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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애양원(愛養園) 한센병 환자 자치조직의 형성과 공동체의 성격 변화(1910-1940)

        장민한,유연실 의료역사연구회 2022 의료사회사연구 Vol.10 No.1

        애양원은 1909년 광주에서 한센병 치료를 목적으로 설립된 나요양소를 모체로 한다. 광주 나요양소는1909년 선교사 포사이트가 나주 남평에서 발견한 한센병 환자를 광주로 이송하면서 치료를 시작했으며, 1912년11월 15일 한센병 환자 전문 수용기관으로 정식 개원하였다. 광주 나요양소는 1926년 도시민들의 반발로 여수 율촌면의 신풍반도로 이전하였다. 1962년 이후 애양원은 한센인 정착촌의 형성과 소아마비 중심의 진료체제로의 전환 속에서 환자공동체가 점차 해체된다. 애양원은 일제시기 기독교 나요양소의 대표적인 모델로서 환자 자치조직의 운영과 자활 노동을 통한 경제적 자립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본고는 애양원의 환자 자치조직의 운영에 주목하여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첫째, 애양원 환자자치조직과 교회 권력의 관계를 시기별로 검토하여, 환자공동체의 성격 변화를 고찰하였다. 애양원은 광주 나요양소시기(1910-1926), 여수 애양원 시기(1926-1934), 일심회 사건과 김응규 목사 퇴진 운동 이후 시기(1934-1940)까지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겪는 동안 그 성격이 ‘선교사 중심의 신앙공동체’에서 ‘환자 중심의 생활공동체’로 변화하였다. 이는 애양원이 운영지도부(병원ㆍ 교회)와 환자 자치조직의 관계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주 나요양소의 환자 자치조직은 선교사의 지도하에 성장했으며, 환자들의 우두머리인 회장도 병원장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독립적인 권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1926년부터1934년까지는 집행위원회(부장회)를 중심으로 환자 자치조직이 성장하면서, 교회 권력과 자치조직이 서로 대립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는 1934년 반교회적 일심회 사건과 1938년 김응규 목사 퇴진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일심회 사건 이후 1936년 환자 자치조직이 재편되고, 병원장이 일부 집행위원에 대한 임명권을 확보한다. 이를 통해 병원장의 환자 자치조직에 대한 견제와 통제가 강화되고, 교회 권력과 환자 자치조직의 운영이 일원화되면서 신앙공동체적 성격이 회복된다. 둘째, 애양원 한센병 환자들의 주체성을 검토하였다. 애양원 내에서 환자들은 신앙을 통해 교회 권력에 접근하였고, 11개 부서(시기에 따라 변화)의 장을 환자들이 선출하여 집행위원회(부장회)를 구성하였다. 환자가 자치조직의 대표(집행위원/ 부장)를 직접 선출하여 애양원의 운영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환자들은 교회 권력에 대한 견제가 가능했다. 또한 환자들은 노동 자활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고 가정사를 구축하여 가족단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환자 자치조직의 자율성은 교회 권력의 견제 속에서 축소되기도 하였지만, ‘부장회’와 같은 환자 자치조직의 자율적 운영은 환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며, 주체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제공했다.

      • KCI등재

        남장로회선교부 한센병 환자 수용정책의 성격(1909~1950)

        최병택(Choi Byung-Taek)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0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2 No.-

