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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로마서주석』 제2판에 나타나는 교회론 연구
김문영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국내석사
이상으로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 7장과 9-11장에 나타나는 교회에 대한 바르트의 이론을 살펴보았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바르트는 대학에서 하르낙과 헤르만에게서 자유주의신학을 배웠다. 특히 역사-비평학적 성서연구의 방법을 초기 사상형성기에 이미 통달했다. 바르트는 이를 통해서 『로마서 주석』 에서 전통적인 영감설과 역사-비평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새로운 성서해석을 시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초창기에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를 가치상대주의와 개인주의라는 문제를 통해서 인식하고 있었지만 꽤 오랫동안 자유주의신학 노선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자펜빌에서의 목회를 통해서 종교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는 종교사회주의자가 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서 인간적인 노력을 통한 방법을 상용했던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사회주의에 대한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고 특히 그의 스승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지지하는 상황과 사회주의자들도 민족이라는 이름 앞에 분열하고 전쟁에 동조하게 되면서 바르트는 자유주의신학과 종교사회주의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통한 방법을 포기하고 매주 설교를 위해 읽게 되는 성서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여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로마서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신학의 길을 시작하였다. 둘째,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으로 하느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인식하여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라는 새로운 명제를 통해 교회를 다시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느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에서 구원의 방향이 인간에서 시작되어 하느님에게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서 하느님이 인간을 만나시는 사건으로 정의하였다. 즉 바르트는 어거스틴에서 시작하여 종교개혁자들로 이어지는 신 중심 신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인간중심의 당시 교회를 개혁하는 하느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셋째,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에서 교회의 의의를 인식 불가능한 신적인 것을 지시하고 비유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역할은 인간이 인식 불가능한 하느님을 찾는데 실패하고 스스로의 종교성으로 인해서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대체하는 종교의 한계성내에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는 교회의 본래적 한계와 죄과를 지적한다.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로 인한 종교의 한계성이 교회의 곤경이며 이를 통해 교회의 죄과가 나타나게 된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종교의 한계와 죄과는 인간의 피조성과 죄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전적인 하느님의 자유에 의해서 교회는 하느님의 심판에 처하는 상황에 처했음을 지적하였다. 넷째,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 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은 인간을 만나주시고 스스로를 계시하시기 때문에 바로 교회의 죄과가 드러나고 인정되는 곳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신다고 말한다. 즉 교회의 한계와 죄과를 드러내시는 하느님에게서 다시 교회의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 다시 갱신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인데 이 기회를 갖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회개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교회의 상황을 "어둠 속에 항상 빛이 있었으니 문제는 교회가 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것으로 정리한다. 다섯째, 바르트는 믿음을 "믿음으로부터, 믿음을 통해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니, 우리가 그를 파악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분 그대로의 그를 두려워하고 사람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믿음은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일반적 정황을 의미하며 심판 아래 복종함을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따라서 교회가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한 필수조건을 이러한 믿음으로 제시하였다. 바르트는 루터와 칼빈의 이론의 영향을 받아서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면서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 즉 제도화된 교회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비가시적인 "야곱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전적으로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복종하는 믿음을 통해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을 『로마서 주석』 에서 발견하였다. 바르트가 이야기한 믿음의 핵심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만날 수 없으니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모든 인간적 노력은 의미가 없는 것이며 이는 오히려 인간을 죄로 인도한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니 스스로를 감추는 방법으로 그의 자유와 은혜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에게 온전하게 복종하는 것인 믿음을 통해서 그분에게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교회는 하느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거룩한 장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노력이 교회를 채우게 될 때 인간의 종교성에 의해서 인간은 죄악에 빠지게 되는 상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바르트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올바로 지시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교만함을 버려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회의 상황은 바르트가 비판한 그 교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교회의 거룩함의 근원이요,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과 하느님의 의는 사라지고 이러한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돈, 명예, 행복 등등 인간적 의가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교파로 나뉘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알고 있다고 하는 착각 속에서 서로 비방하고 서로를 이단이라고 너무 쉽게 정죄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오히려 그들은 스스로의 죄과를 가지고 하느님의 심판 앞에 이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하느님으로 받은 계시의 불완전함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가 하느님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국 바르트가 지적한 것처럼 교회를 오히려 죄과로 몰아가게 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바르트에게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하느님 앞에서 의로울 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하며 겸손이라는 교회의 전통적 미덕의 가치를 재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세상을 섬기고 나눔에 앞장을 서야 할 교회가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 몰두하여 교회가 스스로 목적화하는 죄과를 범하고 있다. 설교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값싼 은혜를 통해서 가짜 교인들을 양산하고 이를 통해 교회를 살찌우느라 바쁘다. 서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교회에 성장주의가 도입되어 '성장하는 교회가 참교회'라는 이상한 판별법이 생겨나게 되었고 성장이라는 단어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성장의 목적을 대부분의 교회가 스스로의 사명이라 칭하는 선교에 두고 있는데, 이 선교도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기에는 교회를 세우고 확장시키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크다. 하느님의 구원의 사역에 스스로의 힘을 더 할 수 있다는 이러한 태도는 매우 위험한 태도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다른 어느 곳의 교회보다 기도와 예배가 많이 드려진다고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매일 새벽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교회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지만 과연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그것을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는 얼마나 될까? 오히려 스스로의 복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이웃과 세상을 섬기라고 했는데 오늘날 한국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기도는 이웃과 세상을 정복하고 스스로를 살찌우는 기원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연구를 통해서 본인은 서론에서 밝힌 "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는 오지 않는가?", "이 땅에 하느님의 백성이 이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변화는 어려운가?"라는 문제의 해결을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서 찾을 수 있었다. 즉 하느님은 그의 전적인 자유 안에서 그의 무한하며 절대적인 주권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고 계신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의 방식이 아니라 교회가 이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오늘날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장이라는 잘못된 목표 속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죄과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교회 역시 한계 상황 속에서 죄과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이제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을 통해 우리는 다시겸손을 깨달아야 할 것이고 이를 통해 진정 이웃과 세상을 섬기고 하느님의 뜻을 지시하는 본래의 사명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의 기독교 영성 : 종교간 대화와 성숙한 자기영성을 위한 신학적 모색과 성찰
