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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근대미술사연구를 위한 몇가지 노트

          윤범모(Yoon Bum-mo) 한국미술사교육학회 1994 美術史學 Vol.8 No.-

          근래에 이르러 우리 근대미술사 연구의 활성화 현상이 제법 일고 있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근대미술사 연구의 수준은 아직도 초보단계에 불과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한국근대미술사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사회적으로 독립성을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미술대학에서 조차도 중심선상에 놓여있지 않다. 때문에 연구자의 영세성과 아울러 연구의 성과물도 희소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근대미술사의 기초자료 조사작업조차 미완의 상태이다. 일례로 일제시대의 신문 잡지에 게재된 미술관계 문헌자료조차 집대성시키지 못했다. 기초자료의 조사정리작업은 학문연구상 제일의 관건이 된다. 자료의 집대성작업은 부차적인 문제라할지라도 제1차 자료의 개인적 검증은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초자료의 조사적업 없이 쓰여진 이름도 좋은 근대미술관련 논문(?)을 숱하게 보아왔다. 심지어는 《한국현대미술사》라는 제목의 개설서 같은 저술도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세대의 수준에서 일탈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본자료의 문제와 더불어 자료의 해석방식에도 재검토를 요하고 있다. 지난 세월의 미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른바 시각의 문제요, 史觀의 문제이다. 이에 본고는 근대미술사학도의 입장에서 기존의 연구태도에 대한 소견을 부담없이 피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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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말 한국미술의 ‘도시문명에의 참여'

          신정훈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4 美術史學 Vol.- No.28

          The late 1960s witnessed the emergence of new terms such as “moderncivilization,” “urban civilization,” “industrial civilization,” “everyday life,”“machine civilization,” “urban world,” and “consumer civilization” in thediscourse of Korean art. While a plethora of new terms indicates a dearth ofa shared definition of the new society to which they sought to refer, it revealsa new awareness that Korean society was on the verge of, if not in the midstof, totally new formations. The aim of this paper is to elucidate the significantrole of that awareness in the production of Korean art in the late 1960. Tothis end, this paper focuses on a particular set of advanced practices such as‘environmental work', ‘Happenings', and ‘geometrical abstraction,' of whichadvent in the Korean art scene should be understood as inseparable from theurbanization and transformation of everyday surroundings that made optimisticvisions of a new society much more tangible than any other forces. This paper argues that the late 1960s saw what might be called a urban turnin Korean art, which was widely performed not only by the new generationof post-Informel artists (‘environmental work' and ‘Happenings') but also byestablished ones in their 30s and 40s (‘geometrical abstraction'). Although theturn has received little attention in the existing literature, it occupied a centralposition in the work of art critic Yi Il (1932-1997) in the late 1960s. For him,who was highly informed during his sojourn in Paris by a noticeable surge inattention to the artistic use of everyday objects and the fusion of art and architecture, a radical immersion into the urban environment defined thecharacteristic of new ‘avant-garde.' Calling for ‘participation in urbancivilization,' the critic urged Korean artists to depart from artistic existentialismembodied by Korean Informel in favour of the enthusiastic incorporation ofelements from a new urban society. Pointing out that the ‘participation inurban civilization' attitude arose among the Korean artists for seriousconsideration, this paper deals with largely ignored issues and worksregarding the late ‘60s urban turn as a result of a complex interplay amongvarious artistic and socio-spatial forces. 1960년대 말 한국미술의 담론 속에는 “현대문명”, “도시문명”, “산업문명”, “일상생활”, “기계문명”, “도시세계”, “소비문명” 등과 같은 새로운 용어들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 다양한 어휘들의 등장은 그것들이 지칭하고자하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성격이 충분히 파악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사회가 변모하고 있다는, 최소한 변모를 앞두고 있다는 감각내지 기대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본 논문의 목표는 이와 같이 새로운 사회의 도래에 대한 기대 섞인 전망이 1960년대 말 특정 시기 한국미술 생산에 주요한 역할을 했음을 밝히는 것이다. 본 논문은 그 전망을 일상적인 수준에서가장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구현하고 있던 도시화와 일상환경의 변모에 당시 일군의 오브제, 환경, 해프닝, 기하학적 추상 작업이 반응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따라서 탈-캔버스 작업으로 나아갔던 포스트-앵포르멜 세대의 젊은 미술가뿐만 아니라 기하학적 패턴을 채택하여 자신의 회화를 일신하려했던30-40대의 기성미술가들을 포함한 1960년대 말 선진적인 한국의 미술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도시적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확인하고 그 전환에 놓인 기대감을 강조한다. 비록 이 전환이 기존 미술사 서술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것은1960년대 후반 비평가 이일에 의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전위'의 태도로 강조된 바 있었다. 그의 표현에 따라 ‘도시문명에의 참여'라 부를 수 있는 그 태도는 저항이나 반항을 존재이유로 하던 기존 앵포르멜 미술가의 실존주의적 태도와 결별하고 도래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호응(‘참여')내지, 최소한 중립적인 대응(‘확인')을 특징으로 했다. 본 논문은 ‘도시문명에의 참여'가당시 미술가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태도나 관념으로 부상했음을지적한다. 그리고 이를 앵포르멜 이후 새로운 미술의 등장을 바라는 당시 미술계의 강렬한 요구,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당대 해외미술에 대한 직간접적 정보의 증가, 그리고 서울의 급격한 도시화와 그에 수반된 낙관주의적, 미래주의적 도시담론의 확산과 같은, 미술적이고 사회-공간적인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로 파악한다.

