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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과 한국기독교의 관계의 역사적ㆍ정치사회적 맥락

            안교성(Ahn Kyo-Seong)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4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0

            2008년 소위 ‘좌편향 교과서' 사건 이후 한국사회에는 역사적 관심이 비상하게 높아졌고, 그 결과 ‘건국'은 이제 단순한 ‘정치' 사건이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건국과 한국기독교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본 논문은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기존 연구와 두 가지 점에서 차별화된 접근을 하고자 한다. 첫째, 본 논문은 이 관계 자체를 상세히 다루기보다 이 관계의 역사적·정치사회적 맥락을 고찰하고자 한다. 둘째, 기존 연구에서 건국을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본 논문은 건국이 실제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의 관점까지 고려하면서,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하여 답하였다. 첫째, 건국 이전에 대해서는, 민족지도자들과 한국기독교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한국기독교는 건국과 관련된 민족지도자의 거대한 인력 풀을 마련하였다. 둘째, 건국 당시에 대해서는, 건국과 한국기독교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특히 기독교건국론의 문제를 재고하였고, 건국을 둘러싼 기독교 내부의 다양한 정치 지형을 살펴보았다. 한국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정치 참여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적으로 정치 참여를 하였고, 한국가톨릭교회는 소극적으로 그런 추세를 따라갔다. 셋째, 건국 이후에 대해서는, 미국과 한국기독교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특히 건국과 친미주의에 대하여, 분단 문제, 친일세력 발탁 문제, 신탁통치 문제를 살펴보았다. 국가와 종교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며, 이것은 건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Since the controversy over the so-called ‘leftist textbook' in 2008 aroused national interest in history in Korea, the issue of ‘nation-building" became not only an event of ‘politics', but also a very ‘political' one. It is in this context that re-emerged the question of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nation-building and Korean Christianity.' This paper aims to answer this question. In doing so, this paper distinguishes itself from previous studies in two aspects: first, it focuses on the context of the relationship rather than the relationship as such; and second, it approaches the issue of nation-building from the practical viewpoint rather than the ideological one. This paper argues that, regarding the pre-nation-building period, Korean Christianity provided the pool of national leaders who finally became the masterminds of nation-building. It maintains that, in regard to the nation-building years,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was ready to engage in politics, while its counterpart, the Korean Catholic Church, passively swam with the tide. It also stresses that, as regards the nation-building years and its aftermath, Korean Christianity had a complex relationship with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hich cannot be reduced to pro-Americanism, in the various areas such as the division of the nation, the selection of the pro-Japanese group in nation-building, and the trusteeship. It must be remembered that the relationship of Church and State has never been simple and straightforward, and the issue of nation-building in Korea is a case in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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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병리현상과 신흥종교운동

            탁지일(Tark Ji-Il)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8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8

            이 글의 목적은 한국교회의 병리현상이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들의 발흥에 끼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종교개혁 500주년과 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개혁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연구 대상은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들로 제한하며, 시기적인 범위는 1987년 6월 항쟁으로부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2017년까지에 초점을 맞춘다. 단 논의의 전개를 위해, 한국전쟁 이후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의 발흥과 전개과정을 서론 부분에서 개괄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주제에 대한 선행연구는 미미하지만 꾸준한 형편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 신흥종교운동들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로는 이강오의 『韓國新興宗敎摠監』(대흥기획, 1992)이 있는데, 불교계와 동학계와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들의 발흥에 대한 현장중심의 연구를 진행한 탁명환의 『한국의 신흥종교 : 기독교편』 I-IV(국제종교문제연구소, 1972, 1973, 1974, 1987)가 자세한 관련정보를 전달해주고 있다. 한국전쟁과 군사정권의 등장은 사회적 불안정성과 반공사상을 이용한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 발흥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신흥종교운동들의 친사회적 활동 변화가 주목된다. 