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금관가야’ 멸망 이후 진평왕대까지 금관가야계의 활동에 관한 사료 검토를 통해 금관가야계가 신라 중앙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 과정과 그 요인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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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 부산대학교 대학원, 2021
학위논문(석사) --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 역사교육전공 , 2021. 8
2021
한국어
951.9 판사항(23)
부산
iii, 37 장 : 삽화, 표 ; 30 cm
지도교수: 백승충
참고문헌: 장 33-35
I804:21016-00000015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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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본고는 ‘금관가야’ 멸망 이후 진평왕대까지 금관가야계의 활동에 관한 사료 검토를 통해 금관가야계가 신라 중앙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 과정과 그 요인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
본고는 ‘금관가야’ 멸망 이후 진평왕대까지 금관가야계의 활동에 관한 사료 검토를 통해 금관가야계가 신라 중앙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 과정과 그 요인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금관가야계는 김해지역에 연고를 두던 김유신가문과 그들의 추종세력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데, 신라 삼국통일을 주도한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삼국통일전쟁에서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금관가야계 혈족의 활약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금관가야계의 성장이 항상 일직선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평왕의 즉위로 인해 대내외적 정세가 변함에 따라, 때로는 그들의 활동이 제약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금관가야계는 진평왕대의 정치적 부침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데 성공하였고, 결국 신라 중대를 주도하는 신귀족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금관가야 멸망 이후 진평왕대까지 금관가야계의 활동 과정을 분석해 보면, 금관가야계의 정치적 위상 추이와 그 요인을 추정할 수 있다.
진평왕 즉위 이전에 금관가야계는 이미 신라 귀족사회에 편입되었다. 김구해는 투항의 대가로 상등의 직책과 식읍을 하사받는다. 신라의 외교전략적 필요성에 따라 수여받은 것이지만, 금관가야계는 이를 바탕으로 당분간 김해지역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무력은 진흥왕대 영토확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막대한 공훈을 세웠다. 정복전쟁의 과정에서 김무력의 지위는 상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무력-거칠부-진지왕으로 연결되는 인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진지왕은 ‘政亂荒婬’으로 인해 폐위당하고 백정이 진평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금관가야계의 입지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진평왕을 즉위시킨 국인세력들이 관제정비를 주도하고 정국을 운영함에 따라 금관가야계의 정치적 위상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외적으로는 삼국 간의 전쟁이 비교적 소강상태를 맞게 되었으며, 신라는 隋와 倭에 사신을 보내는 등 교류, 교역 중심의 대외관계에 집중한다. 신라의 이와 같은 대외안정책 추구는 대내적으로 군사적 강점을 갖고 있는 금관가야계의 정치적 성장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면에서 등장한 김서현은 신라 왕족 숙흘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만명과 혼인하여 금관가야계의 정치적 지위가 실추되는 것을 막았다. 또한 대내외적 정세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 진평왕 후기의 관제정비에서 용춘이 내성사신에 임명되는 등 신라 정국에 사륜계가 등장하였으며, 602년 아막성 전투를 시작으로 잦아진 전쟁으로 인해 금관가야계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문희와 김춘추의 혼인으로 금관가야계와 사륜계의 가문적 결합이 이루어졌으며, 낭비성 전투는 양측의 정치적 재결합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그 결과 금관가야계는 사륜계와 함께 신귀족세력으로서 향후 신라 중대를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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