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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기록으로 본 가야문화의 성격

        남재우 구결학회 2015 구결연구 Vol.34 No.-

        It is not a easy task to understand culture of Gaya and predict boudaries of Gaya culture. It’s because Gaya had been divided into six countries and each Gaya country did not have local ruling system. The culture of Gaya and Silla had become distinguished from the 4th century which was considered as period of the second term of Gaya period. However, since we have yet to know the border of each Gaya country, it is hard to set up the cultural boundary of Gaya. when we consider historical records about Gaya, we are able to predict three things. At first, political boundaries of Gaya could be predictable. Flexibility of this boundary is the second. The third one is about geographical border between Gaya and Silla is the Nakdong-river. And we would consider the region in which could not be belonged to Silla and Baekje among ByunHan region as Gaya. It is possible to predict the border between Gaya and BaekJe by historical records about Baekje’s invasion on Gaya region and four cities in Imna. In the late 5th early and 6th century, boundary of Gaya against Baekje was a line between Gaya mountain and Dukyou mountain in north and coastal line from Jin-an to Yu-su in the south. The culture of Gaya could be characterized by openness, regionality, creativeness and localization. From the early state of Gaya, thank to the coastal area, Gaya easily carried our cultural exchange with China and Japan by sea route. As intermediary region, accepting advanced culture from China and giving it to Japan, exchanging with Three kingdom in korea, Gaya had flourished their own culture. And each nation in Gaya also created their distinguishable culture. These special cultures were well-reflected on their own earthenwares. In terms of creativeness, Gaya-gum, a musical instrument of Gaya, could be an answer. In these respect, Gaya, known as a federation of small countries, had their own developed culture as much as three kingdoms in korea in that period. 가야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가야문화권과 가야문화 성격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야는 여러 나라들로 나뉘어 있었고, 가야 각국들이 지방통치체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야전기에 해당하는 변한의 문화권을 추정하기 어렵다. 가야후기에 해당하는 4세기대부터 가야와 신라의 문화권이 나눠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가야영역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문화권 설정은 어려운 상황이다. 문헌자료의 검토를 통하여 가야의 영역을 설정할 때 확인되는 것은, 첫째 뚜렷한 경계는 알 수 없지만 정치적인 가야영역을 설정할 수 있다. 둘째 가야영역은 유동적이었다. 셋째 확실한 영역 설정보다는 대체적인 윤곽밖에 설정할 수 없는데, 어느 시점에 그 유력한 경계는 낙동강이라는 것이다. 또한 백제와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을 가야의 영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야와 신라의 경우에는 어느 시기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낙동강이 경계가 되었다. 가야와 백제의 경우에는 임나4현과 백제의 가야지역 진출에 따라 경계 추정이 가능하다. 5세기 후반 혹은 6세기 전반까지의 백제와 가야의 국경선은 북쪽으로 가야산과 덕유산을 경계로 하고, 진안–임실–순창–곡성–구례–순천–여수반도를 잇는 선으로 볼 수 있다. 가야문화의 성격은 개방성, 지역성, 창의성, 토착성으로 볼 수 있다. 가야는 남해안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를 통하여 중국, 일본과 교류했다. 중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와 교류하기도 했고, 가야 각국끼리의 교류를 통하여 다양한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가야 각국들은 각국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가야의 각국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각자의 특성이 드러나는 지역성이 존재했다. 이것은 토기문화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가야금의 제작 등에서 가야사람들의 창의성을 엿볼 수 있었다. 가야도 삼국과 마찬가지로 지역 환경에 따른 토착적 문화가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 KCI등재

        가야문화축제의 관광 특성과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

        김화경 ( Hwa Gyeong Kim ),최화열 ( Hwa Yeol Choi ) 한국사진지리학회 2015 한국사진지리학회지 Vol.25 No.1

        본 연구는 김해 지역의 지역축제인 가야문화축제를 대상으로 그 경남의 가야축제, 김해 가야축제의 관광특성을 사진을 이용하여 고찰하였다. 가야문화축제는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고대 가야시대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켜 제 4제국인 가야 역사적 중심지인 김해를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가야문화축제가 경남의 문화축제로서 뿐 아니라 전국민의 지지를 얻는 관광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고 국제적 문화축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축제의 양적 확대와 함께 질적 성장을 이루어야 하며, 적극적 홍보와 가야문화권 연계 프로그램 전략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김해 가야문화문화축제의 관광 특성을 살펴보고 이를 활성화 할수 있는 방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This study, mainly based on Gaya Cultural Festivals especially in Gimhae and Kyungnam area, researched and analyzed Tourism characteristics by using the photos of the area. Given the historic importance of the area, Gaya Cultural Festival is a bit away from the public attention. Boosting an interest in the area through highlighting Gaya as an ancient historical center can be a big opportunity for the locals. To make Gaya Cultural Festival not only for Kyungnam province but also as an international Festival as well as a national one, it is very important to tremendously pursuit both qualitative and quantitative growth with the expansion of the festival at the same time. In addition, it is very necessary to strategically introduce the associated Gaya Cultural program and actively promote the festival.

