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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책동향 - 어선 검사제도의 변화

        권용철,Kwon, Yong-Cheol 선박안전기술공단 2009 선박안전 Vol.27 No.-

        "선박안전법"에 따른 선박 설비기준 및 검사업무에 관한 규정 가운데 어선 관련 부분을 어선법(법률 제9718호, 2009. 5. 27 공포, 2009. 11. 28 시행)으로 이관하여 어선관리업무를 일원화하고, 어선에 관한 검사 및 검사대행기관 지정토록 개정되어, 그에 따라 어선 검사제도의 변화를 통하여 어선관리업무의 정책방향 등을 제시하였다.

      • KCI등재

        거란 성종의 고려 친정(親征) 배경에 대한 새로운 관점 : 거란의 정세 분석을 중심으로

        권용철(Kwon Yong-Cheol)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1 동방학지 Vol.197 No.-

        거란제국은 건국 시점부터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특히 제위계승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완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황실 내부의 분쟁은 매우 첨예하게 벌어졌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는 매우 어려웠고, 그 대신에 황태후가 제국의 중요 사안을 결정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거란 성종 역시 자신의 모친인 승천태후의 정치적 능력 덕분에 제위에 오를 수 있었고, 장기간 그 제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승천태후가 사망하는 1009년까지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승천태후가 사망하고 난 이후, 성종은 모친 없이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다시 확립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황실 내부의 권력 다툼을 억제하면서 황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그 첫 번째 무대가 바로 고려 정벌 전쟁이었다. 성종이 무리한 전쟁이라는 비판을 묵살하면서까지 본인이 직접 전쟁터에 나선 것은 이를 통해서 자신의 지도력을 직접 보여주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종의 권위 강화 과정에서 가장 견제해야 했던 인물은 동생 야율융경이었다. 야율융경의 권력을 향한 움직임은 북송 측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야율융경은 성종의 고려 정벌 준비 및 수행 과정에서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을 회피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거란은 고려에 대한 2차 침입에서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 점령하는 전과를 거두었고, 그 과정에서 성종의 지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고려 침입을 통해 성종은 자신의 권위 강화와 실력 검증을 모두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거란의 2차 고려 침입은 성종의 권위가 확립되는 전환점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는 성종이 ‘親征’을 했기 때문에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결과였다. 이러한 성과가 승천태후 없이도 나올 수 있었다는 것에서 성종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본다면, 거란의 2차 고려 침입은 거란제국의 역사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질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Since the founding of the Khitan Empire, there were frequent political conflicts over power, and very sharp disputes took place within the imperial family as no system had been fully established to keep the throne stable. In this political environment, it was very difficult to establish the emperor s authority. Therefore, the number of instances in which Empress Dowager ruled on important issues of the empire increased. Khitan-Liao Shengzong was also able to ascend to the throne thanks to the political ability of his mother, Empress Dowager Shengtian, and to maintain himself there for a long time. However, this explanation is only valid up to 1009, when Empress Dowager Shengtian died. Shengzong then needed to re-establish his authority without his mother. In order to do so, he had to demonstrate his own ability as emperor. The first stage was through war with Goryeo. Shengzong went to the battlefield himself as he aimed to show his leadership directly through it. The person who had to check in the process of strengthening Shengzong s authority was his younger brother, Yelulongqing(耶律隆慶). Yelulongqing s movement toward power can be confirmed in the records of the Northern Song. Yelulongqing did not provide much help in the process of preparing and carrying out Shengzong s invasion of Goryeo, but rather avoided war. However, as Khitan came to occupy the capital of Goryeo, Shengzong was able to confirm his leadership. Eventually, through the invasion of Goryeo, Shengzong managed to strengthen his authority.

