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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말려초 굴산문 범일과 삼척지역

        정동락 한국이사부학회 2015 이사부와 동해 Vol.10 No.-

        이 글은 나말려초 崛山門을 개창한 梵日선사와 삼척지역과의 관련성과 그 의미 를 살펴본 사례 연구이다. 굴산문과 범일, 그리고 삼척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 었다. 삼척은 범일이 三和寺를 포섭하면서, 범일 당시부터 그 세력권에 속하였다. 그 후 굴산문이 세력을 확대하는 거점지로 기능하였고, 굴산문은 영동과 동해안 일대에서 번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성을 토대로 범일은 삼척지역의 불교문화 를 꽃 피운 神僧으로써 존숭받았다. 강릉지역에서 범일이 神的인 존재로 ‘大關嶺 國師城隍神’으로 모셔졌던 것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삼척지역의 삼화 사, 天恩寺, 靈隱寺, 新興寺 등에서 ‘범일국사 창건설화’가 창출될 수 있었다. 하지 만, 삼화사를 제외한 사찰은 범일 혹은 굴산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 같지는 않 아 보인다. ‘범일 창건설화’는 범일과 굴산문을 염두에 두면고 조선시대 이후에 정 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동지역을 중심으로 범일과 굴산문의 영향력과 위상이 높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This writing is a case study to investigate the relevancy between Beomilseonsa who founded Gulsanmun at the end of Silla and the beginning of Goryeo and Samcheock area and the meaning. Gulsanmun and Beomil, and Samcheock had close relationships. As Beomil embraced Samhwasa, Samcheock belonged to the sphere of influence from the time of Beomil. Since then, Gulsanmun acted as a base to expand power and it could flourish in the area of Yeongdong and east coast area. Based on such historical background, Beomil was respected as a hold monk who blew Buddhist culture in Samcheok area. It can be guessed from the fact that Beomil was enshrined as 'Daegwanryeongguksa-seonghwangsin' as a god-like existence in Gangneung area. Thus, Samhwasa, Cheoneunsa, Yeongeunsa, and Sinheungsa in Samcheock area could create 'Beomilguksa Foundation Tale'. However, it does not seem that temples except Samhwasa have direct relationships with Beomil or Gulsanmun. It seems that 'Beomil Foundation Tale' was settled since Joseon dynasty bearing Beomil and Gulsanmun in mind. This seems to be a symbolical phenomenon showing that influence and status of Beomil and Gulsanmun were strong and high with Yeongdong area as a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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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나말여초 오대산 불교권의재형성 과정과 배경

