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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말기 한국기독교계의 변질ㆍ개편과 부일협력

        김승태(Kim Seung-Tae),이명화(토론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6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24 No.-

        이 글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한국기독교계의 변질ㆍ개편과 부일협력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기독교 연합기관의 변질ㆍ개편과 부일협력 활동을 정리하고, 이어서 당시 교제의 순서에 따라 개신교 4대 교파 교회였다고 할 수 있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구세군의 순으로 정리하였다. 일제는 1920년대 말에 시작된 세계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1931년 9월 중국 동북지역(만주)을 침략하여 ‘대륙침략정책’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들의 식민지를 포함한 일본 전역에 ‘정신교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키고, 종교 이용 통제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도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의 도발을 전후하여 종교계를 더욱 철저히 통제하여 전쟁 협력에 이용하고, 이에 거슬리는 종교 단체나 개인에 대하여는 가차 없이 탄압하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따라서 그 때까지 법령이나 종교계 지도층의 회유를 통한 간접 통제의 방식을 버리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개개 종교단체나 개인들에게까지 직접적인 강압과 통제를 하여 각 교파를 ‘교단’으로 통폐합하고, 그 교리와 의식(儀式)까지 일본화(日本化=神道化)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특별히 기독교계에 대해서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1938)과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1940)이라는 구체적인 ‘정책’까지 수립하여 실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계의 “변질ㆍ개편과 부일협력”은 일제의 외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거의 예외없이 그 교세만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든 기독교계 내부의 “협력자”가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그 “협력자”들은 모두가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계의 ‘지도자’ 들이었다. 물론 당시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모두 일제의 “협력자”는 아니었지만, 당시 직위를 유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지도급 인물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일제에 협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협력행위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하지만, 결국은 그러한 행위가 세속 권력에 영합ㆍ추종하여 교회의 교회다움을 상실하게 하고, 교회의 사회 공신력을 떨어뜨리게 했으며, 교인들은 물론 다른 일반인들까지 잘못된 길로 내몰았다. 더욱이 그러한 행위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한, 일제의 침략 전쟁 협력 행위였다는 점에서 하나님 앞에는 물론, 우리 민족과 역사 앞에서도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지 60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실상의 정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에 대한 한국교회 전체의 반성과 ‘죄책 고백’이 요구되는 것이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degeneration and reorganization of the Protestant denominations and their pro-Japanese collaboration activities during the later Japanese colonial period. Japanese expansionism intensified in the 1930s. It invaded Manchuria in 1931, provoked a war against China in 1937, and waged the Pacific War in 1941~1945. Korea became a supply base for the wars and the total resources of Korea were mobilized for the wars. The General-Government formulated policies to promote national integration and to support for the wars. Especially Governor-General Minami(南次郞) pushed a strong policy of assimilation (Japanization) to exterminate the Korean culture and identity. Since the Second Sino-Japanese War in July 1937, his administration enforced the Christian churches to attend the Shinto shrine worship and support for the war.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enforced all Protestant denominations 10 unite into one body “kyodan” (敎團) and Japanized its doctrines and Liturgy by means of “Countermeasures to Control Christianity”(1938) and “Policy to Control Christianity”(1940). According to these strong policies, most of the Korean Protestant churches and the ecumenical organizations were degenerated and reorganized by their pro-Japanese leaders for their mere survivals. The four main Korean denominations―the Presbyterian Church, the Methodist Church, the Holiness Church, and the Salvation Army―could not help adapting 10 the enforced policies and cooperating to the Japanese colonial regime. Finally on July 19 and 20, 1945, a constitutional assembly of the delegates of all Korean Protestant denominations met for the formation of a united Protestant Church. But the united church ceased to function in less than a month as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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