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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기(崔尙基) 한국목간학회 2014 목간과 문자 Vol.12 No.-
2011년 소개된「?軍 墓誌」는 예군의 흥미로운 생애로 인해 한?중?일 학계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다만 각국 학계의 관심사에 따라 논의의 방향도 조금씩 차이가 있으므로,「 예군 묘지」의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 이들을 정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군은 613년 사비에서 출생했다고 추정되며, 678년 장안에서 66세로 사망했다. 예씨 일족의 묘지에서는 그들의 출자를 중국에서 찾았지만, 현재로서는 웅진지역에 연고를 가진 세력이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630년대 정계 입문 적령기였던 예군은 마침 무왕이 웅진 지역과 맺은 모종의 관계 속에서 백제 정계에 진출했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의자왕의 항복은 예군의 동생인 예식진이 주도했다고 보지만, 묘지의 서술 및 예군이 당에서 받은 관직을 고려하면 그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백제 멸망 이후 예군은 동생 예식진과 함께 웅진도독부 체제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당의 동북아시아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軍 墓誌」에는 ‘日本’을 명시한 구절이 있어 주목을 받았는데, 이 부분은 백강 전투 및 그 사후처리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와의 교섭은 묘지에 기록될 정도로 예군 본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최상기(崔尙基) 한국목간학회 2013 목간과 문자 Vol.11 No.-
1차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목간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咸安城山山城에서 출토된 대량의 목간들은 중고기 신라의 정치, 경제, 군사 등을 살필 때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실물 자료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성산산성 목간 관련 간행물, 연구성과들이 다수 축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산산성 목간에 대한 체계적인 번호 부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는 연구 과정에서 오류,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 요인이다. 발굴보고서, 현장설명회 자료집의 경우 한 간행물 안에서도 번호 부여 방식이 여러 가지이며, 각 간행물마다 매번 목간 번호가 1번부터 시작하므로 일관적인 파악이 어렵다. 《韓國의 古代木簡》, 《韓國木簡字典》은 현재까지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활용하는 기본 자료집이다. 그러나 다른 간행물들과의 연속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부여한 번호도 아직 문제점이 있어 그 형식을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들에 일괄 적용하기 어렵다. 여러 종류의 번호 부여 방식이 혼재한 상황은 연구성과의 작성 단계부터 문제가 되며, 이로 인해 연구사의 신속, 정확한 파악도 곤란하다. 번호부여 방식을 비롯해 성산산성 목간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는 학문후속세대의 연구 지속성 측면에서도 중요한 과제이다. 차후 새로운 번호 부여 방식을 마련할 때에는 해당 목간의 출토 장소, 출토 연도, 일련번호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틀을 갖춰야 할 것이다.
최상용(崔相鎔) 한국도교문화학회 2004 道敎文化硏究 Vol.20 No.-
도교 내단학의 기반이 확고해진 中國 宋代에는 陳搏을 필두로 圖書學派가 등장하며 太極圖와 無極圖가 형이상학적 우주론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태극도는 周郭?의 『太極圖說』을 배경으로 하여 ‘無極 → 太極 → 陰陽 → 五行 → 萬物’이라는 우주의 생성론적 관점을 형이상학적으로 규명하고 하고 있다. 반면에 진단의 무극도는 우주 만물의 최초근원인 무극으로 복귀하려는 내단수련의 단계를 ‘玄牝 → 築氣(煉精化氣와 煉氣化神) → 和合(五氣朝元) → 採藥(取坎塡離) → 脫胎(煉神還虛와 復歸無極)의 다섯 층차로 설정하고 하고 있다. 즉 태극도가 우주 만물의 생성에 대한 순행적인 단계를 표현하고 있다면, 무극도는 역행적인 관점에서 만물의 하나인 인간이 우주 생성의 최초의 단계인 무극으로 회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극도의 단계별 구성요소는 內丹修練의 방법이 다양화ㆍ성숙됨에 따라 층차의 경지문제가 대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