        석길암 ( Gil Am Seok ) 한국사상사학회 2014 韓國思想史學 Vol.0 No.46

        오대산 문수신앙이 자장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월정사의 창건 역시 자장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에는 남아있는 기록들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월정사 대가람을 중심으로 하는 오대산 불교권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월정사가 처음부터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을 가능성을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월정사 대가람을 중심으로 하는 오대산 불교권의 재형성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본 논문은 그 과정과 배경을 검토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월정사의 터가 처음 정해진 것 곧 창건은 자장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훗날 신효(信孝) 거사가 여기에서 오류성중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곧 사찰로서의 출발은 자장부터이지만 가람의 본격적인 전개는 범일(梵日)의 제자인 신의두타(信義頭陀)가 와서 암자를 세운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다시 수다사(水多寺)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와서 살면서 월정사의 사세(寺勢)가 점차 커지면서 오대산 불교권의 중심으로 성장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오대산 불교권 내에서 성지신앙(聖地信仰)의 중심축이 월정사로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월정사의 사세 확장에 굴산문(窟山門)의 승려들이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신라 말과 고려 초 사이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굴산문이 영향력을 오대산까지 확대하는 과정으로 생각된다. 고려 초기 왕권에 후원을 바탕으로 굴산문은 인근의 오대산까지 영향력을 확대했고, 그 과정에서 오대산 불교권의 중심이 새롭게 사세를 키운 월정사로 이동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월정사의 사세 확장은, 굴산문에 의해 오대산 불교신앙이 융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Present records tell that faith in Manjusri Bodhisattva in Mt. Odae (五臺山, Five Peaks Mountain) was begun by Master Jajang (慈藏) and Woljeong-sa (月精寺) Temple was found, also, by him. But, this doesn`t mean that the buddhist circle was formated in Mt. Odae around a big monastery of Woljeong-sa Temple like these days. Because we have difficulty finding any clue in present records, that Woljeong-sa Temple had been equipped with full monasterial aspects from the beginning. If so, when and how buddhist circle in Mt. Odae was re-formed around the big monastery of Woljeong-sa Temple? This paper is an examination for progress and background of re-formation of the buddhist circle in Mt. Odae. Records tells that Master Jajang has deep relation with deciding site where Woljeong-sa Temple was founded first, and that, later, Layperson Sinhyo (信孝) met five groups of buddhist sacred monks at this site. However, a suitable temple was founded by Sineui Duta (信義頭陀), a disciple of Master Beomil (梵日). When Elder Master Yuyeon (有緣) from Suda-sa (水多寺) Temple lived in it, Woljeong-sa Temple flourished and grew to the center of buddhist circle of Mt. Odae. It is an evidence that, within buddhist circle of Mt. Odae, the central axis of the faith in sacred land moved to Woljeong-sa Temple. Also, we can see that Woljeong-sa`s flourishing is related with monks of Gulsan (窟山) Sect. This fact tells us that, I think, Gulsan Sect, one of Nine Mountain Seon Sects in the late Silla and the early Goryeo dynasty, extended its influence in Mt. Odae. In other words, Gulsan Sect extended its influence in nearby Mt. Odae under early Goryeo Kingdom`s support, and, meanwhile, the center of buddhist circle in Mt. Odae moved to newly flourishing Woljeong-sa Temple. Thus, this temple`s flourishing can be taken as the harmonizing process of buddhist faiths in Mt. Odae by Gulsan S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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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祖紹楚騷高遠引, 越名任心自風流 - 論嵇康對屈原的接受與創新

        余霞(Yu, Xia) 국제언어문학회 2019 國際言語文學 Vol.- No.44

        嵇康과 屈原은 모두 중국 지식인의 전형적인 대표로서, 포부가 크고 고결한 정신을 지녔으며 세속에 융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두 인물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지녔지만,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정신적 목표를 추구하는 집념은 후대 중국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혜강은 굴원의 사상과 작품을 계승하였으나 굴원의 정치적 집착이나 초사 속 비유수법은 과감히 버렸으며, 전통사상 개혁하는데 있어서도 굴원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Both Ji Kang and Qu Yuan are typical representatives of Chinese intellectuals. They have lofty aspirations, noble spirit and do not share the same stream with the secular. Although they show different life forms, their criticism of the dark side of society and their persistence in pursuing spiritual goals have deeply influenced Chinese intellectuals of later generations. When Ji Kang inherited Qu Yuan"s spirit and Chu Ci, he also dispelled his political persistence and the metaphor system of Chu Ci, and his innovation of traditional thoughts surpassed that of Qu Y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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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굴산사지(사적 제448호) 가람의 고고학적 성과와 고려 굴산사

