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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욕망 Ⅲ. 끝의 끝?

        김창래(Kim, Chang-Rae)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2013 철학탐구 Vol.34 No.-

        철학은 전통적으로 존재자의 근거, 그리고 그 근거의 근거를 물으며 근거들의 계열의 끝을 추구해 왔다. 물론 이 끝은 철학자의 신이고, 이 신이 인간 존립의 근거이고 형성의 목표이자 또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리의 기준이었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무의 지배, 허무주의의 장막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런데 니체는 신은 죽었고 끝은 끝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허무주의에의 예속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인가? 이 글은 “허무주의를 끝까지 체험한 자”로서의 니체가 무의 지배에 맞서 어떻게 인간의 삶과 이 삶의 의미를 수호했는지를 보이려 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가 논증될 것이다. 첫째 니체가 죽었다고 하는 신은 존재자의 근거를 물어 올라가는 상승적 사유의 끝으로서의 신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자가 생겨나게 된 최초의 원인, 즉 생성의 시작으로서의 신이다. 니체는 이 두 신의 혼동 내지 전도 가능성을 경계한다. 죽은 신은 일차적으로는 시작으로서의 신이다. 둘째 니체는 물론 끝으로서의 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인데, 그의 비판은 도덕적인 신, 인간의 삶에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신에 제한된다. 그는 인간과 삶을 강하게 하는 새로운 신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셋째 죽은 신은 무엇보다 ‘그 하나의 신’, 유일신이다. 니체는 유일신이 죽고 떠난 빈자리에 많은 새로운 신들을 형성하여 세우기를 원한다. 이렇게 많은 신들이 생겨나면서 유일신의 죽음은 피할 길이 없다. 유일신은 ‘여러 신들 중의 하나일 수는 없는 신’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다신론자다. 넷째 많은 새로운 신들은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관점에 따라 만든 인간적인 신이다. 니체는 이런 신들을 위버멘쉬라 부른다. 위버멘쉬는 인간의 위에서 인간의 고양을 이끌고 인간 형성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춤추는 별”이다. 이것이 니체의 철학이 추구했던 높아가는 인간들의 계열의 끝이고 다신론자로서의 니체의 신이다. 그러나 이 신은 ‘그 하나의 신’이 아니라 ‘많은 새로운 신들 중의 하나’이다. 이 모든 논의의 근거에는 우리 유한한 인간에게는 ‘하나(Eines)’가 아니라 단지 ‘여럿(Vieles)’만이 허용된다는 관점주의적 입장이 놓여 있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은 스스로 상승하는 계열의 끝을 추구하는 욕망을 갖고 또 실제로 높아지지만, 그에게 허용되는 끝은 ‘그 하나의 끝’이 아니라 ‘여러 끝들 중의 하나로서의 끝’일 뿐이다. 이것은 철학(애지)하는 자로서의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다.

      • KCI우수등재

        상, 재현, 언어. 가다머의 언어 개념

        김창래(Chang-Rae Kim) 한국철학회 2012 철학 Vol.0 No.110

        이 글은 가다머의 언어 개념을 규명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아래의 세 물음에 대한 답변을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 언어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가다머는 언어는 존재를 표현하는 상(Bild)이라고 답한다. 이때의 상은 존재를 모방하는 모상과 존재를 자의적으로 지시하는 기호의 중간에 놓인 것이다. 따라서 ‘상으로서의 언어’는 ‘존재와 같은 모상’이 아니고 ‘존재와 다른 기호’도 아니다. 이 둘의 부정으로서의 상은 오히려 이 둘의 특성(존재와 같음과 다름)을 모두 갖는다. 여기서 둘째 물음이 제기된다. 모상과 기호의 중간으로서의 상은 존재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이 물음에 가다머는 이의적으로 답한다. 상으로서의 언어는 일면 존재와 같고 타면 존재와 다르다. 셋째 물음은 존재와 언어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 같음과 다름 간의 역설에 대한 것이다. 이 역설을 해명하기 위해 본고는 상으로서의 언어가 수행하는 표현이 곧 ‘존재(현존)의 재현’임에 주목한다. 즉 재현이 포함하는 두 의미(재-현과 대표)가 이 역설을 푸는 열쇠이다. 언어적으로만 사유하는 인간은 모든 언어적 표현 이전의 현존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고 오직 언어적으로 재현된 존재를 현존하는 존재로 간주해야만 한다. 이 재현 안에는 존재가 표현되어 있어서 마치 존재가 그 안에 현존하는 듯이 사유될 수 있고, 그런 한에서 재현은 현존의 권리 있는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언어는 존재와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 언어적으로 재현된 존재는 이미 특정 언어에 의해 매개된 존재이기에 모든 매개와 규정을 벗어나 절대적인 방식으로 현존하는 존재 자체는 아니다. 이 점에서 언어는 존재와 다르다. 언어에 구속된 인간은 존재의 언어적 표현(재현)을 존재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지만, 동시에 이 언어적 재현이 현존하는 존재 자체가 아님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무한한 신적 지혜에 대한 유한한 인간의 추구로서의 철학은 초언어적 존재 자체(현존)를 언어의 매개를 통해서만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역설의 본질이다. 이 사실을 논증하는 것이 이 글의 궁극의 목표이다.

