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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 중국여성문학과 매체

        김은희 한국여성문학학회 2000 여성문학연구 Vol.4 No.-

        . 1920년대 여성운동은 아편전쟁 이후 쌓아온 여성운동의 성과 위에서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여성운동은 대체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면에서의 여성의 권익을 쟁취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여성노동자와의 연대를 모색하였는데, 1920년대 초 여성 작가의 대거 등단은 바로 이 같은 여성운동의 성과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5.4운동 이후 여성문제를 다루고 있는 잡지들은 상이한 정치적 성향을 보이면서 다양한 여성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여성운동의 성격을 볼 때 크게 개량주의적 여권운동과 혁명적 여권운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가 부르주아 지식 여성을 중심으로 남성과 동증한 권익을 요구하였음에 반해, 후자는 프롤레타리아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사회체제의 변화를 통해 여성 억압적 사회구조를 타파하고자 하연다. 5.4 운동 직후에 쓰여진 글에서는 전자와 관련된 논의가 활발하였던 반면, 1922, 23년에 접어들어 후자와 관련된 논의가 증가하였다. 이는 변혁운동이 발전함에 따라 그 성격이 보다 명확해지고, 아울러 여성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이 보다 분명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잡지의 출판성격, 출판자 및 기고자를 살펴보면, 5.4운동 전후에 출판된 잡지는 종합지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북경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남성 필진을 중심으로 간행되었다. 반면 1921년 전후에 출판된 잡지는 여성문제 전문지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上海와 廣州를 중심으로 여성 필진이 대폭 강화되었다. 이는 사회문제의 일부로서 제기되었던 여성문제가 점차 독립적인 분야로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여성문제가 점차 변혁운동과 결합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 KCI등재

        연구논문 : 도산 안창호와 춘원 이광수의 관계

        박만규 ( Man Kyu Park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7 No.-

        한말 일제시기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아직도 그 평가를 두고 이론이 있는 인물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를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로 평가한다. 그러나 학계 일부에서는 그를 민족개량주의자 내지 자치론자의 대부로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 인식의 바탕에는 춘원 이광수(1892-1950)와의 긴밀한 관계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춘원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다방면의 업적을 남겼지만 일제시기 변절한 끝에 반민족친일파의 대표적 인물로 전락했던 인물이다. 어쨌든 끝까지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보냈던 도산과 독립운동가에서 자치론자로 변화했던 춘원은 1919년 5월 말 처음 만난 뒤부터 1938년 3월 도산이 타계할 때까지 20여 년간 깊은 유대를 지속하였던 각별한 사이였다. 여기서는 특히 도산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춘원이 상해를 이탈하여 국내로 들어와, 도산과의 부단한 연계아래 흥사단의 국내 조직(=수양동맹회, 수양동우회, 동우회)을 만들고 그 활동을 주도하던 1921년 4월부터 1937년 5월까지의 16년 동안에 주목하였다. 이 시기 춘원은 일제와 내통했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품 활동과 동아일보 편집국장 및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며 사회 유지로서의 명성을 더할 수 있었다. 반면 도산은 귀국을 감행해 버린 춘원을 용인하고 지원함으로써 국내에도 흥사단 조직을 만들려던 염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자신의 실제 정체성과는 달리 국내 대중들로부터 민족개량주의자 내지는 자치운동자들의 배후 인물로 낙인찍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는 그가 춘원과 동일시된 데서 온 결과인데 비단 당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그의 사후에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그런 선입관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굴레가 되었다. Ahn, Chang-ho(1878-1938) was one of the leaders of nationalist movement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received a dubious evaluation on his accomplishments from descendants. Of course he was perceived as a dedicated patriotic person of independent movement, but also evaluated from some historians as an advocate of reformism and as a theorist of autonomism. The reason for that kind of evaluation comes from his intimate relationship with Lee, Gwang-soo(1892-1950) who was a typical renegade and pro-Japanese sympathizer. Both of them continued their friendship from 1919 to 1938 for 20 years. Lee, Gwang-soo departed from independent movement in Sanghai and came back to the homeland. Later on he helped to develop the inland organization of Heungsadan by keeping contacts with Ahn, Chang-ho, and led an active campaign from 1921 to 1937 for 16 years. Even though Lee Gwangsoo was suspected of his secret communication with colonial Japanese bureaucrats, he kept his reputation as a leading man of noble status while serving the editor of Donga-Ilbo and a vice president of Chosun-Ilbo. Ahn, Chang-ho also could make an inland organization of Heungsadan with the help of Lee, Gwang-soo. However, Ahn, Chang-ho got a bad reputation as an autonomist or a man of advocating reforming the character of Korean people. This was because he was acknowledged as same as Lee, Gwang-soo. And people are still identifying him with the same kind of perception and prejudice.