한국교회의 교리적 인정보다 주변 사회의 공신력을 얻고자 하는 방향으로 신흥종교운동들의 활동이 이루어진다. 한편 신흥종교운동들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교회의 병리현상, 즉 신행불일치의 삶과 신앙으로 인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고립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개혁주체가 아니라 개혁대상으로까지 비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는 한국교회의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들에 대한 대책마련에 있어서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교회가 병리현상을 극복하고 신흥종교운동들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의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influence of pathological phenomenon of Korean church to the rise and growth of Christian new religious movements. This examination emphasizes on the period from 1986 to 2017 and, in the beginning of this paper, the formation of Christian new religious movements after the Korean War is explored to show their socio-historical background. Notably, there have been few but continuing preceding researches, such as, Gang-Oh Lee's Comprehensive Studies of New Religious Movements in Korea and Myong-Hwan Tark's New Religious Movements in Korea, I-IV. The Korean War and the military dictatorship were a fertile soil for the rise and growth of the movements and they have tried to make some important changes in their beliefs and practices since the democratization of Korean society in 1986. The formation of Christian new religious movements is deeply related to the pathological phenomenon of Korean church, namely, the imbalance between belief and practice, which causes its isolation. As a result of this phenomenon, there is a serious concern for Korean church nowadays and Korean church is expected to not only respond to the challenge of new religious movements but also reform and restore its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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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 70년, 한국 기독교의 권력유착 사례와 그 성격

            윤경로(Yoon Kyung-R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6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4

            본 논문은 ‘한국 기독교의 성찰과 반성'이라는 큰 주제 아래 “분단 70년, 한국 기독교의 권력유착 사례와 그 성격”을 논구한 글이다. ‘분단 70년'을 고려할 때 2015년까지 다루어야 했으나 이 연구대상 시기는 해방 이후 미군정기(1945-1948), 이승만 집권기(1948-1960), 박정희 군사집권기(1960-1971) 그리고 유신 독재기(1972-1979)까지 한국교회와 정권유착 관계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와 그 성격을 다루는데 그쳤다. 첫째, 미군정기 권력유착과 한국 기독교 특히 교회문제는 적산불하(敵産拂下), 곧 패전한 일본의 한국 내 재산처분을 미군정이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받은 특혜를 중심으로 천착했다. 둘째,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권력유착 문제는 그 정권이 ‘기독교 정권'이라 할 만큼 여러 특혜를 받은 구체적 사례를 적시했다. 반공이념을 국시로 내세우면서 상대적으로 친기독교적 정책을 펼친 이승만 정권에서 진행된, 예컨대 종교인들에 대한 각종면세 혜택을 비롯해 군대와 형무소 안에 실시한 군종제(軍宗制)와 형목제(刑牧制) 등을 비롯해 일요일과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정한 것과 공영방송을 통한 기독교 선교방송 허용, 기독교방송국 설립 허가, 그리고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독교적으로 실시한 것 등등 구체적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셋째,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권력유착관계를 좀 더 천착해 구명했다. 먼저 군사정권 초기의 기독교계 추이를 돌아보며 베트남 파병과 군목파견에 따른 정권유착과 대통령조찬기도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권력유착관계, 전국신자화운동 등을 추진하면서 권력과 한국교회 특히 교회지도력과의 권력유착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살펴보았다. 끝으로 유신독재기 권력유착 사례를 이 시기 진행된 초대형 전도집회와 이러한 초대형 집회를 가능하게 한 물적 토대(物的土臺) 제공자 역할을 한 기독실업인회에 대해 구명했다. 이러한 사례연구를 통해 해방 이후 한국교회와 기독교계는 종교적 전도와 선교를 내세웠지만 매우 정치적이었으며 권력과 유착한 정치집단의 성격이 강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해방 이후 지난 70년간의 한국교회와 기독교는 교세로는 매우 크게 성장 발전했다 할 수 있으나 본래 기독교 복음정신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세속적이었다는 자기반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하겠다. 특히 개신교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2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한국 기독교계는 자기성찰과 반성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This paper is a writing that reviews ‘Seventy years after National division, cases and nature of Korean Christianity's adhesion to power' under the big theme of ‘introspection and reflection of Korea Christianity.' The period to 2015 should be dealt with when considering ‘Seventy years after national division" but this study only dealt with the specific cases and nature on the adhesion relationship between Korean church and regime in Regime of U. S. Army(1945-1948), Rhee Syng-man's reign(1948-1960), Park Chung-hee's military reign(1960-1971) and Yushin(Revitalizing