      • KCI등재

        난소종양으로 수술한 환자의 임상 조직학적 양상 및 수술 전 CA 125의 의미

        김창래 ( Chang Rae Kim ),구천회 ( Chun Hoe Ku ),전인상 ( In Sang Jeon ),손동우 ( Dong Woo Son ),이지성 ( Ji Sung Lee ) 대한폐경학회 2013 대한폐경학회지 Vol.19 No.1

        Objectives: The aim of this study is to confirm the clinical and histopathologic findings of ovarian tumors and determine the malignancy before operation. It will attribute to early diagnosis, determining direction of treatment and improving prognosis of malignant ovarian tumor. Methods: Seven hundred sixty-five patients who had an operation for ovarian tumors in the department of Obstetrics and Gynecology of Gachon University Gil Medical Center from April 2007 to December 2009 were enrolled as subjects. A retrospective analysis of age, parity, menopausal status, preoperative CA 125, histology, ultrasound, and treatment method was done. Results: 1. Among benign ovarian tumors, endometrial cyst (211 cases, 30.1%) was most common and had the highest preoperative CA 125 (76.07 U/mL). 2. Among borderline ovarian tumors, mucinous type (16 cases, 62.5%) was most common, but preoperative CA 125 was higher in serous type (144.38 U/mL) than mucinous type (82.59 U/mL). 3. Among malignant ovarian tumors, serous adenocarcinoma (14 cases, 29.8%) was most common, and undifferentiated carcinoma had the highest preoperative CA 125 (500.0 U/mL). 4. The preoperative CA 125 showed a tendency to increase in relation to stage in malignant ovarian tumors. 5. Age, preoperative CA 125, menopausal status and ultrasound finding were identified as discriminating factors for malignancy and relative risk of them were 7.19, 7.90, 5.56 and 61.43, respectively. Conclusion: Using the combination of age, menopausal status, preoperative CA 125 and ultrasound to diagnose ovarian tumors before the operation will be a help to early diagnosis and determining the treatment and improve prognosis. (J Korean Soc Menopause 2013;19: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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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딜타이의 ‘철학의 철학’에 대한 철학적 성찰

        김창래(Kim, Chang-Rae)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2015 철학탐구 Vol.38 No.-

        철학적 사유로부터 방면될 수 있는 대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철학은 자기 자신을 대상화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철학의 철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난다. 여기서 철학이 사유하는 철학(1)과 철학을 사유하는 철학(2)이 같다면 철학의 자기반성은 무한소급에 빠진다. ‘철학의 철학’, ‘≫철학의 철학≪의 철학 …’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입장을 ‘철학의 상대주의적 견해’라 칭하자. 철학(1)과 철학(2)가 같지 않고 후자가 전자들의 가능성의 조건을 밝히는 선험 철학이라면, 무한소급은 발생하지 않는다. 철학(1)들은 철학의 선험적 비판을 거쳐야 하지만, 철학(2)는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스스로는 비판 받는 철학들의 체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철학의 절대주의적 견해라 칭하자. 논문은 이 두 상반된 견해의 대립 및 그 화해 가능성을 빌헬름 딜타이의 ‘철학의 철학’, ‘세계관론’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사유하려는 시도이다. 딜타이의 철학의 철학은 철학에 대한 상대주의적 견해와 절대주의적 견해 사이의, 인간의 역사적 상대성과 보편타당성에 대한 철학의 요구 사이의 갈등 자체이기 때문이다. 딜타이는 상대적인 철학들(세계관들)에 대한 선험 철학적 반성과 이른바 세계관들의 유형론을 통해 철학들의 상대성 논란을 종식시키고 보편타당성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논문의 최종 결론은 딜타이는 철학들의 보편타당성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이 목표를 향하는 다양한 길에 이를 수는 있었다는 것, 철학의 절대주의적 견해의 타당성과 현실성을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상대주의적 견해의 불가피성과 생산성은 증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KCI등재

