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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율곡학(栗谷學)의 계승(繼承)과 창신(創新)

        황의동 ( Eui Dong Hwang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0 儒學硏究 Vol.23 No.-

        율곡학의 특성은 개방적 학풍과 務實학풍에 있다. 또 이기심성론에 있어서는 理氣之妙의 입장에서 氣發理乘一途說과 理通氣局說을 주장하였다. 율곡은 發하는 것은 氣요 理는 발하지 않는다 하여 이황의 互發說을 반대하였다. 또한 인간의 감정을 통틀어 七情으로 보고, 이 속에서 선한 감정을 四端으로 보았는데, 이는 기대승의 설을 계승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율곡의 설은 충실한 제자 사계 김장생을 통해 전승되었다. 그는 성실한 학문태도로 율곡의 설을 계승하여 송시열을 비롯한 율곡학파에게 전해 주었다. 김장생은 성리학적 측면에서 율곡의 설을 충실히 계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禮學的創新이라는 유학사적 공헌을 하였다. 송시열은 김장생을 통해 율곡의 성리학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특히 영남 퇴계학파의 도전에 대응하면서 율곡학의 정체성을 찾고 퇴계설의 부당성을 비판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송시열은 의리적 측면에서 자기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평생의리를 중시하였고, 의리의 실천과 부식을 위해 노력하였다. 송시열은 율곡, 김장생의 성리학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의리적 創新이라는 유학사적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송시열의 경우 율곡학에 대한 영남 퇴계학파의 도전에 대응하면서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학문의 경직성을 낳게 되었고, 대의명분론에 치중한 나머지 율곡 학풍으로서의 務實학풍을 결여하게 되었다. Yul-Gok study is characterized by its openness and Mu-sil scholastic atmosphere. Also, it includes I-Gi-Ji-Myo, theory of Ki-Bal-Il-Seung-Il-Do, theory of I-Tong-Gi-Guk, and theory of senses in Chil-Po-sa. Philosophy of Yul-Gok is inherited by Jangsang Kim, who greatly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Ye-Hak by faithfully carrying on Yul-Gok`s Neo-Confucianism. In addition, Siyeol Song has contributed to practcing principles of righteousness through inheriting Yul-Gok and Jangsang Kim`s Neo-Confucianism. In particular, he made his effort to defend Yul-Gok`s Neo-Confucianism by coping with the challenges from Youngnam Toe-Gye School. For these reasons, his academic tradition was characterized as conservative and closed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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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농영농조합 생산자 조합원 의식에 대한 분석적 연구

        황의동(Eui-Dong Hwang) 한국지역사회학회 2018 지역사회연구 Vol.26 No.3

        30년 역사를 가진 남농영농조합은 역사성이나 사업의 규모, 사업의 내용에 있어 다른 농업법인과 구별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창립 시기가 90년대 초반으로 비교적 역사가 길다는 점, 농민회 주력 멤버들이 설립한 점, 직거래 중심의 새로운 판로를 개척한 점, 정부 지원사업을 적극 수용하여 자산 형성에 활용한 점, 친환경농업을 조직화하여 지역사회와의 결합력을 높인 점, 가공 분야를 도입한 경영전략을 구사한 점 등이 타 조직과 구별되는 차이점이다. 남농 생산자들과 남농이라는 조직체간에 설정된 관계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른 생산자 조직의 구성원들과는 차이를 보였는데, 이는 지난 세월 남농이 추진했던 사업 방향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본 연구에 적용한 132개 표본의 속성은 친환경인증을 받은 남농의 조합원이다. 연구자는 이들이 작성한 5개 항목, 22개 세부항목의 설문을 분석하면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3가지 영역으로 구분하여 해석하였다. 경제적 측면에서 남농 조합원들은 소득 수준이나 친환경농업의 전문성과 관련해서는 유사한 타 집단에 비해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고령화에 대한 대비, 농지의 승계와 관리, 생산물의 안전성 확보 및 세대간 역할 분담에 대한 사항이 과제로 부각되었다. 문화적으로 남농 조합원들은 상징성을 중시하며 친환경농업에 대한 자부심, 사회현상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실천력, 소비자와 교류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The Namnong Agricultural Cooperatives which has been in operation for 30 years has several factors that distinguish it from other agricultural cooperatives in its history, business scale, and business contents. The Namnong activities have specific characteristics, and this specificity can be understood through the direction pursued by Nannong. The subjects of this study are the 132 members of Namnong who have environment-friendly certificates. In analyzing the questionnaires of the 5 items and the 22 sub-items, I attempt to interprete-the characteristics of the result classified into three categories: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espectively. From the economic point of view, the Namnong farmers were found to be very vulnerable to income levels and expertise in environmentally friendly agriculture compared to similar groups. On the social side, issues such as preparation for aging, inheritance and management of farmland, securing of product safety, and division of roles among households have been highlighted. Culturally, the Namnong farmers have a high level of symbolism, high self-esteem for environmentally friendly farming, high understanding and practice of social phenomena, and high preference for consumers and exchan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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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와 율곡의 철학정신

