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예수 운동에 나타난 공동체 영성,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떻하면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라는 큰 질문을 담고 있다. 창조때부터 공동체로써 지음 받은 인간에게 더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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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학위논문(석사) --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 신학석사(M.Div)과정 , 2006
2006
한국어
235.8 판사항(4)
261 판사항(21)
서울
102p. ; 26cm
참고문헌: p. 99-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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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예수 운동에 나타난 공동체 영성,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떻하면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라는 큰 질문을 담고 있다. 창조때부터 공동체로써 지음 받은 인간에게 더불어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온 인류의 염원이며, 창조의 목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서 속에서나 인류의 문명사를 돌아볼 때, 인류는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이는 더불어 행복하기위해 창조된 하느님의 공동체 속에서도 힘의 논리에 의해 소외되고,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많은 약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이 인류의 가장 큰 타락이고, 반드시 부활시켜 내야할 역사임을 그 아무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역시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모든 인류가 사랑하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하느님 나라를 소망했고, 하느님의 공동체 속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이들을 다시 공동체 속으로 복귀토록 한 것이 본인이 생각하는 예수의 구원 사역이었다. 이를 위해 예수가 택한 방법은 바로 밥을 함께 먹는 밥상공동체 운동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잔치집의 신랑인 것처럼 소외된 사람들과 잔치를 나누었고, 그러한 삶을 축제로 받아들였다.
이런 바로 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써 본인의 관심은 예수의 사역속에 나타난 밥상공동체 운동에 있었고, 이 운동의 모습을 통해 오늘 날 나와 너가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적 영성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의 해답으로의 밥상공동체는 그리 간단치만은 안아서 선행되어져야 할 많은 이해들과 연관된 질문들이 본 논문 속에서 제기되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우선 공동체란 무엇이며, 예수운동은 과연 공동체운동이었는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가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적 의미로써 사용한 '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이스라엘(히브리인)에게 있어서의 밥의 의미와, 이것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를 통해 구약의 토양 속에서 태동된 예수가 인식했던 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신약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가 행한 밥상교제의 모습들과, 관련된 비유의 내용들을 확인해 보았고, 예수시대를 건너뛰어 예수운동의 영향을 받아 초대교회 공동체 속에서 행해진 밥상공동체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의 원형인 초대교회 공동체의 형성에 있어 밥이 지닌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으로 역사적 예수가 1세기 찰레스틴에서 행한 밥상교제를 통해 그 속에 담긴 사회학적, 신학적 의미를 밝혀보았고, 이런 이해 속에서 예수의 밥상교제가 지닌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예수의 밥상공동체 속에는 메시아 연회의 상징이 담겨있으며, 예수 죽음의 한 원인이 되었음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예수의 밥상공동체 운동의 분명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서야 본 논문의 목적인 공동체적 영성을 담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본 논문은 밥상공동체 운동의 원리 속에 나타난 나와 너의 사귐의 모습,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선행 되야 할 밥이 지닌 올바른 정의, 그리고 이 운동 속에 나타난 서로살림의 모습인 밥을 통한 생명을 주제로 고찰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구약성서가 히브리 민족의 밥의 역사였다면, 한민족의 반만년 밥의 역사가 빚어낸 한국 민중들의 고유한 밥상공동체인 두레 공동체를 통하여 이미 우리의 의식 안에 내제된 밥의 영성을 발견해 보았다.
살펴본 대로 인류는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혼자 있기 보다는 더불어 있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풍성히 나누기 위해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모시고 이웃과 함께 그리고 자연과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그러나 인류는 음식을 통해 타락 했고,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 후에도 하느님은 밥을 갈구하는 히브리 민족을 통해 인류 역사 속에서 공동체의 창조를 다시 드러내셨고, 그 도구는 바로 밥이었다. 또한 이러한 밥의 역사를 통하여 창조공동체를 회복하려 하신분이 바로 예수였다.