      • KCI등재

        『朱一齎先生文集』에 수록된 ‘責問高麗詔’에 대하여

        권용철(Kwon, Yong-Cheol) 효원사학회 2020 역사와 세계 Vol.- No.58

        본고에서는 원말명초의 문인 주선의 문집인 『朱一齎先生文集』에 기록되어 있는 「責問高麗詔」의 내용 분석을 통해 고려-명 관계사에서의 사건들을 살펴보고, 여기에 더하여 「책문고려조」가 언제 작성된 문서였는지에 대한 추론을 진행하였다. 「책문고려조」는 기존에 활용되었던 『명태조실록』, 『고려사』 등의 사료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문서이기 때문에 전문을 번역하면서 분석을 시도했는데 그 내용은 기존에 알려져 있던 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책문고려조」는 고려사와 명태조실록에 실린 홍무제의 칙서 내용을 詔書의 형식으로 다듬은 정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책문고려조」에는 공민왕이 시해된 이후 고려-명 관계가 악화되는 과정이 잘 설명되어 있다. 홍무제는 공민왕이 시해되기 전부터도 고려에 대한 의혹을 가지고 있었고, 고려에서 사신이 두 번이나 살해된 것(손내시와 채빈의 죽음)으로 인해 그 의혹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한 분노를 고려에 전달하면서 홍무제는 자신이 한미한 출신에서부터 들고 일어나 결국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고, 특히 「책문고려조」에서는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적 사례까지 언급하면서 고려에 대해 강경한 질책의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책문고려조」는 실제로 고려에 전달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조서 내에 시기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 조서만으로는 「책문고려조」가 어느 시점에 작성된 것인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책문고려조」의 내용에 유독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가 길게 들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홍무제가 처음으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는 홍무 10년(1377) 12월의 칙서와 「책문고려조」를 연계시켰고, 『朱一齎先生文集』에 실린 문서의 순서를 통해 「책문고려조」가 홍무 10년 9월에서 홍무 11년 3월 사이에 작성된 것임을 논증하였다. 고려-명 관계사 연구에서는 『고려사』와 『명태조실록』이 가장 중요한 자료이지만, 여기에만 너무 집중하다보면 자칫 「책문고려조」와 같이 다른 문집에 수록된 문서를 놓칠 수도 있다. 앞으로 새로운 시각의 확보와 상세한 분석을 위해서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들을 발굴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책문고려조」의 소개 및 분석을 시도했던 본고가 고려-명 관계사 연구의 진전에 조그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In this article, I examined the events of history of Goryeo-Ming relation through the analysis of the contents of “imperial edict to rebuke Goryeo”(責問高麗詔) which is recorded in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of early Ming dynasty Zhuyijixianshengwenji(朱一齎先生文集), and also conducted inferences on when “imperial edict to rebuke Goryeo” was written. “Imperial edict to rebuke Goryeo” explains the deterioration of Goryeo-Ming relation after King Gongmin was assassinated. Emperor Hongwu had suspicions about Goryeo even before King Gongmin was assassinated, and the suspicion was further magnified by the fact that envoys were killed in Goryeo. In conveying such anger to Goryeo, Emperor Hongwu mentioned the historical cases of Gojoseon and Goguryo, he expressed his strong intention to reprimand Goryeo. However, it is not easy to determine when the imperial edict was written because it does not appear to have actually been delivered to Goryeo and the timing is not specified in the edict. However, this article noted that the contents of “Imperial edict to rebuke Goryeo” contain a long history of Gojoseon and Goguryo, and proved that “Imperial edict to rebuke Goryeo” was written between September of 1377 and March of 1378. In the study of Goryeo-Ming relation, Goryeosa and Veritable Records of Ming Taizu are the most important materials, but if we focus too much on them, we may miss documents contained in other materials, such as “Imperial edict to rebuke Goryeo”. In order to secure new perspectives and analyze them in detail, there is still a need to excavate previously unknown materials. We hope that this article which attempted to introduce and analyze “Imperial edict to rebuke Goryeo”, will be of little help to the progress of the study of Goryeo-Ming relation.

      • KCI등재

        至元 30년(1293) 원 제국 사절단과 베트남의 서신 왕래를 통해 본 원-베트남 관계의 양상

        권용철 ( Kwon Yong-cheol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21 역사학연구 Vol.81 No.-