        철학의 욕망 Ⅱ. 끝을 향한 형성

        김창래(Kim, Chang-Rae)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2012 철학탐구 Vol.32 No.-

        철학은 타자에 대한 사랑이다. 이 타자는 현상과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끝, 즉 이데아요 존재다. 그러므로 철학은 인간에게 너 자신을 부정하고 네가 아닌 것, 너의 끝을 향해 전향하고 상승하고 초월하라고 말한다. 이렇게 부정, 전향, 상승, 초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바로 이 글의 주제인 형성이다. 주도적인 물음은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가?’이다. 형성은 근본적으로 본에 따른 형성이다. 그리고 인간 형성의 본은 이 또는 저 현상 내지 존재자여서는 안 되고, 현상과 존재자의 끝으로서의 이데아와 존재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철학하는 인간의 과제는 자신보다 다소 더 나은 현상과 존재자가 아니라, 현상과 존재자가 아닌 것, 그의 절대적 타자, 즉 자기 자신의 끝을 닮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본은 이데아이고 존재인 까닭에 마치 존재자가 그러하듯 미리 발견되거나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형성하기를 원하는 자는 자신의 형성의 본을 스스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는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인간이 누구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의 혼의 눈에 보이는 이상적인 자기의 보임새를 본으로 그려내고, 그 본의 인도 아래 자기 자신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형성은 이중의 형성이다. 우선은 본의 형성이고 동시에 본에 따른 자신의 형성이다. 이 글은 형성의 이 같은 이중의 구조가 플라톤의 교육과 하이데거의 초월의 근본 구조와 정신을 결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교육과 초월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인간 자신의 타자, 현상과 존재자의 끝임을 논증한다. 인간은 자신의 끝을 향해 스스로를 형성해 간다. Philosophie ist die Liebe nach dem Anderen ihrer selbst. Dieses Andere ist aber das Ende des Menschen als des Phanomens sowie des Seienden, d. h. die Idee des Guten sowie das Sein selbst. Von daher fordert die Philosophie vom weisheitsliebenden Menschen auf: Niegiere dich selbst und werde, was du noch nicht bist und zu sein hast. Der Vorgang der Negation seiner selbst, der Wendung nach seinem Ende, des Aufstiegs sowie der Transzendenz auf dieses Ende hin macht ja gerade das Kern der menschlichen Bildung aus, worum es sich in der vorliegenden Arbeit handelt. Die leitende Frage ware: Wie und worauf bildet sich der Mensch? Die Bildung des Phanomens sowie des Seienden ist im Grunde die nach einem Vorbild, das selbst nicht dieses oder jenes Phanomen bzw. Seiende sein darf. Denn die Aufgabe des sich bildenden Menschen liegt nicht darin, dem mehr oder minder besseren Phanomen bzw. Seienden als er selbst zu gleichen, sondern darin, dem, was selbst alles Phanomen, alles Seiendes grundsatzlich ubersteigt, d. i. seinem absoluten Anderen als dem Ende seiner selbst schrittweise zu gleichen. Dieses Vorbild als die Idee sowie das Sein findet sich jedoch nicht in der realen Welt vor, wie es beim Phanomen sowie beim Seienden der Fall ist. Von daher hat jeder, der sich nach diesem zu bilden vornimmt, dieses Vorbild seiner Bildung selbst einzubilden. Er muss sich selbst fragen, wer der schonste Mensch (ho kallistos anthropos) ist und wie er aussieht. Dann muss er diesen idealen Anblick des schonsten Menschen, den er mit seinen Augen der Seele gesehen hat, einbilden und weiter sich selbst nach diesem eingebildeten Vorbild bilden. So ist jede Bildung ein doppelter Vorgang. Sie ist zuerst die Bildung des Vorbildes und zugleich die seiner selbst nach diesem eingebildeten Vorbild. Die vorliegende Arbeit versucht aufzuzeigen, dass diese doppelte Strukturierung der Bildung die platonische Paideia sowie heideggersche Transzendens von Grund aus charakterisiert. Es wird noch zu zeigen sein, es ist eben das Andere des Menschen selbst als das Ende des Phanomens sowie des Seienden uberhaupt, woraufhin die Paideia, die Transzendez aufzusteigen und zu transzendieren hat. Fazit: der Mensch bildet sich auf das Ende seiner selbst hin.