      • KCI등재

        도산 안창호와 춘원 이광수의 관계

        박만규 호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7 No.-

        Ahn, Chang-ho(1878-1938) was one of the leaders of nationalist movement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received a dubious evaluation on his accomplishments from descendants. Of course he was perceived as a dedicated patriotic person of independent movement, but also evaluated from some historians as an advocate of reformism and as a theorist of autonomism. The reason for that kind of evaluation comes from his intimate relationship with Lee, Gwang-soo(1892-1950) who was a typical renegade and pro-Japanese sympathizer. Both of them continued their friendship from 1919 to 1938 for 20 years. Lee, Gwang-soo departed from independent movement in Sanghai and came back to the homeland. Later on he helped to develop the inland organization of Heungsadan by keeping contacts with Ahn, Chang-ho, and led an active campaign from 1921 to 1937 for 16 years. Even though Lee Gwangsoo was suspected of his secret communication with colonial Japanese bureaucrats, he kept his reputation as a leading man of noble status while serving the editor of Donga-Ilbo and a vice president of Chosun-Ilbo. Ahn, Chang-ho also could make an inland organization of Heungsadan with the help of Lee, Gwang-soo. However, Ahn, Chang-ho got a bad reputation as an autonomist or a man of advocating reforming the character of Korean people. This was because he was acknowledged as same as Lee, Gwang-soo. And people are still identifying him with the same kind of perception and prejudice. 한말 일제시기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아직도 그 평가를 두고 이론이 있는 인물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를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로 평가한다. 그러나 학계 일부에서는 그를 민족개량주의자 내지 자치론자의 대부로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 인식의 바탕에는 춘원 이광수(1892-1950)와의 긴밀한 관계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춘원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다방면의 업적을 남겼지만 일제시기 변절한 끝에 반민족친일파의 대표적 인물로 전락했던 인물이다. 어쨌든 끝까지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보냈던 도산과 독립운동가에서 자치론자로 변화했던 춘원은 1919년 5월 말 처음 만난 뒤부터 1938년 3월 도산이 타계할 때까지 20여 년간 깊은 유대를 지속하였던 각별한 사이였다. 여기서는 특히 도산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춘원이 상해를 이탈하여 국내로 들어와, 도산과의 부단한 연계아래 흥사단의 국내 조직(=수양동맹회, 수양동우회, 동우회)을 만들고 그 활동을 주도하던 1921년 4월부터 1937년 5월까지의 16년 동안에 주목하였다. 이 시기 춘원은 일제와 내통했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품 활동과 동아일보 편집국장 및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며 사회 유지로서의 명성을 더할 수 있었다. 반면 도산은 귀국을 감행해 버린 춘원을 용인하고 지원함으로써 국내에도 흥사단 조직을 만들려던 염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자신의 실제 정체성과는 달리 국내 대중들로부터 민족개량주의자 내지는 자치운동자들의 배후 인물로 낙인찍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는 그가 춘원과 동일시된 데서 온 결과인데 비단 당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그의 사후에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그런 선입관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굴레가 되었다.

