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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달성사 명부전 존상의 조성과 중수: 향엄(香嚴), 진열(進悅)

        송은석 ( Song Unsok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6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18 No.-

        1565년 나주 운흥사에서 조성되었고 지금은 목포 달성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등 제 존상들은 16세기 조각승 향엄(香嚴)을 비롯한 5명의 조각승들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조각승 향엄은 이 불상들 이외에도 1534년에 제작한 보살상을 남기고 있어서, 16세기 조각승 가운데 유일하게 2점 이상의 작품을 남긴 조각승이다. 16세기 말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해 현존하는 조선 전기의 목조불상이 매우 희귀한 상황에서 향엄이 조성한 두 건의 불상들은 16세기 조각사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1534년과 1565년에 제작된 불상들에는 양식적 특징이 동일하게 나타나 있어서, 이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불상들을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케 하며, 향엄을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승 유파가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보여 주고 있다. 이 불상들은 1719년에 조각승 진열, 태원 등에 의해 중수되었는데, 이때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여러 존상들의 얼굴이 변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중수 시에 원래의 얼굴이나 불신이 크게 바뀌는 사례는 흔치 않은 일인데, 이는 조각승 진열이 추구한 중수 방식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진열이 1722년에 참여하여 중수한 부산 범어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도 달성사 불상들처럼 얼굴의 개변이 이루어진 점으로부터도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1719년 중수 시에는 오도전륜대왕상과 사자상 등 일부 존상들이 진열에 의해 새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러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진열 작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목포 달성사 명부전의 여러 존상들은 1565년 제작된 후 크게 손상되지 않고 후대의 중수에 영향을 받지 않아 향엄의 작풍을 간직하고 있는 불상군, 1719년 중수 당시에 새로이 조성되어 진열의 작풍만을 보이는 불상군, 그리고 중수 시에 진열에 의해 크게 개변되어 향엄과 진열의 작풍이 함께 나타나는 불상군 등 3가지 양식의 불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목조 불상들은 습기나 해충에 의해 손상되기 쉬운 재질의 특성으로 인해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개금, 개채 등을 비롯한 다양한 보수 작업이 필요하였다. 현존하는 모든 조선시대 불상들은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거친 존상들이다. 목포 달성사 명부전 존상들은 16세기 중반에 제작된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치면서 향엄과 진열의 작풍이 공존하는 독특한 구성을 갖추게 되었으며, 조성, 보수, 중수, 개채 등에 의해 변화된 모습이 그대로 간직된 대표적인 불상이 되었다. It was discovered, in a record associated with the construction and renovation of the Buddha images found in various images enshrined at Myeongbu-jeon Hall (Hall of the Underworld) of Dalseong-sa Temple in Mokpo, that the statues enshrined in the hall - including the Ks. itigarbha Bodhisattva Triad, Ten Underworld Kings, Messengers, vajrapani Guardians and Boy Attendants - were originally created in 1565 by a monk-sculptor named Hyang-eom and renovated in 1719 by another monk-sculptor named Jin-yeol. Considering the fact that most of the Korean wooden cultural heritage created before the 16th century were almost destroyed by wars and internal disturbances, particularly the Japanese invasion of the Korean Peninsula in 1592 (Imjinwaeran) and the Manchu Invasion in 1636 (Byeongjahoran), these statues made in 1565 provide valuable clues for the study on and restoration of the history of Korean sculpture for Joseon period (1392-1910). The statues are particularly highly regarded for keeping the original condition almost intact, although some of the original Judge, Demon King, and Boy Attendants failed to survive. The written prayers made at the time of their creation and restoration - with the first discovered at the repositories of five statues, and the second, at those of seven statues - provide even more valuable information on the production, management, and movement of the statues. Other discoveries, including the bokjang container, dharanı, and Buddhist scriptures, also provide a fine complement to the knowledge about the tradition of storing votive offerings inside the Buddhist statues maintained during the Joseon period. Hyangeom, who led the project for the creation of the Buddhist statues enshrined in the Myeongbu-jeon Hall of Dalseong-sa Temple, also left a work he carved in 1534; thus making him the only monk-sculptor of the 16th century to have produced more than one sculpture remaining today. These sculptures maintain the same style despite the thirty-year difference in time, suggesting that he continued to be engaged in sculpture for three decades from 1534 to 1565. While there have been plenty of researches conducted in the 17th-century Buddhist sculpture and sculptors of Joseon, which was terminated with the end of the Imjinwaeran, little is known about the art and artists before the war. That is why artist Hyangeom and his sculptural works are deemed to have played a crucial role in connecting the Buddhist sculpture of early Joseon with that of the period following it. Jin-yeol and Taewon, two of the sculptors who played a key role in the restoration of Hyangeom`s works done in 1719, are now generally regarded as master sculptors who represent the Korean Buddhist sculpture in the first half of the 18th century. Of the two, Jinyeol is famous for his tendency to use his own style for the works he was commissioned to restore or reproduce; this explains how the statues originally made by Hyangeom come to display the style established by Jinyeol. The statue of Ks. itigarbha Bodhisattva is a prominent example. It is also Jinyeol, as generally agreed, whose works replaced the damaged statues of the Tenth Judge and Messenger, providing a valuable clue with respect to the restoration project for Hyangeom`s statues. The modification method adopted by Jin-yeol continued to be used with others such as regilding or repainting carried out in the following period for Buddhist statues, including the Wooden Seated Vairocana Buddha of Beomeo-sa Temple in Busan restored in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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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불교조각의 독창성

        송은석(Song, Unsok)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4 美術史學 Vol.- No.28

        이 글은 조선 후기 불교조각이 갖고 있는 독창적 요소를 圖像, 造形性, 流派의 본격적 성립이라는 세 측면에서 해석한 글이다. 첫 번째 도상의 측면에서는 전체 불교권에서 유일한 제화갈라보살-석가불-미륵보살로 구성된 ‘一佛二菩薩形’의 三世佛 도상의 창안에서 찾아보았다. 두 번째 조형성 측면에서는, 불전 내 의식의 빈번한 설행으로 촉발된 불전 내부의 불단, 대좌, 바닥 등의 평면상, 입면상 변화로 인해 궁극적으로 불상 조형이 변화한 것에서 찾아보았는데, 이 과정에서 조각가들의 독창적 면모가 잘 드러나 있었다. 세 번째는 유파의 탄생에 관련된 독창적 면모이다.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사찰을 재건하기 위하여 수많은 불상을 조성하고 천여 명의 조각승들이 활동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승관계에 기반을 둔 유파가 출현하였으며, 각 유파들은 자신들만의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면모를 찾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사찰의 나한전에는 십육나한상과 함께 삼세불상이 주존으로 봉안되어 있다. 삼세불은 중앙의 佛形의 석가상을 중심으로 하고, 좌우의 미래불인 미륵, 과거불인 제화갈라가 모두 菩薩形으로 봉안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왜냐하면, 조선과 같이 십육나한상(혹은 십팔나한상)이 조성되었던 중국에서는 십육나한과 삼세불이 결합된 사례가 하나도 없으며, 십육나한과 결합하지 않은 독립적인 삼세불상도 모두 佛形의 삼세불만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과거-현재-미래의 授記三世 중에서 석가와 미륵 사이에 無佛時代를 수호하는 십육나한이 들어감으로써 과거-현재-미래가 보다 완전하게 이어져 있게 된 것이다. 