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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신라·백제의 문화적 특성과 융합

        서현주(Seo, Hyun-ju) 신라사학회 2018 新羅史學報 Vol.0 No.42

        본고에서는 고고학 자료 중 주거와 건물, 고분, 이와 관련이 많은 기와, 토기 등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신라와 백제의 문화적 특성을 정리해보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신라와 백제 문화의 융합(교류) 문제에 접근해보았다. 신라와 백제는 6세기 중엽 이후 대체적인 변화 양상이 유사하지만, 그 이전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는 주거뿐 아니라 고분, 기와의 제작기법, 토기의 기종 구성과 형식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 배경에는 원삼국시대 이래 두 국가의 왕실이나 건국세력의 계통이나 구성, 북방과의 친연성, 지리적인 위치에 따른 중국과의 친연성 차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두 국가의 문화적 특성은 신라의 경우 전통성, 배타성(획일성), 후진성, 백제의 경우 다양성(포용성), 개방성, 그리고 선진성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두 국가는 일정 시기에 문화적인 융합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 양상은 단계적으로 차이가 난다. 4~6세기 전엽에는 두 국가의 변경지역인 충청지역에 신라가 진출하여 백제계(마한계 포함) 문물이 늦게까지 공존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 지역 일대의 백제계 지방민에 의한 것이다. 이 시기에 신라 왕경에 나타나는 토기나 기와 등의 백제 문물도 이들을 매개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 문화가 전반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신라와 백제 문화의 융합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여러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기와의 제작기술, 사찰을 비롯한 건물의 건축기술, 토기를 중심으로 한 식기문화 등에서 백제 문화의 영향이 확인된다. 이 때의 문화적 융합은 나제동맹, 혼인동맹 등으로 맺어진 백제와 신라 관계가 바탕이 된 것이며, 주로 신라지역에서 백제 멸망 직후까지 이어진다. 이후 신라는 기존의 전통문화나 중국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의 문화적 차이는 다소 커지는 양상도 나타난다. This study set out to arrange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Silla and Baekje in archeological materials about dwelling, buildings, old tombs, and many roof tiles and pottery related to them and take an approach to the issues of cultural convergence(including exchanges) between Silla and Baekje. The two states showed similar changing patterns overall since the middle sixth century, but there were big cultural differences between them in the former period. These differences are clear in houses, old tombs, making techniques of roof tiles, and types and forms of pottery. As for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the two states reflected in them, Silla was characterized by tradition, exclusiveness(uniformity), and backwardness, while Baekje was characterized by diversity(acceptability), openness, and advancement. There was cultural convergence between Silla and Baekje, as well, with some differences in its pattern according to the stages. During the period of the fourth century ~ the former half of the sixth century, the Baekje-style things remained in some areas of Chungcheong that were incorporated into the territory of Silla or were partially found in Wanggyeong of Silla. Since the middle sixth century, cultural convergence between Silla and Baekje became full-blown in the overall changing process of Silla culture. Silla accepted many things from Goguryeo and Baekje, and the influence of Baekje culture was found in Silla"s roof tile-making technology, building construction technology, and tableware culture around pottery. This cultural convergence was based on the relations of Baekje and Silla including Silla-Baekje Alliance and marriage alliance. As Silla created a new culture based on the introduction of Chinese civilization as well as its old traditional culture since then, cultural differences between Baekje and Silla became large again.

