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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민관은 원로원의 정치적 도구인가? - 공화정 중기 호민관의 사법권을 중심으로

          김경현 ( Kim Kyunghyun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 구 한국서양고대사학회 ) 2011 서양고대사연구 Vol.29 No.-

          본 논문의 목적은 전통적으로 과소평가되어 왔던 호민관의 사법적 역할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필자는 호민관이 과두주의적인 원로원의 정치적 도구에 불과했다는 전통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정치적 재판에 대한 사료들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필자는 논의를 위해 연구시기를 공화정 중기로 국한하였다. 또 호민관의 사법적 활동을 모반(perduellio), 정무관의 근무태만 또는 권력남용, 전리품의 횡령(peculatus), 동맹 공동체에 대한 착취(res repetundae), 네 가지로 구분하여 검토했다. 결론적으로 호민관들은 로마의 법과 관습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활동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호민관들이 원로원의 지배에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원로원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법권을 사용했던 것처럼 간주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호민관들이 로마가 허용하고 있는 법과 관습의 틀 내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호민관에 의한 정치적 재판들이 원로원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호민관은 로마 정체의 한 구성요소로 인정되면서, 로마가 중시하는 집단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원로원과 공조해야 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사법적인 영역에서도 호민관은 본래의 직분에 충실하게 인민의 관심과 이익을 대변하고 옹호하기 위해 계속 활동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호민관이 인민의 옹호자라는 고유의 성격과 역할을 저버리고 원로원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였다는 종래의 가정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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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힉소스 전승과 반유대주의의 기원

          김성 ( Kim Seong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 구 한국서양고대사학회 ) 2013 서양고대사연구 Vol.36 No.-

          기원전 16세기에 형성된 힉소스 전승은 오랜 세월을 지난 헬레니즘 시대부터 인종차별적인 반유대주의의 모습으로 부활되었다. 즉, 이집트로 진출하여 정착했던 가나안 출신의 힉소스 집단이 기원전 15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집트 원주민 세력에 의해 쫓겨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사건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악의 세력에 의한 이집트 침공과 신의 형벌로 인한 탈출”이라는 신화로 대체되었다. 힉소스는 이미 기원전 13세기 람세스 2세시대에 이집트를 혼란에 빠트렸던 대표적인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기원전3세기 이후 헬레니즘 시대에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방민족에 대한 배척 운동은 곧 바로 유대인 집단에게 적용되었는데, 아마도 입-출애굽 전통을 공유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71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외국 세력들의 이집트 침공을 통해 이민족에 대한 증오와 인종적 차별을 더욱 심해졌다. 이집트의 반유대주의는 페르시아의 지배에 놓였던 기원전 5세기 말 엘레판틴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집트가 독립했을 때가 아니라 외국 세력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유대인들이 이집트인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유대인 공동체는 그들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통치 세력들에게 최대한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점이 현지인들의 증오와 비난의 대상이 됐다. 이러한 구도는 프톨레마이오스 정권 하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더욱 발전되었고, 이집트인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인들까지 반유대적 성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헤카타이오스에 의한 이민족의 이집트 탈출 모티프는 유대인의 출애굽과 맞물려 비슷한 유형의 힉소스의 출애굽과 비교되는 근거가 되었으며, 마네토를 비롯한 후대 역사가들이 이것을 인용하면서 반유대적인 선입관이 개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나귀를 섬겼다는 비난은 유대인들을 당나귀 상징의 세트 신을 수호신으로 숭배했던 이집트의 힉소스와 연관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The Hyksos tradition which was originally formulated in the 16th century B.C.E. has been resurrected in the Hellenistic period with a disguised transformation of anti-Judaism. The expulsion of the Hyksos was reenacted over and over again, and the motif of victory over a threat of foreign occupation became a fixed motif. The historical aspects of the Hyksos tradition had been substituted in the late period by a mythical theme - the invasion of Egypt by evil powers and their expulsion with god's wrath. In terms of anti-Jewish propaganda, the story of how the Jews, afflicted with leprosy, were forcibly expelled from Egypt enjoyed popularity in both Greek and Latin literature. We have here a gap of almost one thousand years between the historical expulsion of the Hyksos and anti-Jewish movement at Alexandria. During this period, the successive invasions of the Assyrians, the Babylonians, the Persians, and the Macedonians may have created a perception to the Egyptians that the destroyer always appeared suddenly from the north as similar as the Hyksos did before. While Hecataios of Abdera is devoid of a strong anti-Jewish feelings, and simply tried to make a rendered history appropriate to a vast multi-ethnic atmosphere, Manetho had emphasized misanthropic aspects of the Jews when he quoted his relevant phrases. Another piece of evidence of anti-Jewish sentiment came from the sacrilegious blame of ass-worship in the Jewish temple of Jerusalem. One of aspects of Seth is the divine foreigner and he is identified with Baal, the god of the Canaanites. The ass being the symbolic animal of the god Seth whose cult the Hyksos had embraced at Avaris, there appeared another possibility to associate Jews with the Hyks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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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와 다나오스