하느님의 역사의 관여는 밤이었다 에덴의 평화로운 밥상이 깨진 이후에도 하느님은 히브리 민중을 통해 그것을 갈구하도록 하였고, 그 갈망은 히브리 민중의 삶 속에서 평화-혼돈-외곡이라는 도식으로 나타났고, 결국 이는 인류 역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밥의 역사는 히브리 민중 속에서 스스로 싹이 난다. 억압과 수탈의 땅 갈릴리에서 밥의 정의를 실현할 메시아가 준비되었다. 이것은 밥의 외곡이 만들어 낸 필연적 결과였다. 예수는 민중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일으켰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굶주림 즉 밥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고, 구약성서적인 하느님 나라 표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는 마치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모든 사람에게 푸짐한 잔치를 베풀어 주려는 것처럼 살았다. 예수는 이들과 밥만을 나누어 먹은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 하나가 되어 삶을 함께 나눈 것이다. 밥을 함께 나누는 것은 버림받은 굶주린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연대를 나타낸 것이다. 예수는 질병, 굶주림, 압제로 인한 민중의 고통을 현실적인 고통으로 받아들였고 이 고통과 씨름했다. 질병, 굶주림, 그리고 압제는 가장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고통이며, 예수는 이 고통을 하느님 나라와 직결시켰다. 이렇듯 예수의 밥상공동체는 자주 하느님 나라와 비교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밥상공동체는 비유라기보다는 사회적 실체였으며, 단순한 교훈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노만 페린의 연구처럼 예수는 버림받은 자들을 다시 공동체 속에 회복시키기 위해 죽음으로 가져간다. 이렇듯 예수에게 있어 공동체는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밥상공동체의 결과는 초대교회 공동체로 이어진다. 초대교회 공동생활의 특징은 함께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밥을 나누었고, 그럼에도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과 공동체의 삶이 부활한 예수의 현존으로 이해되었다는 점, 그러고 공동식사는 예배모임의 일상적인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점은 초대교회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으며 예수운동은 이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해방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지 않았다면 재테크 운동가 예수, 문화 운동가 예수가 등장했지. 초라하게 단지 밤을 함께 먹는 밥상공동체로써 자신의 목적지를 꿈꾸던 예수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 운동은 밥(물질)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시작된다.
결국 영성이라는 것은 하느님을 통해 나와 너가 만나는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하느님의 본질이며 영성이다. 예수의 밥상공동체 속에는 이 모든 영성이 들어있다. 이 영성의 도구로서 밥은 사귐의 영성을 가진다.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나와 너는 통할 수 있다. 즉 밥을 나누는 것은 모든 물질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밥은 정의와 평화를 이룬다. 정의가 이루어지면 평화는 당연히 따라온다. 정의는 바로 밥을 원래의 창조의 모습대로 나누는 것이다.
밥은 생명을 지닌다. 성만찬에서 자기를 온전히 내어 즘으로써 우리의 밥이 된 예수는 공동체의 화신이고 원천마다. 서로살림(상생)을 위해서는 나를 네게 밥으로 주어야 한다. 대자연의 생명과 생태계적 순환에는 서로를 살림과 나를 합으로 내어줌(희생)이 있다.
예수는 죽음을 압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눈다. 예수의 죽음은 대속적으로 만이 아닌 밥상공동체 적이기도 하다. 그의 몸은 함께 먹는 밥이며, 그의 피는 함께 마시는 포도주다. 예수가 죽음으로 밥상공동체가 소멸한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밥상 공동체로 육화 되었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는 사상이나 정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성만찬에 까지도 그리스도와 밥은 결합된다. 이것은 하늘(하느님 나라)과 땅(현실)의 결합이며, 이 둘을 갈라놓는 불의한 체제에 대한 혁명이다. 이로 인해 밥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피 흘리는 이들의 피와 살이 성만찬에서 예수의 피와 살과 함께 하나가 되며, 이천년 전의 예수와 오늘의 나가 결합된다.
인류는 지구촌의 생존을 위해서 세계적으로 밥상공동체를 실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나와 너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가 살아갈 수 있는 도구는 바로 예수가 행한 밥상공동체이다. 이러한 오늘, 이시대의 밥상공동체는 우리 인간 스스로의 제도의 혁신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점적 사유재산의 맹신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인류 역사 속에서 매우 예외적인 오늘날과 같은 사유재산 제도는 헌대 산업사회에서 나타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간은 이기적 경쟁적 성향을 갖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 속에는 서로 돕고 나누려는 공동체적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 인류는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데서 돕고 나누려는 형태의 인생관으로 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이 무너져야 하고, 여성들이 앞에 나서야 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영성이 밥상(사회제도)에 나타나야 한다. 밥상공동체의 원형인 교회가 변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민족의 밥상공동체에 역행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21에서 두 개의 식탁을 첨예하게 대조시키는데, 두 식탁이란 바로 '주님의 식탁'과 '마귀의 식탁'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식탁에 초대하신다. 그분께서는 맘몬이 차려놓은 불의와 불평등과 차별의 식탁을 거부하시고 모든 인류가 주님의 식탁에 앉기를 바라신다.
이상으로 본 논문이 제기한 예수의 밥상 공동체 운동은 인간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에서 해방하여 진정한 일치의 기쁨을 주는 운동이다, 이는 자기중심성에서 해방시키는 해방운동이고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 체제를 근원적으로 혁신하는 나눔과 섬김의 운동인 것이다. 밥은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의 귀한 도구이며, 예수와 같이 밥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우리가 발 밀고 있는 인류의 에덴동산 안에 잠재된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치유는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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