        황의동(Hwang Eui-Dong) 대한철학회 2008 哲學硏究 Vol.107 No.-

        퇴계와 율곡은 조선조 유학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고, 그들의 성리학은 한국유학사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퇴계와 율곡의 성리학적 연구는 이미 괄목할만하다. 양자의 학설은 비교적 대비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양자의 철학적 입장과 관점이 다른데서 기인한다. 퇴계는 理氣互發을 말하고, 율곡은 氣發理乘을 말한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상대적으로 비교하여 ‘七對四’의 감정론을 말하고, 율곡은 칠정 속에서 사단을 보아 ‘七包四’의 감정론을 말한다. 그리고 퇴계는 氣는 물론 理의 發을 말하고, 율곡은 理의 發을 극력 부정한다. 이 문제는 退. 票의 후학들로부터 오늘날 현대 학자들에 이르기 까지 많은 논란을 야기해 왔지만, 논자가 볼 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이다. 문제는 퇴계가 말한 理發의 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퇴계 자신의 몫이기도 하다. 또한 수양론에서는 퇴계가 敬을 중시하는데 대해 율곡은 誠을 통해 務實로 확충해간다. 논자는 이 논문을 통해 양자의 학설상의 차이가 주는 철학정신을 찾고자 했다. 퇴계의 철학적 입장은 가치와 윤리를 중시한데 있었다면, 율곡은 존재의 정합성 내지 理氣之妙의 涵義를 體認함에 있었다. 퇴계는 理氣互發論을 통해 사단과 칠정을 구별하고, 도덕적 특수감정과 일반적 감정의 가치적 구별에 주목하였다. 여기에서 퇴계는 사단의 근원처를 理에, 칠정의 근원처를 氣에 두어 理의 능동적 자발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율곡은 氣發理乘을 인간과 자연 모두에 적용하고, 오직 發하는 것은 氣요 理는 그 스스로 發하지 아니하고 發하는 氣의 근본이 되고 주재가 된다 하였다. 따라서 율곡은 사단이나 칠정을 모두 氣發理乘의 구조로 이해하고, 칠정 가운데에서 사단을 이해하고자 했다. 퇴계가 理의 發을 주장하는 본래적 의도가 가치론적 시각에 있지만, 율곡이 理의 發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은 존재론적 시각에서 形而上者의 발용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퇴계는 主理的 입장에서 氣를 상대적으로 경시하고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理의 체인, 理의 실현이 그의 철학적 목표이자 이상이다. 퇴계에게 있어 理는 神이며 절대적 가치이며 善이다. 理는 절대시되고 만물의 창조적 活物로 간주된다. 여기에 理에 대한 자발성과 능동성이 인정된다. 도덕적 본성의 자발성을 인정할 때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가능하다는 논리다. 따라서 氣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이에 대해 율곡은 理氣之妙의 관점을 견지한다. 일체 존재란 理 없는 氣가 없고 氣 없는 理가 없다. 氣도 理만큼 중요한 존재적 의미를 갖는다. 율곡의 입장에서는 氣 없는 理는 불완전하고 부족하다. 퇴계에게서 경시된 氣의 가치와 역할이 인정되는데 특징이 있다. 퇴계는 天理로서의 理를 存養하기 위해 氣와의 협잡을 경계하지만, 율곡의 경우는 氣의 변화를 통해 理의 善을 지켜가고자 한다. 퇴계는 敬을 개인의 修己나 聖學의 요체로 중시하였다. 율곡도 敬을 말하고 있지만, 誠이 修己論의 중핵을 이룬다. 율곡은 宋學에 의해 誠이 實로 구체화 된 바탕위에서 務實로 발전시켰다. Toegye and Yulgok are Korea's representative philosophers for Confucianism. Their Sung Confucianism influenced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Philosophical doctrine of Toegye and Yulgok are compared. Toegye’s idea was developed in axiological and ethical viewpoint, Yulgok, in ontological viewpoints. Toegye was interested in reason, recognition and realization of reason. Meanwhile, Yulgok is interested in harmony and balance of reason and life force. While Toegye distinguished Sadan from Chiljung, Yulgok understood Sadan within Chiljung. Toegye emphasized the difference between reason and life force, regrading reason as higher value. Yulgok pursued harmony of vulues of reason and life force. Specifically, Toegye contended activeness of reason, which is "Igihobalsul", but Yulgok advocated "Ibakisungildosul" denying activeness of reason. In terms of Suyang theory, Toegye favors respect but Yulgok, sincerity, developing it to true subs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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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 노서윤선거(魯西尹宣擧)의 무실사상(務實思想)