        본고에서는 쿠빌라이가 사망하기 이전 시기에 마지막으로 베트남에 파견되었던 원 제국의 사절단이 남긴 문서 기록을 검토해 보았다. 베트남에 대한 두 차례의 군사적 원정이 실패로 끝났지만, 쿠빌라이는 베트남으로부터 진정한 복속을 받아내기 위해 쩐 왕조 군주의 친조를 끈질기게 요청했다. 하지만 베트남 측도원 제국과 기존의 조공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랐을 뿐, 이를 넘어서는 친조 요청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 제국과 베트남 양측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양증과 진부를 대표로 하는 원 제국의 사절단은 1293년 초에 베트남에도착하여 또 다시 베트남 군주의 친조를 압박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군주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친조를 거부했고, 이러한 내용은 양측 사이에서 왕래된 서신 기록을 통해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원 제국의 사절단은 칭기스 칸 시기부터 몽골제국이 가지고 있었던 복속의 관념을 언급하면서 기존의 중화제국이 운영한 조공·책봉체제와는 다른 방식을 베트남 측에 요구했다. 원 제국의 사절단은 ‘모범적인’ 복속의 사례로 고려를 언급했지만, 베트남은 군주 대신 아들을 보내도 된다는 원 제국 사절단 측의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원 제국은 베트남이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기존의 조공·책봉관계와는 다른 성격의 복속 관계를 강압적으로 요구했고, 베트남은 기존의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양국의 관계를 형성하자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베트남은 원 제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로 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인 차이는 서신의 왕래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고, 그 간극이 줄어들지도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article reviewed the documents left by the envoys of the Yuan Empire, who were last dispatched to Vietnam before Qubilai’s death. Although the two military expeditions against Vietnam ended in failure, Qubilai persistently called for the direct attendance of the Vietnam monarch in order to win true obedience from Vietnam. However, Vietnam only hoped to maintain the existing tributary relationship with Yuan empire, so Annan did not accept the request for direct attendance. With the claims of both the Yuan Empire and Vietnam running parallel, the envoys of the Yuan Empire arrived in Vietnam in early 1293, again pressing for the direct attendance of the monarch of Vietnam. However, the monarch of Vietnam rejected the direct attendance for a number of reasons, and this can be confirmed in detail through correspondence between the two sides. The envoys of Yuan empire called on Vietnam to take a different approach from the existing tributary relationship operated by the Chinese Empire, referring to the concept of subjugation held by the Mongol Empire from the time of Chinggis Khan. The envoys of Yuan Empire referred to Goryeo as an example of “exemplary” subjugation, but Vietnam refused to accept the proposal from Yuan envoy that monarch’s son could be sent instead of a monarch. In other words, Yuan empire forcefully demanded a subjugation relationship of a different nature from the existing tributary relationship that Vietnam was familiar with, and Vietnam did not withdraw its claim to form relationship in the line of maintaining the existing tributary relationship. Regardless of Qubilai’s intentions, Vietnam could not accept Yuan empire’s demands. The fundamental difference in the percep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Yuan and Vietnam is evident through the correspondence, and it can be confirmed that the gap has not been narrow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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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인 高模翰과 그의 후예에 대한 검토

        권용철(Kwon Yong-Cheol) 고구려발해학회 2020 고구려발해연구 Vol.66 No.-

        본고에서는 발해 유민 고모한과 그의 후예들에 대해서 검토해 보았다. 수많은 발해 유민들 중에서 비교적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고모한은 거란-요 제국에서 군사적으로 큰 공적을 올리며 지위가 상승했다. 고모한이 사망한 이후, 고모한의 일부 후손들은 거란과 北宋의 경계 지대인 朔州로 이동했다. 朔州에서 활약한 고모한의 후예들과는 달리, 遼陽에 남아서 활약을 했던 인물도 존재했다. 특히 고정은 金이 요동을 차지하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하면서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즉, 고모한의 후예들은 요와 금 정권에 반항을 하기 보다는 순응의 길을 택하면서 가문의 위상을 확보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국가는 비록 없어졌지만, 요, 금, 북송, 원, 고려 등 동아시아 전체에서 활약했던 발해 유민들의 사례를 발굴하고 자세하게 분석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 This article reviewed the Balhae(渤海) person Gomohan(高模翰) and his descendants. Gomohan has risen in status by making great military achievements in the Khitan-Liao Empire. After Gomohan’s death, some descendants of Gomohan moved to Shuozhou(朔州), the border between Khitan and Northern Song. Unlike the descendants of Gomohan in Shuozhou, there was also another descendents who remained in Liaoyang(遼陽). In particular, Gaozhen(高楨) maintained a stable position, making a certain contribution to the rise of Jin Empire. In other words, the descendants of Gomohan have secured the status of their family by choosing a path of conformity rather than rebelling against the Liao and Jin administrations. In the future, it needs to continue to make efforts to find and analyze the examples of Balhae people who have been active throughout East Asia, including Liao, Jin, Northern Song, Yuan and Go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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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元代 中期 관료 高昉의 행적과 출신에 대한 고찰