      • 유일하게 옳은 해석은 있는가? -해석의 기준에 관하여-

        김창래 ( Chang Rae Kim ) 한국해석학회 2008 해석학연구 Vol.22 No.-

        Ist die einzig richtige Interpretation moglich? Diese Frage versteht sich als Frage nach dem Kriterium fur die Richtigkeit der Interpretation. Die Position, die diese Frage mit `Ja` beantwortet, nenne ich die Hermeneutik des gesunden Menschenverstandes, deren Unhaltbarkeit die vorliegende Arbeit aufzuzeigen beabsichtigt. In Anlehnung an die substanzmetaphysische Unterscheidung zwischen Bild(ikon) und Urbild (paradeigma) behauptet diese Hermeneutik, jede Interpretation sei die der interpretierten Bedeutung(mens auctoris) und daher von dieser ohne weiteres zu unterscheiden. Dies ist die ontologische Voraussetzung der Unterscheidung dieser Hermeneutik. Aufgrund dieser Voraussetzung sagt sie weiter, dass die Interpretation, die der Bedeutung korrespondiert, wahr und die, die nicht, falsch sei. Dies ist ihr wahrheitstheoretisches Postulat, das sich letztlich auf die traditionelle Korrespondenztheorie der Wahrheit zuruckfuhrt. Die Arbeit sucht diese beiden Thesen zu widerlegen. Zu diesem Zwecke muß folgendes unter Beweis gestellt werden: Erstens, dass die Interpretation nicht die der von jeder Interpretation unabhangigen, reinen Bedeutung, sondern immer und notwendig die der interpretierten Bedeutung, genauer die der Interpretation ist. Zweitens, dass das Kriterium, das uns in Wirklichkeit zur Verfugung steht, doch nicht die korrespondente Ubereinstimmung von Interpretation und interpretierter Bedeutung, sondern die koharente Ubereinstimmung zwischen Interpretationen sei. Daraus folgt weiter, dass jene Interpretation, die aufgrund ihrer Korrespondenz mit der interpretierten mens auctoris ihr Einzig-richtig-Sein behauptet, fur uns sinnliche Seiende, die keinesfalls die ubersinnliche Bedeutung selbst zu erfahren vermogen, nichts als ein unerreichbares ideelles Ziel sei. So besehen ist die sogennante richtige Interpretation doch nicht die wahre, sondern die aus guten Grunden fur wahr gehaltene. In diesem Sinne kann es die einzig richtige Interpretation doch nicht geben.

      • KCI등재

        딜타이는 누구인가?