        황의동 ( Eui Dong Hwang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8 儒學硏究 Vol.18 No.-

        魯西尹宣擧(1610~1669)는‘湖西5賢’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17세기의 대표적인 性理學者요 禮學者다. 그는 牛溪成渾의 외손자이며 明齋尹拯의 부친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 연원은 家學으로 멀리 趙光祖, 成守琛의 道學과 연계되고 외조부 成渾, 부친 尹煌으로부터 배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金長生, 金集의 문인이며 宋時烈, 宋浚吉, 李惟泰등 율곡학파와 친밀한 교유를 하였고, 남인계열의 權媤, 尹虧와도 친밀한 관계였다. 尹宣擧는 성리학과 예학, 역학에 밝았는데, 성리의 이론적 탐구보다는 도학적 실천을 중시하였다. 그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편인데, 본고는 그의 務實사상을 탐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務實이란‘實의 추구’를 의미하는데, 麗末鮮初先儒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栗谷과 牛溪에 의해 深化되었다. 尹宣擧의 務實학풍은 외조부 成渾의 家學的영향과 함께 栗谷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고 할 수 있다. 尹宣擧는 17세기 조선조의 無實현상을 비판하고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모두 實을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먼저 實心의 확립을 주장한다. 이는 인간 주체의 성실성확보를 말하는데 實心은 만사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또 尹宣擧는 實德의 함양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진실한 인격의 함양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그는 謙讓, 謹嚴, 操存, 省察, 收斂, 謹飭등 敬의 생활화를 제시하였다. 아울러 自守, 守約의 小學的律身을 강조하였고, 실천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禮學이 중시되었다. 尹宣擧의 務實사상은 實心, 實德을 통해 實功의 추구로 나타났다. 實功이란 진실한 노력이라는 실천적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진실한 功效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實心이 實德으로, 그리고 實功을 통해 實效로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務實학풍은 尹宣擧의 특징적 학풍인 동시에 成渾, 趙憲, 尹煌, 安邦俊, 尹拯, 梁得中등 牛溪學派의 학풍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務實학풍은 性理學, 禮學, 實學, 陽明學과도 연계된다는 점에서 보다 정밀한 연구가 요청된다. Yunseongeo (1610~1669) is a representative Confucius scholar of Joseon Dynasty in 17th century. He is a grandson of Ugye, Seonghon and father of Myungje, Yunjeung as a central figure of Ugye school. His intellectual origin is traced back to Dohak school of Joseon Dynasty in 15th century and he learns from Kim Jangsaeng and Kim Jip who are members of Yulgok school. He is a speciality in Sung Confucianism and Yehak philosophy. Specifically, idea of Musil is his representative philosophical characteristic. Musil means “striving for the truth,” which focuses on veracity, practice and practicality. Later, his Musil idea influences school of Wang Yangming and practical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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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沙溪 金長生 사상의 연원에 대한 검토