즉, 삼세불과 십육나한은 시간과 수기를 매개로 완벽하게 결합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조선에서처럼 한 공간 안에 봉안되었을 때보다 완벽한 결합이 될 수 있다. 즉, 도상의 측면에서 나한전의 一佛二菩薩形의 삼세불은 조선 후기에 새로 창안된 도상이며, 조선 후기 불상의 독창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불상의 조형적 특징이라고 알려진 ‘목을 숙이고 자세를 웅크린’ 모습은 불전 내 의식의 성행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건축 구조 상의 변화에 대하여, 조각가들이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대처하여 만들어 낸 조형이라고 추정되었다. 불전 안에 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었던 조선 후기 사찰에서는 예배상의 존엄성을 갖추기 위하여 불단과 함께 높은 대좌가 별도로 더 설치되었는데, 조선 전기 이전의 불상보다 두 배 가량 높은 위치에 불상이 봉안되기에 이르렀다. 봉안 위치의 변화 속에서 조각가들은 예배자와 예배상의 영적교류를 이루기 위한 불상의 圓滿相을 표현하기 위하여 목을 숙이고 웅크린 자세를 취한 불상을 창안하게 된 것이었다고 판단되었다. 조선 후기 조각이 가진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조각승 유파가 본격적으로 성립한 일이다.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인 재건 불사에 따라 급격히 늘어난 불상 조각의 수요에 따라 수많은 조각승들이 활동하게 되었고, 사승관계에 따른 자연스런 집단이 형성되었다. 집단 내 조각승들은 많은 불사를 함께 행하면서 점차 사승관계에 따른 교육-학습 관계가 보다 중요하게 이루어졌으며, 首長의 조각 방식과 樣式을 공유하는 유파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유파의 본격적인 성립은 개인 조각가의 독창성을 바탕으로 한 작가 의식에서 시작하였다고 판단된다. 조선 후기의 불교 조각은 종교미술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圖像, 樣式, 流派 면에서 조선 후기만의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면모를 갖고 발전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불교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밑바탕은 낮은 곳에서 좀 더 폭넓게 자리를 잡으며 능동적으로 변화하였던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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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국사와 석불사의 유기적(有機的) 관계 재검토

        송은석 ( Song Unsok )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23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31 No.-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 길상좌(吉祥坐) 형의 결가부좌(結跏趺坐), 동면을 향한 좌세(坐勢)를 취한 석불사(石佛寺) 불상은 인도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Maha-bodhi Maha-viha-ra) 정각상(正覺像)의 재현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석불사(石佛寺) 불상의 대좌와 불상의 크기가 마하보리사 정각상과 거의 동일하게 재현된 점은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의 정각상 중에서도 인상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불사 본존상과 보드가야 마하보리사 정각상의 유사성이 너무 강해서인지, 불상들을 봉안한 두 사찰과 불전의 성격 차이는 그동안 그다지 주목되지 못하였다. 석가모니의 성도지(成道地)에 세워진 마하보리사와 그 내부에 봉안된 항마성도상은 석가의 항마성도(降魔成道)라는 동일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이라는 맥락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경주 석불사와 그 전각 내부의 정각상도 과연 항마성도라는 맥락을 유지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의문은 마하보리사 건물과 석불사 건물의 외형과 존상의 구성 등 중요한 요소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보리수(菩提樹), 금강보좌(金剛寶座), 정각상에 대한 기록에 비해 충분하지는 않지만 불전(대탑) 건물에 대한 현장(玄奘)과 왕현책(王玄策) 등 7세기 중국인 여행가들의 기록을 통해 마하보리사 건물의 형태를 유추해 낼 수 있다. 이러한 여행기를 통해 마하보리사 정각상의 크기를 알고 있었던 석불사 창건자들이 사각추(四角錐)형의 마하보리사 건물과 전혀 다른 형태인 반구(半球)형으로 석불사 불전을 건축한 것은 매우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도와 신라의 두 불상은 항마성도라는 동일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신라의 석불사는 인도의 마하보리사가 갖고 있는 항마성도의 성지라는 성격을 갖고 있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다. 불상만을 모본으로 삼고 불전은 모본과 다르게 건축한 것은 항마성도지(降魔成道地)의 정각상은 봉안되어야 하였지만, 항마성도지의 마하보리사와 같은 성격은 아니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필자는 석불사에 마하보리사의 사각추형 불전이 배제되고 궁륭(穹窿)형 불전이 수용된 데에는 석불사와 함께 건립된 불국사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두 사찰의 관계는 ‘지상(地上) 즉 신라의 불국사, 천상(天上) 즉 천축인의 석불사’라는 유기적이나 상대적인 개념 속에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각형 평면, 남향, 목조 건물 등 불국사 건물은 지상(地上)을 상징한 것으로 현실세계에서는 신라의 전통 요소들로 표현된 것이다. 반면, 원형 평면, 동향(東向), 반구형 석조 건물 등 석불사 불전 건축은 천상(天上)을 상징한 것으로 현실세계에서는 천축(天竺)의 전통 요소들이 형상화된 것이다. 