        권용철(Kwon, Yong-cheol) 호서사학회 2020 역사와 담론 Vol.0 No.96

        본고에서는 원대 중기의 관료인 고방의 출신과 행적에 대해 검토해보았다. 대원제국 역사 연구를 위한 기본 사료인 正史 『元史』에는 고방에게 따로 열전을 할애하지 않고 그 행적의 일부분만 서술되어 있어 고방에 관한 상세한 사항들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원대의 문집 자료에 기록되어 있는 고방의 신도비명과 「高夫人葬記」라는 제목의 記文을 통해『元史』의 부족함을 채워나갈 수 있었다. 고방은 세조 至元 말기부터 관료로서 활약했던 인물이었고, 세조 재위 당시 과거제가 실시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천거를 받아 하급관리에서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集賢院과 중서성에서 주로 활약했던 고방은 제국 조정의 정치적 상황에 휘말려 지방으로 좌천되는 경험을 겪기도 했지만, 이러한 좌천은 오히려 고방이 지방에서 명성을 쌓게 되는 기회로 작용하게 되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행정 실무를 수행하며 실력을 알린 고방은 인종 황제에 의해 중앙으로 소환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인종이 漢人 관료들을 적극 활용하여 정국을 이끌고자 했던 정책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비록 고방의 모친이 사망하면서 고방은 3년상을 위해 관직을 수행할 수 없었지만, 인종은 고방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이면서 고방의 관직 복귀를 압박했다. 하지만 고방은 인종 사망 이후 후원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권신 테무데르의 공격을 받아 결국 다시 좌천되기에 이르렀다. 즉, 고방은 원대 중기의 복잡한 정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방은 大名路 출신의 관료였지만, 그 선조들의 家系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발해와 연관이 깊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고방의 신도비명에는 고방의 선조들이 원래는 요동에 거주했다가 금 제국에서 활약하면서 점점 중원으로 이주했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元史』에서는 고방과 발해를 연결시킬 수 있는 단서를 전혀 찾을 수 없지만, 신도비명과 「高夫人葬記」에서는 그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발해 멸망 후 오랜 세월이 지나고 중원으로 이주까지 했기 때문에 고방 가문이 발해인의 정체성을 유지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런데도 신도비명에 발해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기록된 그 자체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Gao Fang(高昉) served as a bureaucrat since the end of Qubilai’s reign, and began his official career as a low-ranking bureaucrat through recommendation. Although Gaofang experienced relegation to the provinces due to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e imperial government, this relegation rather served as an opportunity for Gao Fang to build a reputation in the provinces. He was summoned to the imperial court by the Emperor Renzong(仁宗), which was in line with the policy that emperor actively sought to take full advantage of Han officials. Although the death of Gaofang’s mother prevented him from carrying out office for three years, Renzong continued to show interest in Gaofang, pressuring him to return to office. However, Gao Fang was attacked by powerful individual Temüder and eventually demoted again after the death of Renzong. In other words, Gaofang was one of the figures directly influenced by the complex political situation of the mid-Yuan period. Although Gao Fang was a bureaucrat from Daiming Circuit(大名路), it can be seen that he was closely related to Balhae(渤海) if we examine his ancestors. In particular, the epitaph of Gao Fang records that his ancestors originally lived in Liaodong(遼東), but gradually moved to the “Central Plains” during the Jin Empire. In Yuanshi(元史), no clues can be found to link to Gao Fang and Balhae, but traces can be found in the epitaph. Of course, the identity of Balhae cannot be maintained because it has been a long time since the fall of Balhae and Gao Fang’s family even moved to Central China, but it is still very interesting to discover his Balhae roots recorded in his epit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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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大元)제국 시기 지순(至順) 원년(1330)의 정변 모의(謀議)와 그 정치적 영향

