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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계초(梁啓超)의 국학(國學)과 ‘중국철학’의 형성

        김우형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20 철학연구 Vol.0 No.61

        This article sheds light on how Liang Qi-chao (1873~1929) envisioned “Chinese philosophy” through the research of national learning (guoxue 國 學). For the first time in the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he tried to form a “Chinese philosophy” that contrasts with Western philosophy with a consistent stance until the end of his life. He presented a methodology that revealed the characteristics of “Chinese philosophy” through comparison with Western philosophy, and ultimately aimed at integrating it with Western philosophy. Liang Qi-chao maintained his position of being critical of Han learning (hanxue 漢學, philological research of Qing Dynasty) but favoring Song Neo-Confucianism (songxue 宋學). Based on this perspective, he embodied his project of “Chinese philosophy” by interpreting the philosophy of Immanuel Kant (1724~1804) in a subjective way. In addition, he emphasized the ancient origin and the practical characteristic of self-cultivation of “Chinese philosophy” through his criticism of Hu Shi (1891~1962). Liang Qi-chao insists that the study of “Chinese philosophy” should be developed in a way that uncovers the specificity of Chinese thinking from the perspective of national learning, but embraces epistemology from the standpoint of not rejecting scientific knowledge. In conclusion, Liang Qi-chao’s project of “Chinese philosophy” can be evaluated as an original and pioneer one to launch modern Chinese philosophy including contemporary new Confucianism, and has great implications not only for Chinese philosophy researchers but also for East Asian philosophy researchers. 이 논문은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자국 학술 사상에대한 연구로서의 국학(國學)을 통해 ‘중국철학’을 어떻게 구상했는지 조명해 보았다. 그는 철학사상 최초로 말년까지 일관된 입장을 가지고 서양철학과 대비되는 ‘중국철학’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서양철학과의 비교를 통해 ‘중국철학’의 성격을 드러내는 방법론을 제시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서양철학과의 통합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그는 한학(漢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되 송학(宋學)을 선호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그는 칸트(I. Kant, 1724~1804) 철학을 주체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중국철학’적 구상을 구체화했다. 또한 그는 호적(胡適, 1891~1962)에 대한 비판을 통해 ‘중국철학’의 기원과 실천적수양론이라는 특성을 강조하였다. 양계초는 ‘중국철학’의 연구가 국학의 관점에서 중국 고유의 특색을 발굴하되, 과학적 지식을 배척하지 않는 입장에서 인식론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양계초의 중국철학적 기획은 현대 신유가를 비롯한 근현대 중국철학을 개출(開出)한 독창적이고 선구적인 철학으로서 평가할 수 있으며, 중국철학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철학 연구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 KCI등재

        ‘미래의 인간’과 ‘미래의 철학’-완전주의와 행복의 관계를 중심으로

        강용수 ( Kang¸ Yong Soo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21 철학연구 Vol.- No.64

        이 글은 최근 많은 학자들이 주목하는 니체의 ‘호모 퓨처리스’(Homo futuris)의 도래와 그것과 함께 제기되는 미래의 철학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철학적으로 명료화하기 위해 ‘미래의 인간’을 니체의 ‘미래의 철학’에 근거하여 비판적으로 분석하는데 목표가 있다. 이 연구는 ‘미래의 인간과 미래의 철학’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기 위해 니체의 포스트 휴먼, 트랜스 휴먼의 쟁점을 ① 새로운 철학적 인간학 모색, ② 기술공학적 완전주의 비판, ③ 과학기술시대의 불행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완전주의와 진화론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철학은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의 사상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지만, 부단한 자기상승, 역량강화라는 측면에서는 미래의 인간학을 지지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무엇보다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적 인간학과 차이나는 니체의 독특한 인간규정인 ‘미규정성’, ‘미확정성’이 어떻게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의 이념을 지지하는지 살펴보고, 기술공학적인 완전성의 개념을 현대과학에서 경험하게 되는 ‘불행’의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한다. In order to philosophically clarify the possibility and direction of future philosophy raised along with the advent of Nietzsche’s ‘Homo futuris’, which many scholars are paying attention to, ‘future human’ is philosophically expressed in this article. It aims to critically analyze based on the ‘Future Philosophy’. This study focuses on Nietzsche’s posthuman and transhuman issues in order to find the possibility and meaning of ‘future human and future philosophy’: ① seeking a new philosophical anthropology, ② critique of technological perfectionism, and ③ unhappiness in the age of science and technology. I want to deal with Nietzsche’s philosophy contradicts the ideas of posthuman and transhumanism in that it criticizes perfectionism and evolutionary theory, but in terms of constant self-improvement and capacity building, it can be said that there is an aspect that supports future anthropolog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above all, to examine how Nietzsche’s unique human definitions ‘undetermined’, which differ from the existing traditional philosophical anthropology, support the ideology of posthumanism and transhumanism, and complete technological engineering. I would like to criticize the concept of ‘unhappiness’ experienced in modern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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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스피스 철학의 정초로서 사랑과 공감의 의미 연구-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이은영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5 철학연구 Vol.0 No.51