        • KCI등재

          1960년대 말 한국미술의 ‘도시문명에의 참여'

          신정훈(Shin, Chunghoon)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4 美術史學 Vol.- No.28

          1960년대 말 한국미술의 담론 속에는 “현대문명”, “도시문명”, “산업문명”, “일상생활”, “기계문명”, “도시세계”, “소비문명” 등과 같은 새로운 용어들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 다양한 어휘들의 등장은 그것들이 지칭하고자하는 한국사회의 새로운 성격이 충분히 파악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사회가 변모하고 있다는, 최소한 변모를 앞두고 있다는 감각내지 기대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본 논문의 목표는 이와 같이 새로운 사회의 도래에 대한 기대 섞인 전망이 1960년대 말 특정 시기 한국미술 생산에 주요한 역할을 했음을 밝히는 것이다. 본 논문은 그 전망을 일상적인 수준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구현하고 있던 도시화와 일상환경의 변모에 당시 일군의 오브제, 환경, 해프닝, 기하학적 추상 작업이 반응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따라서 탈-캔버스 작업으로 나아갔던 포스트-앵포르멜 세대의 젊은 미술가뿐만 아니라 기하학적 패턴을 채택하여 자신의 회화를 일신하려했던 30-40대의 기성미술가들을 포함한 1960년대 말 선진적인 한국의 미술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도시적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확인하고 그 전환에 놓인 기대감을 강조한다. 비록 이 전환이 기존 미술사 서술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것은 1960년대 후반 비평가 이일에 의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전위'의 태도로 강조된 바 있었다. 그의 표현에 따라 ‘도시문명에의 참여'라 부를 수 있는 그 태도는 저항이나 반항을 존재이유로 하던 기존 앵포르멜 미술가의 실존주의적 태도와 결별하고 도래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호응(‘참여')내지, 최소한 중립적인 대응(‘확인')을 특징으로 했다. 본 논문은 ‘도시문명에의 참여'가 당시 미술가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태도나 관념으로 부상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를 앵포르멜 이후 새로운 미술의 등장을 바라는 당시 미술계의 강렬한 요구,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당대 해외미술에 대한 직간접적 정보의 증가, 그리고 서울의 급격한 도시화와 그에 수반된 낙관주의적, 미래주의적 도시담론의 확산과 같은, 미술적이고 사회-공간적인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로 파악한다. The late 1960s witnessed the emergence of new terms such as “modern civilization,” “urban civilization,” “industrial civilization,” “everyday life,” “machine civilization,” “urban world,” and “consumer civilization” in the discourse of Korean art. While a plethora of new terms indicates a dearth of a shared definition of the new society to which they sought to refer, it reveals a new awareness that Korean society was on the verge of, if not in the midst of, totally new formations. The aim of this paper is to elucidate the significant role of that awareness in the production of Korean art in the late 1960. To this end, this paper focuses on a particular set of advanced practices such as ‘environmental work', ‘Happenings', and ‘geometrical abstraction,' of which advent in the Korean art scene should be understood as inseparable from the urbanization and transformation of everyday surroundings that made optimistic visions of a new society much more tangible than any other forces. This paper argues that the late 1960s saw what might be called a urban turn in Korean art, which was widely performed not only by the new generation of post-Informel artists (‘environmental work' and ‘Happenings') but also by established ones in their 30s and 40s (‘geometrical abstraction'). Although the turn has received little attention in the existing literature, it occupied a central position in the work of art critic Yi Il (1932-1997) in the late 1960s. For him, who was highly informed during his sojourn in Paris by a noticeable surge in attention to the artistic use of everyday objects and the fusion of art and architecture, a radical immersion into the urban environment defined the characteristic of new ‘avant-garde.' Calling for ‘participation in urban civilization,' the critic urged Korean artists to depart from artistic existentialism embodied by Korean Informel in favour of the enthusiastic incorporation of elements from a new urban society. Pointing out that the ‘participation in urban civilization' attitude arose among the Korean artists for serious consideration, this paper deals with largely ignored issues and works regarding the late ‘60s urban turn as a result of a complex interplay among various artistic and socio-spatial fo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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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사와 교재 : 한국근대미술사와 교재, 「한국근대미술사와 교재」에 대한 질의, 김홍남 선생님의 질의에 대한 답변