        도의철 한국선학회 2013 한국선학 Vol.36 No.-

        신라 하대 형성되어 지방사회의 사상적 기반이 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굴산문(崛山門)의 본산 이었던 강릉 굴산사(崛山寺)는 강릉단오제(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의 주신인 범일(梵日)이 신라 문성왕 13년(851)에 창건한 영동지역 선종(禪宗)의 중심 사찰이다. 굴산사지는 2010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학술조사연구를 통해 활기를 띠고 있으며, 본고에서는 발굴 조사를 통해 확보된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굴산사지 가람의 성격과 조성시기, 조성배경에 대 하여 검토해 보았다. 총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굴산사지에서는 건물지 19기, 담장지 및 보도 시설, 계단, 배수로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각 유구들은 배치구조로 볼 때 성격을 달리하 는 두 공간으로 나뉘어 진다. 그중 동쪽사역은 굴산사의 중심사역은 아니지만 건물지의 규모와 배 치양상으로 볼 때 이에 준하는 신앙공간으로 추정되며, 서쪽사역은 동쪽사역의 부속시설물로서 승 방지 혹은 선방지 등의 성격을 갖는 공간으로 파악하였다. 현재 확인된 굴산사의 흔적은 출토유물 의 양상으로 볼 때 12~13세기를 중심으로 하는 고려 중기에 중창된 굴산사의 가람이다. 고려시대 에는 자유로운 가람배치가 유행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사역에 있어서는 ‘중문지-탑-금 당지-강당지’가 배치되어 이전 시대를 계승하고 있는 바, 기록 상 탑의 존재는 확실해 보이는 굴산 사의 경우 현재까지 확인된 공간은 중심사역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한편 고려시대 굴산사의 중건배경에 대하여 고려중기 선종계를 이끌었던 혜조국사 담진과 대감국 사 탄연에 주목해 보았다. 고려시대에는 끊임없이 선교융합이 시도되었는데, 범일의 교·선 융합사 상이 선승들 사이에서 부각되면서 굴산문의 본산이었던 굴산사도 더불어 상징성이 커졌고, 지금의 굴산사는 이때 굴산문의 문도들에 의해 조성된 가람들로 추정해 보았다. The Gulsansa in Gangreung, which was the head temple of the Gulsanmun among the Gusanseonmun (9 Buddhist temples) established in the latter part of the Silla Dynasty, which was founded in the 13th year of reign of King Munseong of Silla Dynasty (851 AD) by Beomil who was the main deity of Dano Festival (registered as the World Intangible Heritage with the UNESCO) in Gangreung and became the ideological foundation of the local societies at the time, is the central Buddhist temple of the Zen sect of Buddhism in the Yeongdong Region. Excavation activities at the site of the Gulsansa are becoming vigorous through academic investigative research that began in 2010, and this thesis reviewed the properties, as well as time and background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Buddhist Temple on the site of the Gulsansa on the basis of archeological performances secured through excavation investigation. Diverse range of traces of structures and styles of civil engineering including 19 sites of buildings, sites of walls and pedestrian facility, stairs and drainage system, etc were confirmed at the site of the Gulsansa through a total of 2 excavation investigations. Each of these traces of structures and styles of civil engineering can be divided into 2 spaces with different characteristics based on their composition of placement. The eastern portion, although it is not the central district of the Gulsansa, is presumed to be a religious venue that is comparable to the central district based on the scale and the placement appearances of the building sites. The western portion is determined to be the affiliated facility of the eastern potion with functions such as site of Seungbang or Seonbang (Buddhist nunnery). The traces of the Gulsansa that have been confirmed thus far is the Buddhist Temple of Gulsansa that was reconstructed in the middle of Goryeo Dynasty in the 12th ~ 13th century based on the appearances of the relics excavated from the site. Although the liberal composition of placement of Buddhist temples during the Goryeo Dynasty was popular, the ‘site of the Jungmun (Inner Gate) - Pagoda - site of the Geumdang (Main Building of the Temple) - site of Gangdang (lecture hall for studying Buddhist scriptures)’ is arranged in the central region of the temple, thereby succeeding the traditions of the previous era. In the case of the Gulsansa for which the existence of the pagoda in the records appears to be certain, it was determined that the venues confirmed thus far could not be considered as the central region of the temple. On the other hand, attention was paid to Damjin, the Hyejoguksa, and Tanyeon, the Daegamguksa, who led the Zen sect of Buddhism in the mid-part of the Goryeo Dynasty to examine the background for the rebuilding of the Gulsansa. During the Goryeo Dynasty, merging of the Zen religion was attempted ceaselessly, with the ideology of convergence of doctrines and virtues of Beomil highlighted amongst the Zen Buddhist monks. Accordingly, the Gulsansa, which was the head temple of the Gulsanmun, attained enormous symbolic significance and the current Gulsansa is presumed to be the Buddhist temples established by the disciples of Gulsan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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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梵日의 崛山門 개창과 성장기반 조성

