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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찬래 청주대학교 국제문제연구원 1999 國際文化硏究 Vol.17 No.-
우리나라의 환경정책이 체계화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마련한 것은 환경문제가 심각해져 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198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비로서 환경법률들이 제정되었고 이러한 법들에 근거해서 다양한 종류의 환경정책수단들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환경정책수단(환경규제)은 시장원리를 이용하는 간접규제라기보다는 대부분 직접규제에 의존하는 적이 대부분이었다. 간접규제의 방법들이 도입, 시행되었지만 규제위주에 익숙한 환경행정의 풍토에서 실효성이 없었다. 권위주의적 정치, 행정구조 속에서 형성·집행되는 환경정책은 직접규제방식의 규제일변도였고 1992년『리우 선언」에서 정립된 (지속 가능한 개발개념)에 부합되게 간접규제(경제규제)의 방법들을 도입하여 직접규제의 실패상황을 개선시키려고 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환경정책의 일반적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는 형식주의 강제적 집행성 및 피규제자 친화성 등은 지속되어서 정책의 효과성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환경정책의 이러한 문제는 정책의 민주화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환경정책의 민주성은 그것이 민주적인 정치·행정 구조에서 형성·집행될 경우에만 확보되는 것이고 이는 정책의 효과성을 증대시켜줄 것이다. 민주적인 환경정책은 대표성, 반응성, 및 책임성을 갖게 되 고 이러한 특징은 정책의 효과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환경정책의 민주화를 위한 도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러한 도식은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ESSD. Environmentally Sound and Sustainable Development) 개념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삶의 질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환경민주주의를 토대로 하는 환경지향적 의식전환, 환경지향적 기술혁신, 환경 보전적 생활양식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로, 환경정책의 민주화는 정책이 형성, 집행되는 정치, 행정체계의 민주화가 선행되어서 환경친화적 구조로 전환되는 경우에 확보될 수 있다. 셋째로, 환경부는 민주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구조로 개편되어서 환경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행정부처간 갈등상항 그리고 사회구성원, 사회집단, 의회, 정당 및 행정부처간에 조성되는 대립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고도의 정치력을 겸비해야 한다. 이러한 정치력의 증대는 환경부의 역할강화로 나타나고 환경부가 환경갈등의 해결을 위한 메카니즘을 부처 내에 산하기구로서 설치하는 것도 이러한 역할강화의 일환으로서 고려될 수 있어야 한다. 넷째로, 환경정책의 민주화는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국민의 노력과 자세가 생활속에서 실천 되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국민 개개인이 환경의 질을 삶의 질로 인식하고 환경 민주주의를 생활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정책의 민주화는 환경민주주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고 이것은 결국 환경정책 결정과정에 시민통제의 제도화가 완성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환경정책의 민주화는 국제화, 정보화 및 지방화 시대에 필요한 요건을 갖추어 줄 것으로 본다 국제화, 정보화 및 지방화 시대는 산업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규격화 대형화, 중앙집권화에 대조되는 전문화 소형화 분권화를 지향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산업사회에서 볼 수 있는 대도시 중심의 개발에서 전문화와 지역특성을 우선시하는 발전을 추구할 것이며, 개발보다는 쾌적한 환경을 더욱 중시할 것이다. 환경정책의 민주화는 이러한 시대의 도래를 염두에 둔 미래지향적인 환경계획전략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환경문제의 해결을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경시하고 있는 환경과의 조화, 나아가서 환경우선의 정책이 실효성을 거둘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찬래 서울대학교 국제지역원 1995 국제지역연구 Vol.4 No.2
유럽의 정치사에서 연방유럽을 건설하려는 노력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으므로 유럽공동체도 이러한 맥락에서 분석할 필요성이 있다. 연방의 기원은 중세의 보편적, 다원적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당시의 연방주의는 사회조직의 일반원리로써 다원주의의 한 국면으로써 간주되었다. 중세사회의 또다른 연방의 지적 유산으로는 제국의 국가형태를 들 수 있다. 제국은 다민족적인 구성국가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해서 국가적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효과적 처방책으로써 큰 의미가 있으며 이는 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역사적 실제에서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방유럽의 지적 유산은 연방유럽의 관념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기되었던 Pierre Dubois, M. Chevalier, Cattaneo 및 Mazzini등의 연방유럽관념들은 단편적이고 비체계적이었으므로 정치적 효과보다는 도덕적 효과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후 연방유럽의 관념은 다양하게 출현하면서 더욱 발전했다. 저항운동의 연방관념, 모네의 연방관념 그리고 영국의 연방유럽관념들은 비교적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저항운동가들은 주권을 초월해서 유럽국가들로 구성된 민주적 연방의 수립을 주장했다. 모네는 신기능주의적 점증주의에 의존하는 연방유럽의 건설을 제안했다. 그의 연방유럽관념은 반국가주의, 중앙집권화된 공동체제의 형성 그리고 각국의 엘리트간의 집단적 협상의 주제들을 강조했다. 영국의 연방유럽관념은 처음에는 식민지들로 구성된 연방제국의 형태였지만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럽의 국제정세에 변화하는 중요한 외교전략으로써 간주되었다. 1980년대에 영국의 연방관념은 대륙의 연방유럽전통에 흡수되어서 연방관념이 대륙에서 다시 인상적인 활력을 갖고 유럽인들의 관심을 받게 했다. 