          홍선표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5 美術史學 Vol.19 No.-

          A new media age has arisen in response to the incredible developments in high-tech electronic media, and it is fundamentally changing the ways in which knowledge and information are aquired. All knowledge is in the process of being converted into either electronic or video media, after which it will be stored in a computer network that anyone can access and use, and that connects the entire world. In the future, the production of knowledge will also be governed by the choices of consumers. In schools, the site of education, textbooks, the official instrument for the transmission of knowledge and information, are also being reevaluated, and it is thought that they must be redeveloped in order to meet the demands of this new media age. In particular, when considering the methods of acquiring and recognizing knowledge and information of a new generation of learners who find greater interest and stimulation in electronic and video media, the development of hyper-texts, or hyper-media textbook formats, and multimedia reorganization is urgent. Art history, which uses visual materials, has certain relative advantages over other fields in the new media or video age, but the debates on textbook development that accompany the changes this age brings are still in an incomplete state. This paper, prior to actual discussions of texbook development, explored the implementation of new content, which is linked to the research directions and results of academia. Among those areas explored, as one part of the search for new content concerning the narrative of modern Korean art history, it critically examined the junior high and high school text books, which have been in use since 2001 and 2002, respectively, as well as the contents of those general introductions that are used as textbooks for undergraduate and graduate stu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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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미술사, 왜 다시 읽어야 하는가? ‘동원된 서양미술사'의 신화(神話)와 한국현대미술사의 세 지점