        황의동(Hwang Eui-dong) 대한철학회 2005 哲學硏究 Vol.95 No.-

        金長生(沙溪, 1548~1631)은 율곡의 嫡傳으로 기호유학의 중심적 위치에 있으며, 특히 '東邦 禮學의 宗匠'으로 일컬어질 만큼 조선조 예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주로 예학과 성리학의 양면에서 평가될 수 있는데, 이러한 그의 학문과 사상형성의 배경에 대한 검토가 본 연구의 목적이다. 사계에 있어 가장 특징적인 면은 '성리학에서 예학에로'의 관심전환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도 성리학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학문적 관심은 예학에 경도되었고, 그의 문하에서 많은 예학자가 배출되고 예학적 연구 성과를 거양하였다. 이러한 예학에로의 관심전환은 17세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임진, 병자의 양난과 가난, 질병, 그리고 당쟁으로 인한 지도층의 분열로 국가질서의 문란, 사회기강의 와해, 개인윤리의 위기 등은 예학 발흥의 좋은 기회였다. 아울러 16세기 성리학시대는 이제 그 性理의 구체적 실천으로서 예학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상적 배경하에서 사계는 예학을 자신의 도학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이에 전념하였다. 그의 예학공부에 있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이는 宋翼弼(龜峰, 1534~1599)로 보이며, 율곡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13살 때 송익필의 문하에 나아가 예학을 배웠고, 20살 때 율곡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업하였다. 사계가 이와 같이 당대 기호유학의 중심인물이었던 율곡, 구봉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친 金繼輝와 율곡, 구봉과의 돈독한 우정과 교유 때문이었다. 이들 외에도 牛溪 成渾, 土亭 李之? 은 그의 존숭이 컸으며, 宋浚吉을 통해 愚伏 鄭經世의 영남예학을 접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의 친우 申義慶(1557~1647)은 그의 예학수업과 연찬에 훌륭한 동반자로서 직접 간접적인 영향을 주고 받았다. 끝으로 그의 성리학은 주로 율곡의 영향하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율곡의 이기론, 심성론, 격치론 등 성리학의 대체를 계승하고 있지만, 인심도심설에서 도심의 인심화를 반대하고 인심을 곧 인욕으로 보는 것처럼 그의 독창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사계의 학문적 연원은 멀리 주자에 연원하면서, 율곡과 구봉의 예학과 성리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성리학적 측면에서는 율곡의 영향이, 예학적 측면에서는 구봉의 영향이 더욱 컸다고 평가된다. Kim Jangsang as a central figure of Yulgok School, represents Yehak (theory of decorum or etiquette) of Joson Dynasty. Kim is a prominent outstanding scholar of Yehak and Sungrihak (theory of human nature and natural laws) and led to open the era of Yehak of the seventeenth century from Sungrihak of the sixteenth century. The mentors that influenced Kim's Yehak most are Song Ikpil and Yulgok. Yulgok plays an important role in Kim's learning Sungrihak so Kim mostly succeeds to theories of Yulgok's Sungrihak. Kim also respects Sung Hon and Lee Giham. Shin Uikyung, Kim's close friend, participates in Kim's study on Yehak and compiling books of Ye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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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栗谷)의 우환(憂患)의식과 경세론(經世論)의 의의

        황의동 ( Eui Dong Hwang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韓國思想과 文化 Vol.54 No.-