방홍식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4 국내석사
이 글의 목적은 종교다원주의적 상황에서 기독교 영성에 대한 신학적 고찰과 성찰을 통해 성숙한 자기 영성을 심화시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을 다루었다. 먼저, 우리가 처한 종교적 현실이 종교다원주의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개념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일반적 의미에서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다양하게 공존하는 종교 다양성의 시대이므로 어느 특정 종교가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주장 할 수 없다는 종교에서의 가치중립적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는 종교다원화 현상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다원적인 종교들을 동인한 지평(地平)에서 보며, 다원적 종교들의 궁금적 실재를 주장하는 종교적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근거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첫째는 존 힉(J. Hick)이 주장한 것처럼 모든 종교는 문화의 산물이므로 종교적 절대성을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종교 문화적 개념이며, 둘째는 피터 버거(P. L. Berger)의 종교 사회적 개념이해가 그것이다. 따라서 두 입장을 통해 더 이상 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시대는 지났으며, 또한 한 종교만이 독점적인 위치를 점유하며 신앙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의 출현요인은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사회 문화적 요인과 문화 인식적 맥락이 그것이다. 이것은 서구 사회의 사상적 흐름과 한국 사회의 종교적 배경에서 그 연유를 찾아볼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가 갖는 의미와 이중성은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신앙이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우월성에서 벗어나 신앙의 혼란과 혼돈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에 대한 겸손한 품성(品性)을 갖게 함으로써 다양한 사람들의 신앙적 “삶의 자리”와 “삶의 상황”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이중성은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이 신앙과 접맥(接脈)될 때 갖게 되는 위험성을 의미한다. 즉, 다원주의라는 문화 ‘형식’을 통해서 종교의 넓이를 확보했지만, 종교의 ‘실체’ 즉 그 깊이를 간과하는 우이기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다음에 언급되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이해와 중심이다. 먼저, 일반적인 영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 말을 사용하고있는 문맥과 상황에 맞는 규정을 어느 정도 설정한 다음 사용해야 그 관계상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영성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의 수준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실제의 수준에서 인간 인격의 통합을 이루려는 인간 마음의 깊은 열망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경험, 사건, 노력들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영성은 서구 사회의 사상적 내력 속에서 그리고 한국 사회의 일반적 근대사회에서 억압을 받으며 뒤틀린 영성으로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영성의 부재(不在)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결국,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개인 영성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 영성은 공동체와 개인을 회복하고 치유(治癒)하기 위해 요청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 영성을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말하려는 것은 이웃종교와의 만남과 대화에서 자신이 믿고 신앙하는 종교에 대한 정체성(正體性)을 확인하며, 이웃종교와의 ‘다름과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라고 한다면, 하느님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성령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적 신앙이 그 독특성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웃종교와 구별될 수 있는 기독교의 독특성(獨特性)이면서 정체성(正體性) 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 영성은 앞서 언급한 내용을 전체로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기독교 영성이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성서(聖書)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주제와 내용이 성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기독교 영성의 원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로부터 기독교 영성의 다양한 특성이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의 기독교 영성의 두 모습을 지적 할 필요가 있다. 첫째, 경계해야 할 함정(陷穽)으로 종교적 혼합주의(混合主義), 몰이해적(沒理解的) 상대주의(相對主義), 그리고 종교적 우월주의(優越主義)가 그것이다. 둘째, 긍정적 의도와 양상(樣相)은 만남과 대화를 통한 이해. 평화와 치유(治癒)를 위한 연대 가능성. 그리고 ‘다름과 차이’를 통한 신앙적 영성 향상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의 성숙한 자기 영성을 위한 신학적 모색과 성찰은 어떻게 시도할 것인가. 이를 위해 두 가지로 구분하여 설정해보았는데, 그것들은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의 ‘신학하기’와 ‘일리지평(一理地平)’에서의 만남과 대화: 말(言)과 글(書)이 그것이다.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 속에 자리 잡게 되는 신학하기의 실천적 자기 모색과 성찰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을 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신앙과 종교적 경험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성숙하지 못할 것이다. 씨앗처럼 작은 신앙의 경험은 신학이라고 하는 지적 잡업을 통해서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하기’를 통해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이웃종교에 대한 ‘다름과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며, 자신만의 독특한 무늬를 연출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성숙한 자기 영성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일리지평(一理地平)에서의 만남과 대화: 말(言)과 글(書)을 통한 모색과 성찰은 이웃종교간에 갖게 되는 만남과 대화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웃종교간의 만남과 대화는 결국, 말과 글의 만남이며 대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낯선 이웃종교에 대한 말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내적 자세가 관용적(寬容的) 영성이며, 말의 진정성(眞正性)이라 할 수 있다. 즉, 만남과 대화의 장(場)이 말의 진정성에 따라 풍성할 수도 있고 속절없이 가벼울 수도 있다. 곧 말의 부재(不在)는 대화의 부재를 가져오는데, 이는 관용적 영성의 결핍에서 나오는 결과인 셈이다. 왜냐하면 독선적인 말은 말을 하되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웃종교간의 만남과 대화의 장에서 또 다른 만남과 대화의 유형은 글(書)이라 할 수 있다. 글은 침묵(沈黙)의 언어이다. 따라서 글을 통해서 우리는 생각의 깊이나 내면의 풍경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나와 다른 ‘일리지평(一理地平)’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인 것이다. 글을 통해서 만남과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이라면, 독선적 편견(偏見)에서 벗어나 자신(우리)이 터한 ‘일리지평(一理地平)’에서의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 자신(우리)의 시각에서 글을 써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글쓰기는 자기가 속한 종교적 영성의 의의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며, 결국 이것은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의 ‘성숙한 자기 영성’을 고양(高揚)시키기 위한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박광준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7 국내석사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새로운 '밀레니엄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의 미래사회는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그리고 그에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답을 찾고자 수많은 논의들을 거쳐 왔다. 