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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5경 명칭 출현 시기에 관한 사료적 검토

        강성산 고구려발해학회 2016 고구려발해연구 Vol.55 No.-

        본문에서 발해 5경 즉 上京龍泉府, 中京顯德府, 東京龍原府, 南京南海府, 西京鴨淥府와 관련되는 문헌사료를 중점적으로 정리해본 결과 발해 5경 명칭의 출현 시기는宣 王 대 이후로 추정된다고 결론지었다. 발해 5경에 관한 체계적 사료는 『신당서』발해전에서 확인 할 수 있는데 그것은 張建章의 『渤海國記』 를 인용한 결과인 것 이다. 『발해국기』는 835년 이후에 성립된 저술로서 당나라 幽州에서 파견된 사신장건장이 833년부터 834년까지 약 일 년 동안 발해에 머물러 있으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둔 현지조사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신당서』발해전에는 당나라 천보 연간에 발해에서 도성을 상경으로 옮기였다고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과연 “고금제도를 받아들였다”는 발해에서 당나라에 앞서 상경을 비롯한5경이 설치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는 『신당서』보다 앞서 성립하는 제 사료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舊唐書』에는 발해5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신당서』에 편입된 지리지에는 가탐도리기를 인용하면서 발해의 지명 즉 渤海長領府, 渤海王都, 丸都縣城, 顯州등을 언급한곳이 있다. 현주에 관해서는『武經總要』에서 『皇華四達記』를 인용하면서 天寶이전에 발해에서 도읍지로 정한 곳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도 『賈耽古今郡國志』를 인용하면서 발해국 南海, 鴨淥, 扶餘, 柵城 四府는 모두 고구려 옛 땅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가탐고금군국지』도 신당서 지리지에서 인용한 가탐도리기도 원명은 『고금군국현도사이술』이다. 이 저서는 801년에 성립된 것이나 발해도성, 책성부와 같이 발해와 관련되는 지명정보는 762년경에 발해와 신라로 파견된 당나라사신 한조채가 전했다는 연구가 있다. 그러므로 가탐도리기를 통해서는 8세기 60년대쯤에 발해에 5경의 명칭이 없었다는 것 을 확인할 수 있다. 797년에 성립된 『續日本紀』에서 발해 사신들이 일본에 건너간 기록을 확인해보면 739년에 若忽州都督 胥要德, 758년에 木底州 刺史 揚承慶, 759년에 玄菟州 刺史 高南申이 일본사신으로 파견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777년에 발해사신 史都蒙 일행이 발해 남해부에서 출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에 남아있는 8세기 후반의 기록에서도 발해5경의 명칭이 없으며 『신당서』발해전에서 나오는 남경남해부도 남경이라는 기록은 없고 다만 남해부라는 명칭만 보인다. 주의 명칭도 『신당서』 발해전에서 나오는 “龍州”, “慶州”등 한 글자 주명과는 달리 “낙홀주”, “목저주”, “현도주”처럼 두 글자 주명이 보인다. 즉 일본에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서 적어도 8세기 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발해에는 『신당서』발해전에서의 경부주 명칭을 확정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으로 제 사료를 정리해본 결과 발해 제3대왕 문왕 大欽茂 시기에 5경의 명칭이 출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흠무 사후 발해에서는 한동안 혼란상태를 겪으며 818년 10대발해왕 선왕 大仁秀의 시기에서야 비로소 해북 제 부를 통솔하고 군현을 정비하기 시작 하였다. 발해5경의 설치는 방5,000리라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고 나서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靺鞨 제 부족을 통제하기 위하여 세운 5개소의 정치적 중심지의 명칭이 아니었을까 한다. 『신당서』발해전의 5경은 820년 전후 즉 선왕대 이후에 발해에서 불렸던 명칭으로 판단되며 8세기후반기 대흠무 시기의...

      • KCI등재

        8세기 60년대 초반 당ㆍ발해ㆍ신라를 잇는교통로에 대한 고찰-당나라 사신 韓朝彩의 출사노정을 중심으로-

        강성산 고구려발해학회 2018 고구려발해연구 Vol.60 No.-

        8세기 60년대 초반에 당나라 사신 韓朝彩가 일본승려 戒融을 발해에 바래다주고 그 안부 확인 차 신라에 들어간 사실이 『續日本記』에 수록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그 부분적 노선을 동시대 賈耽의 『道里記』에 수록되어있는 내용과 연관시켜, 그가 경유한 唐 登州, 渤海, 新羅를 이어주는 교통로에 대해, 최근 고고 자료와 위성지도를 활용해 복원해보고자 했다. 본 주제와 관련해, 발해교통로 등 선행 연구에서 이미 적지 않게 언급된바 있지만, 한조채의 구체적인 사행 노선과 가탐의 『도리기』를 결합시켜, 그 경로를 체계적으로 복원하고자 한 시도는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본고에서는 선행 연구를 비판적으로 수용해, 그에 기초하여 한조채의 대략적인 출사 경로를 복원해보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당 등주에서 발해에 이르는 경로, 그리고 발해부터 신라까지의 노선, 신라에서 당에 이르는 노선으로 나누어 살폈다. 한조채의 출사 경로는 발해나 신라 혹은 일본 등 특정 1國 출행이 아니라, 세 나라를 모두 아우르는 사행이었다. 그러므로 한조채 사행에서 남긴 자료에는 훗날의 발해, 나아가 신라 관련 지리 정보가 적지 않게 담겨있어, 가탐의 『도리기』에도 그 흔적을 남겼고, 또한 9세기에 정립된 발해 교통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 KCI등재