        율곡학은 성리학과 경세학으로 대별되는데, 본고는 율곡의 나라와 백성에 대한 우환의식과 그의 경세론의 현대적 의의를 검토하는데 목적이 있다. 율곡의 우환의식은 그의 수많은 상소문과 기타 글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곧 憂國愛民의식을 의미한다. 또한 율곡의 우환의식은 개혁론으로도 나타나는데, 그는 16세기를 更張期로 규정하고 치밀한 현실분석을 토대로 탁월한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율곡은 개혁의 당위를 당시 無實的 상황에서 찾고, 實心, 實功, 實效의 務實정신을 고취하였다. 율곡은 먼저 개혁 주체의 自己潔身을 강조하여 君德의 성취를 적극 勸勉하였고, 개혁은 너무 조급해도 안 되고 너무 느려도 안 된다고 하였다. 아울러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 言路개방을 통해 개혁의 아이디어를 널리 수집해 반영해야 한다고 하였다. 율곡의 경세론은 養民과 敎民으로 그 내용을 삼는데, 養民이 敎民보다 우선이지만, 반드시 敎民을 통해 王道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율곡의 經世論은 民本에 기초하고 있고, 정치와 행정의 목적을 ‘나라와 백성’에 두었다. 특히 그가 言路개방을 통해 公論을 형성하고, 公論을 통해 國是의 정립을 꾀한 것은 ‘민주’에로의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의의를 갖는다. 또 ‘得中合宜’로 이익과 정의의 조화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현대정치의 나아 갈 바를 시사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아울러 왕실의 예산을 줄여 백성을 위해 써야 한다든지, 당시 신분적 차별을 받았던 庶孼, 賤民의 仕路許通과 신분상승의 길을 제시한 것은 民本에 기초한 그의 정치관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Philosophical theories Yulgok espoused and developed are generally distinguished into Sung-Confucianism and theories on governing. Yulgok defined the sixteenth century as the period of the reformation, and pursued reforms for the nation and people. He diagnosed the reality based on the apprehensive consciousness on the future of the nation and presented reform solutions for it. Yulgok`s theories on governing consist of Yangmin, which means “educating people” for their prosperous life and Kyomin, which means “educating people`s morality. Yulgok supported the freedom of speech, and establishment of national policies through open and transparent public opinions, which shows he is one of the pioneers for the modern democratic politics. Also, Yulgok asserted that people`s lives had to be improved by reducing the budget for the royal families, and that laws for underprivileged people such as children of the concubines or the lowest class had to change. These present Yulgok`s thoughts that good governing comes from interests on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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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철학(哲學) :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도학정신(道學精神)과 무실학풍(務實學風)

        황의동 ( Eui Dong Hwang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韓國思想과 文化 Vol.69 No.-

        聽松 成守琛(1493~1564)은 16세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東國 18賢’의 하나인 牛溪 成渾의 부친이며 靜庵 趙光祖의 문인이다.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비롯한 己卯名賢이 희생되자, 그는 出仕를 포기하고 재야에서 山林處士로 생애를 보냈다. 퇴계, 율곡이 성리의 이론에 밝고 경세에 적극적이었다면, 聽松과 南冥 曹植은 실천을 중시하고 은둔하여 처사로서 살았다. 이처럼 16세기 초엽 조선 성리학의 방향을 ‘隱居自守 聖賢自期’의 道學 君子風으로 전환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성수침이다. 그가 이렇게 隱遯과 自守의 길을 선택한 것은 한편 昌寧 成氏 家學의 영향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靜庵 道學의 爲己之學과 실천유학을 계승한 측면도 있다. 성수침은 이론보다 실천, 경세보다 내면적 자기 수양을 중시한 까닭에 그의 문집에 학술적인 자료가 거의 없다. 몇 편의 시를 제외하면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그에 관한 연구도 문학적인 연구가 약간 있을 뿐이고 철학적인 연구는 거의 없다. 본고는 이러한 배경에서 성수침의 내면세계를 중심으로 그의 도학정신과 務實학풍을 조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성수침이 비록 은둔의 처세를 선택해 산림처사로 일생을 살았지만, 나라와 백성에 대한 憂患의식은 변함없었다. 성리학의 탐구에 沈潛하였고, 利欲에 초연한 선비의 길을 걸었다. 이는 그가 죽었을 때 ‘山林이 텅 비었구나’라고 했다든가, 그를 가리켜 ‘一國의 善士요 當代의 逸民’이라고 평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학풍은 靜庵을 계승하여 小學風과 爲己之學을 견지하였고, 특히 言語之學을 지양하고 務實學을 추구하였다. 誠을 근본으로 한 그의 務實학풍은 이후 아들인 牛溪 成渾을 통해 전수되었고, 牛溪學派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었다. 비록 성수침 자신은 아들인 우계나 율곡에 비해 유학사적인 위상이 낮다 하더라도 成渾에게 미친 영향은 甚大하였다. 또 위로는 鄭夢周-吉再-金叔滋-金宗直-金宏弼. 鄭汝昌-趙光祖로 이어지는 여말 의리학파 내지 도학의 道統에 닿아있고, 아래로는 아들인 成渾을 중심으로-尹煌-尹宣擧-尹拯으로 이어진 牛溪學派를 낳았다는 점에서 그의 위상을 가볍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Seong, Soo-chim (1493~1564, pen name: Cheongsong) is one of the most popular Confucian scholars from the 16th century. He is the father of Seong, Hon (pen name: Ugye) and a student of Cho, Gwang-jo (pen name: Jeong-am). Never taking up a government post, he spent his entire life away from the political circle. He played a pivotal role in re-orienting the practice of Neo-Confucianism in the early-16th-century Joseon Dynasty towards the state of reclusiveness. It was the influence of his family``s scholarly tradition and at the same time of his teacher, Cho, Gwang-jo that led Seong to choose a solitary life and self-discipline. Since he prioritized action over theory, and introspection over politics, his works are far from academic. For this reason, the limited number of studies on his works are in the literary context, with few studies done from the philosophical point of view. This paper aims to shed light on the Confucian scholar``s DoHak (道學) spirit and the academic tradition of Musil (務實), focusing on his inner world. Following his teacher, Seong``s works exhibit the features of Sohak (小學), and put particular emphasis on action as opposed to theory. This Musil kind of academic tradition was succeeded to his son Ugye and the Ugye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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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물의 상징화를 통한 지역사회의 정체성 확립