          오흥식 ( Oh Hungshik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 구 한국서양고대사학회 ) 2014 서양고대사연구 Vol.37 No.-

          기원전 1세기의 역사가 디오도로스(40.3.2)는 이집트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다나오스, 모세가 이집트로부터 같은 때에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기록은 두 사람이 쫓겨난 힉소스임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 논문의 목표는 한편으론 성서, 다른 한편으론 다나오스와 관련된 고대 그리스의 문헌사료를 연계하여 모세의 출애굽 연대를 제시해보는 데에 있다. 언제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였느냐에 관해 『성서』는 서로 다른 연대를 제공한다. 「탈출기」 제1-2장에 근거한 기원전 13세기설, 「열왕기 상」 제6장에 근거한 기원전 15세기설, 「사도행전」 13:17-21에 근거한 16세기 설이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바울로의 16세기설은 「판관기」나 「사무엘서」 같은 구약성서 경전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기원후 1세기 유다인 사제출신 역사가 요세푸스(Contra Apionem, I.26, §§230-23; I.31, §§279-280)를 통해 모세가 파라오 테트모세 치세에 축출된 힉소스임을 살펴보고, 마네토의 두 단편(「단편」 50, from Josephus, Contra Apionem, i.15, §§94-95; 「단편」 53 (a), from Syncellus, according to Eusebius)에 따르면 요세푸스가 말하는 파라오 테트모세가 파라오 아모세(『옥스퍼드 고대이집트사』 (2000), 1550-1525년)임을 제시하려 한다. 에파포스(힉소스 파라오 아포피스로 여겨진다)를 다나오스의 증조부이자 파라오로서 기록하고 있는 아폴로도로스(2.1.4), 스파르타 왕가(다나오스의 8대손 헤라클레스가 그 국조이다)와 유다인은 ‘아브라함의 후예'라는 구약성서 『마카베오 상』 (12:19-23), 다나오스의 도래를 기원전 1511년으로 기록한 『파로스 연대기(Marmor Parium)』―이러한 문헌기록은, 힉소스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었지만 서부 셈족(페니키아인과 유다인)이 주류이고 그들이 아바리스로부터 축출된 시기는 기원전 1530년경이라는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에 대한)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결과와 잘 맞아 떨어진다. Diodorus(40.3.2) wrote that Danaus and Moses were expelled from Egypt by the natives of Egypt, which suggests that the two men were the expelled Hyksos. This article aims to propose the Exodus' date by connecting the Bible with the ancient Greek documentaries relating to Danaus. The Bible suggests different dates for Moses' Exodus: the date of the 13th-century based on Exodus 1:8-11, the mid 15th-century based on 1 Kings 6:1 -2, and the 1540's based on Acts 13:17-21. The date of 1540's is supported by Judges, 1 Samuel, and so on in the Old Testament. Josephus, the Jewish historian of the first century A.D., says that Moses was the leader of the Hyksos who were expelled by Pharaoh Tethmosis (Contra Apionem, I.26, §§230-23; I.31, §§279-280). According to two fragments (Fragment 50, from Josephus, Contra Apionem, i.15, §§94-95; Fragment 53a, from Syncellus, according to Eusebius), Tethmosis was Pharaoh Amosis, the first king in the 18th dynasty. According to The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 (2000), “the conquest of Avaris can be dated much more closely, between years 18 and 22 of Ahmose(Amosis), 1532-1528 BC.” Diodorus suggests that Diodorus and Moses were the leaders of the aliens expelled from Egypt in the same period. Apollodorus(2.1.4) mentions Epaphus(considered as Apophis, king of the Hyksos) as Danaus' great-grand father and the king of Egypt. Marmor Parium says that Danaus sailed from Egypt to Greece in 1511/10 BC. Greek documents mentioned above suggest that both Moses and Danaus were contemporary leaders of the Hyksos who were expelled from Egypt in the latter half of the 16th century 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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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동부 지중해 세계의 시민병·용병·상비(의무)병의 사회·정치적 의미 분석