        8세기 60년대 초반 당 · 발해 · 신라를 잇는 교통로에 대한 고찰

        강성산(姜成山) 고구려발해학회 2018 고구려발해연구 Vol.60 No.-

        8세기 60년대 초반에 당나라 사신 韓朝彩가 일본승려 戒融을 발해에 바래다주고 그 안부 확인 차 신라에 들어간 사실이 『續日本記』에 수록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그 부분적 노선을 동시대 賈耽의 『道里記』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과 연관시켜, 그가 경유한 唐 登州, 渤海, 新羅를 이어주는 교통로에 대해, 최근 고고 자료와 위성지도를 활용해 복원해보고자 했다. 본 주제와 관련해, 발해교통로 등 선행 연구에서 이미 적지 않게 언급된바 있지만, 한조채의 구체적인 사행 노선과 가탐의 『도리기』를 결합시켜, 그 경로를 체계적으로 복원하고자 한 시도는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를 비판적으로 수용해, 그에 기초하여 한조채의 대략적인 출사 경로를 복원해보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당 등주에서 발해에 이르는 경로, 그리고 발해부터 신라까지의 노선, 신라에서 당에 이르는 노선으로 나누어 살폈다. 한조채의 출사 경로는 발해나 신라 혹은 일본 등 특정 1國 출행이 아니라, 세 나라를 모두 아우르는 사행이었다. 그러므로 한조채 사행에서 남긴 자료에는 훗날의 발해, 나아가 신라 관련 지리 정보가 적지 않게 담겨 있어, 가탐의 『도리기』에도 그 흔적을 남겼고, 또한 9세기에 정립된 발해 교통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 KCI등재

        발해 5경 명칭 출현 시기에 관한 사료적 검토

        강성산(姜成山) 고구려발해학회 2016 고구려발해연구 Vol.55 No.-

        본문에서 발해 5경 즉 上京龍泉府, 中京顯德府, 東京龍原府, 南京南海府, 西京鴨淥府와 관련되는 문헌사료를 중점적으로 정리해본 결과 발해 5경 명칭의 출현 시기는宣 王 대 이후로 추정된다고 결론지었다. 발해 5경에 관한 체계적 사료는 『신당서』발해전에서 확인 할 수 있는데 그것은 張建章의 『渤海國記』를 인용한 결과인 것 이다. 『발해국기』는 835년 이후에 성립된 저술로서 당나라 幽州에서 파견된 사신 장건장이 833년부터 834년까지 약 일 년 동안 발해에 머물러 있으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둔 현지조사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신당서』발해전에는 당나라 천보 연간에 발해에서 도성을 상경으로 옮기였다고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과연 “고금제도를 받아들였다”는 발해에서 당나라에 앞서 상경을 비롯한 5경이 설치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는 『신당서』보다 앞서 성립하는 제 사료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舊唐書』에는 발해5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신당서』에 편입된 지리지에는 가탐도리기를 인용하면서 발해의 지명 즉 渤海長領府, 渤海王都, 丸都縣城, 顯州등을 언급한곳이 있다. 현주에 관해서는 『武經總要』에서 『皇華四達記』를 인용하면서 天寶이전에 발해에서 도읍지로 정한 곳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도 『賈耽古今郡國志』를 인용하면서 발해국 南海, 鴨淥, 扶餘, 柵城 四府는 모두 고구려 옛 땅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가탐고금군국지』도 신당서 지리지에서 인용한 가탐도리기도 원명은 『고금군국현도사이술』이다. 이 저서는 801년에 성립된 것이나 발해도성, 책성부와 같이 발해와 관련되는 지명정보는 762년경에 발해와 신라로 파견된 당나라사신 한조채가 전했다는 연구가 있다. 그러므로 가탐도리기를 통해서는 8세기 60년대쯤에 발해에 5경의 명칭이 없었다는 것 을 확인할 수 있다. 797년에 성립된 『續日本紀』에서 발해 사신들이 일본에 건너간 기록을 확인해보면 739년에 若忽州都督 胥要德, 758년에 木底州 刺史 揚承慶, 759년에 玄菟州 刺史 高南申이 일본사신으로 파견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777년에 발해사신 史都蒙 일행이 발해 남해부에서 출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에 남아있는 8세기 후반의 기록에서도 발해5경의 명칭이 없으며 『신당서』발해전에서 나오는 남경남해부도 남경이라는 기록은 없고 다만 남해부라는 명칭만 보인다. 주의 명칭도 『신당서』 발해전에서 나오는 “龍州”, “慶州”등 한 글자 주명과는 달리 “낙홀주”, “목저주”, “현도주”처럼 두 글자 주명이 보인다. 즉 일본에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서 적어도 8세기 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발해에는 『신당서』발해전에서의 경부주 명칭을 확정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으로 제 사료를 정리해본 결과 발해 제3대왕 문왕 大欽茂 시기에 5경의 명칭이 출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흠무 사후 발해에서는 한동안 혼란상태를 겪으며 818년 10대발해왕 선왕 大仁秀의 시기에서야 비로소 해북 제 부를 통솔하고 군현을 정비하기 시작 하였다. 발해5경의 설치는 방 5,000리라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고 나서 각지에 산재하고 있는 靺鞨 제 부족을 통제하기 위하여 세운 5개소의 정치적 중심지의 명칭이 아니었을까 한다. 『신당서』발해전의 5경은 820년 전후 즉 선왕대 이후에 발해에서 불렸던 명칭으로 판단되며 8세기 후반기 대흠무 시기의 상경, 동경 등 명칭은 후세에서追 記한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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