        김창래(Chang-Rae Kim) 중앙대학교 중앙철학연구소 2008 철학탐구 Vol.24 No.-

        이 글은 “딜타이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의 시도이다. 딜타이는 다양한 얼굴의 소유자이고, 이에 상응하기라도 하듯 참으로 다양한 딜타이 해석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지금까지의 거의 대부분의 딜타이 해석들에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딜타이는 삶의 현실성과 정신과학적 인식의 객관성 간의 갈등에 빠졌고, 이 모순에 직면하여 삶과 과학 중의 하나를 취하고 나머지 하나를 버렸다는 양자택일적 관점이 그것이다. 그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 가다머의 딜타이 해석이다. 가다머의 딜타이 해석은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하나는 『진리와 방법』에서 전개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딜타이에 대한 추모 논문에서 펼쳐진 것이다. 전자에 의하면 딜타이는 정신과학적 인식의 객관성을 위해 삶의 현실성을 포기한 계몽의 완성자이고, 후자에 의하면 역사주의의 미완성자이다. 물론 가다머는 전자를 후자에 대한 이유로, 그리고 후자를 전자를 위한 전제로 사유한다. 따라서 가다머의 딜타이는 계몽의 완성을 위한 역사주의의 미완성자, 역사주의의 미완을 통한 계몽의 완성자이다. 본고는 이 두 딜타이 사이의 양립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계몽의 완성자로서의 딜타이를 지양하고 역사주의의 미완성자로서의 딜타이를 강화한다. 그를 통해 딜타이는 삶의 역사적 상대성과 정신과학적 인식의 객관성 간의 모순에 직면하여 이 모순을 형식논리적으로 해소시킨 것이 아니라, 모순을 모순으로 유지시키면서 해소되지 않는 모순만이 갖는 생산적 힘에 이끌려 ‘헤아릴 수 없는’ 역사적 삶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라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목표를 추구했던, 그리고 이 추구의 완결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추구를 결코 멈추지 않았던 모순의 사상가로 기술한다. 즉 딜타이의 “누구?”라는 물음에 대한 본고의 답변은 모순의 힘에 의거한 애지자(eros philosophos)라는 것이다.

      • KCI우수등재

        해석학적 문제로서의 표현

        김창래(Chang-Rae Kim) 한국철학회 2001 철학 Vol.66 No.-

        본 연구는 해석학적 문제로서의 표현이 지니는 철학적 의미에 대한 성찰이다. 현대의 해석학에 의하면 이해란 대화(Dialog)이며, 이는 본질상 「말하고 듣는 과정」, 「표현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표현과 (좁은 의미의) 이해는 상호 귀속적이고, 함께 대화, 즉 넓은 의미의 이해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는 곧 해석학의 대상규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는 초기의 철학으로서의 해석학이 표현의 문제를 방치한 채, 오로지 이해의 분석에만 치중해 왔다는 점을 문제삼는다. 그리고 그 이유를 초기의 철학적 해석학(슐라이어마허, 딜타이)이 플라톤으로부터 연유하는 정신주의적 실체형이상학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정신주의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간의 차등화된 이분법을 전제하고, 이는 외면화, 감성화로서의 표현을 평가절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고는 희랍 실체형이상학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 현대 해석학에 있어서는 「이해되어야 할 내적, 정신적 의미」와 그것의 「외면화, 감성화로서의 표현」간의 이분법이 정당화될 수 없고, 당연히 표현의 복권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실제로 현대 해석학에서 이런 작업이 수행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 자원봉사활동 지속성에 관한 차이 분석