        The goal of the passage of hospice What is the philosophy and hospicephilosophy in modern society, why do you need? In the face of its twocore positions in order to give up on discussions about. First, a hospiceby the meaning of death in philosophy and second, the need for hospicepatients and hospice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philosophy theneed for going to present. And in the process, philosopher and a Catholicsaint on the philosophical rationale of the hospice where Edith Stein’sideas and by linking ‘Hospice philosophy’ thatIntends to 10 days ofJanuary, the new paradigm. The writer is an active supporter of thosediscussions and wants. Nevertheless, the potential to add one importantelement, That is in hospice where pilgrims or an invalid for lookingafter the ‘Nursing’(Time) and to rest the default based on the categorythat we are making a ‘Accommodation’(Space)Nurse to receive care andhospice patients between the elements called ‘Relationship’(Attitude) ‘thehospice, and to convince this by adding human being, based in thecountry twist Philosophy’ (Hospice philosophy) to try to do. Above all,hospice and patients based on empathy and feelings of love to hospicein terms of the philosophy proposed by clarifying the relationship betweencritical of the more But when my desire to develop the disputed. 이 글의 목표는 호스피스 철학이란 무엇이며, 왜 현대사회에서 호스피스 철학이 필요한가? 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두 가지 입장을 제시한다. 첫째, 죽음의 의미를 통한 호스피스 철학의필요성과 둘째, 호스피스와 환자사이의 관계를 통한 호스피스 철학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호스피스 철학의 이론적근거를 철학자이자 가톨릭 성인인 에디트 슈타인의 사상과 연결시킴으로써 ‘호스피스 철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초하고자 한다. 종래의 호스피스는 순례자나 병약자를 돌보기 위해 ‘간호’(시간)하는 일과그들을 편히 쉴 수 있도록 ‘숙박’(공간)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호스피스에 있어서는 순례자와 병약자를 위한 숙박과 간호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우리는 이 ‘숙박’(공간)의 개념과 ‘간호’(시간)의 개념을인간존재라는 바탕에서 철학의 기본범주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이를 ‘호스피스 철학’이라 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러한 논의를 적극 지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부가하고자 한다, 즉 호스피스에 있어서순례자나 병약자를 돌보기 위한 ‘간호’(시간)와 그들을 쉴 수 있도록 하는 ‘숙박’(공간)이라는 기본범주를 토대로 간호하는 호스피스와 간호를받는 환자 사이의 ‘관계’(태도)라는 요소를 추가하여 인간존재라는 바탕에서 재해석하려는 것이며, 이를 ‘호스피스 철학’(Hospice Philosophy)으로규정짓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공감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바탕으로 호스피스와 환자 사이의 관계를 구체화함으로써 종래의 제시되는 호스피스철학의 범주에서 좀 더 발전시키고자 하는데 필자의 논의가 있다. 그렇다면 필자는 호스피스 철학을 정초하기 위해 왜 사랑과 공감을 강조하는가?, 왜 이것이(사랑과 공감) 오늘날 호스피스 철학을 정초하기 위한유효한 대안일 수 있는가? 이다. 우리는 퀴블러 로스가 주장한 죽음을앞둔 임종자의 마지막 단계인 ‘수용’의 단계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는 임종자의 수용이라는 의미를 감정의 단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마지막 단계는 고통이 지나가고 몸부림이 끝나면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수용 단계에들어선 환자는 혼자 있고 싶어 하고 사람이 방문을 해도 이야기를 나눌기분이 아닐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심경을 주변에 있는 가족이나 간호제공자들이 수용하고 있다고 느낄때, 간호제공자와 환자는 상호 소통에 놀라운 영향을 줄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임종환자는 어쩔 수 없는 ‘수용’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내세에 대한 희망 속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을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죽음을 앞둔 임종환자와 간호제공자 사이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며, 그 소통은 서로가 ‘하나로 느낌’ 내지는 ‘더불어 느낌’과 같은 사랑과 공감을 전제로 했을 때 유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제시하는 사랑과 공감의 의미는 호스피스 철학을 정초하기 위한 큰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 이에 필자는 슈타인의 박사논문 『감정이입의 문제』에서 제시되었던 감정이입(Einfühlung)의 한 측면인 ‘하나로 느낌’과 ‘더불어 느낌’을 통하여 호스피스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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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는 왜 배움과 관련된 즐거움에 대해 열성적이어야 하는가? -플라톤 파이돈의 경우

