Silla to Naeriseoseong etc was blocked. Since 554, Gwangsanseong fortress became a military base of the Silla which pressure to the Baekje. Silla"s offensive was concentrated in Daejeon and Geumsan-gun, Chungcheongnam-do. That"s the evidence that advance to Geumsan of Silla was Jangdae-ri ancient Tombs, Geumsan-gun. In the middle~late 6th century, Silla and Baekje shared a border in Geumsan-eup and Chubu-myeon, Geumsan-gun. In 596~598, Baekje built the Baekryeongsanseong Fortress in southwest of Geumsan-gun in order to stop the invasion of Silla. Meanwhile, In the middle~late 6th century, Silla and Baekje shared a border in basin of Daejeon City. Silla built the Gyejoksanseong Fortress. Baekje built the Wolpyeong sanseong Fortress and Sajeongseong Fortress[Sajeong-dong, Jung-gu, Daejeon] for respond to it.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