        권용철 ( Kwon Yong-cheol ) 중앙아시아학회 2018 中央아시아硏究 Vol.23 No.1

        In this paper, I examined the political history of Mongol empire, centering on the political upheaval that occurred in the first year of Zhishun(1330). This event was recorded very briefly in Yuanshi(元史), so many scholars did not pay attention to this historical event. But, this conspiracy has an important meaning in that it was a case that reflects the politics of late Yuan(Mongol) empire formed after the civil war between two capitals(兩都內戰). Wenzong(文宗) and El-Temur(燕鐵木兒) suppressed conspiracy quickly and decisively, resulting in the further strengthening of El-Temur’s political influence. In other words, through the suppression of coup of the first year of Zhishun, El-Temur was to have stabilized power. Meanwhile, Huizong(惠宗) Toγon-Temur could only be crowned after El-Temur died. In the early days of his reign, Huizong could not control the excessive power of powerful vassal, so emperor could not establish his own position. In 1340, Huizong drove away powerful vassal Bayan(伯顏) and tried to establish emperor’s authority. As a part of this plan, Huizong completely overturned the evaluation of conspiracy occurred in the first year of Zhishun.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conspiracy were now recognized as loyalists rather than traitors. In the meantime, Huizong basically denied an era that began with the ascension of Wenzong and ended with the expulsion of Ba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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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人 宦官 高龍普와 大元帝國 徽政院使 투멘데르(禿滿迭兒)의 관계에 대한 小考

        권용철(Kwon Yong-Cheol) 한국사학회 2015 史學硏究 Vol.- No.117

        본고에서는 대원제국과 고려 말기에 두 국가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했던 고려인 환관 高龍普와 대원제국의 徽政院使투멘데르(禿滿迭兒, Tumender)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기존의 연구들에서는 환관 고룡보가 곧 휘정원사 투멘데르와 동일한 인물이고 고룡보의 몽골 이름이 투멘데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어떠한 뚜렷한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추정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元史』에는 휘정원사 高龍卜이라 기록된 곳이 한군데 있지만 그 신빙성이 불투명하다. 또한, 이 기록으로도 고룡보와 투멘데르가 동일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본고는 고룡보와 투멘데르의 관계를 재검토하기 위해 우선 고룡보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사실, 대원제국과 고려 양국에서 뚜렷한 활약을 한 것 치고는 고룡보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다행히 『高麗史』에는 고룡보의 열전이 있지만, 그마저도 고룡보의 출생이나 그가 대원제국으로 들어가게 된 배경 등에 대한 설명은 없다. 『高麗史』 이외의 자료들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散見되기는 하지만, 그의 행적을 상세하게 복원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료들 중에서 고룡보의 몽골식 이름이 투멘데르였다는 기록은 확실히 존재하지 않고, 고룡보가 투멘데르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단정하게 만드는 기록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이에 필자는 아예 고룡보가 아닌 다른 인물에 주목하였다. 『稼亭集』에 나오는 禿滿達이 투멘데르와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가정집의 저자 李穀의 기록은 독만달이 1300년에 대원제국에 들어온 이후 至正5년(1345)까지 고위 관료로서 은총을 받는 혜택을 누렸고, 이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사당을 짓기 위해 이곡에게 부탁하여 지어진 것이다. 독만달은 대원제국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이곡은 굳이 그를 徽政公이라고 불렀다. 휘정공은 휘정원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독만달의 대표 관직이 휘정원사였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독만달이 환관이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는 기록들도 있어서 투멘데르가 고려인 환관이라고 서술했던 『庚申外史』의 내용과도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독만달이 휘정원사에 있을 때 賢能한 자를 추천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는 내용은 기황후를 궁녀로 추천한 투멘데르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고려의 자료에 기록된 禿滿達과 『元史』의 禿滿迭兒가 과연 같은 人名에 대한 다른 표기인지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이는 고려의 자료에서 몽골인 인명을 쓰는데 활용한 達의 또 다른 용례를 살펴보면서 우리말의 達이 중국어와는 달리 ‘da’와 ‘r’ 발음을 한꺼번에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하여 禿滿達과 禿滿迭兒는 같은 인명에 대한 다른 표기임을 주장하였다. 아마 고려 측의 자료와 중국 측의 자료에 대한 비교 작업을 계속 수행하게 되면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또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대원제국-고려 관계의 구체적인 역사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두 국가의 자료에서 발견되는 같은 인물에 대한 다른 표기 방식을 추적하고 이를 비교 분석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대원제국 시기의 자료에는 같은 인물을 다른 한자로 표기한 사례 혹은 동명이인이 많이 발견된다. 그래서 대원제국과 고려의 관계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분별하는 작업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이에 본고는 추후에 이루어질 상세한 연구들을 위한 試論으로서 우선 투멘데르가 누구인지를 밝혀내어 고룡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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