      • KCI등재

        이승복과 창립기 신간회의 조직화과정

        김인식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9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58

        Lee Sǔng-Bok’s greatest achievements in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centered on the nationalist press movement and the Shinganhoe. Through his resourcefulness to arrange financing and excellent negotiation skills, he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supporting nationalist newspaper companies that were in constant financial difficulties. Furthermore, his organizing capabilities were thoroughly evident in the founding and inaugurating process of the Shinganhoe. The three leaders of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Hong Myǒng Hǔi, An Jae Hong, Shin Sǒk U) are generally considered as the proponents and founders of the Shinganhoe. However, the role played by Lee Sǔng-Bok was critical for its success, especially in the initial organization stage. Lee Sǔng-Bok was the ‘de facto creator’ of the Shinganhoe. He was the one who drew up the association’s platform and constitution, and above all he was the major facilitator who perfected Shinganhoe’s central organization. Through his efforts, the Shinganhoe was able to establish its identity as a ‘leftwing national liberation front.’ And as such, the Shinganhoe advocated the absolute independence as its platform, rejecting the national reformism favored by a faction associated with the Dong-A Ilbo newspaper. Lee Sǔng-Bok systemized the Shinganhoe by framing the Shinganhoe’s future direction through its platform and constitution, recruiting and deploying many leftwing nationalists into the organization, and by mobilizing funds for its operation. In the Shinganhoe’s 3-code platform that began with ‘We,’ he declared clearly for the absolute independence and rejected the autonomy movement of the Dong-A Ilbo faction. At the same time, as observable in the articles of association, he strengthened the leftwing nationalist front by organizing the Shinganhoe under the leadership of its board of governors. In fact, the Shinganhoe in the initial stage was dominated by the Chosun Ilbo faction and other leftwing nationalists who controlled the board of governors. In this manner, the significance of Lee Sǔng-Bok’s activities in the Shinganhoe movement lies in the fact that his efforts resulted in the Shinganhoe’s becoming an organization predominated by the leftwing nationalist front. 이승복의 민족운동에서 돋보이는 바는 언론민족운동과 신간회운동이었다. 그는 재정난에 허덕이는 신문사에 자금을 융통하는 수완과 대인 교섭의 탁월함을 보였다. 신간회를 창립ㆍ발족시키는 데서도 그의 이러한 능력은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홍명희ㆍ안재홍ㆍ신석우가 신간회를 발기ㆍ창립한 세 주도자로 불리지만, 창립기 신간회의 조직화 과정에는 이승복의 힘이 매우 컸다. 이승복은 신간회를 낳는 사실상의 ‘산모’였다. 그는 신간회의 강령ㆍ규약을 직접 작성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신간회의 중앙조직을 완성하는 주도자였다. 이로써 그는 ‘민족주의 좌익전선’=‘좌익민족전선’으로 창립되는 신간회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신간회는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개량주의를 배격하고 절대독립론을 내세웠다. 이승복은 신간회의 강령과 규약을 작성하여 신간회 운동의 방향성을 정립하는 한편, 좌익민족주의자들을 신간회에 포진시키고 자금을 동원하는 등의 신간회를 조직화하였다. 첫머리를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3개 항의 강령에서 절대독립의 정신을 못박았고, 동아일보 계열의 자치운동을 배격하였다. 규약에서는 신간회를 사실상 총무간사회가 주도하는 조직체로 확립함으로써 민족주의 좌익전선을 공고화하였다. 창립기 신간회 조직은 조선일보 계열로 대표되는 좌익민족주의자들이 총무간사회를 장악함으로써 신간회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와 같이 이승복의 활동이 신간회운동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신간회를 민족주의 좌익전선으로 완성시킨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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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의 안창호 이해와 그 문제점 -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

        박만규 ( Park Man-kyu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8 역사학연구 Vol.69 No.-