특별히 오늘날의 사회는 해체주의적 성격의 포스트모더니즘, 과학의 급진적인 발전, 대담하고 역동적인 예술적 표현은 N세대(Network)나 포스트디지털세대(PDG)와 같은 신종 세대를 만들어 냈고, 음악, 미술, 멀티미디어, 건축 등에 있어서도 새로운 형식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변화의 급물결 속에서 교회라는 공동체 역시 결코 이러한 변화의 흐름 밖에 존재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이렇듯 변화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교회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마땅히 교회는 사회 안에서. 사회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우리는 그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몇몇 교회들만이 이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며, 여전히 대다수의 교회들은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모든 건축물이 사회와 유리된 채 독립된 구조물로써 존재 할 수 없듯이, 한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 속에 자리한 교회 역시 이를 간과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교회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를 고려할 때, 오늘날의 교회는 사회 속에서 공공을 위해 열려져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는 정말로 많은 수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으나 주일과 특정일을 제외한 날이면 그 공간은 굳게 닫힌 채 비어 있는 실정이며, 여전히 교회는 특정인들, 소수의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만의 공간이 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와 교회 공간이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임을 고려한다면, 세속화로 특징 지워지는 현대사회 속에서 성스러운 공간으로서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은 사회에 문을 열고 그 맡겨진 사명을 올바로 수행해 나갈 때 진정한 그리스도 공동체의 회복과 지역사회의 회복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이에 현대교회의 의미와 교회건축이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제2절 연구 범위 및 방향 본 연구에서는 교회건축의 공공성에 대한 중심적인 틀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선교'라는 개념과 연관지어, 특별히 '하느님의 선교'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살펴본다. 그리고 '교회건축의 공공성'에 대한 방향을 교회의 존재 의미와 관련하여 세상을 향한 봉사와 선교라는 관점에서 이를 점검하는 것으로 그 범위를 제한하고자 한다. 이에 제Ⅱ장에서는 일차적으로 교회의 존재의 기반과 터전이 되고 있는 우리의 삶의 자리인 현대사회와 우리가 몸담고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문화에 대하여 그 의미와 특징을 살펴본다. 그리고 제Ⅲ장에서는 교회와 관련하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등장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교회의 의미(교회론)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리고 교회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은준관의 이론을 그 기초로 하여 살펴본다. 그 후 이 글의 주제인 오늘날의 현대사회 속에서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바인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를 선교라는 측면과 결부지어 이를 고찰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선교의 의미를 살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선교의 의미가 매우 넓기 때문에 그 범위를 하느님의 선교 신학에 대한 입장으로 제한하여 이를 휘체돔과 호켄다이크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피고, 하느님의 선교 신학의 한계도 알아본다. 그리고 교회건축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하여, 선교적 차원에서 통전적 선교를 그 귀착점으로 바라보며, 지역교회로의 변화를 모색한다. 제Ⅳ장에서는 건축에 있어서의 공공성 개념에 대한 개념적 정리와 이해를 통해 바람직한 교회건축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나아가 교회건축의 방향성을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해 특별히 여기서는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한 교회건축에 대하여 그 기능 및 표현, 상징적 측면에 대하여 정시춘의 생각을 바탕으로 이를 살펴본다. 제Ⅴ장에서는 현대사회 속에서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바에 의거한 교회건축이 나아갈 길인 교회건축의 공공성에 대하여, 공공신학을 그 근거로 그 개념과 이를 뒷받침하는 신학적 이론의 근거로서 몇몇 현대 신학자들의 이론을 통해서 이를 살펴보고, 교회와 지역사회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개방성과 지역성의 관점에서 이를 분석해 본다. 끝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 속에 놓여 진 교회가 이에 발맞추어 나가기위한 방법과 그에 따른 교회건축에 관해서도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이 원규의 이론에 의해 살펴볼 것이며, 이를 통해 오늘날에 요구되는 바람직한 교회 상을 그려보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음악치료를 통한 목회방법 연구 : 정서장애아의 피아노학습을 중심으로
이주영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국내석사
'삶은 치료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란 존재가 형성되는 순간은 가장 건강한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는 순간인데, 그 처음의 '건강함'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성장시키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삶은 치료와 관계되고 그 관계성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끈질기게 이어진다. 본 연구자는 이런 사실을 토대로 하여 음악치료를 중심으로 한 목회 방법을 연구했다. "왜 음악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했고, 그에 대한 답으로 음악은 조직된 소리의 진동으로 구성되고, 그 움직임으로 들려지는 에너지임을 강조했다. 그 역동적인 힘이 치료적인 목적에 사용되고 특유한 물리적, 음향적 속성을 갖는다. 음악치료사는 이러한 속성을 사용하여 클라이언트의 진체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거나 객관적 경험으로서 음악을 사용하여 신체적, 감정적, 심리적, 정신적인 모든 면에 작용하게 한다. 음악치료의 정의는 "정신과 신체건강을 복원 및 유지시키며 향상시키기 위해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다."가 자주 사용되지만 아주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음악치료는 음악과 치료의 혼합이라는 면에서 지극히 예술적이며, 또한 과학적인 방법이다. 음악치료는 치료환경, 클라이언트의 배경과 문제, 치료 목적, 그리고 치료사가 가진 철학에 따라서 그 접근법이 다르다. 그래서 그 접근법을 행동과학적, 인지적, 정신역동적, 인본주의적, 생의학적으로 관찰했다. 이런 철학을 근거로 한 접근법은 내제 된 동기(intrinsic motivation)를 자극하여 음악적 과제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학습된 음악적 기술들을 음악 외적 환경으로 전이(transference)시키는데 그 목적을 둔다. 그리고 음악치료의 과정 및 방법에 대해 살계보았다. 그 과정은 음악치료 의뢰가 선행되고, 치료사와의 유대감(rapport)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며, 클라이언트를 진단평가(assessment)를 시행한다. 다음으로 종합적인 평가에 의한 치료목표(goal)을 설정하고 클라이언트를 심도 깊게 관찰(observation)한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접근법들을 고려한 음악치료기법(strategies)을 클라이언트에 맞게 적용한다. 음악치료 적용 계획서를 작성하고 실행한 후 최종평가를 거쳐 음악치료는 종결된다. 음악치료방법은 COS(Clinical Orff-Schulwerk), 창조적(Creative), 즉흥음악치료(IMT), E. Boxill, GIM(Gulded Imagery and Music)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21세기적 목회방안으로 '건강함'과 '전문성'을 강조했는데, 특히 고령화시대의 심각한 노인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3개의 사례를 통하여 음악치료의 이론과 실제의 균형 있는 임상경험을 살펴보았는데, 3개의 사례들은 특이하게 피아노 학습을 겸하고 있다. 사실 음악치료와 음악교육은 시행목적에서 그 차이점이 있지만, 사례에서의 음악교육은 음악지식과 기술습득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음악교육에저 벗어나 있고, 차라리 음악성 계발, 창의성계발, 음악적 정서의 함양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하여 내재된 '음악아동'을 만나고 모자라는 부분을 계발하고 촉진하여 성장, 발전시킨 것이다. 이것은 음악치료의 전문성과 정체성(正體性)에 따른 치료의 영역을 보다 넓고, 깊게 형성하게 하였다. 목회의 오랜 전통 중에 '심방(尋訪)'이란 것이 있다. '심방(尋訪)'의 음과 훈은 찾을 심, 찾을 방이다. 즉 나를 찾고, 하느님을 찾는다는 의미이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그 순간 하느님의 임재를 깨닫는 것이다. 대한성공회에서는 1년에 두 차례 봄, 가을에 '심방(尋訪)'을 실시한다. 본 연구자가 사례에서 보인 방문레슨의 성격은 이런 '심방(尋訪)'과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전통적인 '심방(尋訪)'은 목회자가 교인의 요청에 의해 그 집을 방문하여 기도하고 여러 가지 상담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기존의 그것은 꾸준한 성실성에 의한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음악치료의 효과나 그 특징과 방법은 가설이 아니라 이미 50여년에 걸쳐 연구되어지고 입증된 결과이다. 단지 아직 목회적 관점으로 인식되어지지 않았고, 성공회 내에서 시도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낯설기만 한 것이 현재 교회의 상황이다. 목회의 한 방법으로 음악치료가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전문적인 음악치료사로서의 목회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전문가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시설이 대한성공회 내에 필요함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자는 목회에 음악치료를 도입하는 이런 시도를 통하여 또 다른 차원의 목회방향을 모색하고 기존의 음악치료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패러다임을 기대한다.