Reform) dictatorship period(1972- 1979). First, adhesion of power during Regime of U.S. Army and Korean Christianity, especially the church problem was explored with a focus on enemy property transfer(敵産拂下), that is, special favors given to Korean Church in the proces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handling defeated Japan"s assets in Korea. Second, the power adhesion problem under Rhee Syng-man government pointed out specific cases of receiving many privileges enough to call the regime as ‘Christian regime'. We examined specific cases conducted in Rhee Syng-man government that carried out the relatively pro-Christian policies while presenting the anti-Communist ideology as a national policy, for example, designation of Sundays and Christmas as holidays including military chaplaincy and Prison chaplaincy implemented in the military and prisons including various exemptions for religious people and permission of Christian missionary broadcasting through public broadcasting, approval of establishment of Christian broadcasting system and Christian major events of the country. Third, power adhesion relations under the Park Chung-hee military regime were further explored. We first reviewed the trends of the Christian world in the early military regime and examined the specific cases on adhesion of regime caused by dispatch of armed forces to Vietnam and army chaplain dispatch, power adhesion relations with a focus on Presidential Prayer Breakfast and adhesion of power made between power and Korea Church, especially with church leadership while promoting national believers movement etc. Finally, power adhesion cases during the Yushin dictatorship period were examined for mass missionary meeting conducted during this period and Christian Business Men's Committee who played a role as a material foundation provider enabling these mass meetings. Through these case studies, it can be said to be difficult to deny that although asserting religious evangelism and mission, Korean Church and the Christian world after the liberation were very political and had the strong nature of political groups that adhered to power. From this point of view, the congregation of Korean Church and Christianity is considered to have developed and grown very significantly for last 70 years after the liberation but self-reflection and introspection on being very worldly in the light of the original spirit of the Christian gospel are required. In particular, the reflection and self-reflection of Korea Christianity can be said to be further required in a situation with two years ahead of the five hundredth anniversary of the Lutheran Reformation that enabled the birth of Protestan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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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1운동과 기독교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7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7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 기독교(개신교)는 선교역사가 30년이 되지 않은 ‘신흥종교' 수준이었다. 종교인 비율로 봐도 전체 인구의 1.5% 수준에 머무는 ‘소수종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 1운동의 준비, 모의단계로부터 대중 투쟁단계, 그리고 3 · 1운동 후 임시정부 조직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기독교계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한국 기독교는 선교초기부터 강력한 ‘민족주의 종교'로 성격이 형성되었다. 19세기말 근대화시기에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소개된 기독교 복음은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를 한민족에게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적 사회체제에서 억압당하며 살았던 하층민과 부녀자 계층이 기독교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체득, 실천하였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기독교를 통하여 서구문화와 문명의 유입이 이루어졌고 그와 함께 수직적 질서가 강조되던 봉건사회가 붕괴되면서 수평적 가치가 구현되는 시민사회로 바뀌었다. 이처럼 한말 민족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한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어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종교로 변모하였다. 그것 역시 일제의 억압통치로부터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는 민족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참여하는 민족주의 성향을 띠게 되었다. 둘째, 한국교회는 식민통치 상황에서 민족문제를 논의하고 투쟁하는 ‘민족운동 공간'이 되었다. 