          심상용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5 美術史學 Vol.- No.29

          본 논문은 해방공간 이후 현재까지 한국미술의 다양한 분야들, 창작과이론, 비평, 교육, 전시기획 등의 전문화된 영역에서 서양미술사가 그러한 신화로, 지역을 뛰어넘는 보편적 내러티브 기제로 작용해 왔으며, 그 결과 우리가 우리 미술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성찰하는 인식의 토대가 왜곡되어 왔고,그 여파가 오늘날의 동시대미술까지 미쳐 여전히 가볍지 않은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 또한 그것이다. 서양미술사의 전망과 관점이 우리의 인식과 판단에 ‘신화적 거울'로 작동하는 동안, 그것에 반사된-맥락화된- 해석을 통해서만 우리 미술을 설명하고 스스로에게 설득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독자성과 자율적 판단, 의구심을 통제하는 검열기제로 작용했고, 이로부터 원류에 의해 상대화된 자각,아류의식, 대국(大國)에의 자발적인 예속, 선진적인 것을 따르는 추종자의 감성이 양산되었다. 서양미술사 내러티브가 신화적 거울로 작동하는 배후에 늘 일정한 정치적 자장이 작동해왔다. 때로는 완강한 정치적 분위기 조성이나 보상기제의 활용을 통한 동기부여 안에서 ‘서양'이 유일한 선택지로서 권장되거나 촉구되었고, 미술 장은 서양미술사의 내러티브를 적극적으로 차용, 편승함으로써 그러한 정치적 노선에 직, 간접적으로 부응했다. 그러므로 서양미술사를 다시 읽는 이 논의에는 서양미술사 내러티브에의 동조, 편승이 정치적 정당화기제로활용되도록 해온 예술의 정치화, 또는 정치예술의 맥락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내포되어 있다. 논의는 또한 ‘동원된 서양미술사 내러티브'의 신화화된 기제안에서 스스로를 인식해온 한국현대미술의 타자성의 문제와 부득불 결부될수밖에 없다. 즉, 서양미술사 다시읽기의 궁극적인 취지는 오히려 ‘동원되고특권화된 서양미술사 내러티브'와 그것의 중요한 배후로서 정치적 선전기제라는 두 축에 의해 지지되어 온 한국현대미술을 난맥상을 짚어보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현대미술의 연대기적 세 지점, 곧 1950년대의 앵포르멜, 1970년대 한국적 모노크롬 또는 단색조 회화, 그리고 1990년대의 글로벌미술화의 기점이 이 논의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져야 했다. 이 각각의 세 지점은 신화화된 서양미술사 내러티브와 정치적 선전기제의 제휴가 매우 긴밀하고 관찰 가능한 형태로 발현되었던 시기이고, (아마도 그 결과이겠지만)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 확립에 있어 중요한 진전을 이룬 시점들로 이해되어 온 곳들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가 반공이데올로기로 분위기를 몰아갈 때,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유럽의 앵포르멜을 추종하는 노선이야말로실로 훈장을 수여받을만한 화답이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이끌었던 제3공화국에 의해 선포된 유신체제가 한국의 정치체제를 서구의 민주주의와 다른 것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같은 추상이로되 ‘한국적 추상'을 주창한‘한국적 모노크롬'이나 단색조 회화는 결과적으로 체제의 노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1995년을 세계화의원년으로 삼았을 때, 한국미술은 21세기 초일류국가에 걸맞는 세계화된 미술을 위해 글로벌 무대에 가담하는 소통행위, 블록버스터 전시와 행사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부(富)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세계미술론, 아시아 맹주론 등으로 스스로를 고무시키면서, ... Western art history's prospect and perspective worked as ‘a mythic mirror' toour perception and judgement, and only the reconstituted interpretationorganized by its projection is possible to explain and persuade Korean art. The projective interpretation worked as a kind of inspective mechanismsupervising and controlling identity, autonomic judgement and suspicion,which resulted in mass production of perception relativized by the originaltext, imitator consciousness following headstream, voluntary subordination togreat powers and follower's emotion toward the advanced. Like this, there has been always a extremely political magnetic field operatingin the background that made Western art history mobilized and operated as amythic mirror. That is to say, it is to create a series of political mood thatencourages ‘Western' as the privileged choice securing compensation andpositively mobilize motivation mechanisms, of which