        정동락(Jung, Dong-lak) 신라사학회 2015 新羅史學報 Vol.0 No.35

        梵日(810~889)선사는 溟州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金周元계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졌다. 崛山門의 성장은 범일의 가문과 김주원계의 후원이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다가 신라왕실에서 國師로 초빙한 871년(경문왕 11)무렵부터 왕실의 지원이 본격화되었다. 범일과 굴산문은 김주원계의 후원으로 성장했고, 신라왕실의 지원을 받으면서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다. 범일의 비문은 효공왕 때에 朴仁範이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굴산사 터에서 발견된 비석 조각의 ‘溟州都督’과 ‘副都督’ 등은 비석 건립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굴산사에 머물던 범일은 洛山寺와 三和寺등을 포섭하였다. 낙산사와 삼화사는 모두 화엄종 계통의 사찰이었다. 낙산사에서는 김주원계의 도움이 있었고, 삼화사에서는 신라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범일은 굴산사의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거점 사찰을 확보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성장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Monk Beomil(810~889) was from Myeongju, and his family had the common interests with Kim Ju-won’s lineage. In the growth of Gulsanmun, support from Beomil’s family and Kim Ju-won’s lineage did work crucially. Meanwhile, around the year of 871(King Gyeongmun 11) when Silla’s royal family invited him as a national mentor, the royal family’s support genuinely began. Beomil and Gulsanmun grew with support from Kim Ju-won’s lineage and could develop rapidly with support from Silla’s royal family. There is possibility that Beomil’s tombstone was built by Pak In-beom during King Hyogong’s reign. Figures like ‘Myeongju Dodok’ or ‘Budodok’ on the pieces of tombstone found in the ground of Gulsansa were the ones involved in building the tombstone. Beomil staying in Gulsansa won over Naksansa and Samhwasa and so on. Naksansa and Samhwasa were both Buddhist temples in the Hwaeom sect. For Naksansa, Kim Ju-won’s lineage gave help, and for Samhwasa, Silla’s royal family gave support. Beomil secured foothold Buddhist temples located in the north and south of Gulsansa and laid the ground for growth based on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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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동아시아 불교와 문학

        이연숙 동아시아고대학회 2008 동아시아고대학 Vol.18 No.-

        불교문화가 아시아 문학에 미친 영향을 아시아 공통의 문학적 특성인 산문과 운문의 결합형식을 중심으로 하여 논하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인도의 쟈타카 등의 영향으로 변문이 생성되었고, 유선굴이라는 새로운 문체의 소설이 생성되었으며, 삼국유사 소재 향가의 산문과 운문의 결합형식은 변문이나 유선굴 등의 영향이라는 점, 향가는 형식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내용․기능적인 측면에서도 변문과 공통된 특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논하였다. 일본의 萬葉集 16권의 ‘有由緣雜歌’는 변문의 영향일 것이라는 점, 平安시대가 되면 大和物語 등에 ‘歌語’라는 산문과 운문의 결합형식이 성행하였다는 점, 그러나 일본의 경우 문학적 형식에서만의 수용일 뿐, 내용이나 불교포교라는 종교적인 목적에서의 수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임을 논하였다. This paper examined effects of Buddhist culture on Asian literature focused on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which was a common character of Asian literature. As Buddhism spread into China, transformational literary was developed in China, affected from such as India's Jataka which was a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Transformational literary generated a new literary style of novel called Yuseongul which was a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and had a great effects on Chinese literature. In Korea a verbal feature was found in Shilla's Wonhyo, Hyegong, and such Hyangg writers as Wolmyungsa and Youngjai. This tradition continued to Koryo's Gyunyeo. Works of Hyangga of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in Samgukyusa were affected from literary works of such transformational literary and Yuseongul and written at the stage of recording them. Hyangga had common character with transformational literary in not only stylish feature but also functional aspect. However, effects of pictorial aspect such as transformational symbol did not found in Hyangga. In Japan, a form of combination of backgroud tale and song beginning ‘Mukasi-ari(昔有)’ was found in ‘有由緣雜歌’ in Manyoshu Vol. 16. ‘Mukasi-ari(昔在)’, which could be considered as the same as ‘昔有’. Since ‘昔在’ was seen to be affected by transformational literary, ‘昔有’ was also seen to be affected by transformational literary. In 평안 period, the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such as ‘Utagatari(歌語り)' which explained the background of songs, were prevailed in Yamatomonogatari․Isemonogatari. Tales in 31volumes of Conzakumonogatari, which was estimably formed around 1120, were examined in relation to transformational literary in their structure and purpose, the fact of beginning the form of ‘今昔(Now is Past)’, intension of writing, and structural and substantial characters. Since Conzakumonogatari was thinly related to the combined form of prose and verse, examination was limited to poetic literatures. In case of Japan, the combined form was accepted only in the aspect of literary form but was not accepted either in subject matter or missionary purpose of Buddhism. Japanese were more interested in Buddhist pictures such as transformational symbol and independently developed pictorial volumes which drew literary works into pi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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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말려초(羅末麗初) 선승(禪僧)의 이상과 현실 - 굴산문(?山門) 출신의 행적(行寂)과 개청(開淸) 선사를 중심으로 -