          최자영 ( Che Ja-young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 구 한국서양고대사학회 ) 2014 서양고대사연구 Vol.37 No.-

          용병과 시민병은 존립 기반은 물론 지향하는 바, 즉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있어서 서로 간에 상당한 괴리가 있다. 전자는 보수를 받기 위해 싸우는 것이고, 대의나 대상이 무엇인지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안 되며 침략적, 호전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더한 질곡은 용병의 발호가 그들 상호간의 끝없는 권력 투쟁과 갈등을 야기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반면 시민병은 전쟁을 직업으로 하지 않고 최소한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므로, 많은 경우 그 주요 목적이 불가피한 방어전에 그치므로 무력의 증강이나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 파커는 초기 참주와 후기 참주를 구분하여 전자는 개인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나 후자는 영토 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대해서만 호전적(military) 혹은 군국주의(militarisn)라는 용어를 적용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무력의 적용이라는 원리적 측면에서 볼 때 전자도 후자와 크게 다른 점이 없으며, 오히려 후자는 전자의 선례가 확대 적용된 것일 뿐이다. 참주의 호위병은 시민 출신이라 하더라도 시민병이라고 하기 어렵다. 군역의 대가로 참주로부터 보수를 지급 받는다면 방어를 스스로의 의무로 하는 시민병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보수 없이 강제로 차출되었다고 한다면, 전제 왕권 하의 의무병과 같은 것이니 그도 역시 시민병인 것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기원전 4세기에 들어 마케도니아에서는 시민병이나 용병이 아닌 새로운 종류의 상비군이 조직되었다. 필리포스 2세의 군사개혁은 군사력을 강화하나 비싼 보수를 주어야 하는 용병이 아니라 다소간에 강제적으로 차출되는 의무병을 중심으로 하여 상비군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자유민과 예속민의 중간 지위에 있는 병사들로 전제적 왕권하에 있는 페르시아 인과 공통점이 없지 않다. 시민병, 용병, 그 외 강제 차출되는 상비군이 혼합되었던 것으로 상비군에게는 당연히, 용병은 경우에 따라, 무기 등이 국가에서 지급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의 시민병을 오합지졸로 폄하하고 보수를 노리는 직업용병을 효율적인 조직과 전술을 가진 것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할 것이 아니다. 권력과 영토의 확장을 꾀하는 전제적 왕권 하에서 강제적으로 차출되는 상비군은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고 세금을 착취하는 것이었다. 특히 참주와 그 권력의 유지에 봉사하는 용병은 민주파와의 갈등은 물론 그들 간의 상호 충돌을 야기함으로써 사회를 맹목적으로 호전적, 침략적, 만성적인 전쟁과 분열의 상태로 몰아갈 위험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고대 그리스 용병의 횡행을 공급-수요의 원칙에 준하는 경제적 현상의 하나로 간주하려는 현대적 해석은 전쟁을 부득이한 사회 현상으로 정당화하고, 또 권력과 재물을 지향한 인간 탐욕에 대한 반성을 무디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Mercenary soldiers of the Ancient Greece used to be hired by the Tyrants. Parke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tyrants of the earlier and the later period, defining the former as a private bodyguard, and the latter as a force for territorial expansion. And he applied the term military or militarism just to the latter. In my opinion, however, both tyrants of each period do not have any great difference in the principle of exploiting military power for gaining power or territory, and the latter is an extended application of the former. The bodyguard of tyrants is not equal to citizen soldiers. The bodyguard used to get pay from tyrants. And, in case citizen soldiers become bodyguard of tyrants, they should not be regarded as citizen soldiers anymore but mercenary, as the former themselves used to be obligated to bear the expenses for weapon, without getting pay. In the 4th century a new kind of standing army in duty, different from citizen soldiers or mercenary, was created in Macedonia. The military innovation of Philippos II aimed at consolidating military power, by organizing standing army in duty by coercive conscription rather than mercenary for whom wages more or less should be paid. These Macedonian soldiers could be situated in the middle of free men and slaves, and they have commnon elements with the Persians under despotic ruler. Macedonian soldiers were of hybrid composition, that is, citizen soldiers, mercenary and the standing army by forced conscription, and among these standing army, and sometimes mercenary, too, used to be supplied with weapons by employer. Citizen soldiers should not be disparaged as a disorderly crowd, and mercenary aiming at rewards should not be positively appraised as a group efficiently organized and highly skilled. The former was not professional warriors, waging war mostly in inevitable cases for protecting their own lives and properties, while the latter was frequently to incur chronic war state and social conflict, even conflict among themselves. The standing army in duty under the despotic ruler of Macedonia or Persia, who aimed at power and territorial expansion could be sustained by oppressing poeple's freedom and imposing taxes. Contemporary interpretation on the point of supply and demand for the explosion of mercenary in the ancient Greece in the 4th centuury tended to justify the war waged by mercenary as an economically inevitable phenomenon, and nullify the reflection against human avarice towards unlimited power and e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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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공화정 중기 평민의 정치 참여와 호민관의 활동 - 전쟁과 평화, 군 징집의 문제를 중심으로