스콜라 철학과 중세 고딕 건축 이미지와의 상관관계 연구
김희철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7 국내석사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교회의 모습(건축양식)은 시대의 사상과 그에 따른 이미지에 의해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실재론적인 신학을 가졌던 중세에 고딕이라는 양식이 출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신의 현현과 하늘과 맞닿은 땅의 만물들의 계층성 그리고 수많은 장식들의 상징 등 고딕은 철저하게 실재적 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본 논문의 처음에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땅에 지어진 수많은 고딕외형을 가진 개신교회들은 과연 고딕에 맞는 교회론을 가지고 있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고딕은 중세시대에 어울리는 양식이었고 그마저도 유명론의 등장과 함께 더 이상 축조되지 않았던 양식이다.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땅 위에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중세의 교회에 반기를 들었던 루터와 칼뱅의 교회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루터와 칼뱅의 교회론이 특별히 오늘날 개신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를 살펴보는 것은 현대의 개신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교회론을 왜곡하고 있는지를 반추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1) 루터와 칼뱅의 '보이지 않는 교회' 루터의 종교개혁의 중심 원리는 인간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될 뿐이지 행위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가 정한 규율을 열심히 지키고 자주 신앙고백을 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구원받은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의식과 투쟁하였다.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루터의 교회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교회 또한 의롭게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즉 '성자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하며 이들이 진정 구원받은 사람들이며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된 자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는 까닭에 감추어져 있고 불가시적이다. 루터는 이런 선택된 불가시적 교회와 성자들과 죄인들이 혼합되어 있는 경험적 교회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였다. "그리스도교는 하나의 믿음 안에 있는 영혼의 영적 모임이다. 아무도 자기 몸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따라서 본래적이며 실재적이고 참되고 본질적인 그리스도교는 영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외형적인 것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성서가 거룩한 교회와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두 개의 교회들을 두 개의 구별된 명칭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본래적이고 기본적이며 본질적이고 참된 첫 번째 교회를 우리는 영적이고 내면 적인 그리스도교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외형적인 두 번째 교회를 우리는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 칼뱅도 루터와 유사한 방법으로 불가시적 교회를 설명한다."성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에 대하여 언급한다. 때때로 그것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실제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현존에는 은총에 의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참 구성원의 된 사람들만이 받아들여진다. 교회는 오늘날 지상에서 살고 있는 성인들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선택된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렇지만 자주 '교회'라는 명칭은 유일한 하느님과 그리스도에게 신앙을 고백한 지상에 널리 퍼져있는 온 무리의 사람을 가리킨다. 세례를 받음으로서 우리는 그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며, 성찬에 참여함으로서 우리는 참 교리와 사랑 안에서의 우리의 일치를 입증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협력하며, 말씀 선포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제정한 교직은 유지된다. 이러한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외적 현상 이외에는 그분의 어느 것도 갖지 못한 많은 위선자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불가시적인 전자의 교회가 오직 하느님의 눈에는 가시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인간들의 '교회'라고 불리는 후자의 교회를 존중해야 하며 그 교회와 영적 교류를 유지해야 한다." 칼뱅의 이러한 주장은 가시적 교회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에서 루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칼뱅에게 교회의 존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영원한 뜻에 속하는 영역이었고, 가시적 교회는 하느님이 말씀과 성례전과 그리고 권징의 교직을 통하여 선민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이 예비해 주신 수단들로 이해한 것이었으므로 결국 그의 예정론에 입각한다면, 루터가 말한 선택된 '진정한 교회'를 하느님에게 이끄는 수단으로서의 '가시적 교회'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부연하자면, 전통적 개혁신학은 교회를 '성도들의 교제'(communio sanctorum)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교제'라고 번역한 라틴어 '꼬뮤니오'라는 말은 '연합, 참여, 나눔'등을 의미한다. 교회가 성도들의 교제이라는 말은 교회가 성도들이 영적으로 연합하여 하느님께 예배하며 그를 섬기고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며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의 공적 집회들과 교회 생활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적 요소는 성도들이다. 만일 성도들이 없다면 교회도 없을 것이다. 물론 교회의 건물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이지 않고 부수적이다. 2) 현대 개신교회건축의 문제 교회는 단순히 건축물이 아니므로, 교회의 건립은 단순히 외형적 건립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개신교의 교회론의 기초이다. 외적 교회(건물)는 교회의 모임을 위해 필요할 뿐이다. 교회 건립은 일차적으로 성도들이 모이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참된 교회 건립이란 순수한 복음 진리를 선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며,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도록 양육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교제로서의 교회의 실상이나 전체 모습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교제'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수평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시춘에 따르면, 교회건축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으로부터 설정되는데, 이 본질과 사명은 '성령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의 공동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살아있는 몸', '하느님의 백성' 등이 기초가 된다고 한다. 결국 교회론이 변형되고 발전해 왔다 하더라도 이 기본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 중심에는 '무형'의 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에 예전의 극적 효과를 위하여 또 상징성의 담보를 위하여 건축은 실용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과도한 건축적 역량을 교회건축에 쏟아 부었고, 이를 통해 종교 개혁가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들은 교회가 그 본질과 사명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허례와 허식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종교 개혁가들에 의해 제시된 교회는 '말씀선포 중심의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교회 내부의 장식과 외부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소박한 설교단 (Pulpit)과 회중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개신교회들의 뿌리로 본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고딕양식의 성당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유형적인 실재를 추구하고, 수직적 관계를 철저하게 추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개신교회들은 실재론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로만 가톨릭교회를 긍정하여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개신교회들은 오히려 외형적 교회에만 관심을 쏟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론을 어딘가에 내버리고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멋으로 새워 놓은 첨탑과 의미도 모른 체 만들어 놓은 장미창 등 고딕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부에 들어가면 사정없이 분할해 놓은 공간이 교회론의 부재를 심각하게 말해주고 있다. 무엇이 오늘날의 개신교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교회론을 왜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건축에 철학이 없다는 것은 건축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꼭 건축철학의 부재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이 버렸던 교회의 상징체계와 의미들을 오늘날의 교회가 장식요소로 받아들여 쓰고 있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세(勢)를 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더욱 크게 멋있게 건물을 짓는데 좋은 양식이 고딕이기 때문이다. 고딕의 웅장한 규모와 특유의 상승감은 다른 여타의 건축양식을 압도하며 군림한다. 