        김창래 ( Chang Rae Kim ),최종진 ( Jong Jin Choi ) 한국사회복지경영학회 2015 사회복지경영연구 Vol.2 No.2

        이 연구는 강원도 도시지역의 자원봉사 지속성에 있어서 성별, 소득, 학력, 종교 등의 차이를 실증 분석하였다는 점에서 선행연구와 차별화된다. 독립변수로는 인구통 계학적 요인, 봉사분야별, 기관의 유형 등을, 종속변수는 자원봉사자의 지속성(지속기간, 지속의지와 참여강도)에 대한 선행연구를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독립변수와 종속변수간의 관계를 차이 분석하였다. 그동안 자원봉사자들의 봉사활동 지속성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많이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강원도 도시지역 자원봉사활동 지속성에 관한 차이를 분석한 연구는 많이 없었다. 선행연구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강원도 도시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의 지속성에 관한 차이를 실증적으로 분석하여 자원봉사자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봉사 지속성을 연구 하였다. 이 연구는 한계점을 지적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연구의 표본이 강원지역으로 한정 되어 있으므로 전국적으로 자원봉사여건과 자원봉 사체제가 다르기에 모두 연구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연구 결과의 일반화에 상당한 제약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인구통계학적 요인, 봉사분야,기관의 유형 등 선행연구에서 사용된 주요변수만을 대상으로 연구 하였으므로 다양한 변수가 제외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연구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한계들은 많은 후속 연구를 통해 극복되어야 할 과제들이다. 이 연구가 지니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연구결과의 일반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지역을 대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비록 우리나라의 특성상 지역적 차이가 크게 나타나지 않기는 하지만 지역적 특성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자원봉사자들의 지속성에 관한 차이 분석을 보다 타당성 있고 심층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한 실증적 연구와 더불어 자원봉사자 활용기관의 자원봉사자 활동 현황,실적 자료 등과 같은 각종 객관적 자료의 활용 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This study was differentiated from the precedent study, in the way that difference of gender, income, academic background, and religion, etc. was actually analyzed in the persistence of Gangwon-do province``s urban volunteer work. This study analyzed the difference of the relationship between independent and dependent variables after the comprehensive review of the advanced study, where independent variables included demographic factors, each field of volunteer work, types of institutions, etc.,: where dependent variables included volunteer``s persistence (including persistence period, willingness to persist, and participation strength). It is true that there has been much the research about volunteer``s persistence of volunteer work in the meantime. But there has not been much the research analyzing the differences regarding persistence of volunteer work at urban area in Gangwon-do. In order to complement the precedent research, this study empirically analyzed differences concerning persistence of volunteers working at urban area in Gangwon-do and studied the persistence of systematic volunteer work with volunteers at Donghae-si as the central figure. Uppermost limit of this study is as follow. First, as the sample of this study is limited to Gangwon-do Province and the conditions and system of volunteer work differ throughout the country, it is judged that this study may be considerable restrictions on generalization of the research results in that this study has limits not studying everything concerned. Second, as this study has been conducted with only main variables used in the advanced research i.e., demographic factors, each field of volunteer work, types of institutions, etc., the possibility ruled out various variables cannot be entirely excluded.

      • KCI등재

        저자란 무엇인가?

        김창래(Chang-Rae Kim) 한국철학회 2012 철학 Vol.0 No.112

        저자(Autor)란 무엇인가? 전통적 해석학은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해 왔다. 저자는 글쓴이다. 글을 쓴 이로서 저자는 글의 주인이고, 글 안에 들어 있는 의미 내용의 유일한 원천이다. 따라서 해석자의 과제는 저자가 창조한 의미의 발견에 제한된다. 해석자는 글을 읽는 자이지 쓰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만이 글의 유일한 창조자이고, 저자의 의도(mens auctoris)만이 올바른 해석을 위한 단 하나의 척도이다. 저자의 권위(Autoritat des Autors)에 대한 이 같은 전통적 견해에는 철학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세 가지의 소박한 해석학적 테제가 포함되어 있다. ① 텍스트의 독점적 주인으로서의 저자, ② 저자와 해석자 간의, 따라서 저술과 해석 간의 절대적 구분, ③ 해석의 옳고 그름을 가름하는 유일무이한 기준으로서의 저자의 의도. 이 글은 전통적 저자 개념과 언급된 세 테제의 배후에 근대 주체성의 형이상학이 서 있고, 저자는 근본적으로 근대적 주체 개념의 해석학적 변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논증하고자 한다. 저자란 사유가 글쓰기로 이해되는 한에서의 근대적 주체, ‘글 쓰는 나’이다. ‘글 쓰는 나’로서의 저자는 글 쓰는 활동성과 그 활동의 산물로서의 글의 근원이고, 글의 세계에로 초대된 모든 객(독자)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글의 주인이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확실한 해석을 위한 단 하나의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이다. 본고는 이 같은 글쓰기-주체로서의 저자 개념에 대한 (정확히는: 이 저자의 실재에 대한 소박한 믿음에 대한) 존재론적 해체를 시도한다. 이를 통해 위에서 언급된 세 가지의 해석학적 테제를 대신하는 다음의 테제들이 제시되고 그 정당성이 논증될 것이다. ① 텍스트의 의미는 최초의 저술 과정에서 뿐 아니라 이후의 해석 과정에서 계속 창조되고 형성된다. ② 그렇기 때문에 저자와 해석자 사이의 엄밀한 구분은 불가능하다. ③ 올바른 해석의 척도는 원래의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에서 반복되는 대화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의미이다. 이상 세 테제의 근거 위에서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저자 개념은 텍스트와 텍스트 의미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실재하는 개별자가 아니라, 쓰이어진 후 원래 저자의 손을 떠나 장구한 해석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형성해 온 텍스트의 형이상학적 주어, 그 이념적 대응물임이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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