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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鴻章, 伊藤博文과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9 동학연구 Vol.26 No.-
이홍장과 이등박문은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과정에서 淸 · 日 양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평생 세 차례 만나 청 · 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 첫 번째 만남은 1885년 4월, 갑신정변 사후처리를 위한 天津회담이었으며, 두 번째는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일본 마관에서 열렸던 회담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견은 청일전쟁 후 이홍장이 중국을 여행 중이던 이등박문을 초청하면서 이뤄졌다. 이홍장과 이등박문 두 사람의 첫 번째 만남, 즉 천진회담은 중 · 일 양국의 조선에서의 지위가 대등함을 인정하는 자리였다. 전통적으로 종주국과 藩屬國으로 인식되었던 中 · 韓관계에 변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마주앉았던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두 번째 만남에서는 淸 · 朝 양국의 전통적 宗 · 藩관계를 폐절한다는 것을 문서로 확정함으로써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와해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은 청일전쟁 패배 후 부국강병을 위한 變法 필요성이 고조되면서 유신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스승삼아 개혁을 진행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전통시대의 중국 중심 동아시아 천하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세 차례에 걸친 만남은 한 · 중 · 일 삼국의 관계를 중국 중심에서 일본 중심으로 바꾸는 과정을 결과하였던 것이다.
姜文晧 동국사학회 1997 동국사학 Vol.31 No.-
모든 정책의 성격은 그 정책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의도하는 바애 다라 결정되어진다는 점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氏族分徙에서 관련된 史書의 기록을 분석, ?堅은 氏族分徙를 통해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가 하는 점을 밝혀 기존의 견해들과 비교함으로써 이 정책의 성격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본 논문이 작성되었음을 밝혀둔다.
李鴻章, 伊藤博文과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9 동학연구 Vol.0 No.26
이홍장과 이등박문은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淸・日 양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평생 세 차례 만나 청・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 첫 번째 만남은 1885년 4월, 갑신정변 사후처리를 위한 天津회담이었으며, 두 번째는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일본 마관에서 열렸던 회담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견은 청일전쟁 후 이홍장이 중국을 여행 중이던 이등박문을 초청하면서 이뤄졌다. 이홍장과 이등박문 두 사람의 첫 번째 만남, 즉 천진회담은 중・일 양국의 조선에서의 지위가 대등함을 인정하는 자리였다. 전통적으로 종주국과 藩屬國으로 인식되었던 中・韓관계에 변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마주앉았던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두 번째 만남에서는 淸・朝 양국의 전통적 宗・藩관계를 폐절한다는 것을 문서로 확정함으로써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와해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은 청일전쟁 패배 후 부국강병을 위한 變法 필요성이 고조되면서 유신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스승삼아 개혁을 진행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전통시대의 중국 중심 동아시아 천하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세 차례에 걸친 만남은 한・중・일 삼국의 관계를 중국 중심에서 일본 중심으로 바꾸는 과정을 결과하였던 것이다.
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8 동학연구 Vol.24 No.24
『蹇蹇錄』은 동학농민전쟁의 발생부터 淸日戰爭(1894~1895) 종식을 위한 강화조약, 즉 시모노세키조약 체결까지의 일본 제국주의 정부 외 교노선을 제 2차 伊藤內閣의 외무대신이었던 陸奧宗光이 회고록 형식으로 정리 한 일종의 외교비망록이다. 陸奧宗光은 이 책에서 후일 만약 日·淸 양국 간의 淸日戰爭期 외교사를 다시 정리하게 된다면 그 서두 처음에 ‘東學黨의 亂’이라 는 章을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단언하고 있다. 이 말은 東學農民戰爭이 淸·日 양국군을 조선으로 불러들였으며, 그로 인해 淸日戰爭이 발생했고, 그 결과는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이어져 淸·韓 宗·屬관계가 와해됨으로써 韓· 中·日 삼국 관계가 재편되는 상황이 발생했으며, 이를 계기로 일본의 본격적 인 대륙진출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淸·韓 宗·屬관계의 와해 및 조 선에 대한 일본 영향력 확대, 이것이 바로 『蹇蹇錄』이 말하는 東學農民戰爭의 의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