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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Colonialism and Catholicism in Asia

        Franklin Rausch(프랭클린 라우시)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敎會史硏究 Vol.0 No.48

        안중근과 호세 리살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데, 특히 둘 다 용기 있는 교육자이자 개혁가로서 가톨릭 신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식민주의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저항했다. 안중근은 한국의 식민화를 유발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반면에, 리살은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비난하는 소설을 썼다. 식민주의에 대한 다른 접근 방법에도 불구하고, 안중근과 리살은 자신들의 저항으로 인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은 인명살상이라는 그의 선택을 비난하는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과 생애 후반에 가서야 마찰을 빚었지만, 한국 가톨릭계는 국가 영웅인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안중근과 달리 리살은 생전에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으며, 자신의 반식민주의 소설 속에서 가톨릭교회와 그 가르침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후 죽음에 임해서야 리살은 가톨릭교회와 화해하고 교회에 대한 종교적 비판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정치적 입지를 비판하는 자신의 입장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필자는 안중근과 리살이라는 두 반제국주의 운동가와, 그들의 대조되는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연구함으로써 이두 사람이 어떤 이유로 다르게 시대에 저항하였는지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했다. 연구 결과, 리살은 천주교회와 총독부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천주교회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유럽의 합리주의를 받아들이고 필리핀의 계몽을 막는 전통의 천주교 교리도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죽기 전에 합리주의의 제한성을 깨닫고 믿음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이해한 후 비판을 철회하였다. 그에 반해서 안중근은 하느님이 안중근과 안중근의 아들을 은총으로 낫게 하셨다는 것을 믿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더구나 안중근은 선교사와 어떤 마찰이 있어도 천주교회는 물론 신부들과도 긍정적인 관계에 있었으며, 필리핀 교회와는 달리 한국 교회와 총독부는 관계가 그리 밀접하지 않았다. 때문에 안중근은 천주교를 비판하지 않고도 제국주의를 비판 할 수 있었다. 리살과 안중근은 죽기 전에 천주교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외면했기 때문에 그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만약 교회가 안중근과 리살을 도울 수 있었더라면, 이들은 이 세계는 물론 교회에도 보다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An Chunggŭn and José Rizal were alike in many ways-both were men of great courage, educators, reformers, and Catholics. However, they resisted colonialism differently, with An killing Ito Hirobumi, the man who led Japan’s colonization of Korea, and Rizal writing novels that criticized Spanish rule. Despite these different approaches, both were executed for their actions. While An was a devout Catholic, his actions led to conflict with French missionaries, who condemned him. However, he has been recognized by Korean Catholic leaders as having acted properly, and has become a national hero who Korean Catholics are deeply proud of. Filipino Catholics are also proud of José Rizal, but unlike An, during much of Rizal’s life, he was critical of the Catholic Church, sharply criticizing it, and its teachings in his anti-colonial novels. It was only just before his death that he was reconciled to the Catholic Church, retracting his religious critique of the Church, but not his political one. By studying these two men and their contrasting relationships with the Catholic Church, we can better understand why they acted in such different ways. Rizal criticized the Catholic Church because of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Catholicism and the Spanish colonial government. He also accepted Enlightenment rationalism and criticized traditional Catholic beliefs which he saw as superstitious and as preventing the Philippines from modernizing. However, before his death, he came to realize the limitations of Enlightenment rationalism and saw the importance of faith and beauty and retracted his criticisms. In contrast, An Chunggŭn had a deep faith arising from his belief that God had miraculously healed him and his son. Moreover, despite some conflict, An had largely positive relationships with Catholic priests and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was not as closely connected to imperialism as it was in the Philippines. Thus, An maintained his faith and was able to criticize colonialism without criticizing Catholicism. While both men affirmed their Catholic faith before they died, the failure of the Church to respond to the problems they faced caused a great deal of suffering. If the Church would have helped them, they could have made an even greater contribution to the world and the Church itself.