      • 新羅와 伽耶의 文化交流 : 古墳出土의 裝身具類를 中心으로

        金基雄 新羅文化宣揚會 1988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Vol.9 No.1

        신라와 가야와의 문화교류를 고찰함에 있어 가야에 관한 문헌사료의 결여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가야에 관한 기록은 거의 후세에 전하여지지 않은 것 같아 『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도 지극히 단편적인 기사가 남아있을 뿐이다. 즉 『삼국사기』에는 가야관계기사가 「신라본기」와 「지」 및 「예전」등에 12개여소에 보이나 그 대부분이 신라와 가야와의 국경충돌기사가 중심이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오가야명과 『본조사략』의 오가야설을 인용한 기록이 있고 이밖에 금관가야의 신화전승 및 왕통계보 등을 모은 「가락국기」가 있을 뿐이다. 한편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문"에도 극히 단편적인 기록이 있고 중국사기인 『삼국지』「위지동이전」변신조, 『후한서』「동이전」한조, 『송서』「이만전」왜국조, 『남제서』「동남이전」가라국조, 『양서』「제이전」왜조 등과 같은 일본사서인 『일본서기』에도 가야관계의 자료가 있으나 그 모두가 주로 외교관계의 사료로서 국내사료와는 성격을 달리함으로 진중한 사료비판을 필요로 한다. 이와같이 가야에 관한 문헌사료가 희소함으로 한국고대사에 있어 가야의 역사는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가야의 영역이였던 낙동강유역에 군집하고 있는 가야의 고분을 통하여 가야문화의 한 측면을 헤아릴 수가 있고 또 가야의 문화는 삼국시대에 있어 고구려 · 백제 · 신라 등 삼국의 문화에 뒤지지 않았을 뿐더러 신라 · 일본 등의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케 한다. 다행히도 최근에 이르러 신라고분문화의 내용이 넓고 상세히 구명됨과 함께 다수의 가야고분이 발굴조사되어 가야의 고분문화가 보다 확실하여져서 신라 · 가야 두 나라의 문화교류실상이 상당히 깊게 밝혀져 가고 있다.

      • KCI등재

        전북 동부지역에 진출한 가야와 백제의 접경문화와 지역 정치체 검토

        소재윤 호남고고학회 2022 湖南考古學報 Vol.70 No.-

        전북 동부지역은 서부지역과 달리 복합된 문화양상을 가진 유적들이 다수 존재함에 따라 이와 관련한 역사적 해석을내놓는데 많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을 줄여보고자 본 논문은 유적 분포현황을 토대로 지역별 문화양상을 살펴보고 문화권과 지역성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문화권별 검토를 통해 상사성과 상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부지역은 가야문화권역과 백제문화권역으로 크게 양분되고 이 문화권은 더 세분될 수 있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금강 상류와 남강 상류 일원이 가야문화권에 포함되고 만경강 상류~섬진강 상류에 이르는 서부 일대가 백제문화권에 포함된다. 만경강 상류 지역의 경우, 백제 유적 외에도 가야와 관련되는 것으로 제기되는 봉화가 확인된다. 섬진강유역은마한·백제·가야의 물질문화가 복잡한 양상으로 확인되는데 6세기 전반 이후에 진출한 백제의 유적들을 제외하면주로 재지계 문화와 가야의 물질문화만 남게 된다. 가야문화는 남강유역의 소가야와 대가야 등의 가야문화가 혼재된상태이나 6세기 전후한 시점에 대가야문화 위주로 바뀌는 양상이 확인되며 반대편의 섬진강유역도 유사한 문화적 흐름을 보인다. 따라서 각 문화의 비중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전북지역의 섬진강 상류 일원과 남강 상류 일원은 5세기 대 유사한 문화적 복합양상을 보임에 따라 양직공도와 삼국사기 등에서 지칭하는 기문의 위치로 두 지역이 같이 검토되어야 한다. 기문 중 가장 유력한 정치체로 추정되는 상기문은 가야의 고총이 밀집된 남강 상류 일대가 유력한 거점지로추정된다. 일본서기에서 동시기에 보여지는 반파는 주로 6세기 전반에 백제·왜와 활발한 접촉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주변지역에서 대가야계 문화가 주요 문화로 유입 혹은 일시 정착되는 양상이 확인되고있어 관련 정치체의 문화양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KCI등재