contemporary art fieldaccommodate or atune to the political mainstream in the form of aggressivelyborrowing Western art history's narrative. In this context, it is important to identify three chronological points of Koreancontemporary art. The first point of them is the time when Syngman Rheegovernment drove the atmosphere with anticommunist ideology. Linesfollowing american abstract expressionism and European Informalism were accommodation and response to that political line. The second point is thetime when in October 1972, the Revitalizing Reforms system declared by theThird Republic led by former president Park Chung-hee tried to make Koreanpolitical system different from the Western democracy, including a presidentialsystem of leading status for the peaceful unification of the nation. At thattime, Korean monochrome or monotone painting advocating ‘the Koreanabstraction', although it belonged to the same abstraction, worked in thedirection giving the system line justification consequentially. In the third point that Kim Young-sam administration took office in 1993, thatmade the year 1995 as the first year for globalization, and that Korea joinedOECD in 1996, Korean art stepped on the path of the globalized artrepresented by Venice, Basel and Miami matching one of the top country inthe 21st century again, turning against its own experience. Beginning in thispoint, Korean art started to be measured by communication behavior joiningglobal stage, events decorated by blockbuster exhibitions and overseascelebrities, and economic wealth facilitating it. Encouraging itself with theoriesof global art, Asian leader, etc., Korean art lost critical and interpretationalabilities and was rapidly buried under the values of utopia and exchange. In retrospect, Korean art should ask itself whether it had a moment thatstarted from the independent critical mind, coming from experience of ourlives and anguish, and whether it had a moment that led to find its ownstyle, from the Americanization for subsistence in the 50s, through Koreanmodernism in the 70s, to the global art discourse in the 90s. In this context,our modern art history may be abstracted that it has repeated the samepattern by interaction of politics and myth, interlocked by an axis, whichpolitics and policy motivated beforehand or created atmosphere and the artpassively matched it and received a series of systematic compensation for it,with another axis of the structured practice, which it directly importedadvanced Western art history that risk bearing of trial and error was removedin advance and changed it as a myth of universality. Korean art will be able to get rid of this framework, only whenstraightforward gaze and strong criticism about stereotypical and structured intellectual subordination removing risk beforehand with political fomentation,accommodation and response to the system and myth-dependent thoughtapp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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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펠러 재단의 문화사업과 한국미술(II): 록펠러 3세 기금 (JDR 3rd Fund)