      • KCI등재

        편견 가운데 화합을 위한 모색 : 안중근, 존 브라운, 프레더릭 더글라스의 사상

        프랭클린 라우시(Franklin Rausch)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1 동방학지 Vol.196 No.-

        민족주의자이자 범 아시아주의자(Pan-Asianist)였던 안중근은 한 가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였다.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기 위해 한중일 삼국의 화합과 상호 협력을 희망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시름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이 상황은 1840년대와 1850년대의 미국과 비슷하다. 이 기간 동안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합법적이지만 부도덕한 노예제도에 반대하였으나,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세력들은 동시에 더욱 더 공격적이 되었다.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은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세력들의 폭력에 직면하여 폭력만이 노예제도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렇다면 보다 더 조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폭력의 사용은 가능한가? 흑인이지만 노예 신분으로부터 벗어난 프레더릭 더글라스(1818~1891)와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무력 투쟁을 이끈 백인 존 브라운(1800~1859) 등 두 명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이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응답한다. 본 논문은 안중근과 프레더릭 더글라스, 존 브라운과의 대화를 통해 이 세 사람이 어떻게 폭력의 사용을 통해 사악한 제도를 무너뜨리고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 KCI등재

        Wicked Officials and Virtuous Martyrs

        Franklin Rausch(프랭클린 라우시)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敎會史硏究 Vol.0 No.32

        내러티브는 권력의 도구이다. 제임스 스캇은《저항과 지배의 기술》이라는 연구서를 통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내러티브가 갖는 구조를 분석하였다. 스캇은 권력자는 ‘공적 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신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지배를 정당화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달리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그와 다른 자신들만의 내러티브를 만든다고 하였다. 지배받는 사람이 만든 내러티브에는 사회적 약자들의 사고방식과 행동특성 등이 담겨 있으며, 이처럼 지배받는 사람의 내러티브는 ‘비공식 담론’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지배받는 사람의 내러티브는 그 당시에 공적인 담론과 달리 비밀스러운 것이어야 하는 법이다. 왜냐하면 피지배자의 입장에 서 있는 비공식 담론이 공적으로 드러나면 결국 권력자들에 의해서 그것은 억압?변질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가의 연구에 있어 비공식 담론에 속하는 자료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역사 안에 살아 숨쉬던 약자의 생활과 사상을 파악하는 작업에 비공식 담론이 갖는 의미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공적 담론과 일정한 거리를 갖는 비공식 담론을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조선시대에 양반은 정치권력을 가지고 지배세력으로 존재하면서 그 지배구조에 저항하는 도전은 잘 다스려 나갔다. 이와 같은 구조가 안정적으로 지속된 사회에서 지배구조에서 벗어나는 비공식 담론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황사영 백서라는 비공식 담론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는 조선의 지배구조에서 통용되는 공적 담론과는 전혀 다른 피지배자들의 비공식 담론이 드러나 있다. 조선시대에 천주교 신자는 피지배자이며 사회적 약자였다. 그들은 정부의 박해를 피해 몸을 숨겨야 했다. 그러나 신유박해라는 거센 박해의 회오리바람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황사영은 북경 주교에게 도움을 받기 위하여 “백서”를 썼다. “백서”는 비밀스러운 서한이었기 때문에 황사영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글이다. 따라서 이를 비공식 담론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백서”에서 황사영은 순교하는 천주교 신자에 관해서 이야기하였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사악한 관료’가 미움이나 복수 등의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순진하고 덕이 있는 천주교 신자를 학살한다는 것이다. 황사영은 이 비공식 담론에서 순교자의 행동과 말,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승리로 묘사하고 천주교의 교리가 진리라고 단언한다. 이와 같은 박해받는 사람의 비공식 담론과 정부의 공적 담론은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정부의 공적 담론은 천주교 신자는 사악한 술법을 따르는 짐승과 같은 무리이므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황사영은 이와 전혀 다른 내러티브로 정부에 도전하였다. 더구나 황사영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서양의 대박과 육군을 조선에 오게 해달라는 요청은 성리학에 기초한 정부에 도전한 것이었다. 하느님과 교황에 호소한 것은 곧 ‘사악한 관료’에게 저항한 것뿐만이 아니라 성리학에도 도전한 것이었다. 황사영의 비공식 담론에는 천주교를 위하여 정부에 저항하는 것이 정의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황사영이 조선 정부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유교의 ‘충’의 의미를 천주교 신앙 안에서 새롭게 적용한 것이며, 그렇게 변한 ‘충’의 의미를 비공식 담론에 담았다. 이와 같은 황사영의 “백서”를 통하여 조선시대 약자의 숨겨진 생각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백서”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는 그 오랜 기간의 극심한 박해를 견뎌내야만 했다. 물론 많은 신자들이 비공식 담론이 담긴 “백서”를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서”에 나타난 천주교 신자들의 비공식 담론을 통해 사회적 약자이며 피지배자이던 순교자의 마음을 더욱 가까이 접해볼 수 있다. 그것은 조선 사회에서 ‘사악한 관료’의 박해를 견디어 내는 ‘고결한 순교자’의 숨겨진 담론이었던 것이다. 그 숨겨진 비공식 담론은 그들이 박해를 견디어내는 힘이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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