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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봉 광신대학교 2005 光神論壇 Vol.14 No.-
現今 논의되는 통일은 대부분 정치적 내지는 사회학적 또는 민족의 분단에서 바라본 관점에서 논의 되고 있다. 이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 또한 이미 많은 내용을 제시했다. 그러므로 본 고는 신약성경의 몇몇의 본문들을 주석하면서, 그 본문의 의미와 지금의 통일의 문제를 연결하여 논하고, 그와 함께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보다 신약성경적 근거로 도출하고자한다.
ζηλωται(קנאים), δικαριοι(סיקרים)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Ⅰ)
최순봉 광신대학교 출판부 2004 光神論壇 Vol.13 No.-
로마가 여러 나라들을 통치하고 있었던 제국 당시에 그에 반대하는 크고 작은 많은 저항운동들이 있었다. 로마의 통치가 특히 하스모니안(Hasmonaer) 왕조 말기에 이르러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 때, 스스로 선민이라 자부하는 이스라엘 중에 이를 반대하는 여러 모양의 반대세력들이 은밀하게 이루어 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통치를 반대하는 직접적인 봉기도 있었다. 젤롯당 사람들 내지 는 젤롯당 운동은 그러한 로마의 지배에 대항한 저항들 가운데도 아주 특별한 위치를 점유한다. 기원후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은 예수님 당시에 어쩌면 그 이전서부터 로마인들에 의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이러한 지시어들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암시적으로 反-로마적 유대인들의 저항운동(antirörnische jüdische Widerstandsbewegung)이었던 젤롯당 내지는 젤롯당 운동을 지칭한다. 젤롯당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 매우 강력하게 로마의 식민지정책에 대항했다. 추측하기로 그 당시에 그들은 로마의 통치를 가장 주도면밀하게 대항한 반대세력이었고 그 경향 역시 매섭고 냉정한 그리고 강력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글은 신약성경 당시의 이해를 추구하는데 매우 도움이 된다.
최순봉 광신대학교 2003 光神論壇 Vol.12 No.-
본문에서 “άποδίδωμι" 의 사용은 예수께서 생각하신 의도 내지는 이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가 주화 자체가 갖는 어떤 의미를 주려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의 의도는 이 땅의 어떤 통치자를 향한 것도 그에게 납부하는 어떤 세금도 아니었고 그의 의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그 내용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내용의 중심에는 이 사건을 통하여 열심당의 주장을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가이사의 세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이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열심당이 당시에 주장하던 내용의 약점을 철저하게 넘어서신 것이다.
최순봉 광신대학교 2002 光神論壇 Vol.11 No.-
녹 23장 2절에서 누가는 다음과 같이 사람들이 예수를 고소하는 말을 보고한다. “이 사람이 우리 민족을 미혹하고 (διαοτρέφοντα)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막고 스스로 그리스도, 곧 왕이라 하는 것..." 여기서 눈 여겨 볼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항목 "가이사에 게 세금 바치는 것을 막고” 이다. 이 두 번째 항목은 본 고가 다루고자 하는 본문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 고소의 근거가 되는, 적어도 복음서안에서, 이 본문 마가복음 12: 13-17 (마 22: 12-22과 녹 20: 20-26) 은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판결로 이르게 되는 예수의 행적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최순봉 광신대학교 출판부 2010 光神論壇 Vol.19 No.-
녹 9 장 51 절 -56절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의거절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짧은 내용과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그리고 예수님의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짧은 누가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의 새로운 움직임을 기록한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을 향한 이 예수님의 행보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역과는 획을 긋는 매우 의미심장한 행동이다. 이러한 구분은 대부분의 주석이 동의하고 있다. 이 본문의 시작은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행보와는 다른 보다 사역의 전환적 내용을 시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 본문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명시하는 독특한 단어들을 발견하게 되며 이러한 예수님의 경향과 배치되는 제자들의 행동은 복음서 이해의 중요한 흐름이다.
최순봉 광신대학교 2006 光神論壇 Vol.15 No.-
이북의 동포를 우리의 진정한 형제요 민족으로 보고, 기독교가 지향하는 이웃이 되려면 그들의 입장에서 적절한 이웃이 되어야한다.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강도 만난 자를 치유하고 간호한 것 같이 그들을 향한 구원과 구조의 손길을 뻗는 것이 기독교 실천의 한 방법이며 이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실천으로서의 통일의 시작이다.
유다스 호 이스카리오테스('Iουδαζ ο 'Iσκαριωτηζ)
최순봉 광신대학교 출판부 2008 光神論壇 Vol.17 No.-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대가를 받고 선생님을 판 사람으로 지목되는 유다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다루어진다. 자신의 선생님을 판 이 제자는 어떠한 연유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했을까? 이러한 의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이다.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 그 유다 이스카리옷이란 이름이 언급된 그 행위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실마리를 준다면, 이 이름은 연구되어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이름과 관련된 내용이 당시 그 제자가 의도한 것을 짐작하게 하는 근거를 찾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면, 이 제자의 이름은 언급된 과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Σιμων ό ζηλωτης 또는 ό καναναιος
최순봉 광신대학교 출판부 2007 光神論壇 Vol.16 No.-
왜 누가복음의 저자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언급된 이름과 달리 보다 직접적인 이름을 사용했을까? 누가복음을 읽는 독자와 관련을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누가복음을 읽는 독자는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일 경우를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독자를 위하여 누가복음의 저자는 보다 직접적인 용어를 사용함으로 그들의 이해를 도운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적어도 네 사람 이상이 이 열심당 내지는 열심당운동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으며, 이는 당시에 사회적 정황이 예수님의 사역과 전혀 무관하게 움직이지 않았음을 또한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