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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DHD 아동의 정서적 문제에 대한 성경적 상담

        박이정 총신대학교 상담대학원 2013 국내석사

        RANK : 247631

        본 논문은 정서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ADHD 아동들의 근본적인 변화와 회복을 위하여,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가 마음의 동기를 살피고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성경적 상담의 방법을 제안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ADHD 아동에게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성, 충동성으로 대표되는 ADHD의 일차적인 증상 외에도, 우울, 불안, 분노, 낮은 자아존중감, 낮은 자기유능감 등의 정서적 문제들이 이차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이차적인 정서적 문제들은 기분장애, 불안장애, 품행장애, 반항장애 등의 공존장애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대인관계에서의 부정적인 상호작용을 지속적으로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깊이 연구되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선행연구에 따르면 ADHD 아동의 정서적 문제를 다루는 일반적인 방법으로서의 심리상담이, 증상의 완화 및 해소에만 관심을 둘 뿐 아동의 마음 깊은 곳의 동기까지 살피지 못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지 못하는 등 기독교적 관점으로 이해할 때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서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ADHD 아동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세우기 위하여, ADHD 아동의 일반적인 증상과 특성, 원인과 치료방법에 대하여 알아보고, ADHD 아동의 정서적 문제 및 ADHD 아동의 정서적 문제에 대한 심리상담의 이론과 치료기법에 대해 문헌 연구한 뒤, ADHD 아동의 정서적 문제에 대한 심리상담의 한계점을 논하고, ADHD 아동의 정서적 문제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 성경적 상담의 방법을 제안하는 내용으로 연구하였으며, 제안한 성경적 상담의 방법을 적용한 구체적인 상담 사례 2개를 통해 사례 연구 하였다. 주로 부모, 교사, 친구들로부터의 부정적인 피드백과 불안정한 애착, 부모의 부정적인 양육태도 등에서 기인한 ADHD 아동의 정서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성경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기 사랑과 자기 연민, 순종과 감사와 용서를 하지 않는 마음 등의 내면의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ADHD 아동의 정서적 문제를 위한 성경적 상담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고 그에 따라 사례 연구한 결과, ADHD 아동의 정서적 문제를 위한 성경적 상담의 방법이 아동의 정서적인 증상을 해소함은 물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고,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발견하여 꿈을 가지고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근본적인 회복을 이끄는 상담임을 알 수 있었다.

      • 국어의 연어 연구

        박이정 창원대학교 2008 국내석사

        RANK : 247631

        The purpose of this study lies in the examination of the concept of connectives, and according to the concept the connectives were sorted and categorized. Connectives, which are defined as a continuum of selective words requiring a inclusive or exclusive relationship between a word (uninflected word) and another word (inflected word), were examined in terms of the level of the union of the word and the meaning. Also, they were differentiated from the compound words, idioms, sayings, and proverbs. The difference between idioms and common unions were also examined. Unlike idioms which constitute a mutual selective relationship which could have an affect on the union, the connectives were considered to have a certain direction. They could be categorized into common union, connectives, and idiomatic expression in accordance with limitation to the selection of the words and the clearness of the idiomatic expression. ◁표는 원문 참조▷ From type W to Z, type W had connective in the view of the union of word but have an aspect of common union in the view of meaning. Type X had similarity with idiomatic expression in the view of word but had connective in the view of meaning. Type Y was excluded because it was not consistent with the conditions requiring the clearness of the core of connective. Type Z was close to the idiomatic expression because it is unclear both in the views of the word and the meaning. With the unclearness of the core of connective being higher, it is considered idiomatic expression, and types of Y and Z were not considered connective. On the other hand, types of W and X were considered connective.