선교초기부터 서구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며 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나 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활동에 간섭하지 않도록 정치권(총독부)과 타협하였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 교회는 선교사들의 보호 아래 ‘치외법권적 영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총회와 연회, 지방회(노회)를 연결하는 전국 연락망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경찰력이 미치지 않았던 교회와 기독교 선교기관 안에서 (선교사들의 의도와 달리) 민족주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민족문제를 논의하고 항일 민족저항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3 · 1운동 때 만세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자료가 지방에 신속하게 전파되어 전국적인 시위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전국 연락망'을 갖춘 교회와 기독교의 연결 조직이 있어 가능했다. 셋째, 한국 기독교의 초교파 연합운동 경험이 종파를 초월한 ‘전 민족적' 독립운동을 가능케 하였다. 선교초기 각기 다른 교파와 교단을 배경으로 하여 내한한 선교사들에 의해 ‘교파중심' 교회 설립과 선교가 추진되었다. 그러다가 1903~07년 일어난 초기 부흥운동의 여파로 교회 일치운동이 일어나 성서번역과 문서출판, 의료와 교육 사역에서 초교파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연합과 연대 경험을 바탕으로 3 · 1운동 때 장로교와 감리교목회자, 평신도 지도자들이 천도교와 불교 등 다른 종파 지도자들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할 수 있었고 서울과 지방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다른 종파 지도자, 일반 시민들과 연대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3 · 1운동을 통해 교파와 종파를 초월하여 대동단결하는 민족운동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렇듯 선교초기부터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던 한국 기독교는 3 · 1운동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종교로서 그 성격과 역할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런 배경에서 한국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 하에서 항일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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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의 현상(現狀)에 대한 역사적 검토

            서정민(Suh Jeong-Min)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1 No.-

            현재의 이명박 정부는 제1공화국 이래 이른바 ‘기독교적 정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오히려 반 기독교적 정서를 야기하는 요인이 된다. 한국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한국기독교가 보여주는 여러 현상들에 대해 결코 긍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이글은 이러한 한국기독교의 현상들에 대해 사회참여의 특성에 따른 시기구분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종교적 차원이 아닌 정치적 힘의 이데올로기로 수용했던 초기 한국 기독교는 1907년 대 부흥운동을 거치며 사회적 문제보다는 개인적 내면의 문제에 치중하는 특징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3ㆍ1운동을 통해 일부 신앙적 동기가 민족적 에너지로 전환된 사례를 찾을 수 있지만 주류는 개인중심, 내세중심의 신앙이었다. 이는 일제 말기 신사참배 강요에 의한 수난의 시대를 통해 소수의 저항과 다수의 순응이라는 역사적 현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 소수의 신앙적 동기에서의 저항은 강력한 정치적 저항으로 현상화되었다. 해방 후 한국기독교는 미군정기를 거쳐 이승만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특혜를 누리며 ‘기독교적 정부'를 형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정교유착은 말기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박정희 정부에서도 여전하였다. 소수의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은 1969년 ‘삼선개헌'을 계기로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민중신학'을 창출하여 세계적 신학의 흐름과 동류하며 신학적 예언성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양적성장에 매진하는 보수 다수의 기독교 세력과 적극적 사회참여의 진보 소수의 기독교 세력 사이의 양극화와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소수의 진보적 기독교 세력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기를 통해 직접 정치일선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전 민주화 운동 당시의 예언성을 상실하며 사회적 신망마저 잃게 되었다. 반면 다수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정권반대의 결집과 투쟁을 통해 차기 정권을 창출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시대 한국기독교는 더욱 많은 갈등을 빚어내며 세간의 비난을 받고 있다. 총체적으로 현재의 한국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는 한국 일반사회의 인식 수준에서 최하의 평가에 놓여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고난의 민족사에 십자가를 지고 앞장섰던 역사적 유산을 지니고 있다. 또한 민중 크리스천의 신앙 에너지는 오늘날 여전히 강력하다. 또한 어두운 상황을 밝게 비친 예언자적 신학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사고의 전환, 가치관의 변혁, 목표의 수정을 지향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또한 한국기독교는 일본이나 중국 기독교와의 선교협력 사명을 자각하고 있는 동시에, 세계 기독교 안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새롭게 발견해 가고 있다. 이는 한국기독교의 불멸하는 긍정적 희망과 과제이다. Today, the Lee Myoung-bak administration is estimated as christian government again, since the first republic of Korea. But this image is a factor lead to anti-christianity emotion, on the contrary. Social recognition on the Korean christianity has not given positive estimation on the status quo of Korea christian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nvestigate on the status quo of Korean christianity centered on division of period depended on the specific character of participation in public affairs. Early Korean christianity has received christianity as not religious dimension but ideology of political power. Passing through the great revival movement 1907, Korean christianity was transformed to emphasize the individual inner matter rather than social