      • KCI등재

        신라의 ‘一統’ 인식과 그 영향

        장일규 신라사학회 2014 新羅史學報 Vol.0 No.32

        This article was studied Silla's ‘Unification’ perception. Sinmoon King was emphasized ‘Unification’ perception. The perception continued after Soseong king. At the end of the Silla kingdom, ‘Unification’ perception was changed. Confucian scholar Gimyeon was stressed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However, Choi Chi-won was stressed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But again, ‘Unification’ perception was changed in later Three Kingdoms period. Gyeonhwon and Wanggeon was emphasized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perception. In particular, Wanggeon was presented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in order to appease public sentiment. It was an act of ‘Samhan should be unified as one of the country.’ Silla's ‘Unification’ perception was unification plan. 이 글은 신라의 ‘一統’ 인식이 형성・변화한 과정을 살피고, 그것이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미친 영향을 고찰한 것이다. 통일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문무왕은 ‘당나라의 義軍’과 함께 ‘선왕의 뜻’을 이어 ‘원흉을 제거하였다’고 국내외에 알렸다. 하지만 통일 전쟁이 끝난 뒤에 신문왕은 ‘一統三韓’・‘統三’을 강조하면서 전쟁에서 희생되었던 ‘신라 백성의 추숭’을 부각하였다. 이것은 원성왕과 소성왕 이후까지도 계속 유지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아울렀다는 ‘일통’ 인식은 신라 중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하대 초에 정립되었다. 신라 말에 ‘일통’ 인식은 혼재한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대체로 왕명을 받아 비명을 찬술하였던 유학지식인에 의해서 나타났다. 곧 金穎은 ‘삼한’과 ‘신라 백성’을 강조하였는데, 崔致遠은 신라 백성을 위무하였던 무열왕을 강조하였다. 특히 최치원은 ‘일통삼한’・‘통삼’에서 ‘삼한’을 ‘삼국’으로 바꾸어 이해하면서, ‘一統三韓’과 ‘一統三國’을 함께 강조하는 ‘일통’ 인식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 신라와 발해를 둘러싼 進士試 급제 경쟁에 관련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발해를 비난하면서 신라의 통일을 강조할 때, 삼한의 비정을 달리하며 진한인 신라 국가를 앞세우는 ‘일통삼국’ 인식을 애써 강조하였다. 후삼국시기에 ‘일통’ 인식은 다시 변화하였다. 견훤과 왕건은 세력을 다투면서 ‘일통삼한’ 인식을 거론하였다. 그들은 신라 국왕을 존중하고 수호해야 할 ‘尊主’로 부각하였다. 특히 신라의 영역을 나누어 지배하였으므로, ‘일통삼국’이 아닌 ‘일통삼한’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의자왕의 宿憤’을 강조하였고, 왕건은 고려를 세우면서 ‘고구려의 원수’가 아닌 ‘고구려’를 강조하였다. 견훤은 백제 국가를 유념한 ‘일통삼국’을 나타내었지만, 왕건은 사회적・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쏟으며 이전의 ‘일통삼한’을 내세우면서 민심을 회유하였다. 신라 국가를 부정하였던 백성들은 점차 ‘삼한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일통’ 의식을 갖게 되었다. 자연히 민심은 왕건 쪽으로 기울었고,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에도 고려는 ‘일통삼한’ 인식을 유지하면서, 따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우며 발해 유민을 아울렀다. 신라의 ‘일통’ 인식은 후삼국시기에 통일 방안의 하나인 ‘일통’ 의식으로 기능하였던 셈이다.

      • KCI등재후보

        新羅 征討 地理考(津田左右吉)

        이부오,장익수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7

        신라사의 기본사료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해 전문적인 분석을 처음 시도한 연구자는 츠다 소오키치(津田左右吉)였다. 우리는 그 최종판이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연구≫, 洛陽堂, 1919)의 번연문을 ≪新羅史學報≫제15집 (2009.4)에 실었다. 그런데 이 글은 1913년 <新羅征討地理考>(≪滿鮮歷史地理≫ 1,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그가 표명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고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에 우리는 신라본기에 대한 일본인 학자들의 논의를 면밀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新羅征討地理考>에 대한 소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본고에서 츠다는 신라본기 남해차차웅 11년~소지마립간 32년에 기재된 왜의 침공 기사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이를 통해 그는 天平寶字 3년(759) 즉 경덕왕 18년경 일본의 신라 정벌 계획을 토대로 만들어진 전설에 의거해 역사가들이 해당 기사들을 構成해 낸 것이라고 보았다. 이 주장이 왜의 신라 침공을 부정하는 데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을 통해 임나일본부의 기초가 공고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왜의 침공이 모두 가야 방면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는데, 그 주된 근거는 당시 가야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한다고 본 데 있었다. 그의 신라본기 비판론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신라본기 기사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 일본인 연구자들의 인식을 파악하는 데는 이 글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하에서 본문의 ‘( )’는 츠다가 보충한 세주이고, ‘(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역자의 간단한 설명이다. 각주에서는 ‘**’만 저자의 원주이고, 나머지는 역주이다.