      • AMOS, LISREL, R을 이용한 구조방정식의 실현

        박이정 중앙대학교 대학원 2014 국내석사

        RANK : 247631

        자동차 중고 시장에서 가격과 엔진 성능, 디자인, 그리고 수행 능력간의 관계를 AMOS, LISREL, R을 이용하여 MLE, GLS 추정 방식으로 비교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AMOS를 이용한 확증적 요인분석을 실시하고, 확증적 요인분석에서 배경 지식 혹은 이론을 근거로 한 각 요인에 대한 타당성을 검증하였다. MLE와 GLS의 특성을 살펴본 후 AMOS, LISREL, R을 이용하여 구조방정식모형에 대한 적합도와 추정계수를 비교하며, AMOS를 이용한 베이지안 추정과 MLE 계수 추정 값도 비교하였다. 이 데이터의 경우 MLE 방법에 따른 프로그램 별 차이는 없었고, 좋은 적합도를 나타냈고, GLS 방법의 경우 프로그램 별 차이가 존재하며, 계산 방식과 적용 방법이 프로그램 별 상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베이지안의 계수 추정과 MLE 계수 추정에서도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데이터의 정규성 혹은 특징을 살펴본 후 적절한 추정방식을 적용하는 것 또한 중요하며, 데이터에 맞는 추정 방식일 경우 프로그램 별 차이는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In this paper, I will use AMOS, LISREL, R to compare relationships between price, engine performance, design and overall car performance in the used car market under MLE, GLS estimation method. To achieve my goal, I will use AMOS to perform confirmatory factor analysis. During the factor analysis, I will test validity of each factor based on background knowledge and theory. I will look over characteristics of MLE and GLS, then use AMOS, LISREL, R to compare goodness of fit in structural equation model and estimated coefficients. I will also compare coefficient estimates under Bayesian and MLE by using AMOS. Using this data, I could not find significant difference between programs and it also showed a good fit under MLE method. However, under GLS method, there was quite a difference between programs and calculation and application methods were also different depending on which program I was using. There was no significant difference in estimation of coefficients under Bayesian and MLE method. In the end, I concluded that It is also important to look over normality and characteristics of data and apply proper estimation method. It is my judgement that when using the proper estimation method, difference between programs is not significant.

      • 17세기 전반기 가사 문학 연구

        박이정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박사

        RANK : 247631

        국문초록 17세기 전반기는 임진왜란이 남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피해를 다스리고 국가 체제와 민생 기반을 재정비해야할 시기였으나 국내외 정세는 안정을 찾기보다는 불안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몇 차례의 전쟁과 정권 교체 가운데 17세기 전반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폭력, 파괴, 무질서를 경험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폭력적 사태 앞에 규범적인 세계가 붕괴되는 것을 경험했으며, 그것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되었다. 17세기 전반기 가사 작품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창작된 것으로 경험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훼손된 것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지, 상실감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등의 문제에 대한 당대인 고민과 선택을 보여준다. 그 면모를 고찰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강호자연과 변란 체험이라는 주요 화제를 두 개의 중심축으로 삼았다. 17세기 전반기 가사 중 다수를 차지하는 강호자연에서의 은일을 노래하는 작품은 앞 시기의 전범이 제시한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양상을 보인다. 