        구교선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20 철학연구 Vol.0 No.61

        본고는『파이돈』의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는 배움에 관련된 즐거움에 열성적이라는 말로 자신의 논의를 마무리 짓는(114d-e) 이유를 탐구한다. 이 작업을 위해 본고는 우선 몇몇 학자들의 견해와는달리 철학자가 이러한 종류의 즐거움에 대해 열성적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우리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만하고, 또 왜 그가 이러한 언급을 하고 있는가를 하나의 문제꺼리로 삼아 탐구해야만 한다는 점을확인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먼저 본고는 못질 논변(83b-d)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 철학자도 육체적 즐거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고 그래서 그는 감각계가 참된 실재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고 결국 철학적 삶을 살지 못할 뿐더러 사후에는 하데스에도 이르지 못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위험으로부터자신을 구제하고 철학적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철학자는 가지계야말로 참된 실재라는 믿음을 지켜 내야하는데, 유사성 논변(78b-84b)에 대한분석을 통해 본고는 가지계에 대한 탐구로부터 얻어지는 즐거움은 이러한 믿음을 유지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어서 상기 논변(72e-77a)에 대한 연구를 통해 본고는 이러한 즐거움이 곧 배움에 관련된 즐거움을 가리킨다는 점을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철학적 삶을 살아내기 위해 철학자는 가지계가 참된 실재라는 믿음을 지키는 데 기여하는 배움에 관련된 즐거움에 열성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고는 결론 맺는다. This paper investigates why the philosopher Plato’s Phaedo is eager for the pleasure of learning. First, by analysing Riveting Argument(83b-d), I argue that the philosopher risks losing his correct belief about the true reality which forms the foundation of his characteristic life. This is because, as a body-soul composite, he cannot help experiencing some bodily pleasures which delude him, by suggesting that what is perceptible is real. Then, by examining Affinity Argument(78b-84b), I claim that, unlike bodily pleasures, the kind of pleasure taken in the intelligible helps him to retain his correct belief about the true reality. In view of this, by visiting into Recollection Argument(72e-77a), I contend that the pleasure of learning is the same as this kind of pleasure. Accordingly, I conclude that the philosopher has a sufficient reason to be keen on the pleasure of learning since enjoying this pleasure helps him to retain this life.

      • KCI등재

        호스피스 철학의 정초로서 사랑과 공감의 의미 연구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이은영 ( Eun Young Lee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5 철학연구 Vol.0 No.51

        이 글의 목표는 호스피스 철학이란 무엇이며, 왜 현대사회에서 호스피스 철학이 필요한가? 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두 가지 입장을 제시한다. 첫째, 죽음의 의미를 통한 호스피스 철학의 필요성과 둘째, 호스피스와 환자사이의 관계를 통한 호스피스 철학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호스피스 철학의 이론적 근거를 철학자이자 가톨릭 성인인 에디트 슈타인의 사상과 연결시킴으로써 ‘호스피스 철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초하고자 한다. 종래의 호스피스는 순례자나 병약자를 돌보기 위해 ‘간호’(시간)하는 일과 그들을 편히 쉴 수 있도록 ‘숙박’(공간)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호스피스에 있어서는 순례자와 병약자를 위한 숙박과 간호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우리는 이 ‘숙박’(공간)의 개념과 ‘간호’(시간)의 개념을 인간존재라는 바탕에서 철학의 기본범주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이를 ‘호스피스 철학’이라 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러한 논의를 적극 지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부가하고자 한다, 즉 호스피스에 있어서 순례자나 병약자를 돌보기 위한 ‘간호’(시간)와 그들을 쉴 수 있도록 하는 ‘숙박’(공간)이라는 기본범주를 토대로 간호하는 호스피스와 간호를 받는 환자 사이의 ‘관계’(태도)라는 요소를 추가하여 인간존재라는 바탕에서 재해석하려는 것이며, 이를 ‘호스피스 철학’(Hospice Philosophy)으로 규정짓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공감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바탕으로 호스피스와 환자 사이의 관계를 구체화함으로써 종래의 제시되는 호스피스 철학의 범주에서 좀 더 발전시키고자 하는데 필자의 논의가 있다. 그렇다면 필자는 호스피스 철학을 정초하기 위해 왜 사랑과 공감을 강조하는가?, 왜 이것이(사랑과 공감) 오늘날 호스피스 철학을 정초하기 위한 유효한 대안일 수 있는가? 이다. 우리는 퀴블러 로스가 주장한 죽음을 앞둔 임종자의 마지막 단계인 ‘수용’의 단계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는 임종자의 수용이라는 의미를 감정의 단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마지막 단계는 고통이 지나가고 몸부림이 끝나면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수용 단계에 들어선 환자는 혼자 있고 싶어 하고 사람이 방문을 해도 이야기를 나눌기분이 아닐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심경을 주변에 있는 가족이나 간호제공자들이 수용하고 있다고 느낄때, 간호제공자와 환자는 상호 소통에 놀라운 영향을 줄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임종환자는 어쩔 수 없는 ‘수용’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내세에 대한 희망 속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을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죽음을 앞둔 임종환자와 간호제공자 사이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며, 그 소통은 서로가 ‘하나로 느낌’ 내지는 ‘더불어 느낌’과 같은 사랑과 공감을 전제로 했을 때 유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제시하는 사랑과 공감의 의미는 호스피스 철학을 정초하기 위한 큰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 이에 필자는 슈타인의 박사논문 『감정이입의 문제』에서 제시되었던 감정이입(Einfuhlung)의 한 측면인 ‘하나로 느낌’과 ‘더불어 느낌’을 통하여 호스피스 활동의 이론적 근거를 모색하였다. 우선 호스피스는 임종하는 환자의 곁에 있으며, 임종자의 고통스러운 행동을 외적으로 직접 실행하지는 않지만 내적으로 감정이입하면서 함께 함으로써 ‘하나로 느끼게’ 될 수 있다. 임종자의 고통을 하나로 느끼려 하는 호스피스의 태도는 심리적, 정서적으로 환자가 자신의 안정감과 만족감을 가지는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 호스피스는 임종자의 고통에로 자신을 옮겨 놓으며, 임종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에 대하여 ‘더불어 느낌’(Mitfuhlen)으로써 임종자의 호소에 응답하며 임종자로 하여금 친밀감과 가까움이라는 정서를 느끼게 할 수 있다. 감정이입의 한형태로 제시된 ‘하나로 느낌’과 ‘더불어 느낌’의 근저에는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슈타인은 주저『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전반에 걸쳐 감정이 존재에 접근하는 유효한 방법임을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육체적 케어를 돕고 있는 싸나톨로지스트와 영적 케어에 좀 더 집중하는 호스피스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하여 열린 마음을 지녔을 때, 그 의의가 더 드러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The goal of the passage of hospice What is the philosophy and hospice philosophy in modern society, why do you need? In the face of its two core positions in order to give up on discussions about. First, a hospice by the meaning of death in philosophy and second, the need for hospice patients and hospice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philosophy the need for going to present. And in the process, philosopher and a Catholic saint on the philosophical rationale of the hospice where Edith Stein’s ideas and by linking ‘Hospice philosophy’ thatIntends to 10 days of January, the new paradigm. The writer is an active supporter of those discussions and wants. Nevertheless, the potential to add one important element, That is in hospice where pilgrims or an invalid for looking after the ‘Nursing’(Time) and to rest the default based on the category that we are making a ‘Accommodation’(Space)Nurse to receive care and hospice patients between the elements called ‘Relationship’(Attitude) ‘the hospice, and to convince this by adding human being, based in the country twist Philosophy’ (Hospice philosophy) to try to do. Above all, hospice and patients based on empathy and feelings of love to hospice in terms of the philosophy proposed by clarifying the relationship between critical of the more But when my desire to develop the disputed.