불국사는 목조 건물 위주의 건물들이 남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동아시아적’이자 ‘신라적’이다. 그러나, 석불사는 석조 건물 위주의 불사가 동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非)동아시아적’이자 ‘인도적’이다. 신라인들은 신라의 전통문화로 ‘현실세계’를 표현하였으며, 비신라 문화로 ‘천상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며 이들은 비신라 문화란 곧 ‘천축적’인 것과 상통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불국사가 지상의 현실적 건축이자 신라 땅 위에 있는 건축이라면, 석불사는 천상의 이상적 건축이자 신라 땅이 아닌 천축의 건축인 것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성행한 석상(石像)과 천궁상(天宮像)은 각각 석가불국(釋迦佛國)과 도솔정토(兜率淨土)를 나타낸 것이었다. 또한 불국사와 석불사의 관계는 이들 비상(碑像)의 구조와 상통하여 불국사는 지상의 석가불국, 석불사는 천상의 도솔정토로 연결되었다. 또한 8세기 중엽 유가학파에서 화엄학파로 세력의 중심이 이동한 신라 불교계에서 토함산이라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속에 지상의 석가불국은 ‘화엄불국사’로 현현하였으며 천상의 도솔정토는 ‘석불사’로 현현하여 상호 결합된 것이다. The Buddha statue at Mahābodhi Temple in Bodhgayā, India, is a monumental one created at the place where Shakyamuni (Śākyamuni) attained enlightenment. It is well known as the model for the Buddha statue at Seokbulsa Monastery in Gyeongju. However, it is not well known that the shape of the building is different. While the Mahābodhi Temple has a square plane and square pyramid shape, the main hall of the Seokbulsa Monastery has a circular and hemispherical plane. I believe that the difference in the appearance of the two buildings is attributed to the different character between the two monasteries. In other words, the Mahābodhi Temple built in the place where Śākyamuni attained enlightenment and the Buddha statue was enshrined inside share the context in which Buddha’s enlightenment was commemorated. However, the Gyeongju Seokbulsa Monastery and the Buddha statue inside the hall do not share the context of commemorating Buddha’s enlightenment. It was a very intentional choice for the founders of Seokbulsa Monastery, who knew the size of the Buddha statue at Mahābodhi Temple through the records of Chinese travelers in the 7th century, to build a semi-spherical building rather than a quadrilateral pyramidal building of Mahābodhi Temple. The Buddha statue at Seokbulsa Monastery in Gyeongju, like the Buddha statue at Mahābodhi Temple in Bodhgayā, has the same background as the event of Buddha's enlightenment. However, the Seokbulsa Monastery, which has a different appearance from the building of Mahābodhi Temple, shows that it does not have the event of Buddha’s enlightenment as the background. I think the reason why Seokbulsa Monastery chose to take the form of the hemispherical building instead of the quadrangular pyramidal building of Mahābodhi Temple is closely related to Bulguksa Monastery, which was built along with Seokbulsa Monaster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monasteries is in the closely connected but opposite concept of Bulguksa on the ground and Seokbulsa in the heavens. In other words, the building elements of Bulguksa, such as a square plane, south-facing, and wooden building, symbolize the ground and are manifested in the real world with traditional elements of Silla. On the other hand, the architectural elements of Seokbulsa Monastery, such as circular planes, east-facing, and hemispherical stone buildings, symbolize the heavens and embody the traditional elements of India. Bulguksa is very East Asian and Silla-like in that the wooden buildings face south. However, Seokbulsa is non-East Asian or Indian in which the stone building faces east. The people of Silla visualized the real world with the traditional culture of Silla, whereas the heavenly world was represented with the non-Silla