앞 시기의 전범을 적극적으로 재현하려는 창작 태도를 보인 경우도 있다. 강호가사의 전통을 확인하고 전범을 재현하는 것은 앞 시대의 풍류를 복원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대 문제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났음을 확인하고 선언하며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다시 확보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전쟁, 반란, 반정 등 당대 여러 사건과 이후 복구 및 재건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사건이나 경험이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기술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극렬한 전투 뒤의 처참함과 피난생활의 어려움, 그 가운데 드러나는 참혹한 인간상 등은 서술 대상에 적극 포함되지 않았다. 작품의 주안점은 주로 시비를 판단하고 해석과 논평을 제시하는 데 놓여 있다. 당대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에서는 상황에 대한 진단이 구질서의 회복을 주창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문제적 상황의 원인에 대한 탐색과 그 해결을 위한 방책을 모색하는 데 있어 기준이 되는 것은 기존의 이념과 질서이다. 이와 같은 양상을 보이는 작품이 유의미한 지점은 그것을 통해 전후 사회상의 문제와 주요 사건에 대한 대사회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양상과 유사한 궤적을 보이면서 특기할 만한 점이 발견되는 작품이 있다. 최종적인 귀결은 은일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갈등하는 내면을 표출한 경우, 당대 상황에 대해 진단하는 대사회적인 발언과 개인적인 문제와 관련된 사적인 술회, 강호자연에서의 은일과 시국에 대한 근심 등 이질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경우 등이 그러하다. 이는 17세기 전반기의 혼란상과 당대인의 불안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면모를 지닌 17세기 전반기 가사는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자기 표현의 장으로서 기능하는 한편으로 작자의 입지와 관련하여 그 위상을 확인하거나 제고의 가능성을 도모하는 방편이 되었다. 왕족, 공신(功臣), 지역 사회의 유명 인사 등과 그 후예로서 지배 질서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작가들은 전란의 상처보다는 그로부터의 회복에 주목했고 과거의 모습을 다시 재현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작업은 사회에서 이들의 위상을 확인하는 역할을 했다. 상대적으로 주변부에 놓인 작가들에게서도 같은 지향을 공유하는 경우를 살펴볼 수 있는데, 이 때 가사는 기존 입지를 강화하고 그 제고를 모색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내면 갈등의 노출, 이질적인 결합 등 주변인으로서의 측면이 투영된 결과를 보이기도 했다. 삶에 영향을 끼친 혼란기의 경험을 작품에 다루며 기억을 가시화하는 작업도 창작 당시 주변부에 위치한 작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가사는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고 해결을 시도하는 장이 되었다. 17세기를 전후한 가사 문학의 흐름 속에서 17세기 전반기 가사의 의미는 16세기 유산의 계승과 이후 가사 문학과의 접점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17세기 전반기 가사에서 앞 시대로 회귀하는 일은 의식적?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시련과 혼란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필요했던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다. 당대 가사 담당층이었던 사대부 계층은 16세기 가사 문학의 유산을 계승함으로써 그 정체성과 문화적 지위를 다시 정립하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유형별 특징이 마련되고 전범적 지위를 부여받은 작품이 등장하면서 높아진 가사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앞 시대의 성취를 계승함으로써 양식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것과도 맞아떨어졌다. 같은 시기 시조, 한시 등에서도 유사한 국면이 관찰된다는 점은 앞 시대의 작품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당대 문학사에 있어 주요한 화두임을 확인하게 한다. 17세기 전반기 가사에서 서로 다른 지향을 나타내는 목소리가 내적 갈등을 드러내고, 이질적이고 때로 상충되는 요소가 혼재하는 양상은 개별적 자아로서의 의식과 시선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양적 확대, 작가층의 다변화, 장편화의 기반이 되었던 개인적 기호와 취향, 감성과 경험에 대한 관심의 단초로서 이후 가사 문학을 예고했다.