추측컨대, 현대의 개신교회들은 고딕 특유의 상징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규모와 장식만을 도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중세의 고딕성당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바탕 하여 이미지와 건축 사이에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를 항상 감각과 함께 있는 감각적인 질료 내지는 형상이라고 보아 '미'란 감각적인 물질을 존재케 해주는 조건이라는 것이라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미'와 연계하여 '모방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모방이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작용으로서 감각적인 대상의 참다운 재현을 뜻한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눈앞에 있는 물체를 알아볼 수 있고, 또한 감각적인 것에서 참다운 존재를 찾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 본연의 모방은 바로 이 감각적인 것의 참다운 존재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항을 받은 고딕미술은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영혼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개방적이고 외향적이며 과시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개신교회들은 사상이 부재된 체 이러한 개방적, 외향적, 과시적 성격만을 도용하여 교회론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오늘날 개신교회 건축이 가야할 방향 중세의 성당은 글을 읽을 줄 몰랐던 일반 대중들의 성서였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종교적인 교리를 가르쳐주는 곳이었다. 이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인류가 살아온 이야기,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 하느님의 뜻을 품고 있는 자연의 세계, 하느님께로 가기 위한 올바른 삶의 길인 미덕의 세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생활에서의 일과 학문의 세계가 시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성당은 신학 그 자체이기도 했거니와 돌로 된 백과사전이기도 했다. 중세미술은 비유를 통한 형상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해 주는 것과 동시에 여러 가지의 상징성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해 주는 것이었다. 교회를 모임으로 정의한 종교개혁의 교회론적 틀 속에서 이야기 할 때, 교회건축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단지 그 모임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할 뿐, 특별한 상징체계와 의미를 가지는 건물은 오히려 스스로의 교회론을 왜곡시킬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는 장식을 최대로 배재하고 기능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장식 없는 교회건물의 실내는 청빈과 순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은 다문화시대에 전통적인 교회론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 전통은 계승하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말아야 한다. 계속해서 변화되고 발전되는 교회론의 수용을 통해 교회도 그 나름의 대답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그동안의 양적 팽창 위주의 성장이 급격히 정체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질적 성장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예배실에 대한 요구로부터, 교육, 친교, 봉사 등 교회의 다른 활동을 위한 공간적 요구가 제기되었고, Missio Dei (하느님의 선교)라는 새로운 선교적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지역사회의 열린 교회로서의 사회적 공간에 대한 요구들도 높아지고 있다. 정시춘에 따르면,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교회 건축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교회교육이 강조됨으로서 주일학교가 중요한 교회기능으로 건축에 반영되기 시작하였고, 지역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교회건축의 주변 환경과의 조화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동시에 교회의 사회화 현상에 따라 지역사회 활동기능을 위한 공간을 교회건축에 포함하거나, 교회의 시설을 주중에 지역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용도로 전환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간의 융통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가 성도들의 교제를 넘어서 복음을 선포하는 기능과 하느님의 선교에 동참하고 그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에서 정시춘 교수의 말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위기를 겪고 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교는 어쩌면 이러한 교회론의 부재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을 무시한 채 권위적 색채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대형교회들은 지역주민들의 눈총을 받고, 대형화의 길을 걸으며 자본에 잠식당하고 부패해가는 교회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스도는 없고 맘몬이 그 자리를 대신한 교회들의 모습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떠나 차라리 없어져야 할 존재들로 보이기 일쑤이다. 교회론의 재정립은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일이다. 교회론이 바로 서야 비로소 교회가 교회다워 질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건축은 이 교회론을 충분히 반영하여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외형적 대형화의 모습을 버리고, 주변 환경과 지역적 특색을 고려하여 지역을 포용하는 형상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규모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디자인의 문제, 혹은 다른 문제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반복했던 실수들을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상징이라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개신교회건축은 그 기능에 충실하면 된다. 집회의 장소로서, 지역사회의 공적 공간으로서, 선교의 도구로서의 교회의 이상적 모습이 무엇인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건축가들은 계속해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일제 말 한국 기독교의 수난과 대응 : 일제에 의한 한국교회와 대한성공회 탄압을 중심으로
조종필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국내석사
지금까지 우리는 일제 말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 정책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본론을 간단하게 요약을 해 보겠다. Ⅱ장에서는 일제 기독교 정책의 변화를 시기별로 구분해 보고 신사참배 강요와 종교단체법의 추진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1절에서는 구체적으로 기독교정책의 각 시대별 특징들을 고찰해 보았고, 더불어 각 시기별 선교사들에 대한 정책의 변화도 살펴보았다. 일제의 기독교 정책은 한마디로 식민지 경영의 부속물로써 규정되었다. 선교초기 일제는 자국의 식민지 경영에 특별히 거슬리지 않는다면 종교문제에 개의치 않으려는 이른바 '정교분리' 노선을 폈으며, 선교사들 또한 마찬가지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후기로 가면서 대(對) 기독교 정책은 '종교보국'의 기치로 선교사와 교회를 철저히 탄압하는 정책을 편다. 2절에서는 신사참배의 강요를 시대적 배경과 함께 서술하였다. 신사참배는 1930년대 들어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재개하면서 일제의 '국체'사상에 기초한 황민화 운동의 주요 수단으로써 강요되었다. 3절에서는 종교단체법을 통과시켜 전시체제에 적극적으로 부합할 수 있고 기존의 교파적 교회체제를 일본적 교회체계로 대체시켜 철저히 천황제 중심의 종교보국으로써의 교회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서술하였다. Ⅲ장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각국 선교사들의 대응과 교회의 대응을 알아보고 신사참배 수용 이후의 교회의 변질과 종교단체법을 시발로 한 교회의 통합을 통해 일제 말 한국 교회가 격어야 했던 고통과 인내의 시기를 알아본다. 1절에서 우리는 기독교계 학교를 시작으로 철저히 강요되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보게 된다. 또 이에 따른 각국 선교부는 순응과 반발의 과정을 겪으며 나름대로의 신학적 견해와 정치적 입장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달리한다.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저들의 입장에 따라 국가적 행사로 받아들인 천주교와 감리교를 비롯해서 1938년 장로교가 마지막으로 신사참배를 모든 교단이 형식적으로 수용하기 까지 많은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이들의 저항은 개인적 저항을 비롯하여 선교부에 의한 학교의 폐쇄도 불사하였으며 한국의 교회는 많은 희생을 감내하여야 했다. 결국 신사참배를 수용한 교회는 일제에 의해 통합의 수순을 밟으며 변질되어 간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개인적인 저항은 계속되어 기독교 세력도 항일 운동의 한 줄기를 형성하며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게 된다. 2절에서는 전시체제 식민지 병참기지화를 목표로 '종교보국'의 기치에 맞는 교회를 만들고자 종교단체법을 이용하여 일본교파와의 통합을 시작으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결성까지 일제에 의해 강요된 부일협력과 교회 수난을 알아보았다. 일제는 종교를 국가의 통치하에 두고 종교통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였다. 이에 방해세력이었던 선교사를 1941년 전면 추방하였고, 교파적 특징인 '재림사상', '종말사상'등을 이유로 회유가 어렵다고 생각된 성결교, 동아기독교회(침례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을 일방적으로 해산해 버린다. 3절에서는 선교초기부터 사회사업 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대한성공회 선교사들의 가치관과 신앙관을 살펴보고 신사참배에 대한 대응을 알아보았다 대한성공회는 일제 말기 영국선교부와의 관계로 인해 모든 선교사가 추방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선교시기 내내 중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다른 개신교등과 같은 부일협력을 하지는 않았다. 특히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어지던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 보육원, 교회가 1941년 선교사 추방을 기점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일본인 주교의 섭정으로 고난을 견뎌내야 했지만 대한성공회는 이렇듯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냈다. 