        1947년에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는 해방 후 최초의 안창호 전기로서 안창호와 그의 사상에 대한 인식의 틀을 우리 사회에 최초로 제시한 책이었다. 발간된 지 이미 70년이 넘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판을 거듭해 계속 보급되면서 안창호를 이해하는 데는 거의 원전이라 할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다. 그 책이 갖고 있는 큰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이라도 본격적인 내용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는 『도산 안창호』에 나타난 이광수의 안창호에 관한 인식의 문제점을 크게 세 가지로 보았다. 첫째는, 이광수가 독립운동 지도자 안창호의 폭넓은 활동을 도덕적 인격수양으로 한정한 점이다. 그 이유는 이광수 자신이 일제에게 투항한 다음 국내에서 전개한 비정치적인 수양운동을 합리화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둘째는, 일제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던 안창호의 독립운동이 정작 『도산 안창호』를 통해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안창호가 한말의 신민회운동에서 강조했던 민주공화국가 건설이나 독립전쟁의 준비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또 안창호가 3.1운동 후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제시했던 독립운동 구상에 대해서도 제대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대신 임시정부가 심한 파벌싸움 끝에 약화되어 전혀 독립의 전망을 주지 못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이 역시 그 자신이 임정을 배반하고 국내로 탈출한 사실 때문으로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문제되는 것은 1920년대 후반의 혁명적 독립운동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는 사실이다. 대신 그는 안창호와 흥사단과 스스로를 일체화시킴으로써, 안창호를 대다수의 국내 대중들에게 자신과 같은 민족개량주의자 또는 자치운동자로 잘못 각인시켰다. 독립운동가 안창호에게는 너무도 치명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셋째는, 이광수는 안창호가 마치 한국 민족과 역사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단지 이광수 자신이 갖고 있는 잘못된 민족관과 역사관일 뿐이었다. 안창호는 실제로는 우리 민족의 자질에 대해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며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고난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에 대해서까지 비관하지는 않았다. 어떤 인물에 대한 기록이건 상당한 정도로 작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의 경우는 그것이 너무 심한 사례로 생각된다. 안창호의 활동 전체에 비추어 보면 매우 중요한데도 누락된 부분이 많은 것은 저술 당시의 여건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술되어 있는 부분마저도 과장과 축소가 많고 왜곡이 심해서 어디까지가 안창호의 실상이고 어느 부분이 작자인 이광수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만들어낸 허상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읽는 이들의 한국근대 역사에 관한 폭넓은 배경 지식과 세밀한 주의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도산 안창호』를 통해서는 안창호와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광수가 자신의 틀 내에서 이해하고 자신의 처지와 의도에 따라 만들어 낸 안창호를 보게 되는 위험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창호의 본 모습은 한국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서 사상과 운동의 양면에서 우리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데 있다. 하지만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는 이런 그의 전모를 전해주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온전히 그리기에는 대표적 친일파로 지탄받는 이광수 자신의 생각과 삶이 너무 크게 굴절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Dosan Ahn, Chang-ho』, the first post-independence biography of Ahn, Chang-ho written by Lee Gwang-soo in 1947, provided Korean society for the first time with the frame of understanding Ahn, Chang-ho and his thoughts. After more than 70 years of the first publication, the book, with continuous editions, is accepted as nearly a classic and still occupies the central place in understanding Ahn, Chang-ho. Given this great influence of the book, a thorough examination into its contents must be made. This thesis presents three problems in Lee, Gwang-soo,s understanding of Ahn, Chang-ho, which are illustrated in 『Dosan Ahn Chang-ho』. The first problem is that Lee, Gwang-soo limited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leader Ahn, Chang-ho’s activities over wide spectrum within character building in moral terms. The reason why Lee, Gwang-soo did so is that Lee himself wanted to legitimize his nonpolitical character building movement he had started after accepting the Japanese rule. The second is that one cannot see in 『Dosan Ahn Chang-ho』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activities of Ahn, Chang-ho, the leading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re are no mention of democratic republic building and preparation for an independence war that Ahn emphasized while in Shinmin Society that he established in late Chosun dynasty period. Also, the book rarely mentions the design of independence movement that Ahn presented while leading the Provisional Government after the 3.1 Movement. Instead, it depicts the Provisional Government as if it have been weakened due to its inner factionalism and failed to provide any prospect for the independence. This can also be explained by Lee Gwang-soo’s betrayal of and escape from the Provisional Government. Above all, the revolutionary independence movement of the late 1920s is entirely omitted in 『Dosan Ahn Chang-ho』. Instead, Lee, Gwang-soo indentified himself with Ahn, Chang-ho and Heungsadan, thereby conveyed an incorrect impression to the public that Ahn, Chang-ho was a national-improvementalist or home-rule activist like Lee himself. This has brought a fatal blow to reputation of Ahn, Chang-ho as an leading independence movement activist. The third problem is that Lee, Gwang-soo described as if Ahn, Chang-ho has had a highly negative recognition of Korean people and history, which is far from the truth. Rather, it more reflected what Lee, Gwang-soo had in mind about Korean people and history. Ahn, Chang-ho had a faith in the disposition of Korean people, and did not take a pessimistic view of the future of Korea, despite the present sufferings. It would be inevitable for the author to be influenced by his own view to some extent in describing a certain figure. But in the case of 『Dosan Ahn Chang-ho』, the author’s subjective views and judgement are too much involved. Large part of works that are very important when considered in Ahn’s whole activities are left out. One may try to understand this omittance by considering the difficult surroundings of the time, but even in the part that Lee recorded, exaggeration, understatement, and distortaion are common, which makes readers have difficulty in distinguishing facts on Ahn’s works from what the writer made from his false images. This is why readers need to be equipped with close attention and background knowledges on Korean modern history. Or, they could not avoid the danger of seeing Ahn, Chang-ho created by Lee Gwang-soo who reflected his own position, intention and limitation. Ahn, Chang-ho was one of the leading figures who headed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both ideological and practical ways. 『Dosan Ahn Chang-ho』 written by Lee, Gwang-soo, however, is too far from showing this feature. This problem can be attributed to the fact that Lee, who was blamed as a pro-Japanese and had a distorted life and ideology, found it difficult to fully accept and describe Ahn, Chang-ho the way he is,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leader who devoted himself to the historical demand of the time.