      • KCI등재

        신화(神話)적 사유로 본 북송 성리학에서 "생성"의 의미-<태극도설>과 <원회운세>를 중심으로

        주광호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4 철학연구 Vol.0 No.50

        이 연구의 목적은 북송 성리학 특히 주돈이(周敦李)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 』중 <원회운세(元會運世)>에서 생성의 의미를 ‘신화적 사유’로 읽음으로써, 발생론과 본체론 분할의 맹점을 극복하고 이 저작들의 수양론적 의미를 복원하는 것이다. 기존의 철학사는 <태극도설>을 우주발생론적 저작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언제나 발생론과 본체론의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발생론적으로만 읽는다면, 규범으로서의 태극-인극과 개별자와의 불연속은 설명이 어렵게 된다. 원형적 규범과 질서는 현재의 속되고 악한 실존적 존재로서의 나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는 주돈이와 소옹에 대한 사상사적 평가에서 고스란히 도드라진다. 철학사에서 주돈이와 소옹은 소위 성리학의 비조(鼻祖)라고 일컬어지지만, 그들은 철저히 천도(天道) 혹은 우주론의 영역으로 한정됨으로써 인도(人道)나 수양(修養)의 영역이 부족하거나 아예 결여되었다고 평가되어 왔다. 그래서 <태극도설>은 주돈이 사상의 종지가 아니라거나, 소옹은 아예 유가가 아니라고 단정되어버렸다. 그러나 과연 이들의 집필 의도가 거기에 있었을까? 규범적이고 실천적인 요구 없이, 우주 창조와 그 변화의 역사를 담백하게 기술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을까? 만일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성리학이고 유가일 수 없다. 그것은 천체물리학이거나 기껏해야 자연철학이다. 과연 주돈이와소옹은 천체물리학자인가? 우리에겐 <태극도설>과 <원회운세>를 이해할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이에 <태극도설>과 <원회운세>를 이해할 새로운 방법으로 필자는 신화적 관점을 제안한다. 신화학자이자 비교종교학자인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의 관점에서 종교적 인간은 각종 의례를 통해 태초의 생성을 재현하고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우주적 온전함·생성력·성스러움을 회복시키려고 한다. 신화적 관점에서 태초의 창조를 반복 재현하는 것은 단순한 모방이나 혼동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주의 창조에 참여하는 성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이다. 엘리아데가 말하는 신화적 사유 즉 성스러움이라는 원형의 상정과 그에의 합일·복원이라는 사유 구조로 이해할 때, <태극도설>이나 <원회운세>는 가치 초월적 천체물리학이나 기계적인 역사연표 혹은 천인합일이라는 단순한 유비적 단계를 뛰어넘어 지금·여기에서 온전함 혹은 성스러움을 회복하고 완성할 수 있다는 실천철학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양론적 상징체계의 근간이 바로 ‘생성’인 것이다. 本論文的目的就是從神話思維方式來看北宋理學中,尤其周敦李≪太極圖說≫和邵雍≪皇極經世≫之≪元會運世≫中的“生成”的意義, 從而批判分割生成論和本體論的想法而回復兩部文章之修養含義. 壹般哲學史大部分把≪太極圖說≫只從宇宙發生論的立場上看. 不過, 如果只從宇宙發生論的立場看則各不能解釋太極-人極和個人之間的連續性. 原型規範卽太極-人極絶不能解決顯存存在我. 同然, 如果把邵雍的≪元會運世≫只從宇宙歷史年表立場上看, 則不能脫離悲觀的命運論. 那馬, 他們倆不可爲理學大師, 甚至不可爲正宗儒家. 不過, 兩位理學家的眞正著述目的果眞在此? 筆者絶不同意. 其理由之壹乃是依他們的整個著作則他們的風格依然是儒家風貌. 那馬, 這兩部特殊的著作應當再加解釋. 其二, 整個中國哲學史中宇宙發生論和本體論的程序幷非那磨連續. ≪易傳≫的太極、≪老子≫的道、玄學的無等則絶不能解釋爲物質性因素. 其三, 宇宙發生論上的≪太極圖說≫和宇宙歷史年表意義的≪元會運世≫所包含的天體物理學特征絶不符合於兩宋理學的最終目標. 現存哲學史觀點則大部分在二十世紀初與西方哲學比較中所産生的. 故他們特別强調中國哲學中宇宙論、本體論、認識論的因素. 在新世紀, 我們需要新解釋. 從而, 筆者提出從神話思維解釋理學中生成的看法. 神話學者比較宗敎學者Mircea Eliade(1907-1986)認爲傳統時期的人基是宗敎性存在又是象征存在, 故他們通過各種儀式再現最初宇宙的生成, 這意味著回復大自然的生成力、完整性. 從而言之, 以神話思維中看≪太極圖說≫則其眞正目的乃是通過合壹於宇宙生成而達到個人生成力、完整性的完成, 這就是理想人格的完成卽成爲君子. 同然, 從神話思維看的≪元會運世≫的眞正目的乃是通過合壹於宇宙周期性而達到個人生成的現存再現, 這就是邵雍所說的聖人或者心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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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 철학에서 본 인식의 문제 : 진리개념을 중심으로