      • 朝鮮後期 面里任의 役割과 地位

        박이정 慶星大學校 敎育大學院 2003 국내석사

        RANK : 247631

        조선후기 面里制나 面里운영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 초부터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선후기 면리운영의 담당자였던 面里任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그것도 대개는 조선후기 면리제나 향촌사회 권력구조변동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부수적으로 면리운영의 담당자인 면리임에 대해 언급한 정도였다. 그 결과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의 면리임의 위상이 보다 종합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못하였다. 특히 선행연구들의 대상 시기가 17세기나 18세기, 또는 19세기에 한정되어 조선후기 守令의 향촌통제 첨병이었고, 面里운영의 담당자이자 賦稅운영의 말단 책임자였던 면리임에 대한 좀 더 총체적인 이해와 정리가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본고는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먼저 조선후기 면리임이 어떠한 명칭으로 불리워졌으며, 향촌내에서 담당하였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으로 어느 계층이 면리임직을 수행하였고, 이들이 부세운영을 중심으로 한 향촌운영을 통해 수령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또 民과 在地兩班層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파악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향촌내에서의 면리임이 차지하는 위치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먼저 조선후기 面里의 새로운 지역적 편제의 진행과 함께 그 명칭과 직능은 더욱 다양화 · 세분화되어, 17세기 「五家統事目」에서 보이는 都尹 · 副尹이외에 風憲 · 約正 · 勸農 · 有司 · 尊位 · 里正 · 都將 · 譏察將 등 다양한 명칭의 직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명칭들은 지역적으로 다양한 편차와 함께 명칭간의 혼용현상을 보였는데, 이는 새로운 면리편제의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후 점차 확실해져 가게 된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면임 · 이임이라는 명칭을 그 자체로 쓰는 곳도 많았다. 명칭의 다양성과 함께 면리임의 역할도 다양화 · 체계화되어 갔는데, 官令전달 · 戶口파악 · 租稅의 분급과 징수 등 제반 행정적인 역할뿐 아니라, 농민의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勸農과 생산수단의 관리기능, 그리고 재지세력을 견제하고 장악하기 위한 鄕風敎化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기초적인 裁決權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면리임의 역할은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민정보고와 관령전달 그리고 부세수취 등 행정적인 쪽으로 한정되어 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면리임직이 점차 평 · 천민의 직임으로 고정화되어 간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면리임층은 향촌의 부세운영을 담당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노정시키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田政에서의 隱漏結의 발생, 實結의 확정과 結價算定과정에서의 작폐, 養戶 · 防結, 그리고 閑丁代定시 수뢰행위와 그로 인한 闕額 · 加徵 · 勒徵, 還穀분급과정에 있어서 작간에 의한 책환과 逋欠, 民庫田 등 잡역세운영에 있어 작폐 등으로, 이는 黃口 · 白骨 · 族徵 · 隣徵을 야기시켜 民들의 몰락을 초래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 전시기에 걸쳐 면리제를 통한 지방지배정책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중 하나는 재지양반층을 면리기구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양반층은 면리임이 중앙권력의 대행자인 수령의 감독과 침책을 받는 입장이었고, 직능도 일반민의 직역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班常간의 차별론을 내세워 면리임에의 임용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반층의 謀避로 인해 대개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면리임은 '양민중 부유한 자' 즉 饒戶富民 중에서 담당하여 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이러한 면리임직을 통해 役을 모피하고 나아가 수령권과의 결탁을 통해 자기 성장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에 이르면 면리임직은 거의 모두 이들 서민계층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면리임 특히 면임은 수령에 의해 차임되는 官任的 존재였지만, 수령과의 관계로 볼 때 이들은 관임으로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면리임은 주로 수령의 지시를 받아 各里를 감독하고 조세수취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수령에게 직접 부림을 당하는 下手人的인 지위에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수령과 유착관계를 맺지 못한 경우 오히려 침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면리임의 지위는 지역에 따라 특히 재지양반층의 세력정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양반층이 별로 없었던 北關 등의 지방에서는 風憲이 道를 論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양반토호세력이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호서지방 등에서는 閑丁에서 빠진 자가 향소나 양반가에 투탁해 있는데도 면임과 관리가 감히 두려워해 색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특히 18세기 말 19세기 단계에 있어 면리임이 향촌사회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역시 이 시기 새로운 계층에 의해 장악되어 간 鄕所(鄕任)와 함께 수령과 吏 · 鄕층 중심의 수탈구조의 하부주체로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 면리임이 담당하였던 역할과 지위에 대해 간략히 고찰하였다. 그런데 향촌운영의 실태는 면리임만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留鄕所(鄕任)나 鄕吏와의 관계, 더불어 지역에 따라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在地兩班층과의 관계가 특히 부세운영과 관련시킬 때 보다 천착이 요구된다. 그것을 통해 부세운영상에 있어 면리임의 역할과 향촌사회에서의 지위가 보다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조선후기 면리임의 역할과 지위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역 사례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 같다. 본고는 그렇지 못한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조선후기 면리임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하나의 경향성만을 파악하는데 그쳤다. Myun Lee Im(面里任) was diversified and fractionized with progress of reorganization of the Myun Lee(面里) in the late Chosun Dynasty. It had kept not only the various administrative role of a messenger, a census, the tax collection and so on, but also had played the role of encouragement of agriculture, the control of productive means and the enlightenment of public moral, and had preserved a fundamental authority to decide. The role of Myun Lee Im, but, is likely to be limited gradually to the administrative part, and it is considered that the position of Myun Lee Im would have a relation with the fact that it was becoming, little by little, as a post of the common people and the lower people. It seems that the riches among law-abiding citizens(良民) was generally in charge of the position of Myun Lee Im from the middle of 18th century, because of an artifice of Yangban Class(兩班層). They attempted to shirk their services through Myun Lee Im and moreover they tried to plan their own growth through the collusion with the chief magistrates. Myun Lee Im, specially Myun Im(面任) was an official being which was nominated by the chief magistrate, but when seeing with relationship with the chief magistrates, they had a somewhat limited power as an official being. Myun Lee Im mostly had received the instruction of the chief magistrate, had controlled each Lee(里) and had taken charge of taxes receiving. Therefore they was a kind of subordinate whom the chief magistrates directly employed. Specially, if they did not enter into a relation with a chief magistrate, they rather had become the target of pillage. There was also a difference little by little in a position of the Myun Lee Im according to the area, specially according to the degree of the power of Yangban Class. Nevertheless the position of Myun Lee Im at the local societies in Chosun Dynasty, in particular in the later of 18th century and the 19th century, could be considered as a sub-subject of plundering structure in which a chief magistrate and li-Hyang(吏-鄕) Group were a l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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