          정무정(Chung, Moojeong)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20 美術史學 Vol.- No.39

          이 논문에서는 1963년 설립되어 자동차 사고로 인해 존 록펠러 3세(John D. Rockefeller 3rd)가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1978년까지 지속한 록펠러 3세 기금(JDR 3rd Fund)을 중심으로 록펠러 재단이 한국미술계를 위해 펼친 지원사업의 양상과 특징에 대해 살펴본다. 록펠러 3세 기금은 미국과 아시아 사이에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분야 문화교류 지원을 위해 1963년에 설립된 기구로서 록펠러 아카이브 센터에서 검색한 자료를 토대로 미술 분야에 한정해서 한국의 미술가와 학자가 수혜를 받은 사례를 살펴보면 회화/조각 분야에 김창열, 윤명로, 최만린, 김환기, 김차섭, 김병기, 박종배, 미술사 분야에 안휘준, 박물관학 분야에 김재원, 권이구, 손보기, 고고학 분야에 김원룡, 건축 분야에 강홍빈 등이 있다. 록펠러 3세 기금이 동서문화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1963년에 시작한 아시아 문화프로그램 (Asian Cultural Program)은 1) 아시아인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아시아인이 미국과 때로 유럽 또는 아시아에서 훈련을 받고 예술활동을 시찰할 수 있도록 여행과 유학 장학금을 제공하고, 2) 아시아 문화전통의 검토와 보존을 고무하기 위해 아시아 박물관 인력이 등록, 목록작성, 사진 자료, 설치, 보존, 교육프로그램 같은 분야에서 박물관 훈련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하며, 3) 아사아의 문화적 업적이 미국에서 전시, 공연되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전시, 공연 투어, 강연-실연 투어,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4) 아시아에서 미국의 문화적 업적의 전시와 공연을 촉진한다는 4가지 사업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포터 맥크레이(Porter McCray)는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서로 다른 발전단계에 있는 나라들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각 나라가 지닌 독특한 문화에 대한 상호존중과 교류가 필요하고 그것을 토대로 생산적인 문화 관계가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아시아 문화프로그램의 운영을 위한 모델을 개발했다. 사업의 목표와 대상 지역 그리고 지원 분야를 고려할 때 록펠러 3세 기금의 프로그램은 1950년대 파스가 아시아에서 추진한 문화지원 활동이 고도화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1975년 아시아 문화프로그램 운영 12년간의 활동을 평가하기 위해 록펠러 3세 기금은 개인 수혜자들을 대상으로 기금의 지원이 수혜자의 개인적 발전과 경력 그리고 소속기관의 업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한국인 수혜자 총 55명 중 설문지를 작성하여 보낸 사람은 총 11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설문지 내용을 살펴보면 수혜자들이 록펠러 3세 기금의 지원 덕택에 한국의 박물관 제도가 정착되고 고고학과 미술교육 분야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수혜자가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정착함으로써 록펠러 3세 기금의 애초 의도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는 한계도 찾아볼 수 있다. 1970년대에 록펠러 3세 기금은 문화교류의 정치, 경제적 가치를 중시하며 일방적으로 지원에서 방식에서 벗어나 상호교류를 강조하는 방식으로의 변화를 꾀한다. 그 과정에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등장한 한국문예진흥원이나 대우재단과 같은 한국 공 · 사립 문화재단은 상호교류의 주요한 파트너였다. 이러한 문화재단의 출현은 록펠러 재단이 아시아에서 펼친 문화사업의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록펠러 재단이 한국 공 · 사립 문화재단의 형성과 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1970년대 ACC의 사업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 후속 연구를 기대한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Rockefeller Foundation's cultural projects in Korea during the 1960s~1970s, specifically focusing on the JDR 3rd Fund. The JDR 3rd Fund was established in 1963 to support cultural exchanges in the visual and performing arts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Asia. The Fund had four objectives: “(1) to foster advancement of opportunity for Asians, (2) to encourage evaluation and preservation of Asian cultural tradition, (3) to promote exhibitions and performances of Asian cultural achievements in the United States, (4) to promote exhibitions of performances of American cultural achievements in Asia.” As a way to achieve some of these objectives, the Fund made grants to Asian artists, scholars, and cultural leaders pursuing such activities as research, study, and creative work in the United States. Porter McCray, director of the Fund, tried to search for individuals with unique potential and motivation. Once identified, individual grantees were provided with personalized assistance such as determining which American institutions could best serve their needs, finding housing for their families, and so on. Thus, its program can be seen as sophisticating the programs operated by Charles B. Fahs during the 1950s. Among the Korean grantees were Kim Tschang Yeul, Youn Myeong Ro, Kim Whanki, Kim Tchah Sup, Kim Byung Ki, Park Chong Bae, Ahn Hwi Joon, Kim Che Won, Kwon Yigu, Sohn Pow Key, Kim Won Yong. In 1974, the JDR 3rd Fund sent questionnaire to individual Asian grantees to review its twelve-year operation of the Asian Cultural Program. The questionnaire was designed to elicit their views of how their development and careers had been affected by the Fund's assistance. Only 11 out of 55 Korean grantees are presumed to have responded to the questionnaire. Their responses show that the Fund's assistance was greatly instrumental in establishing Korean cultural institutions and academic disciplines such as archaeology and art eduation. During the 1970s, the JDR 3rd Fund sought for change by placing greater emphasis on mutual exchanges instead of one-way assistance. The Korean Culture and Arts Foundation and the Daewoo Foundation were major partners in pursuing those bilateral exchanges. In this context, the appearance of public and private cultural foundations in Korea can be seen as the most significant achievement of the Rockefeller Foundations' cultural projects in Korea. It has yet to be studied, however, how the Rockefeller Foundation affected the formation and activities of Korean cultural foundations.

        • KCI등재

          록펠러 재단의 문화사업과 한국미술계 (I)