      • KCI등재후보

        일제강점기 신라사 사료비판론의 전개-≪三國史記≫ 新羅本紀 초기기사를 중심으로-

        이부오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7

        新羅本紀 초기기사에 대한 근대적 연구는 1890년대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고대 사서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신빙성을 낮게 평가하고, 신빙 가능한 시점을 탈해왕대~법흥왕대 이후로 다양하게 설정했다. 러・일전쟁 이후 滿鮮史가 강조되면서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비교대상으로서 중국 사료가 강조되었다. ≪三國志≫ 韓傳을 기준으로 신라의 건국시기는 2・3세기 이후로 설명되었다. 특히 前秦에 대한 사신 파견을 근거로 신라의 왕통이 4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초기 왕대에 대해서는 혁거세대~흘해대의 16왕에 대한 조작설이 제기되었고, 실제 시기를 수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대외교섭 기사는 거의 무시된 반면, 任那日本府가 가야지역을 장악해 신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日本書紀≫의 기록은 중시되었다. 이러한 사료비판론은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합리적 해석의 단서를 제공했다. 그러나 신라본기 초기기사에 대해서는 엄격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중국・일본 사료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편향적 태도를 보였다. 이는 근대적 사료비판론의 외형을 갖추면서도 이를 위한 구성요건을 결여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태도는 최근까지 한국인 학자들의 연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 신라상고사의 복원을 위해서는 이를 극복하는 한편, 신라본기 초기기사에서 드러나는 모순점에 대해 체계적 분석이 요청된다.

      • KCI등재

        신라사 補正을 위한 당 金石文 기초 연구

        권덕영(Kwon, Deok-young) 신라사학회 2016 新羅史學報 Vol.0 No.38

        최근 중국의 국토개발 과정에서 당나라 금석문을 포함한 수많은 역사자료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그런데 비록 빈도가 높지 않으나 고대 한반도 삼국과 발해 관련 당 금석문도 가끔 발견된다. 이런 점에서 중국금석문은 한국고대사 연구 자료에 대한 갈증을 다소나마 해소시켜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중국에는 1만여 점의 당대 금석문이 공식적으로 조사, 보고되었다. 그 가운데 신라 관련 금석문 38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금석문은 크게 在唐 新羅人 관련 자료와 唐人의 신라 내왕자료로 대별되고, 자료의 내용은 신라와 당 사이의 사절 왕래와 전쟁, 求法과 문화교류가 중심이 된다. 사실 신라 관련 당 금석문이 신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광범위하게 補正 할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료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면, 당 금석문은 신라사의 일부를 보완하는데 충분히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당 금석문을 활용한 신라사 복원’이라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설정한 기초 연구 작업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특정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보다 신라와 관련한 당 금석문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정리,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추후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신라사 補正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Recently a lot of historical materials including T’ang epigraphy have been excavated and found in China. Although the frequency is not high, sometimes T’ang epigraphy related to Silla history are found. This situation supplement somewhat the lack of Korea ancient historical resources. More than ten thousands of T’ang epigraphy officially have been investigated and reported until now. Among them, 38 items of T’ang epigraphy related to Silla are included. We can classify them into two broad categories in terms of content. That is to say, one is politics and foreign affairs, the other society and cultural exchange. Although they are not quantitative enough for research, they can not be denied that it is useful. This article is a basic research to realize such a T’ang epigraphy to supplement the Silla history. So rather than draw specific conclusions here, I would like to be satisfied with broadly investigating and organizing T’ang epigraphy related to Silla. Based on these data, I plan to work on supplementing Silla history in earnest.