problem. To be sure, through the 3ㆍ1 Independent Movement, we can find some case of a part motivation of faith turning to the national energy, but main stream was focused on individual or hereafter faith. This tendency continued historical situation as minority's resistance and majority's adaptation in the age of sufferings caused by demand of Shinto shrine worship in the last years of the Japanese reign. But this minority's resistance that made faith-based motivation was shown powerfully political resistance. After the Emancipation of August 1945, Korean Christianity formed ‘christian government' with special benefit through the age of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and the course of founding Rhee Seung-man administration. The close relationship of church and state which made in this process, was continued in the last years of Rhee Seung-man regime in spite of the dictatorship and unrighteousness. This disposition was unchanged in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Minority progressive christians came forward to full-scale democratization movement for the chance of ‘constitution amendment of election for the third term(三選改憲)' in 1969. They made 'Minjung Theology' together with current of world theology and displayed theological propheticality. But, in this course, the trouble and struggle between the conservative majority christian who striving for the quantitative growth and the progressive minority christian positive participating to the society were deepened. This progressive minority christian powers were participated immediately in the front of political affairs through the age of Kim Dae-jung and No Mu-hyun administration. But, in this process, they lost propheticality at that time of democratization movement and social confidence. On the other side, conservative majority christians got an opportunity to make the next term administration through the struggle for political power and the concentration for against campaign. But Korean christianity in the age of Lee Myung-bak administration was criticized by Korean society more and more because of it made troubles much more. As a whole, it is impossible of we cannot conclude that the Korean protestant christianity at the present is received the lowest estimation in the rebel of recognition of general society in Korea. However, the Korean christianity has a historical heritage that leaded suffering national history undertake together with the corss. Also, the faith energy of people christian is still powerful. Also, the Korean christianity has a tradition of prophetical theology that lighted on the dark situation of Korean history. And, little by little, an atmosphere intend to conversion of thinking, reform sense of value, rectification of target is perceived. Also, the Korean christianity is conscious of the mission of cooperation missionary work with Japanese and Chinese christianity as well as newly discovering the role of Korean christianity in the world christianity. This is the imperishably affirmative hope and t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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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 외원단체의 구호활동

            김흥수(Kim Heung-S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5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23 No.-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구호를 필요로 하는 전쟁 난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952년 3월 통계에 의하면, 전쟁으로 집을 잃은 피난민, 전쟁으로 물자 상실이나 지원수단이 파괴되어 고통을 받는 전쟁 이재민, 빈곤과 인플레이션으로 괴로움을 받는 지방 빈민이 남한 인구 21,000,000명 가운데 절반이나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으며, 원조단체 중에서도 외국의 기독교회와 구호단체들은 한국교회에 다량의 구호금품을 보내거나 직접 구호활동가들을 보내 구호활동에 나섰다. 이 단체들은 40여 개에 달했으며, 민간 구호 단체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글은 한국전쟁 시기 및 전쟁 직후 활동한 기독교 외원단체들의 내한과 구호활동 과정을 살펴보고 그 중에서도 미국과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구호사업을 대변했던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활동을 정리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전시에 내한한 외원단체들은 한국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온 미국교회에 속한 단체가 가장 많았다. 교파는 장로교, 침례교, 나사렛교회, 메노나이트, 퀘이커, 동양선교회, 감리교, 안식교, 유니테리언교회, 루터교, 천주교 등 다양했다. 구호품을 가장 많이 전달하고 구호활동을 가장 활발히 전개한 기독교 외원단체는 미국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가톨릭구제위원회와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속한 기독교세계봉사회였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구호 활동도 대행하였다.