일제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지 경영의 근간인 '천황중심의 사상'과 근본부터 상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하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관리의 대상이었고, 이후로 갈수록 통제와 억압의 대상이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집요하고 강압적인 황민화 정책으로 민족 자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였을 때, 교회 역시 기독교 순수 신앙이 왜곡되고 변절을 강요받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식민지 초기 일제는 '정교분리' 원칙을 강조하며 교회의 정치적 행동을 봉쇄하고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후 일제는 교회의 계속되는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즉, 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 저편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울부짖는 백성들 가운데 있는 것이기에 '교회와 국가', '신앙과 정치'는 상호 보완, 책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후 일제의 종교탄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된다. 하나는 신사참배 강요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단체법을 통해 이미 국가에 종속되어있는 일본기독교로의 흡수와 교파 통합이었다. 이 둘은 한국의 기독교를 식민지 상황에 맞도록 국가에 복속시켜 '황국신민화'와 '식민지 병참기지화'에 합당하게 되도록 개량하고 천황을 신으로 받드는 일제의 근간사상에 종교를 유용하게 쓰기 위함이었다. 즉 일제는 기독교라는 자체는 인정하지만 기독교는 반드시 국가 체제 내에 속해야하고 국가의 이익에 복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일제가 식민지 초기부터 제기해 왔던 종교관으로 일제가 강요했던 신사참배와 종교단체법도 이러한 그들의 사상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결국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그들의 정책에 한국의 교회를 꿰어 맞추는 성과를 얻는다. 즉,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친일을 하거나 부일협력을 했던 대다수의 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제도권교회와 기관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일제가 주장하는 것처럼 신사참배와 종교통합을 신앙의 관점이 아닌 국가 체제로 받아 들였다 즉, 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고 각 교단을 통폐합하여 일본기독교에 복속 시키는 것을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일제의 주장대로 단지 국가체제에 대한 순응 내지는 제도화의 한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친일을 하거나 부일 협력을 하였던 많은 제도권 교회는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류를 이루었던 기독교 인사들이 변절의 길을 걸을 때 소위 '무명'의 신앙인들은 목숨을 걸고 조직적으로 대응하며 투쟁하게 된다.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그 결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된 이가 대략 2천명에 달하고,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명이 순교하게 된다. 결국 역사의 흐름은 억압받는 민중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일제의 광폭한 탄압도 기독교 저항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대한성공회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선교부 선교사의 전원 추방 등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탄압은 일제가 영국과 맺은 영일동맹이 파기되면서 가해진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즉, 대한성공회는 그 모태가 영국성공회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대륙침략을 비난하는 영국과 영국성공회에 대한 간접 보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의 선교사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선교부가 퇴진한 것이다. 대한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이 땅의 소외 받는 민중들을 찾아 복음의 터전을 넓힌 성공회였기에 교단의 성장보다는 병원, 고아원, 보육원, 학교등등의 사회복지 시설로 민족의 자립과 자활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러하기에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드러나는 부일협력을 통한 매국행위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교회를 책임지던 선교사들이 모두 쫓겨나서 모든 시설들과 일부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할 때에도 돈이 끊겨 굶어 죽을 지라도 교회를 지켜 내셨던 선조들의 신앙의 유산을 오늘날에도 이어나가고 있다. 즉, 대한성공회는 세계성공회와의 제도적 연대로 성공회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나갔던 것이다. 결국, 기독교계의 이러한 투쟁은 단순한 신앙수호에 국한된 투쟁이 아니었다. 혹독한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 아래로 봄을 알리는 물이 흐르듯이 교회는 겨울을 이겨냈으며 이것은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고 억압당하던 식민지 조선의 거대한 항일 투쟁의 한 지류였던 것이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 제장, 창씨개명, 일본어상용등의 민족말살정책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막을 내기게 되지만 해방 직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교회의 제도가 빠르게 복구되고 회복되었던 것은 이러한 교회의 정신이 온전히 이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의 종교정책은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실패한 것이다. 이제 해방을 맞이한 지도 60년이 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2002년 월드컵을 공동 유치해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날로 좁아지는 양국의 관계에 비해 일본이 보이고 있는 전쟁 등에 대한 반성은 아시아 주면나라에 많은 실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근래 들어 일본 매스컴이 벌이고 있는 중국 난징 대학살에 대한 조작설 제기는 과연 일본이 과거 전쟁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을 하고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한다. 또한 해마다 제기되는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와 침략국으로서의 반성을 외면한 일본 각료들의 계속되는 망언들을 봤을 때, 그 실망은 더욱 깊어져 간다. 많은 사람들은 과연 일본이 아시아 속에서 우리의 우방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우방, 곧 이웃이란 옆에 살거나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고 이웃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사랑과 신뢰를 주고 받을 때 진정한 이웃이자 우방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과거사 문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전후세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과거는 과거로써 묻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나침반으로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의 종교이다. 양국 간에 넘지 못할 벽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1910년대 일본조합교회가 조선의 선교를 목적으로 일본 기독교를 전파하려 조선에 들어와서 활동한지 근 10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대한 성공회가 일본 성공회의 요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겠다. 신앙적 교류가 작은 줄기를 이루고, 그것이 나중에 큰 강물을 이룬다면 동북아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두 민족 간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데 기독교가 교두보 역할을 했으면 한다.
김대묵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국내석사
본 논문은 예수 운동에 나타난 공동체 영성,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떻하면 서로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라는 큰 질문을 담고 있다. 창조때부터 공동체로써 지음 받은 인간에게 더불어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온 인류의 염원이며, 창조의 목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서 속에서나 인류의 문명사를 돌아볼 때, 인류는 모두가 더불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이는 더불어 행복하기위해 창조된 하느님의 공동체 속에서도 힘의 논리에 의해 소외되고, 공동체 밖으로 밀려난 많은 약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것이 인류의 가장 큰 타락이고, 반드시 부활시켜 내야할 역사임을 그 아무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역시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모든 인류가 사랑하며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하느님 나라를 소망했고, 하느님의 공동체 속에서 밀려나고 소외된 이들을 다시 공동체 속으로 복귀토록 한 것이 본인이 생각하는 예수의 구원 사역이었다. 이를 위해 예수가 택한 방법은 바로 밥을 함께 먹는 밥상공동체 운동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잔치집의 신랑인 것처럼 소외된 사람들과 잔치를 나누었고, 그러한 삶을 축제로 받아들였다. 이런 바로 위의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써 본인의 관심은 예수의 사역속에 나타난 밥상공동체 운동에 있었고, 이 운동의 모습을 통해 오늘 날 나와 너가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적 영성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의 해답으로의 밥상공동체는 그리 간단치만은 안아서 선행되어져야 할 많은 이해들과 연관된 질문들이 본 논문 속에서 제기되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우선 공동체란 무엇이며, 예수운동은 과연 공동체운동이었는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가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적 의미로써 사용한 '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이스라엘(히브리인)에게 있어서의 밥의 의미와, 이것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를 통해 구약의 토양 속에서 태동된 예수가 인식했던 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신약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가 행한 밥상교제의 모습들과, 관련된 비유의 내용들을 확인해 보았고, 예수시대를 건너뛰어 예수운동의 영향을 받아 초대교회 공동체 속에서 행해진 밥상공동체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의 원형인 초대교회 공동체의 형성에 있어 밥이 지닌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으로 역사적 예수가 1세기 찰레스틴에서 행한 밥상교제를 통해 그 속에 담긴 사회학적, 신학적 의미를 밝혀보았고, 이런 이해 속에서 예수의 밥상교제가 지닌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예수의 밥상공동체 속에는 메시아 연회의 상징이 담겨있으며, 예수 죽음의 한 원인이 되었음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예수의 밥상공동체 운동의 분명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서야 본 논문의 목적인 공동체적 영성을 담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본 논문은 밥상공동체 운동의 원리 속에 나타난 나와 너의 사귐의 모습,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선행 되야 할 밥이 지닌 올바른 정의, 그리고 이 운동 속에 나타난 서로살림의 모습인 밥을 통한 생명을 주제로 고찰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구약성서가 히브리 민족의 밥의 역사였다면, 한민족의 반만년 밥의 역사가 빚어낸 한국 민중들의 고유한 밥상공동체인 두레 공동체를 통하여 이미 우리의 의식 안에 내제된 밥의 영성을 발견해 보았다. 