      • KCI등재

        신라삼국통일론 논의의 연구사적 검토

        장원섭(Chang, Won-seob) 신라사학회 2018 新羅史學報 Vol.0 No.43

        7세기 후반 한반도를 무대로 벌어진 삼국통일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고대사에서 주요 쟁점 중의 하나이다. 이 전쟁의 결과로 신라의 삼국통일이 이루어졌다는 시각이 통일 직후부터 형성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자들에 의해 발해와의 병립에 주목한 남북국시대론과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보는 시각이 제기되면서, 이후 신라의 삼국통일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이 이어졌다. 신라삼국통일론에 대한 논쟁은 크게 나당동맹 결성에서 비롯된 외세의 이용, 나당전쟁을 통한 외세 극복과정, ‘一統三韓’ 의식의 형성 시기, 영토적으로 불완전한 통일, 통일 후 국토 재편과 민족통합정책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에 대한 견해는 신라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이어지고, 부정론은 ‘남북국시대론’과 ‘후기신라론’ 그리고 ‘고려 최초 통일론’과 ‘백제통합전쟁론’ 등으로 제기되었다. 신라와 당의 관계 또한 단지 대외문제로서 이해하기 보다는 삼국의 정세와 관련지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라는 오랜 숙적이었던 백제를 滅하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었지만, 처음부터 고구려 멸망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당과 동맹을 결성하면서 북방의 위협세력이었던 고구려 멸망을 2차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신라가 唐을 전략적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자신들의 국력이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고려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당동맹 체결은 바로 신라가 백제, 고구려와의 외교전에서 승리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신라 삼국통일의 역사적인 의의에 대한 평가도 각각의 논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 부여해 왔다. 7세기 후반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을 끌어낸 역사적 사건인 신라 삼국통일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에만 천착할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動因을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해석하는 거시적 접근이 필요하다. How to view the Three Kingdoms war on the Korean Peninsula in the late 7th century is one of the major issues in ancient Korean history. As a result of the war, the view that Silla was able to unify the three kingdoms of the Korean Peninsula was formed right after the unification. However, as historians of history and geography in the late Joseon Dynasty focused on the conflict with Balhae and saw the theory of the South Sea as the first unified dynasty, various disputes ensued. The dispute ove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of Silla was largely based on the use of foreign powers resulting from the establishment of the Nadang Alliance, the process of overcoming foreign forces through the war, and the formation of national unification. This view led to positive and negative views on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of Silla, including the "South Sea State Age", "Later Silla" and "Baekje War". The relationship between Silla and Tang also needs to be understood in relation to the situation of the three kingdoms rather than just understanding as an external matter. Silla"s primary purpose was to destroy its longtime rival, Baekje, but it established a party and an alliance with the ultimate goal of the collapse of Goguryeo, as a secondary goal. Silla chose Tang as its strategic partner when its national power was relatively inferior to Baekje and Goguryeo. The signing of the Nadang alliance is the result of Silla"s victory in diplomatic wars with Baekje and Goguryeo. Evaluation of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of Silla has also given different meanings according to each issue. The political,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factors are the only things that we need to look into in order to accurately understand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Shilla kingdoms, which led to the reorganization of East Asia"s international order since the late 7th century. It needs to be reaffirmed that Silla"s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was not a product of chance as a result of the war in the late 7th century, but a result of its long accumulation of national capabilities.