        조범환 ( Cho Bum Hwan ) 한국사상사학회 2017 韓國思想史學 Vol.0 No.57

        본 연구는 나말려초 굴산문 출신의 두 선승인 행적과 개청을 중심으로 당시 선승들의 이상과 현실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두 명의 선승은 범일 아래에서 공부하였으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는 길은 각각 달랐다. 행적은 도당 유학을 하였고, 스승이 열반에 들자 건자난야에 머물면서 신라 왕실에 계속해서 눈길을 보냈다. 궁예와 손을 잡기도 하였으나 멀어졌고, 결국에는 그가 원하던 대로 신라 왕실로 가서 국사로 활동했다. 반면 개청은 도당 유학을 하지 않고 오로지 범일 곁에 머물다가 스승이 열반에 들자 민규 알찬이 제공한 보현산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종신토록 지냈다. 보현산사에서 지내는 동안 단월이 왕순식으로 바뀌었는데,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신라 경순왕이 그를 국사의 예로 대접했으나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한 왕순식이 고려 태조 왕건과 밀접하게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왕건과 거리를 두었는데, 이는 개청이 중앙의 권력과는 거리를 두겠다고 하는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명의 스승 아래 공부한 두 명의 제자가 확연하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그들이 추구하던 이상이 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방법이 서로 달랐음을 말해준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각각 다른 방식을 통해 이상을 실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그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행적이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던 방법과, 개청이 가졌던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두 사람이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두 선승들 이외에도 당시 많은 선승들이 행적 혹은 개청의 방식을 택하였는데 이는 그 시대적인 상황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Many Son-Master of Late Silla and early Koryo period tried to redeem common people and to promulgate Buddhist teaching. However, those periods were age of chaos, and it was hard for them to accomplish their ideal. Therefore, many of Son-Masters were having close relationship with Gentry Powers. By doing so, they tried to announce and educate their Buddhist discipline to the public. HaengJeok and GaeChung from Gulsan Meditation School were one of these categories. HaengJeok tried to announce Buddhist teaching by associate with central powers. GaeChung did not leave Gangreung, had relationship with Gentry Powers, and stayed in Gijangsunwon until he died. His life was similar to Buddhist Huiyuan of Mount Lushan. Two Son-Master were taught under a same teacher Beomil, but they pursued different paths. Though the way they tried to realize the ideal was different even if they lived during the same time period, strived for the same ideal. It seems that they had different awareness for their time period. However, we are not able to tell right from wrong because their own religious conviction is regarded as the best way to accomplish their own ideal. Lots of Son-Masters chose the same way HaengJeok and GaeChung did, and it shows that Son-Masters could not oppose th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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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崛山門 梵日國師 관련 자료의 검토