살펴본 대로 인류는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혼자 있기 보다는 더불어 있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풍성히 나누기 위해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모시고 이웃과 함께 그리고 자연과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그러나 인류는 음식을 통해 타락 했고,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 후에도 하느님은 밥을 갈구하는 히브리 민족을 통해 인류 역사 속에서 공동체의 창조를 다시 드러내셨고, 그 도구는 바로 밥이었다. 또한 이러한 밥의 역사를 통하여 창조공동체를 회복하려 하신분이 바로 예수였다. 하느님의 역사의 관여는 밤이었다 에덴의 평화로운 밥상이 깨진 이후에도 하느님은 히브리 민중을 통해 그것을 갈구하도록 하였고, 그 갈망은 히브리 민중의 삶 속에서 평화-혼돈-외곡이라는 도식으로 나타났고, 결국 이는 인류 역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밥의 역사는 히브리 민중 속에서 스스로 싹이 난다. 억압과 수탈의 땅 갈릴리에서 밥의 정의를 실현할 메시아가 준비되었다. 이것은 밥의 외곡이 만들어 낸 필연적 결과였다. 예수는 민중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일으켰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굶주림 즉 밥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고, 구약성서적인 하느님 나라 표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는 마치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주고 모든 사람에게 푸짐한 잔치를 베풀어 주려는 것처럼 살았다. 예수는 이들과 밥만을 나누어 먹은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까지 하나가 되어 삶을 함께 나눈 것이다. 밥을 함께 나누는 것은 버림받은 굶주린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연대를 나타낸 것이다. 예수는 질병, 굶주림, 압제로 인한 민중의 고통을 현실적인 고통으로 받아들였고 이 고통과 씨름했다. 질병, 굶주림, 그리고 압제는 가장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고통이며, 예수는 이 고통을 하느님 나라와 직결시켰다. 이렇듯 예수의 밥상공동체는 자주 하느님 나라와 비교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밥상공동체는 비유라기보다는 사회적 실체였으며, 단순한 교훈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노만 페린의 연구처럼 예수는 버림받은 자들을 다시 공동체 속에 회복시키기 위해 죽음으로 가져간다. 이렇듯 예수에게 있어 공동체는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밥상공동체의 결과는 초대교회 공동체로 이어진다. 초대교회 공동생활의 특징은 함께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밥을 나누었고, 그럼에도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과 공동체의 삶이 부활한 예수의 현존으로 이해되었다는 점, 그러고 공동식사는 예배모임의 일상적인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점은 초대교회가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으며 예수운동은 이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해방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지 않았다면 재테크 운동가 예수, 문화 운동가 예수가 등장했지. 초라하게 단지 밤을 함께 먹는 밥상공동체로써 자신의 목적지를 꿈꾸던 예수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 운동은 밥(물질)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시작된다. 결국 영성이라는 것은 하느님을 통해 나와 너가 만나는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더불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하느님의 본질이며 영성이다. 예수의 밥상공동체 속에는 이 모든 영성이 들어있다. 이 영성의 도구로서 밥은 사귐의 영성을 가진다.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나와 너는 통할 수 있다. 즉 밥을 나누는 것은 모든 물질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밥은 정의와 평화를 이룬다. 정의가 이루어지면 평화는 당연히 따라온다. 정의는 바로 밥을 원래의 창조의 모습대로 나누는 것이다. 밥은 생명을 지닌다. 성만찬에서 자기를 온전히 내어 즘으로써 우리의 밥이 된 예수는 공동체의 화신이고 원천마다. 서로살림(상생)을 위해서는 나를 네게 밥으로 주어야 한다. 대자연의 생명과 생태계적 순환에는 서로를 살림과 나를 합으로 내어줌(희생)이 있다. 예수는 죽음을 압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눈다. 예수의 죽음은 대속적으로 만이 아닌 밥상공동체 적이기도 하다. 그의 몸은 함께 먹는 밥이며, 그의 피는 함께 마시는 포도주다. 예수가 죽음으로 밥상공동체가 소멸한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밥상 공동체로 육화 되었다. 그래서 부활한 예수는 사상이나 정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성만찬에 까지도 그리스도와 밥은 결합된다. 이것은 하늘(하느님 나라)과 땅(현실)의 결합이며, 이 둘을 갈라놓는 불의한 체제에 대한 혁명이다. 이로 인해 밥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피 흘리는 이들의 피와 살이 성만찬에서 예수의 피와 살과 함께 하나가 되며, 이천년 전의 예수와 오늘의 나가 결합된다. 인류는 지구촌의 생존을 위해서 세계적으로 밥상공동체를 실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나와 너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가 살아갈 수 있는 도구는 바로 예수가 행한 밥상공동체이다. 이러한 오늘, 이시대의 밥상공동체는 우리 인간 스스로의 제도의 혁신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점적 사유재산의 맹신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인류 역사 속에서 매우 예외적인 오늘날과 같은 사유재산 제도는 헌대 산업사회에서 나타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간은 이기적 경쟁적 성향을 갖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 속에는 서로 돕고 나누려는 공동체적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 인류는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데서 돕고 나누려는 형태의 인생관으로 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이 무너져야 하고, 여성들이 앞에 나서야 하며, 사회적 약자들의 영성이 밥상(사회제도)에 나타나야 한다. 밥상공동체의 원형인 교회가 변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민족의 밥상공동체에 역행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21에서 두 개의 식탁을 첨예하게 대조시키는데, 두 식탁이란 바로 '주님의 식탁'과 '마귀의 식탁'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식탁에 초대하신다. 그분께서는 맘몬이 차려놓은 불의와 불평등과 차별의 식탁을 거부하시고 모든 인류가 주님의 식탁에 앉기를 바라신다. 이상으로 본 논문이 제기한 예수의 밥상 공동체 운동은 인간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에서 해방하여 진정한 일치의 기쁨을 주는 운동이다, 이는 자기중심성에서 해방시키는 해방운동이고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 체제를 근원적으로 혁신하는 나눔과 섬김의 운동인 것이다. 밥은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의 귀한 도구이며, 예수와 같이 밥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우리가 발 밀고 있는 인류의 에덴동산 안에 잠재된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치유는 일어날 것이다.
조정현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국내석사
16세기 잉글랜드의 정치, 종교적 상황을 언급할 때에는 튜더 왕조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잉글랜드의 개혁 상황, 특별히 종교개혁에 관해서 언급할 수 없다. 튜더 왕조 이전에도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보였지만 종교개혁이 본격화되고 후대에도 영향을 끼친 것은 16세기, 튜더 왕조의 시대였기에 역사적 의의는 더 클 것이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이 본격화 된 것은 헨리 8세 시대에 이르러서 그의 개혁운동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은 단순한 이혼문제 때문만이 아니고 설령 이혼문제가 주 원인이 되었을지라도 로마 교황에 대한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은 시간의 요청이었는지 모른다.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하는 국가주의의 확립은 잉글랜드의 정치적 독립을 가능하게 했다. 에드워드 6세의 시기는 서로 다른 신앙적 요소,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통일시킴으로써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개혁은 잉글랜드 교회 속에 초대교회에 대한 공교회성을 회복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자리를 굳히려 하였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요절로 인하여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은 메리 여왕은 헨리 8세와 캐더린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메리 여왕 시대는 그녀의 출생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보복으로 가득한, 잉글랜드의 정치, 종교사에 있어서 가장 불행하고 잔혹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와 재앙의 시기가 있었기에 잉글랜드의 정치와 종교적 측면으로 보았을 때 더욱 더 개혁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는데, 어떠한 박해도 신앙의 근원을 흔들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제도나 권력도 신앙을 바꿀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는 튜더 왕조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역사상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물론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할 때 기존의 메리 여왕 측에 있던 친 로마교회파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종교개혁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제외하고는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포용을 하였다. 즉, 그녀의 정책은 광범위하고 포용적인 정책이었던 것이다.