      • KCI등재

        5~6세기 신라와 북위의 교섭

        홍원기(Hong, Won-Gi) 신라사학회 2022 新羅史學報 Vol.- No.54

        본 글은 5~6세기 신라와 북위의 교섭을 밝히기 위하여 구성되었다. 우선 5세기와 6세기 신라의 대외적 상황은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에, 5세기와 6세기를 각각 간접 교류시기, 직접 교류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이 시기 신라와 북위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도 파악하여야 함으로 부가적으로 서술하였다. 5세기 중반까지 신라는 고구려에 예속된 상황이었으므로, 당시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북위와 간접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예시를 제시하였다. 첫째, 신라의 初傳佛敎가 북위의 승려 曇始에 의해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담시와 墨胡子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여 그 근거를 제시하였다. 『三國遺事』 「阿道基羅」의 논평에서 一然은 담시가 阿道, 墨胡子, 摩羅難陀 중 한 사람이 필히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였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 중 아도는 일연이 말하기를 묵호자와 동일인물일 것이라고 하였다. 아도 즉 묵호자는 눌지마립간 시대에 불교를 전파하였으므로, 북위의 승려 담시와 활동연대가 겹친다. 그렇다면 담시가 묵호자라는 예명을 사용하여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였을 가정이 성립된다. 둘째, 신라의 왕호와 관등에 붙은 ‘干’이라는 호칭이 북위의 ‘可汗’ 호칭에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는 사실이다. ‘可汗’은 ‘干’과 언어학적으로 통용되는데, 이것은 북위 太武帝 太平眞君 4년(443) 내몽고 嘎仙洞에서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石刻祝文에 기록되어 주목되었다. 나아가 ‘可汗’의 유입 시기를 살펴보면 고구려가 435년 북위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을 때로 생각된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의 예속된 상황이었으므로 고구려를 통해 간접적으로 북위의 영향을 받아 왕호와 관등에 붙은 ‘干’이라는 호칭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는 고구려의 예속에 벗어나기 위해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450년 신라의 何瑟羅 성주가 고구려의 변방 장수를 죽이면서 두 국가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454년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서 두 국가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497년까지 지속되었다. 497년 신라가 고구려의 침략을 받았지만, 백제는 국내의 정치적 혼란으로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으면서 나제동맹에는 균열이 생겼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라는 국익을 위하여 고구려와 맹약을 체결하고, 다시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개선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이후, 신라가 북위에 직접적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는 신라와 북위의 교류방식이 5세기 간접 교류에서 6세기 직접 교류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이 당시 고구려는 북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신라가 북위의 선진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였다. 북위는 당시 宣武帝의 시대로써 이전 孝文帝가 단행한 개혁들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효문제의 개혁은 지증왕대에 실시된 국호 · 왕호의 제정, 상복법의 제정 · 반포, 주군제의 시행, 동시의 설치 등의 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This thesis is intended to reveal the negotiation of the Northern Wei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First of all, since the external situation of Silla in the 5th and 6th centuries is distinct, the 5th and 6th centuries were divided into the indirect exchange period and the direct exchange period, respectively. It also described the relationship between Goguryeo and Northern Wei and Silla during this period. As Silla was under the subjugated situation by Goguryo until the mid-5th century, Silla was able to interact indirectly with the Northern Wei through Goguryeo. The two examples are given to explain this. First, Sillas Early Tradition Buddhism(初傳佛敎) was propagated by the Buddhist monk named Damshi(曇始) of the Northern Wei. In this paper, I thought that Damshi and Mukhoja(墨胡子) are the same person and resented the basis. According to commentary by 『SamGukYuSa』(三國遺事)「Adokira」(阿道基羅), Il-yeon(一然) said Damshi would be the same person as 阿道(Ado), Mukhoja, Maranata(摩羅難陀). In addition, Il-yeon Said Mukhoja and Ado was same person. Ado(Mukhoja) propagated Buddhism during the reign of Nulji Maripgan(訥祗麻立干), overlaps with Damshi, a Buddhist monk in the Northern Wei, and a family that, using the stage name of Mukhoja, first spread Buddhism to Silla. Second, It is the fact that the title of gan(干) attached to the royal family name and official rank of Silla was established under the influence of the Northern Wei Khan(可汗). Khan(可汗) is linguistically used with gan(干), which was noted for the record of Seokgakchukmun(石刻祝文) made in Alseondong(嘎仙洞), Inner Mongolia, to honor ancestors in the 4th year of Emperor Taiwu of Northern Wei Taepyeongjingun(太武帝 太平眞君 4年=443). Furthermore, after reviewing the inflow timing of Khan(可汗), it is believed to be the time when Goguryeo first dispatched envoys to the Northern Wei in 435. Under the subjugated situation by Goguryeo, Silla was indirectly influenced by the Northern Wei through Goguryeo and established gan(干) for the title of king and official rank. On the other hand, Silla formed an alliance with Baekje to break away from Goguryeo.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countries was triggered by the murder of Goguryeos frontier general by the lord of Haslla(何瑟羅) in 450, and the relationship of the two countries turned hostile in 454 when Goguryeo attacked Silla. This relationship lasted until 497. Sllia was invaded by Goguryeo in 497, but Baekja did not dispatch reinforcements due to domestic political chaos, resulting in cracks in the allies of Silla and Baekje. Under these circumstances, Silla formed an alliance with Goguryeo for its own national interests and established friendly relations again. The improved relationship with Goguryeo later became the backdrop for Sillas direct dispatch of envoys to the Northern Wei. This change indicates that the period of indirect exchange between Silla and the Northern Wei in the 5th century had changed to the period of direct exchange in the 6th century. At that time, Goguryeo maintained friendly relations with the Northern Wei, so it was the best time for Silla to accept the advanced cultural properties of the Northern Wei. The Northern Wei at that time was maintaining the reform of the previous Emperor Xiaowen(孝文帝) in the era of Emperor Xuanwu(宣武帝), which had a significant impact on the reforms carried out in the King Jijeung(智證) period, such as the establishment of the country name·title of king, enactment and promulgation of mourning law, implementation of State Army System, and installation of Dongsi(東市).