        정동락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9 한국고대사탐구 Vol.33 No.-

        This study examines the contents of 『Jodangjip』 and 『Samgukyusa』 intensively among the materials of Gulsanmun Beomilguksa(崛山門 梵日國師). 『Jodangjip(祖堂集)』 「Myeongju gulsan gotonghyodaesageon(溟州崛山故通曉大師傳)」 is a monk’s biography that summarizes and arranges the epitaph of Beomil(梵日). There is possibility that 「Beomilbi(梵日碑)」 was compiled by Pak In-beom(朴仁範) either at the end of Queen Jinseong or in the reign of King Hyogong after the entrance into Nirvana. Among the pieces of the tombstone fixed up in Gulsansagi(崛山寺址), two of which words can be deciphered seem to be the body and eumgi(陰記) of the epitaph each. The eumgi tells us the titles of the office of Myeongju dodok(溟州都督) and Budodok(副都督). It seems that in the foundation of the tombstone, Silla’s local administrative organizations had been involved. 『Samgukyusa(三國遺事)』 「Naksanidaeseong Gwaneumjeongchwijosinjo(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條)」 contains how Beomil founded Jeongchwibosaljeon(正趣菩薩殿) in Naksansa(洛山寺). 「Bonjeon(本傳)」 quoted here seems to be 『Jodangjip』 「Beomiljeon」. 「Gobon(古本)」 stresses the roles of Beomil having been compiled by the Zennist of Gulsanmun. Supposedly, the insistence that ‘Beomil was the Munin of Euisang(義相)’ was set forth by the Huayan school(華嚴宗), a line of Euisang. 이 글은 굴산문 범일국사와 관련한 자료 중에서 『조당집』과 『삼국유사』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조당집』 「명주굴산고통효대사」전은 범일의 비문을 요약・정리한 승려의 전기이다. 「범일비」는 입적 뒤 진성여왕 말이나 효공왕 때 朴仁範이 찬술했을 개연성이 있다. 굴산사지에서 수습된 비편(음기)에는 溟州都督과 副都督의 관직명이 있다. 비의 건립에 신라의 지방행정조직이 관여했던 듯하다. 『삼국유사』 「낙산이대성 관음정취조신」조는 범일이 낙산사에 正趣菩薩殿을 건립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곳에 인용된 「本傳」은 『조당집』 「범일전」으로 보인다. 「古本」은 굴산문의 선승이 편찬해 범일의 역할을 강조했다. ‘범일이 의상의 문인’이라는 주장은 의상 계통의 화엄종에서 내세운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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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초 통진대사(通眞大師) 양경(讓景)의 행적(行蹟)과 태자사(太子寺)의 위상-안동 용수사 소장 양경비편을 중심으로-

        한기문 한국중세사학회 2020 한국중세사연구 Vol.0 No.63

        By newly discovered epitaph and Nanggong Master stone-script and postscripts I studied Yanggyeong`s trace and role. With these my thesis explored the rebinding process in the center of Taeja Temple from the later Shilla to Goryeo Gwangjong. Yanggyeong`s epitaph seems to be written between 1012 and 1014 Ad. On the basis of his ancestors` prestige he was the 6 stratum Literature from Shilla royal family. So in 893 AD. he had the monk-becoming will at 15 years old in 893. At early 20s he became the monk under priest Haengjeok in Taeja Temple. Studying in China before 917 he succeeded Namjongseon. In 928 he returned and assisted Goryeo Taejo. In Gwangjong he was Gukju Temple`s head monk and Geonseungwon`s Buddhist-master. This was Naewondang(內願堂) as King`s eye and ear. In 954(Gwangjong 5) Yanggyeong built Haengjeok`s tombstone in Taeja Temple by himself. In Gwangjong it was the center temple that associated the dharma-brothers. Gulsanmun`s Haengjeok-line founded at Gulsansa in Myeongju(溟州) regrouped in the center of Taeja Temple more strongly. On the changing time to 10~11C, specially each Sanmun of Transcendental Denomination developed the center-temple building process through the construction of master-pupils tower-script from later Shilla to earlier Goryeo in Gwangjong. By the foundation of Goryeo virtuoso priests`s monument-towers with Shilla teachers` memorials each Sanmun restrengthened him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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