연방유럽의 관념들은 국제정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정치와 민족국가의 주권문제 그리고 정치엘리트들의 지도력 문제 등을 경시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원만히 해결되어야만 유럽공동체는 연방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은 연방도 연합도 아닌 국제체계의 애매모호한 상태에 있을 것이다. The European Community needs to be analyzed in the historical context, for European have made continuous efforts to build up a federal Europe for many centuries. The origins of federalism can be traced back to the Medieval society which has been mainly characterized by its universalism and pluralism. At that rime, federalism was used as an identical concept with pluralism in that the former might be regarded as a general principle of social organization. The empire that had existed as a form of state in the political history of Europe can be mentioned as another intellectual legacy of the federal Europe. It had a significance as the effective prescription for organizing its multi-national, constituent states and ensuring uniformity among them. Indeed, this fact was proved in the historical realities of the Rome Empire and the Holly Rome Empire. These intellectual legacies worked positively to form many ideas of the federal Europe. The ideas of the federal Europe that had appeared before the Second World War was fragmentary and unsystematic. They were generally said to carry moral rather political tone. However, the idea of the federal Europe appeared in diverse forms after the Second World War. For the convenience of analysis, they can be categorized into three theoretical segments; the idea of the resistance movement, J.Monnet's idea and the British perspective. They all presented relatively concrete and systematic programs for the united Europe. In particular, J. Monnet proposed that a federal Europe be established on the basis of neo-functionalism and incrementalism. His idea of federal Europe emphasized anti-statism, the importance of institution building within the E.C. and the collective bargainings among political elites of every state. These ideas of the federal Europe are subject to the criticisms that they tended to overlook the power politics of international society, the sovereignty of nation-state and leadership of political elites. If the above problems are to be solved satisfactorily in the future, the European Community would attain political unity on a federal basis. Otherwise it should be in an ambiguous state of the international regime that means neither federation nor confederation.
근로소득보전제도(Earning Income Tax Credit)의 도입에 관한 연구
조찬래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대학 세무학과 2005 稅務學論集 Vol.18 No.2
근로소득보전제도의 도입에 관한 연구
조찬래 한국시민윤리학회 2014 한국시민윤리학회보 Vol.27 No.1
본 논문은 중세시기 교권과 세속권의 논쟁에서 제기되었던 세속권 논의에 대한 체계적 인 분석을 통해 서구정치철학사에서 세속권의 의의를 밝히려고 한다. 교권의 대립적인 의미 로서 세속권의 개념이 사용되었고 그러한 세속권의 주체는 황제 또는 군주로 이해하였다. 게라시언 원리(양검론),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구분한 로마법 그리고 "국가는 교회보다 선재했고," "황제는 종교회의를 소집과 감독하고 주교를 임명할 권한을 소유했다는" 등의 역사적 사실 등이 세속권 논의의 이론적 근거들로 제시되었다. 존의 온건론적인 세속권 논 의와 마르리오와 윌리엄의 극단적인 세속권 우위의 입장을 검토했다. 중세말기에 세속권 우위는 확립되어서 근대국가와 왕권신수설의 형성에 기여한 반면 종교 개혁이후 종교문제는 국가 내에서 정치문제가 되어서 내란의 원인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This article is meant to illuminate the significance of the secular power in the history of Western political philosophy by analyzing its arguments that had been suggested by the secularistic political thinkers in the medieval times. The concept of the secular power may be used with the contrary meaning to the ecclesiastical power. The Gerasian doctrine(two swords theory), the Roman Law emphasizing the distinction between the public and private spheres and such historical facts as "the state existed before church", "the emperor held and supervised the religious conference and appointed the bishop", had been offered as the theoretical grounds for the secular arguments. John of Paris argued for secular power in the moderate position. On the other hand, Marsilio of Padua and William of Occam spoke for the primacy of the secular power over ecclesiastical power in the extremist position. The primacy of the secular power over ecclesiastical power that had begun in the late medieval times and continued until the fifteenth century, might be said to promote the formation of modern state and the theory of the divine right of king. On the contrary it became the cause of the civil war because the religious problems would be often political ones within the nation after the Re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