      • KCI등재

        百濟와 新羅의 國家的 美術交流

        陳政煥(Jin, Joung-hwan) 신라사학회 2018 新羅史學報 Vol.0 No.42

        본고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고분 출토품, 제와술과 목조건축술 등 기술, 불교미술품 등 다양한 분야의 대표적인 유물을 통해 양국 간의 미술 및 문화교류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교류의 정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본고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미술교류에 대해 양국 간의 정치적・군사적 遠近에 따라, 첫째 ‘적극 동맹기’, 둘째 ‘동맹 소강기’, 셋째 ‘대치 시기’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첫 번째, ‘적극 동맹기’는 450년~500년으로 고구려의 남하에 백제와 신라 양국이 적극적으로 공동 대응한 시기이다. 이 시기 양국 간 미술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송산리 4호분에서 나온 은제과판이다. 식리총 금동신발은 한성시기에서 웅진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백제 금동신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송산리 고분의 과판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과판이다. 이 시기의 교류는 비록 적극 동맹기였으나, 이처럼 완제품이 상대 국가에 사여되는 것 이외에 문화교류는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동맹 소강기’는 500년 이후부터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554년 이전까지이다. 이 시기 양국은 명목 상 동맹이었으나,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양-백제-신라 3국의 국제 관계 속에서 백제의 제와술과 같은 기술이 신라에 전해지는 한편 중국 남조 불상양식의 영향을 공유하는 등 동맹이 굳건했던 그 전시기에 비해 오히려 미술교류의 폭이 더 넓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 ‘대치 시기’에는 ‘동맹 소강기’ 그 이전 시기 있었던 국가 차원의 직접적 교류는 점차 쇠퇴됨에 따라, 목조건축술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방의 문화 내지 미술이 그대로 전달되기보다, 다른 국가의 문화와 미술의 모티프를 바탕으로 자기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후삼국기 후백제는 전반적으로 신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가졌으나, 황룡사지 출토 금동불입상, 남산 늠비봉 석탑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후백제에서도 후백제 미술을 신라지역에 이식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에 세련된 백제 미술이 신라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런데, 본고를 통해 국가 차원의 미술교류는 직접적인 영향이 많은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백제의 미술이 신라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백제와 신라의 미술교류는 당시 양국의 정치적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KCI등재

        신라의 ‘一統’ 인식과 그 영향

        張日圭(장일규) 신라사학회 2014 新羅史學報 Vol.0 No.32

        이 글은 신라의 ‘一統’인식이 형성·변화한 과정을 살피고, 그것이 후삼국통일 과정에서 미친 영향을 고찰한 것이다. 통일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문무왕은 ‘당나라의 義軍’ 과 함께 ‘선왕의 뜻’을 이어 ‘원흉을 제거하였다’고 국내외에 알렸다. 하지만 통일 전쟁이 끝난 뒤에 신문왕은 ‘一統三韓’·‘統三’을 강조하면서 전쟁에서 희생되었던 ‘신라 백성의 추숭’을 부각하였다. 이것은 원성왕과 소성왕 이후까지도 계속 유지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아울렀다는 ‘일통’인식은 신라 중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하대 초에 정립되었다. 신라 말에 ‘일통’인식은 혼재한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대체로 왕명을 받아 비명을 찬술하였던 유학지식인에 의해서 나타났다. 곧 金穎은 ‘삼한’과 ‘신라 백성’을 강조하였는데, 崔致遠은 신라 백성을 위무하였던 무열왕을 강조하였다. 특히 최치원은 ‘일통삼한’·‘통삼’에서 ‘삼한’을 ‘삼국’으로 바꾸어 이해하면서, ‘一統三韓’과 ‘一統三國’을 함께 강조하는 ‘일통’인식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 신라와 발해를 둘러싼 進士試급제 경쟁에 관련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발해를 비난하면서 신라의 통일을 강조할 때, 삼한의 비정을 달리하며 진한인 신라 국가를 앞세우는 ‘일통삼국’인식을 애써 강조하였다. 후삼국시기에 ‘일통’인식은 다시 변화하였다. 견훤과 왕건은 세력을 다투면서 ‘일통삼한’인식을 거론하였다. 그들은 신라 국왕을 존중하고 수호해야 할 ‘尊主’로 부각하였다. 특히 신라의 영역을 나누어 지배하였으므로, ‘일통삼국’ 이 아닌 ‘일통삼한’ 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의자왕의 宿憤’을 강조하였고, 왕건은 고려를 세우면서 ‘고구려의 원수’ 가 아닌 ‘고구려’ 를 강조하였다. 견훤은 백제 국가를 유념한 ‘일통삼국’ 을 나타내었지만, 왕건은 사회적·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쏟으며 이전의 ‘일통삼한’을 내세우면서 민심을 회유하였다. 신라 국가를 부정하였던 백성들은 점차 ‘삼한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일통’ 의식을 갖게 되었다. 자연히 민심은 왕건 쪽으로 기울었고,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에도 고려는 ‘일통삼한’인식을 유지하면서, 따로 ‘고구려 계승의식’ 을 내세우며 발해 유민을 아울렀다. 신라의 ‘일통’인식은 후삼국시기에 통일 방안의 하나인 ‘일통’의식으로 기능하였던 셈이다.