        황의동(Hwang, Eui Dong) 역사문화학회 2018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21 No.1

        본 연구는 남원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기념물 제작 과정에 주목해서 그 의미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지역사회가 기념물을 건립하는 과정에서부터 완공 후 이를 상징체계로 편입하여 정체성 확립에 활용하는 과정이 본 논문의 주요내용이다. 지역사회는 기념탑 건립 전 과정에 걸쳐 단단한 내부의 결속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이해집단과의 정치적 협상을 주도하면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룩했고 이를 지역사회의 자산으로 축적했다. 지원금 확보를 둘러싼 지역정치권과의 교환적 상호작용, 기념탑 설계와 시공에 관한 전문가 집단과의 갈등적 상호작용 및 기념탑에 새길 유공자 선정을 위한 독립운동가 후손과의 타협적 상호작용이 그것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개인이나 지역은 사회나 국가라는 상층부의 하부 단위로 규정되어 피동성과 예속성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 속에는 지역사회가 가지는 능동성과 주체성이 발휘되고 있다는 점을 본 논문에서 피력한다. 3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산업화와 개방화라는 거대한 시대적 물결이 몰고 온 총체적 쇠락 현상을 반전시키기 위해 지역사회는 만세운동 기념탑 건립이라는 문화운동 체계를 만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독립만세운동의 터전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만세운동 기념탑과 삼일절 기념행사 유치라는 상징물과 행사를 보유하게 되었고 이를 주체적으로 활용하여 지역 정체성을 재생산,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significance of the process of making the monument of independence movement in Namwon area. The main content of this paper is the entire process of building the monument from the initial step to the final one incorporating it into the symbol system and establishing the identity. Throughout the process of building the monument, the local community has made meaningful achievements by leading political negotiations with diverse stakeholders based on solid internal cohesion and accumulating them as assets of the local community. Exchange interactions with local political circles around securing subsidies, conflictual interactions with specialist groups on the design and construction of the monument, and compromised interactions with descendants of the independent movement for the selection of patriots whose names would be inscribed in the monument. From a macro perspective, individuals and regions are frequently defined as subordinates of a society or state, which seem to be passive and subordinate, but in fact they are not. In this paper, it is shown that the activeness and subjectivity of the local community is exercised. In order to counter-act against the global decline that has been driven by the huge wave of industrialization and free-market policy that lasted for nearly 30 years, the local community has made a cultural movement for the building of the memorial tower of the March 1<SUP>st</SUP> independence movement and made efforts to establish its identity as the base of the independence memorial rituals in the region. It has become a major symbol of the anniversary of March 1<SUP>st</SUP> movement, and it is able to reproduce and strengthen local identity by using it as a 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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