        고대 양산지역의 가야문화 검토

        조수현 동아시아문물연구소 2022 文物硏究 Vol.- No.42

        고대 양산지역은 신라문화인가, 가야문화인가에 대한 논쟁이 줄곧 이어져 왔다. 연구자들 중 다수는 양산의 중심고분군과 토기문화를 통해 주로 신라문화권으로 인식하여왔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근래 들어 새로운 발굴 자료가 계속 증가하면서 고대 양산지역의 문화 실체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글은 신라와 가야토기가 분화하는 시점인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의 토기문화를 통해 고대 양산지역의 문화변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대 양산지역의 토기문화는 신라·가야토기가 분화되기 전부터 김해지역에 존재한 금관가야의 묘제와 토기문화를 수용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문화양상은 적어도 신라묘제와 토기가 출현하는 5세기 전반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양산 산막동 토기가마는 가야문화에서 신라문화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고고자료이다. 이러한 양상을 통해 적어도 고대 양산지역은 5세기 전반까지는 금관가야권역 또는 독자적인 정치체로 존재하였으며, 5세기 후반부터는 신라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 KCI등재후보

        미술기법의 유형분석을 통한 한국 고대문화의 정체성 연구

        소인선(In-Sun SO) 한국글로벌문화학회 2015 글로벌문화연구 Vol.6 No.1

        본 연구는 한민족의 고대 문화와 스키타이 세계의 영적문화를 미술의 기법을 통하여 유형화하고 문화적 유사성을 분석하였다. 스키타이 황금을 영적 문화에 도입은 가야나 신라 문화와의 계통적 연관성으로 한국문화 기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동물양식, 신라 금관, 띠 장식 등에 그대로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서 스키타이까지 북방 초원으로 이어진 유목민족의 이동 경로를 보여주어 역사적 기억을 되찾는다. 북방 유라시아 초원의 길은 스키타이, 샤카, 훈, 흉노, 몽고 한반도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국민족과 연결되며 동서가 하나로 만났던 유라시아 대륙문화로서 한국 역사의 미래 비전을 보여준다. 분석 결과, 한-스카타이 영적 문화 유사성은 상당히 큰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제도나 미술적 특성의 공유는 한국사회에 적응하거나 한국사회의 전통적 가치나 사회구조에 대한 정신적 통합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키타이의 대표적인 문화인 동물문양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그림이 알타이지역에서 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이미 한반도에서 등장했으며 사슴을 소재로 한 그림은 부여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서, 한민족 문화가 스키타이나 시베리아 지역과 공유하고 선도적으로 전파하였다고 평가된다. This study is focussing on the on the art techniques analysis to identity of ancient Korean culture in Korea-Scytian ornaments pattern which had been popular in Steppe region of Eurasia as well as Korean peninsular. Art techniques related to the spiritual concept to provide protection against evil or disaster and representations of them thus occupied an important place in life. This style reflected the mythology, the ethical and aesthetic ideals of the warrior-nomad. The meaning of the art techniques used in Scythian ornaments appears that in some cases the work was appeard in Korea. In the 7th century BC Scythians penetrated from the territories north of the Black Sea across the Caucasus. After being defeated by the Orientals and driven from the Near East,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BCE, Scythians had to re-conquer lands north of the Black Sea. Scythia"s social development at the end of the 5th century BC and in the 4th century BC was linked to its privileged status of trade with Korean Peninsular, its efforts to control this trade, and the consequences partly stemming from these two. Aggressive external policy intensified exploitation of dependent populations and progressed the stratification among the rulers in the both regions. Scythian culture representative of the animal can be pictures in the Altay area patterned material which were much already emerged from the Korean peninsula at a time. Korean culture share and spread into Scythian-Siberian region to revealed on the research.

      • KCI등재

        고대 해상루트를 통한 불교전파의 가능성과 의미

        한지연 ( Jee Yeon Han )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6 동아시아불교문화 Vol.0 No.25