      • KCI등재

        660년 7월 백제와 신라의 황산벌 전투

        문동석(Moon, Dong-seok) 신라사학회 2016 新羅史學報 Vol.0 No.38

        660년 7월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13만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 나당연합군 중 신라군의 주요한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나당연합군은 7월 10일 백제 사비성 남쪽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군에게 막혀 약속 날짜를 어겨 7월 11일에 도착하였다. 이에 소정방은 약속한 날짜보다 늦게 도착한 신라군의 책임을 물어 督軍 김문영을 참수하려고 하였다. 왜 소정방은 신라의 주요한 장수 중 유독 김문영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일까? 이는 김문영이 독군이라는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독군은 신라군의 전반을 감독하는 지휘관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중국 사서의 용례를 볼 때 ‘督軍’은 후한 광무제대에 처음 등장하여 군사지휘관이라는 뜻으로 통용되었으나 魏나라부터 督軍糧御史등과 같이 군수물자의 보급과 관련된 직무를 병기하면서 그 임무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보면 ‘독군’ 뒤에 양식 糧자가 공통적으로 붙어 있음으로 볼 때 김문영은 독군양어사일 가능성이 높다. 김문영을 포함한 신라군 5만은 13만 당나라군의 병참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 주요한 임무였을 것이다. 한편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군의 지연작전에 말려들어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 결과 약속한 날짜에 당나라군에게 보급품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군대가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죄가 크다. 따라서 신라군의 입장에서는 황산벌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으며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관창이 필요했다. 신라 왕실은 관창의 장렬한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적장이었던 계백을 영웅화 했다. 백제 영웅 계백에 맞서 두 번의 싸움 끝에 장렬하게 죽은 관창, 이보다 더 극적인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In July 660, the allied forces between Silla and Tang Dynasty destroyed Baekje using a hundred-thirty thousand army. What was the major role of Silla troops among Silla-Tang allied forces? Silla-Tang allied forces promised to meet at the southern part of Sabi Castle, Baekje in July 10th, but Silla troops broke their promise and arrived in July 11thbecause Baekje tried to block the mat Hwangsanbeol. For that reason, Su Ding fang tried to be head Kimmunyoung to hold him responsible. Why SuDingfang at tempted to kill especially Kimmunyoung of all the main generals? That’s because Kimmunyoung was a ‘Tuchun’(督軍), one of a position in the government. In the meantime, Tuchun had been understood as a commander who supervised the whole Silla troops. To take an example from Chinese classics, the word ‘Tuchun’ first appeared during the era of Emperor Guangmu of the Later Han dynasty and used its meaning as a military commander, but it had also written as ‘Tuchun liang yushi’(督軍糧御史), a royal secret inspector who had a duty of military supplies and its duty had found a shape since Wei(魏). In 《Goryeosa》 and 《Goryeosa Jeolyo》, they both have the letter ‘liang’(糧) after ‘Tuchun’, and it means there is a high possibility that Kim munyoung was a ‘Tuchun liang yushi’. The major assignment of fifty thousand Silla troops include Kim munyoung would be supporting logistics to a hundred-thirty thousand Tang troops. Meanwhile, Silla troops entangled themselves in delaying operations by Baekje troops and fought a hard battle with them. As a result, Silla troops couldn’t deliver supplies to Tang troops. In the military, missing an appointment is a cardinal sin; so Silla troops needed to justify how fierce the Battle of Hwangsanbeol was and how they won. To do this, they needed Gwanchang- Silla Kingdom made a hero of Gyebaek, who was an enemy general from Baekje, to emphasize the glorious death of Gwanchang. ‘Gwanchang, who met a heroic death on the battlefield to fight against Gyeback twice’- it couldn’t have been more drama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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