        이 논문은 일제하~1950년까지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인 애양원의 환자 수용정책과 그 영향을 다룬 글이다. 그동안 일제하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이 환자들을 외부사회와 격리함으로써 환자들의 인권을 침해하였다는 비판적 시각이 있어왔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한센병 수용 시설이 그 활동을 시작할 무렵 전세계적으로 한센병에 대해서는 환자들을 격리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이 점에서 환자들을 격리하였다는 것만으로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구에서는 한센병 환자를 ‘죄’로 인해 병을 얻게 된 자로 규정하고 이를 차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환자들을 병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된 ‘선택된 자’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애양원의 ‘격리’ 방침은 환자가 외부인을 접촉함으로써 병을 옮기지 않도록 하는 그야말로 전염병 예방 차원에 머무르는 것으로 환자들을 평생 격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완치될 경우 환자들은 자유로이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환자들이 퇴원 후 격심한 사회적 편견속에 살아갈 길이 사실상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환자들은 경제적 안정이 보장된 애양원에 남기를 원하였고 이 때문에 애양원 내 환자 구역은 비교적 안정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 환자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규율하는 역할은 교회에 주어져 있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병이 완전히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환자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에 더욱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속에서 애양원 수용자의 상당수는 외부와 단절된 채 개인적 신앙생활에 매달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1960년대에 정착촌으로 이주할 당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This article deals with American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ary's activities on treating Hansen’s disease patients and providing shelter for them through AeYangWon. Earlier studies urged that the missionary segregated many patients from society and confined them in leprosy asylums, and by this they treated lepers as social issue for the first time. And on this account lepers be treated discriminatingly. But at that time there were no adequate measures except keeping patients in isolation. Conventionally Western people take lepers as sinner since Middle Ages. By contrast the missionary in korea considered lepers as the blessed for they receive benefits from God through missionary leprosy asylum. The Patients did not protest against segregation and discrimination, but wanted to remain in asylum. In this environment AeYangWon maintained stable relationship between inmate. The leader that keeping order in AeYangWon was the church. pastors of AeYangWon-church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preparing for The Second Advent of Christ, and pushed lepers to concentrate on religious life. Because of them the lepers stuck on religious belief on the millennium, so that they couldn't prepare economical background to meet the new policy on lepers that focus on building settlements in 1960s'.

      • KCI등재

        남장로회선교부 한센병 환자 수용정책의 성격(1909~1950) : 여수 애양원을 중심으로

        최병택 한국기독교역사학회 2010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2 No.-

        This article deals with American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ary's activities on treating Hansen’s disease patients and providing shelter for them through AeYangWon. Earlier studies urged that the missionary segregated many patients from society and confined them in leprosy asylums, and by this they treated lepers as social issue for the first time. And on this account lepers be treated discriminatingly. But at that time there were no adequate measures except keeping patients in isolation. Conventionally Western people take lepers as sinner since Middle Ages. By contrast the missionary in korea considered lepers as the blessed for they receive benefits from God through missionary leprosy asylum. The Patients did not protest against segregation and discrimination, but wanted to remain in asylum. In this environment AeYangWon maintained stable relationship between inmate. The leader that keeping order in AeYangWon was the church. pastors of AeYangWon-church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preparing for The Second Advent of Christ, and pushed lepers to concentrate on religious life. Because of them the lepers stuck on religious belief on the millennium, so that they couldn't prepare economical background to meet the new policy on lepers that focus on building settlements in 1960s'. 이 논문은 일제하~1950년까지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인 애양원의 환자 수용 정책과 그 영향을 다룬 글이다. 그동안 일제하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이 환자들을 외부사회와 격리함으로써 환자들의 인권을 침해하였다는 비판적 시각이 있어왔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한센병 수용 시설이 그 활동을 시작할 무렵 전세계적으로 한센병에 대해서는 환자들을 격리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이 점에서 환자들을 격리하였다는 것만으로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구에서는 한센병 환자를 ‘죄’로 인해 병을 얻게 된 자로 규정하고 이를 차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환자들을 병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된 ‘선택된 자’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애양원의 ‘격리’ 방침은 환자가 외부인을 접촉함으로써 병을 옮기지 않도록 하는 그야말로 전염병 예방 차원에 머무르는 것으로 환자들을 평생 격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완치될 경우 환자들은 자유로이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환자들이 퇴원 후 격심한 사회적 편견 속에 살아갈 길이 사실상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환자들은 경제적 안정이 보장된 애양원에 남기를 원하였고 이 때문에 애양원 내 환자 구역은 비교적 안정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 환자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규율하는 역할은 교회에 주어져 있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병이 완전히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환자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에 더욱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속에서 애양원 수용자의 상당수는 외부와 단절된 채 개인적 신앙생활에 매달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1960년대에 정착촌으로 이주할 당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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