          정무정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9 美術史學 Vol.- No.37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Rockefeller Foundation's cultural projects in Korea during the 1950s, specifically focusing on the three projects for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rt Society of Korea, College of Fine Arts,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paper is mainly based on primary materials such as Record Group 12.1-Officers' Diaries, Charles Burton Fahs Papers, Rockefeller Foundation records, projects, held in the Rockefeller Archive Center located in Wetchester County, New York. Charles Burton Fahs who was director for Humanities in the Rockefeller Foundation, was responsible for the entire cultural program in Korea during the 1950s. In fact, the Rockefeller Foundation's projects for Korean art world were driven through Charles Burton Fahs' Korean network which he had established since 1946. While visiting Korea 8 times, he tried to check and understand what were being done with the financial aid of RF. In particular, Fahs saw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s the key institution which would stimulate and inspire the entire Korean culture and society in the long term. Rockefeller Foundation's cultural projects in Korea were instrumental in making possible the preservation of the collection of National Museum of Korea, the introduction of education programs and the establishment of cooperative workshop for contemporary arts. Although it had a strategic interest in keeping Korea away from Communism, thereby making Korean culture deeply dependent on American one, it is also true that it contributed largely to the development of Korean culture and art. 이 논문은 지금까지 국내 연구에서 한 번도 소개되지 않은 미국 뉴욕 주 웨체스터 카운티에 위치한 록펠러 아카이브 센터를 방문하여 록펠러 재단의 한국에서의 문화지원 사업의 규모와 양상을 살펴본 연구이다. 2부 중 1부에 해당하는 이 논문에서는 국립박물관, 한국조형문화연구소, 서울대 미대를 중심으로 1950년대 록펠러 재단의 한국 미술계 지원의 구체적 양상과 특성을 살펴본다. 록펠러 재단의 한국미술계를 위한 사업은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록펠러 재단에서 재직하며 1961년 사임할 때까지 총 8차례 한국을 방문하며 문화지원 사업을 총괄한 찰스 버튼 파스가 한국에 구축한 인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국 측 인맥의 핵심 축은 국립중앙박물관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한국조형문화연구소와 서울대 미대 지원 사업도 국립박물관 직간접적인 관계 속에 진행되었다.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국립박물관은 혼란한 전후시기에 한국 문화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록펠러 재단의 문화지원사업은 미국 정부의 정치, 경제적 이해와 긴밀한 관계 속에 진행되었다. 파스와 한국 측 인사와의 서신교환에서 자주 언급되는 반공이념과 월남한 문화계 인사에 대한 지원은 공산주의 봉쇄라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기조가 민간재단의 문화사업에 투영된 증거라 판단된다. 그로 인해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은 기관이나 개인의 문화적 영향력으로 한국문화계의 대미 종속적 구조가 심화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이 온전히 보전 되고 박물관 시설과 인력이 확충되었으며, 어수선한 전후의 혼란기 속에서도 전시회가 꾸려지고 동서양의 미술과 문화가 망라된 한국 최초의 본격적 박물관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등 한국문화와 미술의 제도적 정착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도 사실이다. 따라 서 록펠러 재단의 문화지원 사업에 대한 고찰은 그 정치적 성격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사업담당자와 수혜국 관계자라는 변수를 통해 나타난 효과까지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 호에 게재할 2부에서는 파스의 주도로 확립된 록펠러 재단의 한국 미술계 지원사업이 1960년대에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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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수교(1992년) 전후의 현대미술 교류

          정창미(Chung, Changmi)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20 美術史學 Vol.- No.39