      • KCI등재

        신민주주의교육에서 사회주의교육으로 -1950년대 초반 신중국의 교육정책노선의 전환과 타오싱즈(陶行知) 비판

        정문상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7 아시아문화연구 Vol.45 No.-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공동강령에 따라 신민주주의교육의 건설을 선언했다. 신민주주의교육은 노해방구의 경험과 소련의 경험은 물론 구교육의 경험까지 통합하는 방식으로 건설될 것으로 구상되었다. 신민주주의교육 건설의 성공 여부는 구교육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중국지도부와 문화교육계에서 ‘인민교육가’로 평가된 타오싱즈의 교육사상과 그 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화 우쉰전 비판에 연루되면서 타오싱즈의 교육사상은 비판적 계승의 대상에서 비판과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는 쁘띠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한 개량주의 교육가로 지목되어 비판되었으며, 그의 교육론은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지 않은 것으로 거부되었다. 타오싱즈의 교육사상이 전면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신민주주의교육 건설에서 구교육의 경험과 전통은 더 이상 활용과 통합의 대상이 아닌, 전면적인 개조와 배제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는 중국의 문화교육노선이 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환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declared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democratic education in accordance with the Common Program of the Chinese People's Political Consultative Conference. New democratic education was conceived to integrate the new educational experiences of the old Liberated Areas, the experiences of the Soviet Union, and the experiences of the old education. The success of establishment of the new democracy education depended on how to critically inherit and utilize the old education. Therefore, the leadership of the new government and the education community showed a special interest in the educational thoughts and activities of Tao Xingzhi(陶行知, 1891-1946), who was regarded as “a great people’s educator”. However, as Tao involved in the criticism of the film ‘The Life of Wu Xun(武訓)’, his educational thought, which was regarded as an object of critical succession, has fallen into criticism and overcoming. Tao was criticized as merely a reformist educator who represented the interests of petit bourgeoisie, and his methods of education were criticized in ways that did not fit the demands of the new era. The overall criticism of his educational thought meant that the experience of the old education had now become the subject of full reform and exclusion in the process of building a new education. This also meant that China's cultural educational policy started to convert into socialism from new democracy.