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한국 책임자는 헨리 D. 아펜젤러 목사였다. 기독교 외원단체들은 제한된 자원과 구호의 긴급성 때문에 응급한 구호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보건사업에도 손을 대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피난민들을 위한 사업과 아동, 전쟁미망인, 부상자 등을 위한 구호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전시의 구호활동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사업이었다. 이 시기에 외국 기독교 외원단체들을 통해 전개된 구호 및 복구 활동은 한국사회에 대한 봉사의 양과 규모에서 한국교회 초기에 있었던 외국교회들의 교육과 의료활동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으며 한국사회에 대한 대규모 봉사의 재현이었다. 외원단체들은 구호 활동을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사회봉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사회교육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기독교 외원단체의 영향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했으며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미국으로부터의 엄청난 양의 원조는 미군의 참전과 함께 전후의 한국인들에게 미국이 일종의 구원국가로 보이게까지 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외원단체의 최대의 수혜자였던 교회에 아직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Shortly after the Korean War broke out, half the people of Korea were in need of relief. Refugees, war sufferers, and local destitute amounted 10, 291,774 of the total population 21,000,000. In this situation about 40 foreign voluntary agencies with Christian background came to South Korea and began to play a key role in relief activities for war refugees and sufferers. Among other things, Church World Service and War Relief Service of the 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 played prominent part in the relief and rehabilitation during and after the Korean War. This essay examines the relief activities of Christian voluntary agencies from foreign countries in general and those of Church World Service in particular. Church World Service conducted relief and rehabilitation programs in Korea ever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 but during the Korean War it carried on more extensive program of relief of Korean refugees and other war victims as agent of the American Churches and World Council of Churches. Since February, 1951, Rev. Henry D. Appenzeller directed relief work of the Church World Service in Korea. He and his missionary and Korean Christian associates were engaged in distributing supplies, in assisting with the movement of refugees and in their settlement with the cooperation of other voluntary agencies such as War Relief Service Committe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CARE, etc. Main relief work of the Church World Service included orphans and unaccompanied children, the physically handicapped, vagrant adolescents, children and war wid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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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정과 일본기독교와의 관계

            서정민(徐正敏)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5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3

            한국기독교 수용자의 한 축을 이룬 인물이 이수정이다. 이수정의 기독교수용은 한국 프로테스탄트 수용역사에 있어 지식인계층 수용의 중심축을 이룬다. 이로써 비교되기를 만주의 서상륜과 ‘로스성서' 번역자들에 의한 수용루트가 민중계층 수용의 특성을 지닌 것과 달리 일본을 기점으로 하는 기독교 수용은 ‘양반, 엘리트' 수용의 특징으로 함축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듯 이수정은 한국 프로테스탄트역사에서 엘리트 수용자의 대표적 첫 당사자이다. 그동안 그의 연구는 개인의 생애, 활동, 미국선교사들의 한국선교 착수를 권고하는 선교사 유치 노력, 그리고 특별한 업적으로 성서번역의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들 연구는 한국기독교 수용 역사에서 이수정의 위치를 충실히 정리해 주는 주제들이다. 그런데 본 논문에서는 이수정의 프로테스탄트 수용 활동의 바탕, 즉 ‘콘텍스트'가 되는 당시의 일본, 일본기독교, 그리고 이수정과 관련되었던 일본의 조력자들을 중심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이는 한국기독교 수용역사에서 일본이 지닌 역할, 하나의 중요한 관계 축으로서의 의의를 확인하는 주제이다. 이수정은 한국기독교의 수용자일 뿐 아니라 한일기독교 관계사의 첫 사람이다. 그는 또한 한국 신구교의 연결 정체성을 지니기도 했다. 또한 미국선교사의 한국선교 유치를 주도하고, 첫 선교사들의 내한에 관여함으로 한미기독교의 중간자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이수정은 서로 다른 주체 간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사명을 다했다. 이 논문에서는 특히 이수정과 일본기독교의 관계, 더 나아가면 한일기독교의 초기 관계사의 관점에 유의했다. 이수정 시대의 한일 기독교, 물론 이 시기의 한국기독교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긍정적 관계에서 출발했다. 일본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수정을 한 예로 만나면서 자신들의 선교자로서, 더 근본적으로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사명을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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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말기 한국기독교계의 변질ㆍ개편과 부일협력

            김승태(Kim Seung-Tae), 이명화(토론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6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24 No.-