          김경현 ( Kim Kyunghyun )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 구 한국서양고대사학회 ) 2014 서양고대사연구 Vol.38 No.-

          본 논문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화정 중기 로마의 평민들이 전쟁과 평화의 결정 및 군 징집의 문제와 관련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무관에 대항하여 평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대변하기 위해 처음 선출되었던 호민관들이 위의 문제와 관련해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현대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평민을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명목상의 주권자 정도로만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건들은, 비록 그 수가 제한적이지만, 폴리비오스의 주장이 가볍게 간과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로마의 평민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주권자임을 주장하려는 것이 필자의 의도는 아니다. 하지만 로마의 정체는 실제로 보통 시민들이 전쟁과 평화와 관련해서 원로원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허용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평민의 의견 표출을 보장하는 제도적인 장치는 군 징집의 경우에도 발견된다. 군 징집은 강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징집의 회피는 처벌을 수반한다. 하지만 군 징집의 거부는 오래 동안 로마의 평민의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이용되어 왔다. 게다가 군 징집의 면제를 허용하는 예외적인 장치도 있었다. 로마는 전쟁과 평화의 결정 및 군 징집의 문제와 관련해서 평민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평민의 정치적 참여와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호민관들로 하여금 전쟁과 평화, 특히 군 징집에 대한 평민들의 의견과 불만에 귀를 기울이게 하였다. 하지만 호민관을 평민을 대변하는 정무관으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 또 원로원 또는 강력한 정치가를 위해 고유한 권한을 사용하는 정치적 도구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호민관은 로마 정체의 일부로 수용된 이후 로마 정체의 운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구성 요소가 되었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군 징집과 같은 문제와 관련해서 호민관들이 보여주었던 정치적 역할은 폴리비오스가 규명했던 로마 정체의 세 가지 요소 - 정무관, 원로원, 평민 - 간의 정치적 대화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호민관은 평민, 원로원, 정무관 사이의 정치적 균형을 창출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The ultimate aim of this article is to discuss whether the ordinary Romans could exert some influences over decisions for war and peace, and the military levy in the middle Republic, and what political roles were performed by the plebeian tribunes who were initially appointed to defend the interests of the commons against magisterial oppression. The traditional view has regarded the populus as no more than nominal sovereignty in the political decision-making process. But some historical instances examined above, although they are very limited, may rather show that Polybios' judgment that the people had the power of deliberating on the weighty matters of state should not be neglected lightly. To argue that the Roman ordinary citizens were the real sovereignty in the question of war and peace is not my intention. It should not be neglected, however, that Roman constitution allowed the people to exert some influences over the senatorial decisions to make war and peace. The institutional device to guarantee expression of political opinions by the plebeians is also found in the military levy. The Roman citizens who refused their enrolment were liable to severe penalties, since the annual recruitment implies compulsion. But refusal of conscription had been employed as a way of the plebeians' expressing opinions. The military levy also allowed the ordinary citizens to claim any exemption. In the Mid-Republican Rome, the popular participation in the political process of making the decisions for war and peace, and the military levy seems to be authorized by the Roman constitution. It is natural that this popular participation and influence lead to the tribunician involvement in the plebeian discontent and disobedience toward war and peace, and military levy. It should be remembered, however, that the tribunes were no longer representatives of just one section of the whole Roman people. Moreover, they should not be regarded only as a political instrument who exerted their inherent powers in behalf of the senate or the powerful individual politicians. After being accepted as the part of the Roman constitution by the middle Republic, the tribunes became an important constituent which could not be neglected in the Roman constitution. The political roles which the tribunes played in the matters such as the decisions of war and peace and the military levy would be to facilitate political conversation among three parts of the Roman constitution demonstrated by Polybios. It seems, in other words, that the tribunes acted as go-between who created the political balance among the people, the senate, and the magistr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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