        양대종 ( Dae Jong Yang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1 철학연구 Vol.0 No.42

        니체가 이상적 인간으로 삼고 있고 자신의 전 생애와 철학함을 통해 되고자 하는 정의로운 자(der Gerechte)가 갖춰야 할 덕성으로 정의롭게 행동하려는 진실한 의지와 더불어 엄격한 판단능력이 요구되는 한, 진리개념은 니체 철학의 내재적인 이해를 위해서 간과할 수 없는 핵심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에게 있어 진리개념은 언제나 동일한 사태를 의미하지 않고 사용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니체의 가치평가도 양가적으로 나타난다. 자유정신의 편력에서 보이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진리관과 함께 고전적 상응이론에 기반하는 형이상학적 진리개념을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삶의 불가피한 오류로 보는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한 비판 역시 니체 철학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이다. 니체 철학의 여러 맥락에서 양가적으로 나타나는 진리개념의 연관과 외연을 살피고 이러한 양가성이 나타나는 이유와 니체철학 내에서 진리추구가 갖는 함의를 밝히는 것이 논문의 목적이다. 니체철학에는 두 차원의 진리, 즉 필연적인 가상으로서의 진리와 형이상학적 진리의 가상성을 통찰하는 진리가 있으며, 불확실하게 남을 수밖에 없는 진리의 추구를 통해 이미 화석화해 더 이상 참 진리일 수 없는 특정한 진리의 허위성을 밝히는 니체의 작업은 이율배반적이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며, 그간 형이상학적 진리관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돼온 생명의 다른 표현들에 자리를 내주려는 노력이다. 이 한계설정 후에도 계속되는 니체의 인식에의 열정은 심연에 선 철학자가 이성의 경계에서 존재의 초월적 발현을 경험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Solange nicht nur der echte Wille, gerecht zu sein, auch das Urteilen-Konnen als die notigen Tudenden von dem Gerechten verlangen werden, der fur Nietzsche das menschliche Ideal darstellt, ist der Begriff der Wahrheit fur das immanente Verstandnis der Philosophie von Nietzsche ein unumganglicher Schlußelbegriff. Aber er meint mit dem Begriff nicht immer ein und denselben, so dass seine diesbezugliche Wertschatzung auch ambivalent bleibt. Neben der positiven Einstellung zur Wahrheit und Erkenntnis, was bei der Wanderschaft des freien Geistes zu betrachten ist, gehohrt seine Kritik an der metaphysischen Wahrheit zu den wichtigen Themen seiner Philosophie, wobei der auf der klassischen Korrespondenztheorie basierende, metaphysische Wahrheitsbegriff als ein lebensnotwendiger Irrtum von Seizen des Intellektes angesehen wird. In der Philosophie von F. Nietzsche sind zwei verschiedenen Wahrheitsbegriffe zu betrachten, namlich die Wahrheit als der lebensnotwendiger Irrtum einerseits, und die diese Irrtumlichkeit der metaphysischen Wahrheit einsehende Wahrheit andererseits. Durch seine Suche auf die Wahrheit, die standig unbestimmt bleibt, entlarvt Nietzsche den perspektivischen Charakter der schon versteinerten bestimmten Wahrheiten. Es ist gar keine Antinomie, sondern eher die eigene Grenzziehung der menschlichen Vernunft und gleichzeitig seine Bemuhung, den anderen Lebensaußerungen gerecht zu bleiben, welche der metaphysische Wahrhiet ungerecht geopfert sind. Die weitere Betatigung der leidenschaftlichen Erkenntnis von Nietzsche ist als sein Versuch zu betrachten, an der Grenze der Vernunft das transzendierende Sein zu beruh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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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욕망 I. 끝으로부터 철학하기

