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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 한국기독교역사학회 2005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23 No.-
Shortly after the Korean War broke out, half the people of Korea were in need of relief. Refugees, war sufferers, and local destitute amounted 10, 291,774 of the total population 21,000,000. In this situation about 40 foreign voluntary agencies with Christian background came to South Korea and began to play a key role in relief activities for war refugees and sufferers. Among other things, Church World Service and War Relief Service of the 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 played a prominent part in the relief and rehabilitation during and after the Korean War. This essay examines the relief activities of Christian voluntary agencies from foreign countries in general and those of Church World Service in particular. Church World Service conducted relief and rehabilitation programs in Korea ever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 but during the Korean War it carried on more extensive program of relief of Korean refugees and other war victims as agent of the American Churches and World Council of Churches. Since February, 1951, Rev. Henry D. Appenzeller directed relief work of the Church World Service in Korea. He and his missionary and Korean Christian associates were engaged in distributing supplies, in assisting with the movement of refugees and in their settlement with the cooperation of other voluntary agencies such as War Relief Service Committe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CARE, etc. Main relief work of the Church World Service included orphans and unaccompanied children, the physically handicapped, vagrant adolescents, children and war widows.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구호를 필요로 하는 전쟁 난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952년 3월 통계에 의하면, 전쟁으로 집을 잃은 피난민, 전쟁으로 물자상실이나 지원수단이 파괴되어 고통을 받는 전쟁 이재민, 빈곤과 인플레이션으로 괴로움을 받는 지방 빈민이 남한 인구 21,000,000명 가운데 절반이나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으며, 원조단체 중에서도 외국의 기독교회와 구호단체들은 한국교회에 다량의 구호금품을 보내거나 직접 구호활동가들을 보내 구호활동에 나섰다. 이 단체들은 40여 개에 달했으며, 민간 구호단체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글은 한국전쟁 시기 및 전쟁 직후 활동한 기독교 외원단체들의 내한과 구호활동 과정을 살펴보고 그 중에서도 미국과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구호사업을 대변했던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활동을 정리하는 데 목적이 있다.전시에 내한한 외원단체들은 한국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온 미국교회에 속한 단체가 가장 많았다. 교파는 장로교, 침례교, 나사렛교회, 메노나이트, 퀘이커, 동양선교회, 감리교, 안식교, 유니테리언교회, 루터교, 천주교 등 다양했다. 구호품을 가장 많이 전달하고 구호활동을 가장 활발히 전개한 기독교 외원단체는 미국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가톨릭구제위원회와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속한 기독교세계봉사회였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구호활동도 대행하였다.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한국 책임자는 헨리 D. 아펜젤러 목사였다. 기독교 외원단체들은 제한된 자원과 구호의 긴급성 때문에 응급한 구호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보건사업에도 손을 대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피난민들을 위한 사업과 아동, 전쟁미망인, 부상자 등을 위한 구호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전시의 구호활동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사업이었다. 이 시기에 외국 기독교 외원단체들을 통해 전개된 구호 및 복구 활동은 한국사회에 대한 봉사의 양과 규모에서 한국교회 초기에 있었던 외국교회들의 교육과 의료활동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으며 한국사회에 대한 대규모 봉사의 재현이었다. 외원단체들은 구호 활동을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사회봉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사회교육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기독교 외원단체의 영향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했으며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미국으로부터의 엄청난 양의 원조는 미군의 참전과 함께 전후의 한국인들에게 미국이 일종의 구원국가로 보이게까지 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외원단체의 최대의 수혜자였던 교회에 아직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