한상돈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4 국내석사
야훼 종교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연장선상에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 하느님이 율법을 제정한다. 큰 틀에서 보면 성결법, 제의법, 사회법 등으로 구별할 수 있지만 특별히 본 논문에서 다룬 부분은 사회법 가운데 토지에 관한 법을 다루었다.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다시 노예가 되지 않도록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또 그들의 평등한 삶을 보장해주는 법이 곧 '안식년법'과 '희년법'이다. 고대 사회에서 토지가 없다는 것은 노예나 다름없는 삶이다. 그러므로 노예해방은 토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가나안 정착 때 토지의 분배는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해방, 진정한 자유를 정착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최소한 이스라엘에 왕정의 통치가 있기 이전까지는 유지되었다고 본다. 오므리왕 이후 하느님의 율법이 거부되고 바알 종교법이 이스라엘에 도입되면서 하느님이 허락한 자유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예언서에 등장하는 많은 예언자들의 외침은 상실한 자유를 찾기 위함이다. 그들이 자유를 외치는 것은 단순한 정의를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율법 특히 '희년법' 에 근거하여 위법적인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통렬하게 비난했던 토지 독점소유는 인류역사의 대부분을 장식할 정도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인류의 역사는 토지를 둘러싼 갈등의 역사였다. 금세기까지 물질문명과 경제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절대빈곤층의 범위 또한 넓어지고 있다. 현대에 와서 많은 지역의 경제문제의 근원에는 토지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라는 하느님의 간곡한 명령을 무시한 것이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한다. 이 갈등을 회복하는 길은 하느님의 법이 이 땅에 다시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주장은 성서의 '희년법' 은 구약의 율법으로 아주 오래전에 제정된 것으로 시간적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 법의 실행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한다. 또 다른 주장은 현대 사회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와는 근본적인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 법을 현대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구약의 희년법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기록된 부분은 없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고자 했던 율법은 '희년법' (사회법)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대상이 가난한자, 갇힌 자, 억눌린 자,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즉, 이들의 노예상태에서의 해방을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고자 했던 이 하느님의 법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그 사명이 완수되어야 한다고 본다. 희년법의 정신을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에 헨리 조지의 사상과 이론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 가난과 억압과 고통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방치한 것이 아니고, 인구가 너무 많아 물자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야훼의 손이 짧아서 구해 내지 못하시겠느냐?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겠느냐?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느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리워 너희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이사야 59:1-2)." 이런 문제 즉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인간의 제도와 구조에 하느님의 율법이 없거나, 하느님의 율법(사회법)을 부인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래서 예언서의 많은 부분에서 예언자들은 이 상황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도 동일한 목소리로 헨리조지는 "빈곤이란 자연 상태로서의 빈곤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범죄에서 비롯되는 것" 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연의 법칙과 성서의 가르침이 이러한 점에서 서로 합치된다는 사실을 외치고 있지만 누구도 귀담아 듣지 않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회개다. 토지 사유와 부의 축적을 위해 '안식년법'과 '희년법'을 어기고 '부'라는 우상을 섬기며 살았던 과거를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법으로 다스려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선포하셨다. '희년법'을 레위기 25장에 기록하고, 그 다음 레위기 26장 1절에서는 "너희는 우상을 만들어 모시지 말라. 신상이나 석상을 너희 가운데 세우지 말라. 또 그림 그린 석상을 너희 땅에 세우고 그 앞에 엎드리지 말라.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것의 의미는 위 25장에서 언급된 하느님의 '희년법' 을 지키는 것이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으로 해석 될 수도 있다. 또 이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이 신뢰에 하느님의 응답은 자유이다. 이 자유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이법이 영원히 지켜져야 한다. 그것은 영원한 한 분을 거룩하게 여기는 신앙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느님은 그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자유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유가 영원하기를 또한 원하며, 이 땅에 하느님의 법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전해주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2006 국내석사
이상으로 3·1 아우내 만세운동에 대한 시대적, 지역적, 사회적 배경과 그 운동이 왜 다른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에 비해 조직적이고 크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와 또 당시 만세운동 상황과 성공회 병천교회와 진명학교가 그 운동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 보았다. 병천(아우내)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 장이 서기 시작한 역사가 깊은 장터이다. 그러하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정보가 빠르고 선진 외래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타 지역에 비해 기독교가 빨리 들어와 정착했으며 면 단위 시골인데도 불구하고 근대식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자녀들에게 근대식 교육을 시키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보아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교육이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며 이는 아우내 만세운동의 큰 밑거름이 된다. 이 지역이 장터라는 데서 오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작은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거부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타 지역의 유교사상으로 무장된 기득권층 보수세력과는 달리 외래 선진문물에 대해 호의적 반응을 보였으며 거의 모두 기독교를 받아들여 초기 기독교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성공회 병천교회와 진명학교는 이들의 도움으로 초창기 선교가 비교적 수월했으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아우내 만세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으며 이 만세운동 후에 자칫 패닉 현상으로 빠질 수 있었던 지역의 안정과 재건에 크게 기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아우내 만세운동에 있어서 그 운동이 일어나게끔 한 산실은 진명학교이다. 성공회 병천교회 교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이 근대식 교육기관은 지역의 발전을 위해 많은 지역 내 지도자들을 양성했으며, 우리 성공회의 두 명의 사제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쌓여진 힘은 아우내 만세운동을 통해 여실히 나타났으며 특히 이 학교 교사였던 김구응선생이 그 대표적 인물인데, 우리는 민족적 영웅으로 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미흡한 자료와 유관순 열사의 대대적 민족영웅 홍보에 가려 묻혀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아우내 만세운동에 있어서 이를 준비하고 가장 앞장서 투쟁한 분은 진명학교 교사였던 김구응 선생이었다. 또한 이 운동을 사전에 준비하고 참여했던 많은 성공회 병천교회 교인들과 교회내 소모임이었던 기독청년회 회원들, 그리고 진명학교 교사, 학생들 모두가 이 운동의 주인공이고, 역사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 만세운동이 끝나고 성공회 병천교회와 진명학교는 이 지역을 이끌어 나가는 선도적 위치를 확고하게 잡았으며 교인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등 중흥기를 맞게 된다. 또한 진명학교의 경우에는 학생 수가 늘어 여학생을 위한 별도의 교사를 증축해야만 했으며 인근 봉황리에도 진명학교가 신축, 개교되는 등 활발한 지역 선교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 이를 계기로 하여 지역의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선진 문화를 보급하는 지역 중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끝으로 이 민족적 거사인 3·1 아우내 만세운동에서 성공회 병천교회와 진명학교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이 이와 같이 밝혀짐으로써 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가 요구되는 바이다. 이 졸고를 탈고하면서 우리 성공회 관련 역사자료들에 대한 정리 및 보관과 할용에 관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이는 현재 100년 이상 된 교회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역사자료에 대한 귀중함과 또 그것을 활용하는 기술적 문제들을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첫째, 각 교회에서 해당 관련 역사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 보관할 수 있는 매뉴얼이 시급하다. 물론 각 교회마다 조금씩 다른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한 가지의 통일된 매뉴얼에 적용시켜 자료를 다룬다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와 같이 그 어떤 모범적 대안이 없어 귀중한 역사자료들이 교회 창고에서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각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자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교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에 대해서 일정 기간이 지난 것은 역사자료관과 같은 전문적 문헌정보관리를 하는 곳에서-이는 교구별로 만들든지 아니면 현재의 역사자료관을 이용하든지 간에-통합 관리하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 문헌을 정리, 보관하는 것도 전문 기술을 요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을 갖추지 못한 각 교회에서 정리, 보관하다보니 귀중한 자료들이 곰팡이 등으로 훼손되고, 또는 너무 잘 보관되어 아무도 찾지 못할 정도로 묻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역사자료관에서 개인이나 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및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한 '역사자료 공모전'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셋째, 현재 역사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이 원시자료들이다.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가공하는 작업과 아울러 전산화 작업이 필수적이다. 옛 글에 대한 윤문작업과 영문에 대한 번역작업이 바로 그것인데, 모두는 아니더라도 현재 나와 있는 초록에 덧붙여 어느 정도의 요약 정리된 내용이 첨가되어져야 만이 필요한 사람이 그 필요에 따라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현재 진행 중인 전산화작업도 그것이 단지 보관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활용하기 위한 것인지 부터 따져서 효율적 작업이 되었으면 한다. 단지 보관만을 위한 것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해상도가 너무 떨어져 알아볼 수 없는 것을 굳이 스캔작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영문에 대한 번역작업과 분류, 가공하여 활용도를 높이는 작업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역사는 그 잘 보관된 자료 위에 후세인들의 사관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또 지금의 하찮아 보이는 자료가 100년후엔 귀중한 역사 자료가 됨을 생각하면서 그것의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보관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