      • KCI등재

        중화민국 시기 향촌건설운동의 제 양상과 현재적 의미 ― 梁漱溟을 중심으로

        공상철 중국어문학회 2024 中國語文學誌 Vol.- No.86

        근대 중국의 향촌건설 운동은 만청(晩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허베이(河北) 딩현(定縣)에서 ‘관민합작’의 형태로 시작된 이 운동은 1920년대에 이르면 전국에 600여 개의 단체와 1000여 개의 실험지구가 생길 정도로 광범위한 세를 형성한다. 이 시기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안양추(晏陽初), 량수밍(梁漱溟), 루쭤푸(廬作孚), 타오싱즈(陶行知), 황옌페이(黃炎培) 등이 있다. ‘향촌자치’와 ‘평민화’의 깃발을 내걸고 시작된 이 운동은, 그러나 1920년대 군벌의 할거와 도시 상업자본의 향촌 약탈, 세계공황의 여파로 도입한 지폐경제 체제의 붕괴 등으로 인해 그 토대가 사실상 와해된다. 중화민국 시기 향촌건설운동은 이런 대내외적 환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문제의식과 현실적 한계는 공산당 점령지구를 중심으로 이어지면서 극복된다. 본고는 이들의 문제의식과 실천들을 종합적으로 개괄해보면서 이것과 21세기 중국의 ‘삼농’ 논의와의 연접 가능성을 규탐(竅探)해보고자 하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The movement to Rural Reconstruction in modern China dates back to the late Qing dynasty. It began in 1904 in Ding County, Hebei Province, in the form of a “public-private partnership,” and by the 1920s, the movement had grown to include more than 600 organizations and 1,000 experimental districts across the country. Leading figures in the movement during this period included Yan yang-chu, Liang Shu-ming, Lu Zuo-fu, Tao Xing-zhi, and Huang Yan-fei. The movement, which began under the banner of “village autonomy” and “plebeianization” was effectively undermined by the warlords’ dispossession of the villages in the 1920s, the plundering of the villages by urban commercial capital, and the collapse of the paper money economy introduced in the aftermath of the Great Depression. The movement to build villages during the Republic of China was situated in this internal and external environment. Their problems and practical limitations are overcome by their continuation in the Communist- occupied areas. This paper aims to provide a comprehensive overview of their concerns and practices and to explore their possible connections to the “three agriculture” problem in 21 st century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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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와 민생-성취와 한계 ; 민주화와 근로대중의 삶, 국가의 성격

        김재훈 ( Jae Hoon Kim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기억과 전망 Vol.16 No.-

        In democratic society working people can make their union and call for the increase of their wages. Democracy also make economic growth possible with good circle of the increase of consumers` demand and investment. But generally such social accumulation process induces not only the reaction by the rich, but also the problem of balance of payment. In particular, developing countries are apt to suffer such problem. Korea was the case in 1997. And democracy brings about income redistribution policy for working people through their voting activity. But in reality, the economic policy of the democratic government has its boundary of possibility and impossibility, because such policy is operated in the capitalist system by the capitalist state. So democracy is likely to undergo its crisis in the globalized world capitalist system and the situations of the developing countries are worse in particu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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