            이 글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한국기독교계의 변질ㆍ개편과 부일협력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기독교 연합기관의 변질ㆍ개편과 부일협력 활동을 정리하고, 이어서 당시 교제의 순서에 따라 개신교 4대 교파 교회였다고 할 수 있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구세군의 순으로 정리하였다. 일제는 1920년대 말에 시작된 세계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1931년 9월 중국 동북지역(만주)을 침략하여 ‘대륙침략정책'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들의 식민지를 포함한 일본 전역에 ‘정신교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키고, 종교 이용 통제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도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의 도발을 전후하여 종교계를 더욱 철저히 통제하여 전쟁 협력에 이용하고, 이에 거슬리는 종교 단체나 개인에 대하여는 가차 없이 탄압하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따라서 그 때까지 법령이나 종교계 지도층의 회유를 통한 간접 통제의 방식을 버리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개개 종교단체나 개인들에게까지 직접적인 강압과 통제를 하여 각 교파를 ‘교단'으로 통폐합하고, 그 교리와 의식(儀式)까지 일본화(日本化=神道化)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특별히 기독교계에 대해서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1938)과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1940)이라는 구체적인 ‘정책'까지 수립하여 실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계의 “변질ㆍ개편과 부일협력”은 일제의 외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거의 예외없이 그 교세만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든 기독교계 내부의 “협력자”가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그 “협력자”들은 모두가 자타가 공인하는 기독교계의 ‘지도자' 들이었다. 물론 당시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모두 일제의 “협력자”는 아니었지만, 당시 직위를 유지하고 있던 대부분의 지도급 인물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일제에 협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협력행위는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하지만, 결국은 그러한 행위가 세속 권력에 영합ㆍ추종하여 교회의 교회다움을 상실하게 하고, 교회의 사회 공신력을 떨어뜨리게 했으며, 교인들은 물론 다른 일반인들까지 잘못된 길로 내몰았다. 더욱이 그러한 행위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한, 일제의 침략 전쟁 협력 행위였다는 점에서 하나님 앞에는 물론, 우리 민족과 역사 앞에서도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지 60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실상의 정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에 대한 한국교회 전체의 반성과 ‘죄책 고백'이 요구되는 것이다. This paper investigates the degeneration and reorganization of the Protestant denominations and their pro-Japanese collaboration activities during the later Japanese colonial period. Japanese expansionism intensified in the 1930s. It invaded Manchuria in 1931, provoked a war against China in 1937, and waged the Pacific War in 1941~1945. Korea became a supply base for the wars and the total resources of Korea were mobilized for the wars. The General-Government formulated policies to promote national integration and to support for the wars. Especially Governor-General Minami(南次郞) pushed a strong policy of assimilation (Japanization) to exterminate the Korean culture and identity. Since the Second Sino-Japanese War in July 1937, his administration enforced the Christian churches to attend the Shinto shrine worship and support for the war.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enforced all Protestant denominations 10 unite into one body “kyodan” (敎團) and Japanized its doctrines and Liturgy by means of “Countermeasures to Control Christianity”(1938) and “Policy to Control Christianity”(1940). According to these strong policies, most of the Korean Protestant churches and the ecumenical organizations were degenerated and reorganized by their pro-Japanese leaders for their mere survivals. The four main Korean denominations―the Presbyterian Church, the Methodist Church, the Holiness Church, and the Salvation Army―could not help adapting 10 the enforced policies and cooperating to the Japanese colonial regime. Finally on July 19 and 20, 1945, a constitutional assembly of the delegates of all Korean Protestant denominations met for the formation of a united Protestant Church. But the united church ceased to function in less than a month as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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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대부흥운동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옥성득(Oak Sung-Deuk)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6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25 No.-