        김창래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0 철학연구 Vol.0 No.41

        Philosophie ist eine Wissenschaft, die den Grund für den Bestand der Seienden überhaupt untersucht, die Ontologie. Das Sein als Gegenstand dieser Wissenschaft ist dasjenige, das alle Seiende als Seiende seiend sein läßt und selbst doch kein Seiendes ist. Es ist das Nichts als eine schlechthinnige Verneinung des Seienden im Ganzen und ein auf das absolute Ende der Reihe von Seienden überhaupt hinweisender Grenzbegriff. Seit dem Anfang der Philosophie als Ontologie ist es ihre eigentümliche Aufgabe gewesen, über diese Grenze selbst nachzudenken. In diesem Sinne ist das Philosophieren ihrem Wesen nach ‘Philosophieren vom Ende her.’ Dieser merkwürdiger Grenzbegriff des Endes fordert jeden Philosophierenden zweierlei Aufgabe auf. Der Philosophierende sollte zuerst durch die schlechthinnige Verneinung der Seienden überhaupt das Ende der Reihe von Seienden erreichen und an diesem Ende über das Sein bzw. Nichts als eine absolute Nicht des Seienden nachdenken. So ist die Philosophie als ‘Denkexperiment an die oder an der Grenze’ zu bestimmen. Und dieses vom Ende her Philosophieren ist gerade es, was das Wesentliche der Platonischen sowie Heideggerschen Philosophie ausmacht. Platon sucht nie dieses oder jenes gute etwas, sondern das Gute selbst und Heidegger ebensowenig dieses oder jenes Seiende, sondern das Nichts als absolute Verneinung desselben. Was diese beiden Philosophen schließlich sucht, ist nichts als das, was man erst am Ende der Reihe von seienden etwas zu treffen meint, d. i. das Sein. Und sofern der Philosoph dieses Sein als Nichts liebt, kann er auch nicht umhin, das Ende der Seienden, die Grenze des philosophischen Weges, den er auch als ein Seiendes zu gehen hat, d. h. den Tod zu lieben. So ist die Philosophie bei Platon ‘sterben lernen’ und bei Heidegger ‘Vorlaufen zum Tode.’ Es ist jedoch kein realer Tod, welchen der Philosoph stets zu lernen und zu welchem er vorzulaufen hat. Was er im Besitz zu nehmen sucht, ist kein Tod selbst, sondern ein mittels eines Denkexperiments vorweggenommender Tod und dessen Perspektive, die uns philosophierenden Seienden erst im Augenblick des Todes, am End der Seienden überhaupt erlaubt würde. Aus dieser Perspektive des Todes betrachtet der Philosophierende nichts anderes als sein Leben selbst zurück. Das heißt, er versteht den Weg der philosophia vom Ende desselben her, d. i. von der sophia her. Dieses Sichverstehen aus der Perspektive unseres schlechthinnigen Anderen, was uns fehlt und das wir deshalb liebt - das ist ja der eigentliche Sinn des Wortes ‘philo-sophia.’ 철학은 존재하는 것들의 존립의 근거로서의 존재를 추구하는 학문, 존재론이다. 그리고 존재는 모든 존재자가 존재자로 존재하게끔 해주면서 스스로는 존재자가 아닌 어떤 것이다. 그것은 존재자 전체의 단적인 부정으로서의 무이며, 존재자의 계열의 절대적인 끝이라는 한계 개념이다. 바로 이 한계를 사유하는 것이 그 시원 이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를 탐구해 온 철학의 고유한 과제가 되어왔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함이란 그 본성상 ‘끝으로부터 철학하기’이다. 끝이라는 한계 개념은 철학하는 자에게 두 가지의 과제를 부여한다. 철학하는 자는 우선 존재자 일반을 단적으로 부정하여 존재자의 계열의 끝에 이르러야 하고, 이 끝에서 존재자의 절대적 부정으로서의 존재 내지 무를 사유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한계에로의 또는 한계에서의 사유 실험’이다. 이 같은 끝으로부터 철학하기가 플라톤과 하이데거의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 또는 저 좋거나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라 좋음 자체와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며 하이데거 역시 이 또는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절대적 부정으로서의 무를 추구한다. 두 철학자가 추구하는 것은 ‘∼것(존재자)’들의 계열의 끝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이다. 철학자가 존재를 추구하는 한, 그는 동시에 존재자의 끝, 존재자로서의 자신이 걷는 철학의 길의 끝, 즉 죽음 역시 사랑하여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플라톤은 철학을 ‘죽는 연습’으로 규정하며 하이데거 역시 철학하는 현존재에게 ‘죽음에로 미리 달려가 볼 것’을 권한다. 그러나 철학자가 연습하는 죽음, 그리로 미리 달려가 보는 죽음은 실재적인 죽음이 아니다. 철학자가 원하는 것은 상상적으로 선취된 죽음이며, 죽음의 순간, 즉 존재자의 끝의 순간에 비로소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의 관점이다. 철학자는 죽음을 연습하고 선취하며, 이를 통해 얻은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관조한다. 즉, 자신이 걷는 철학적 사유의 길의 끝(지혜)의 관점에서 철학(애지)의 길을 이해한다. 이렇게 우리가 갖기를 원하되 갖지 못한 것, 갖지 못했기에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 즉 우리의 단적인 타자의 관점에서 지금-여기의 나를 이해하는 것 - 바로 이것이 애지라는 말의 본래적인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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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욕망 1. 끝으로부터 철학하기