        한국의 고대 가야국에 대한 연구는 다방면으로 진행되어 왔고, 특히 불교전파와 관련하여 허황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허황후를 매개로 한 불교전파가 한국불교에 있어 어떤 의의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허황후를 중심으로 둘러싼 쌍어문雙魚紋, 불교를 중심으로 고대 해상루트와 가야와의 관계를 밝히고 이를 통해 가야불교의 시발점이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밝혀본다. 쌍어문은 육로 및 해상로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원류를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신화에서 찾아보았다. 그리고 전파과정에서 중국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쌍어와 철기문화와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즉, 메소포타미아-중국 남부지역과 가야에이르는 철기문화의 연관성을 쌍어문과 연결시키는 시도를 하였다. 이어서 고대 경제무역권을 기반으로 한 전파과정에서 이루어진 불교의 전래문제를 다룬다. 허황후가 중국 남부지역이 아닌 인도 아유타국 출신일 가능성은 가야의 불교전래설화에서 등장하는 불탑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을 거쳤을 경우에는 불상이 전래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동시에 인도 및 해상루트에 있는 여러 국가의 경우 불탑 중심의 불교문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야에 전해진 불교는 인도에서 직접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을 밝혔다. 고대 사상ㆍ문화ㆍ종교 전파의 성립배경에는 경제 및 무역이 존재한다. 본논문에서도 그 예를 밝힌 바와 같이 일상생활에 활용되는 모든 것은 의식하지 못한 채, 경제무역의 주요 물품이 된다.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바로 그러한 일상도구이기 때문에 항상 존재해야 하고, 이를 위한 경제무역이 성립될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세계문화 교류의 역동성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고대 가야의 철기 역시 당시 국제경제무역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하면서 이를 통해 한반도 내에서는 최초로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전해받은 고대 국가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The design of two fish, that is shown in the tale of legendary Queen of Gaya, Heo Hwang Ok, is also easily found on both land and sea routes. The design is found not only in Sumerian mythology of Mesopotamia but also in Three Kingdoms of China. So it is possible to presume that there was a link among Mesopotamia, southern China and Gaya. The link was probably the iron age culture and economy. On the myth of the marriage of Queen Heo and King Suro, she brought a pagoda instead of a Buddhist statue. If she came from China, what she brought should have been a statue, because Buddhism in China had preferred statue. So Buddhism the Queen brought and spread in Gaya must had been came directly from India or at least from the Buddhist countries on the sea route from India. The goods used daily have actually been main items of trade and economy. Since Gaya had skills to refine iron, it naturally became qualified to take a part in the international trade market. It gave Gaya the chance to be the first nation which imported Buddhism directly from India without passing through China.

      • 가야문화를 활용한 경남 지역축제의 현황과 과제

        변철희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2019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학술대회 Vol.2019 No.1

        경남 지역은 전역에 산재한 가야시대 유적과 유물은 경남을 통합적인 문화권 체계정립에 잠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지역의 역사적 문화자원의 활용가치는 여러 측면에서 접근될 수 있으나 가장 중심적인 부문은 지역 공동체의식과 사회의 통합과 지역의 정체성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본 연구는 경남의 정체성 및 공간적 틀을 이루고 있는 고대가야권의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개별 시·군의 가야문화 활용 축제의 현황을 분석하여 시사점을 도출함으로써, 경남 지역축제의 활성화를 위한 과제를 모색하였다.

      • KCI등재

        동아시아 해항(海港)문화 전파경로와 불교의 한국전래 - 가락국 불교 전래 문제 이해를 위한 원경 스케치 -

        석길암 ( Seol Gil-am )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8 동아시아불교문화 Vol.0 No.33

        본 논문은 불교의 한국 전래에 있어서 동아시아 해항(海港)문화 전파경로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검토한 것이다. 동남아시아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문화 전파 경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국을 반드시 경유해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본 논문에서는 중국을 경유하지 않은 남방문화의 한국 전파 사례를 모색했고, 지석묘 문화 및 벼농사 문화의 전파는 선행 연구에 의해 해당 사례로 입증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관련 유물과 유적의 분포는 북중국을 경유하지 않는 해항문화 전파경로의 존재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중국이라는 문화공동체가 형성된 이후에도 동일한 경로를 경유한 문화전파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아육왕탑 전승의 전파 경로는 이 부분을 해소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서 제시한 것이다. 북중국의 내륙을 경유하지 않은 아육왕탑 전승의 전파 경로는, 아직은 더 많은 부분이 해명되어야 하겠지만, 스리랑카-부남-양자강 하구-산동반도-요동이라고 하는 전형적인 해항문화 전파경로에 따른 문화의 전파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로부터 육로의 활성화 여부에 관계없이 꾸준히 문화전파의 경로로 기능하고 있는 해항문화 전파경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is for explaining the meaning of the propagation path of the East Asian seaport culture in precess of introducing Buddhism into Korea. If it had been passed through China or not is discussed seriously when examining the cultural propagation path from the East Asia to Korea. However, this paper finds some examples of propagating the East Asian culture to Korea without passing through China. Some studies tell that it is proved by introducing the culture of dolmens and rice farming into Korea, and, in fact, whoever examines where and how many relics and ruins related with the East Asian culture are found in Korea, can see the existence of the propagation path of the East Asian seaport culture without passing through the Northern China. Is it possible to find a example of the same cultural propagating path after forming whole the cultural community of China? Propagating path of a story of the King Ashoka’s building stupas can be an answer. The path without passing through the Northern China’s interior, although it still has to be explained a lot more, shows us the typical seaport cultural propagating path from Sri Lanka to Liaodong (遼東) via Funan (扶南), the mouth of Yangtze River, and the Shandong Peninsula. So, this path tells us that it played a steady role of the route of propagating seaport culture whether the overland route was vitalized or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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