culture. And they seemed to think that the non-Silla culture was related to India. The stone statues and heavenly palaces in the steles in the period of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of China represented the Pure Land of Śākyamuni and the Tushita Heaven of Maitreya Bodhisattva, respectively. The relationship between Bulguksa and Seokbulsa is also similar to the structure of these steles. Thus, Bulguksa Monastery is connected to the Pure Land of Śākyamuni on the ground and Seokbulsa Monastery to the Tushita of Maitreya in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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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慶州 南山 三陵溪 第2寺址 石造佛坐像의 服制와 着衣法

        송은석(Song, Unsok)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21 美術史學 Vol.- No.41

        이 글은 율전을 비롯한 문자기록과 작품 분석을 통해, 경주 남산 삼릉계 제2사지 석조불좌상의 복제가 裙-僧祇支-覆肩衣-大衣 임을 밝힌 글이다. 경주 남산 삼릉계 제2사지 석조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들에 나타났던 거의 모든 복제가 적용되어 있어서 통일신라 불상 복제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불상에 적용된 佛衣의 명칭과 역할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僧衣와 구별없이 적용되었거나, 율전과 해석서의 기록에 기초하지 않는 등 도상학적ㆍ경전적 전거에 대한 접근이 다양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한계가 있다. 經律에 의거하고, 중국의 해석서, 그리고 기타 史書의 기록을 참고하며,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불상들의 복제를 상호 비교를 통하여야만 비로소 통일신라 불상에 적용된 佛衣의 종류와 명칭을 올바르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삼릉계 불상의 복제 중의 하나로 판단되는 僧祇支는 비구니가 가사를 착용하였을 때 유방의 노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율전에 기록되어 있다. 율전과 중국의 해석서 그리고 당대의 인도 여행기 등에 일관되게 오른쪽 어깨를 노출시킨 방식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에 걸쳐 착용된 옷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릉계 상에서는 상반신 가장 안쪽에 착용된 옷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승기지가 흘러 떨어지지 않도록 帶로 고정시켜야 한다는 율전의 기록대로 본 불상에도 가슴 아래에 굵은 끈으로 묶어 고정시키고 있다. 승기지의 밖에 입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와 가슴을 가리고 아래로 흘러내린 옷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제기되어 왔다. 첫째는 袈裟라는 의견이다. 즉, 편단우견으로 착용된 대의의 안쪽에 또 하나의 가사 즉 울타라승이 착용된 것이란 의견이다. 율전에 따라 삼의를 모두 한꺼번에 착용할 수 있으므로 2매의 가사를 착용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율전에 의하면, 가사는 목 뒤를 감싼 후 앞쪽의 두 모서리 중 오른쪽 모서리가 반드시 왼쪽 어깨 위로 넘겨져야 한다고 하였다. 본 불상에서는 오른쪽 모서리가 그대로 아래로 내려져 오른쪽 정강이 위로 드러나 있으며, 왼쪽 모서리도 왼쪽 정강이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가사 착용법은 율전의 규정에 어긋난 것이기 때문에 가사로 볼 수 없다. 둘째는 偏衫이라는 의견이다. 편삼은 오른쪽 가슴과 어깨를 드러낸 승려를 보고 드러낸 속살을 가리고자 중국 왕궁의 궁인이 제작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승기지와 부견의를 합쳐 만든 것으로서 깃과 소매가 달린 윗옷이다. 그러나 이 불상의 오른쪽 상반신에 착용된 옷은 깃도 소매도 없는 옷이어서 편삼이라고 할 수 없다. 셋째는 覆肩衣라는 의견이며, 필자의 의견이다. 부견의는 승기지처럼 비구니의 유방, 특히 승기지가 미처 다 가리지 못한 오른쪽 가슴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는데, 나중에는 비구들도 착용하게 된 옷이다. 형태는 승기지와 같이 방형이기에 소매와 깃이 없는 옷이다. 본 불좌상 오른쪽 어깨와 가슴에 덮인 옷은 方形이고, 소매와 깃이 없으며, 복부를 가로지르지 않는 착용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옷에 가장 부합한 것은 바로 부견의로 생각되는 것이다. 삼릉계 불상의 가장 밖에 착용된 옷은 편단우견의 僧伽梨로 판단된다. 뒷면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 쪽으로 난 사선의 양각선을 갖는 옷은 바로 승가리 즉 대의이다. 대의는 오른쪽 팔꿈치 아래를 지나 복부를 가로질러 왼쪽 가슴에서 매듭진 끈과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즉 율장에 나오는 鉤紐인데, 가사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는 용도의 장치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삼릉계 불상은 겉에 편단우견 방식으로 大衣를 입었고, 안에는 覆肩衣와 僧祇支를 착용하였으며,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안 하반신에는 裙을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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