          본 논문은 한국과 중국이 각각 1940년대 후반 국가를 성립한 후, 냉전시기 단절되었던 외교가 1992년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시기를 전후하여 전개된 한국, 중국, 대만의 현대미술교류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지금까지 한중수교기 정치, 경제적 측면에 대한 연구는 활발한 반면, 현대미술 교류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편이다. 1992년 8월24일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1949년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과 민주주의 국가인 중화민국(이하 대만)으로 양분된 후, 한국은 동일한 정치적 이념을 가진 대만과 1948년부터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어 왔으나 1992년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하며 대만과 단교했다. 이같은 변화는 1988년부터 노태우 정부가 추진해 온 북방외교정책의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중국은 제2차세계대전 종식이후 형성된 냉전시대의 흐름에서 1970년대 초부터 탈피하고자 시도했다. 일명 ‘핑퐁외교'로 일컫는 스포츠를 통한 서방세계와의 교류 시도는 냉전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마침내 1972년 2월 21일 닉슨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함으로써 미중관계는 점차 호전되었고 1972년 일본, 1979년 미국과 국교를 맺었다. 1980년대 세계화를 지향하던 한국은 대만과 교류하며 주로 중국 전통 서화 작품 전시를 개최했으며 1980년 후반에 이르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처음으로 대만의 전통 수묵화나 서예가 아닌 서양화 작품을 선보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확고히 하고자 노력한 한국은 정치와 경제방면에서의 교류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의 문화예술교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중국미술계와의 교류는 1980년대 후반부터 홍콩, 일본 등을 통한 민간 차원에서부터 시작했다. 1988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내에서 전개된 중국미술 전시는 리커란, 치바이스, 우창수어 등 중국의 전통 수묵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20세기 작가들의 전시와 중국의 고대 유물, 명청시대 회화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에 중국현대미술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부터였으며 이 또한 민간차원의 교류에서 전개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 20세기 후반 한국 · 중국 · 대만 간의 급속한 정치적 변화 기류하에서 예술 교류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전개되었으며 한국과 중국, 한국과 대만이 서로 상대국의 현대미술을 바라 본 관점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 같은 논의는 한중수교 27년을 넘어서는 오늘 날,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예술이 가져다주는 사회 전반에 대한 시각과 영향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This paper discusses contemporary art exchanges in Korea, China and Taiwan around the 1992 when diplomacy was resumed after having been previously severed during the Cold War. Diplomatic ties were first established after Korea and China built their respective countries in the late 1940s. While researches 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aspects of the Korea-China diplomatic ties have been vivid so far, researches on contemporary art exchanges have been insufficient. On August 24, 1992, the Republic of Korea formally established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hereinafter “China”). After China was divided into the socialist People"s Republic of China and the democratic Republic of China(hereinafter “Taiwan”) in 1949, Korea had since 1948 established friendly diplomatic relations with Taiwan, which had the same political ideology, but severed the relationship by formally establishing diplomatic ties with China in 1992. The change can be said to be the final step in the Northern Diplomatic Policy that the Roh Tae-woo administration had been pursuing since 1988. Meanwhile, China had been attempting since the early 1970s to break free from the Cold War trends formed after the end of World War II. The “Ping Pong Diploamcy” which attempted to engage the West through sports was the starting point for the end of the Cold War Era. Finally, the Chinese-US relationship gradually improved with President Nixon"s official visit to Beijing on February 21, 1972, and China came to establish diplomatic relationships with Japan in 1972 and the United States in 1979. In the 1980s, Korea, which aimed for globalization, held exhibitions of traditional Chinese calligraphy works, and until the late 1980s, the Korean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displayed Taiwan"s Western paintings. Having strived to solidify Korea"s image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with the Seoul Olympics of 1988, Korea showed active interest in not only cultural and artistic exchanges on the nongovernmental levels but also as well as exchanges in political and economic fields. During this time, exchanges with the Chinese art community began in the late 1980s at the civilian levels through Hong Kong and Japan. The exhibitions of Chinese art in Korea from 1988 to 1994 centered on that of 20th-century artists, who modernly reinterpreted traditional Chinese ink paintings, including Li Keran, Qi Baishi, and Wu Changshuo, as well as on exhibitions of ancient Chinese relics and paintings from the Ming and the Ching Dynasty. This research looks at how art exchanges developed systematically in the late 20th century under the rapid changing political trends among Korea, China and Taiwan, and what were the views of modern art between Korea and China. Such discussions show, 27 years into the Korean-Chinese relationship, the views and influences on the society from not only economics and politics, but also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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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960년대 한국의 용접 조각

          김이순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4 美術史學 Vol.18 No.-

          Begun by Pablo Picasso and Julio Gonzalez in France in the late 1920s, welded sculpture has been favored by artists who seek to escape the traditional nation of sculpture as a 'solid mass'. In the postwar period, the approach was deemed especially suitable for expressing psychological pains and anxieties, and the widely spread in Europe, the United States, and Asian countries such as Korea and Japan. In the radically transformed social situations in the wake of the Korean War, welded sculpture attracted certain Korean artists who sought new directions in art. In this paper, I look at how welded sculpture was introduced from the west to Japan and Korea, and went through subsequent transformations. Especially, I map out how Korean welded sculpture developed, and what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it came to have vis-à-vis its Japanese counterpart. I argue, specially through the examples of Tatehata Kakuzo, Horiuzi Masakaz, Song Young-Soo, Park Jong-Bae, Park Soek-Won and Oh Jong-Uk, that Japanese sculptors were interested in innovative possibilities the welded sculpture offered, while Korean artists were more drawn to its expressive capacity. I hope to clarify how this particular methodology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shaping of the overall topography of postwar Korean art, and in the larger context of shifting structure of society. I try to also show how Koreans artists found in welded sculpture apt means and medium to reflect and inject their own artistic ident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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