        김창래 ( Chang Rae Kim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0 철학연구 Vol.0 No.41

        철학은 존재하는 것들의 존립의 근거로서의 존재를 추구하는 학문, 존재론이다. 그러고 존재는 모든 존재자가 존재자로 존재하게끔 해주면서 스스로는 존재자가 아닌 어떤 것이다. 그것은 존재자 전체의 단적인 부정으로서의 무이며, 존재자의 계열의 절대적인 끝이라는 한계 개념이다. 바로 이 한계를 사유하는 것이 그 시원 이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를 탐구해 온 철학의 고유한 과제가 되어왔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함이란 그 본성상 ``끝으로부터 철학하기``이다. 끝이라는 한계개념은 철학하는 자에게 두 가지의 과제를 부여한다. 철학하는 자는 우선 존재자 일반을 단적으로 부정하여 존재자의 계열의 끝에 이르러야 하고, 이 끝에서 존재자의 절대적 부정으로서의 존재 내지 무를 사유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한계에로의 또는 한계에서의 사유 실험``이다. 이 같은 끝으로부터 철학하기가 플라톤과 하이데거의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 또는 저 좋거나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라 좋음 자체와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며 하이데거 역시 이 또는 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절대적 부정으로서의 무를 추구한다, 두 철학자가 추구하는 것은 철학자가 추구하는 것은 ``~것(존재자)``들의 계열의 끝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이다. 철학자가 존재를 추구하는 한, 그는 동시에 존재자의 끝, 존재자로서의 자신이 걷는 철학의 길의 끝, 즉 죽음 역시 사랑하여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플라톤은 철학을 ``죽는 연습``으로 규정하며 하이데거 역시 철학하는 현존재에게 ``죽음에로 미리 달려가 볼 것``을 권한다. 그러나 철학자가 연습하는 죽음, 그리로 미리 달려가 보는 죽음은 실재적인 죽음이 아니라 철학자가 원하는 것은 상상적으로 선취된 죽음이며, 죽음의 순간, 즉 존재자의 끝의 순간에 비로소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의 관점이다. 철학자는 죽음을 연습하고 선취하며, 이를 통해 얻은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관조한다. 즉, 자신이 걷는 철학적 사유의 길의 끝(지혜)의 관점에서 철학(애지)의 길을 이해한다. 이렇게 우리가 갖기를 원하되 갖지 못한 것, 갖지 못했기에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 즉 우리의 단적인 타자의 관점에서 지금-여기의 나를 이해하는 것-바로 이것이 애지라는 말의 본래적인 의미이다. Philosophie ist eine Wissenschaft, die den Grund fur den Bestand der Seienden uberhaupt untersucht, die Ontologie. Das Sein als Gegenstand dieser Wissenschaft ist dasjenige, das alle Seiende als Seiende seiend sein laßt und selbst doch kein Seiendes ist. Es ist das Nichts als eine schlechthinnige Verneinung des Seienden im Ganzen und ein auf das absolute Ende der Reihe von Seienden uberhaupt hinweisender Grenzbegriff. Seit dem Anfang der Philosophie als Ontologie ist es ihre eigentumliche Aufgabe gewesen, uber diese Grenze selbst nachzudenken. In diesem Sinne ist das Philosophieren ihrem Wesen nach ``Philosophieren vom Ende her.`` Dieser merkwurdiger Grenzbegriff des Endes fordert jeden Philosophierenden zweierlei Aufgabe auf. Der Philosophierende sollte zuerst durch die schlechthinnige Verneinung der Seienden uberhaupt das Ende der Reihe von Seienden erreichen und an diesem Ende uber das Sein bzw. Nichts als eine absolute Nicht des Seienden nachdenken. So ist die Philosophie als ``Denkexperiment an die oder an der Grenze`` zu bestimmen. Und dieses vom Ende her Philosophieren ist gerade es, was das Wesentliche der Platonischen sowie Heideggerschen Philosophie ausmacht. Platon sucht nie dieses oder jenes gute etwas, sondern das Gute selbst und Heidegger ebensowenig dieses oder jenes Seiende, sondern das Nichts als absolute Verneinung desselben. Was diese beiden Philosophen schließlich sucht, ist nichts als das, was man erst am Ende der Reihe von seienden etwas zu treffen meint, d. i. das Sein. Und sofern der Philosoph dieses Sein als Nichts liebt, kann er auch nicht umhin, das Ende der Seienden, die Grenze des philosophischen Weges, den er auch als ein Seiendes zu gehen hat, d. h. den Tod zu lieben. So ist die Philosophie bei Platon ``sterben lernen`` und bei Heidegger ``Vorlaufen zum Tode.`` Es ist jedoch kein realer Tod, welchen der Philosoph stets zu lernen und zu welchem er vorzulaufen hat. Was er im Besitz zu nehmen sucht, ist kein Tod selbst, sondern ein mittels eines Denkexperiments vorweggenommender Tod und dessen Perspektive, die uns philosophierenden Seienden erst im Augenblick des Todes, am End der Seienden uberhaupt erlaubt wurde. Aus dieser Perspektive des Todes betrachtet der Philosophierende nichts anderes als sein Leben selbst zuruck. Das heißt, er versteht den Weg der philosophia vom Ende desselben her, d. i. von der sophia her. Dieses Sichverstehen aus der Perspektive unseres schlechthinnigen Anderen, was uns fehlt und das wir deshalb liebt-das ist ja der eigentliche Sinn des Wortes ``philo-sop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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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 철학에서 본 생명의 문제