            본 논문의 주지는 평양의 도교적 기독교 영성이 한국 (장로) 교회의 주류를 형성했고 그 중심에 도교(선도)에서 개종한 길선주의 영적 지도력(설교와 기도)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평양의 도교인들에게 일어난 미미한 영적 지각 변동은 한국 전역에 파문을 일으키며 번져가서 한국 교회의 복음주의 영성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종교의 전체 지형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파급 효과를 일으켰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평양 장로교회의 첫 지도자들이 되었고 1907년까지 대부분 장로나 목사로 안수를 받았던 일군의 도교인들--송인서, 김종섭, 길선주, 김성택, 옥경숙, 정익노, 이재풍, 김찬성 등--이 청일전쟁 전후에 개종한 과정을 먼저 살펴보았다. 이들은 북한 개신교의 급성장과 부흥 운동, 나아가 한국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엄청난 영향력을 주었다. 이어서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중생 체험이 전범의 형태로 나타난 도교 신자였던 길선주의 개종을 자세히 고찰했다. 1895년 청일전쟁 후 그의 개종 체험은 부흥 운동 당시 한국인들의 기독교에로의 개종이 과거 신앙과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무/선교-불교-유교로 발전되어 온 한국인의 종교성이 근대 종교인 개신교를 수용함으로써 한 단계 진화하고 보다 완전한 종교로 성취되는 과정이었음을 예시한 모범이었다. 동시에 그의 개종 동기였던 도교적 개인 구원관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의 기독교의 사회 구원관은, 당시 북미 개신교의 근대 복음주의가 가졌던 기독교 문명론이 민족적 위기 속에서 근대 자주 국가 형성을 모색하던 한국 사회에 접목된 사례였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도교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이전에 거의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을 지니고 있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 개신교의 무게 중심과 지도력을 평양으로 고정시켰고, 이후 개신교의 주류는 해방 이전까지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한에 있게 되었다. 물론 부흥운동 이전부터 개신교인의 대다수가 북한 지역에 있었지만, 대부흥운동 결과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 목회자 군이 형성되면서 개신교 주류는 북한으로 넘어갔고, 길선주의 영적 지도력은 그 흐름을 고정시키는 교회사적 의미를 지녔다. 동시에 개신교에서 평양 지도력의 우위 확보는 한국사에서 500년간 조선 왕국에서 그 지도력을 행사해 온 서울 양반층에 대한 새로운 지도층의 형성이라는 사회사적 의미를 지녔다. A series of minor spiritual seismic shifts among the Daoist-Christians in Pyongyang sent shock waves rippling through the turn-of-the-twentieth century Korea with far reaching effect of the transformation of the religious landscape of Korea as well as the formation of the mainstream evangelical spirituality of the Korean Church. A group of Daoists in Pyongyang were converted to Christianity around the Sino-Japanese War in 1894~95, and became leaders, elders, or pastors of the Presbyterian Church by 1907, They integrated traditional Daoist spirituality with Protestant spirituality during the Great Revival Movement in 1903~1908. Their indigenous Christian forms of prayer and spirituality became the paradigm of Evangelicalism of the Korean Church ever since. Kil Sun-Ju was the pivotal figure in this evolutionary process of fulfillment of Daoism by Christianity as well as in the revival movement. His conversion was a paradigmatic born-again experience of evangelicalism for the Koreans who confessed their sins in the revival meetings and reconciled with God and neighbors. His case revealed the continuity and the points of contact between Daoism and Christianity. On the other hand, his motive of conversion demonstrated a paradigm shift in popular Korean spiritualty in the turn-of-the century Korea from its private orientation to the public sphere. Realizing the shortcomings of privatized Daoist spirituality in the face of the national crisis, he grafted the holistic Christian civilization theory of the turn-of-the-century North American evangelicalism onto the Koreans' longings for a modern independent nation. Kil Sun-ju and other Daoist Christians introduced the indigenous dawn-prayer, and probably audience prayer, all night prayer, and fasting mountain prayer into the program of the Bible Training Class and regular church liturgy. These Christianized prayers had a stronger public dimension for the communities and nation than their original private Daoist practices. Kil's deeper spirituality and most powerful preaching, which were more effective in persuading the Korean people in the revival meetings, led missionaries to respect him as a Korean Spurgeon, Wesley, or Whitefield. One of the prominent results of the great revival movement was the advent of Korean leadership, which shifted the center of gravity of the spiritual authority of the Korean church from missionaries to Korean leaders like Kil Sun-Ju. Moreover, Kil Sun-ju's revivals and the ordination of the seven Korean pastors in 1907 shifted the center of gravity of leadership of Korean (Presbyterian) Christianity from Seoul to Pyongyang, and Pyongyang remained as its main center until the 1940s. At the same time, the predominance of Pyongyang leadership in Christianity meant a leadership shift in the Korean society, which had been dominated by the Confucian yangban class in Seoul area in the Chosen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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