        양대종 ( Dae Jong Yang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0 철학연구 Vol.0 No.39

        `니체를 생철학의 선구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고전적인 생철학자로 볼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가 고전적 형이상학의 경직된 진리의 자리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유동하는 생명을 세우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니체는 그의 철학의 시발점에서부터 생명의 다양한 측면들을 총체적인 존재 연관 속에서 살펴 철학적으로 확보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생명개념은 그의 사상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니체 철학을 관통해 흐르는 근본테마의 하나이다. 이때 니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의식과 진리에 대한 지금까지의 과도한 평가의 결과로 발생한 전체생명현상에 대한 폄하와 인간의 왜소화이다. 이 생명현상을 그 전체적인 외연이 드러날 수 있도록 상이한 연관 속에서 다루고 이 생명이 갖는 생산성과 전망에 걸맞은 그리고 이 생명 속에서 가능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니체철학이 갖는 중요한 성과의 하나이다. 본고에서는 니체가 중요하게 다룬 생명의 다양한 면들을 정리해 그의 철학의 근본개념 중 하나인 생명이 갖는 의미를 더 선명하게 부각하였다. Vom Anfang seines philosophischen Werdegangs versucht Nietzsche, moglichst viele Facetten des Lebens philosophisch zu sichern und das Lebensphanomen in seinem gesamten Zusammenhang zu betrachten. Es sind schon in seinem ersten Werk solche Bemuhungen um das intaktes Leben zu beobachten, so wie es bei seiner Schilderung uber die griechische Gesellschaft in der Wechselbeziehung der apollinischen und dionysischen Krafte als auch bei seiner Behandlung des Problems des Sokrates geschieht. Nietzsches Augenmerk richtet sich dabei sowohl auf die unberechtigte Geringschazung des gesamten Phanomens vom Lehen als die Folge der bisherigen Uerschatzung des Bewusstseins als auch auf die sich daraus ergebende Selbstverkleinerung des Menschen. Das Phanomen des Lebens in seinem vollem Umfang und in seiner Ganzheit zu denken ist bei Nietzsche ein zentrales Thema, das bis zu seiner letzen Schaffenszeit halt und in vielen Spielarten aufgenommen immer weiter behandelt wird. Diesem Leben einen seiner Produktivitat entsprechenden, in diesem selbst moglichen Sinn zu geben, war eine der wichtigen Bemuhungen von Nietzsches Philosophie gewesen. Diesem Lebensphanomen gegenuber wollte Nietzsche gerecht sein, d. h., ihm das Seinige zuteil werden lassen in seiner unerschoflichen Perspektivitat und somit in seiner prachtigen Sinnvielfaltigkeit, was in der bisherigen metaphysischen Tradition vom Leben in Beschlag genommen ist. In der vorliegenden Untersuchung werden einige wichtigen Facetten des Lebens, worauf Nietzsche besonders achtet, in Betracht gezogen, damit das intaktes Leben als ein Grundbegriff in der Philosophie von Nietzsche besser verstandlich w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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