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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水操」에 나타난 李舜臣 戰術 -기동항해(尖字陣)와 전투진형(鶴翼陣)을 중심으로-

        장학근(Jang Hak-geon)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9 이순신연구논총 Vol.- No.12

        임진왜란은 조선이 건국 이후 처음 맞는 국제 전쟁이었다. 일본 수군이 수십 혹은 수 백 척의 선단을 이루고 침략했음으로, 조선수군도 상응한 선단을 동원하여 대처해야 했다. 이런 변화를 예측하고 혼신을 다해 전비태세를 갖춘 조선의 수군지휘관이 바로 이순신이다. 그는 중국의 선진 병법과 조선 전통의 진법을 응용해 기동항해 전술인 첨자진(尖字陣)을 창안했고, 우리 함포의 단점인 사격 공백을 줄이기 위해 지상전 전술인 학익진(鶴翼陣)을 해전의 전술로 응용했다. 첨자진(尖字陣)의 전술적 장점은 항해 중 지휘통신이 용이하며, 기동선단의 군선 증감이 쉽고, 항해 중 적을 만나면 곧바로 전투체제로 전환이 용이한 것이다. 해전술로서 학익진의 장점은 횡렬로 벌려선 군선의 앞 열이 함포를 발사하면, 대기하고 있던 뒤 열의 군선이 앞으로 나와 화력을 구사하여 사격의 공백을 최소화하고, 공격을 진행하면서 반원형으로 공격대형을 만들어 명 중률이 낮은 아군 측 총통의 명중률을 높일 수 있었다. 이순신은 첨자진과 학익진을 사용해 임진년(1592년) 한 해 동안 4차 출전하여 10여 회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순신은 부산의 적 선단 규모가 500여 척이라는 원균의 통보를 받고 그가 지휘하고 있는 군선 수가 부족함을 절감했다. 그는 부족한 군선 수를 이억기 함대와 합동함대를 구성해 보완하려 했다. 그러나 이억기 함대의 도착이 지연되고 원균의 다급한 지원요청이 거듭되자 이순신 예하 군선(전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만으로 기동함대를 구성하여 첫 출전을 단행했다. 다행히 일본 수군은 일본지상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조선 수군의 존재를 인식치 않고 수십 척 씩 무리지어 조선 연해를 약탈해 전리품을 작만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일본수군이 전투체제를 갖추기 전에 일본선박을 공격해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이룩했다. 이순신 함대의 2차출전은 일본군의 수륙병진(水陸竝進) 전술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행동이었다. 일본 군부는 속전속결로 조선의 중요도시를 점령한 것과 같이 그들의 수군도 조선의 포구를 점령하면 그 일대 해역이 그들의 통제에 놓일 것으로 판단했다. 일본군부의 지시에 따라 일본 선단은 무리지어 남해안 포구로 진입해 선박을 정박시킨 후 포구의 지상과 정박한 선상에서 조총 으로 ‘선단 엄호사격 망’을 구축해 조선 함선의 접근을 저지하였다. 이것은 이순신함대의 1차 출전 때 이순신 함대에게 패전한 경험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이순신은 불리해진 전장 환경을 거북선을 이용해 극복했다. 즉 적의 선단엄 호사격으로 판옥선이 적 선단으로 접근할 수 없자, 이순신은 거북선을 돌진 시켜 적 지휘선을 격파해 적의 지휘통신을 마비시켰다. 그 다음 판옥선을 출전시켜 나머지 적선을 격파했다. 이순신은 이와 같은 전술로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순신의 연이은 해전승리로 일본지상군은 군수품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본지상군이 더 이상 유리한 전투를 할 수 없게 되자, 조선에 강화회담을 제의하게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군을 강화하여 제해권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하게 되었다. 이 지시에 따라 지상전에 참전하고 있던 세 명의 수군장수가 일본 수군에 복귀하여 조선수군과 대항체제를 구축했다. 이순신은 3차 출전해 일본수군과 일전을 전개했다. 이순신은 견내량 협수로에 있던 일본선단을 한산도 내해로 유인하여 협공전술로 적 선단을 격파했 다. 영의정 유성룡은 “한산대첩은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마비시켜, 충청 도와 전라도가 보전되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한산도와 안골포 해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세 명의 일본 수군장이 패전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수군과 더 이상 해전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순신은 3차 출전에서 한산도와 안골포 해전에서 승리하여 제해권 장악했다. 반면 제해권 회복을 목표로 했던 일본 수군은 이순신 함대 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되어 일본 지상군은 전투를 중단하고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일본 수군은 해전을 기피해 그들의 군선은 부산포 항구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 같은 일본군의 변화를 목격한 조선 조정은 일본 침략군이 조선에서 퇴각할 것으로 추측하여 이순신에게 해상퇴로를 차단해 일본군이 일본 본토로 퇴각 할 때 해상에서 섬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정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4차 출전하여 부산포의 일본선단을 공격했다. 조선의 합동함대는 적선 100척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군을 사살했으나 일본 수군의 해전 기피로 부산포의 일본군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가덕도에서 몰운대까지 군함을 벌려 세워 군함시위를 함으로써 일본군의 해상 활 ounded. As Japanese navy invaded with hundreds of ships in group, Korean navy had to mobilize ships for countering a strong enemy in quantity. One of admirals in Korean navy, Yi Sun-Sin(East Jeolla region), anticipated war and prepared operation readiness by all means. He studied traditional Chinese and Korean naval formation and invented the Chumjajin(Delta formation) as an maneuver and navigation tactic. and applied the Hagikjin(Crane-wing formation), an army tactic in origin, for naval battle to be able to reduce time interval between salvo fire at sea. Tactical advantages of Chumjajin are command and control in cruise, flexibility in size of maneuver fleet, ease to convert combat formation. Tactical advantages of Hagikjin, as a naval tactics, are using multi-line abreast and move forward alternatively to provide continuous fire support with long-range cannon. And both line proceed to encircle enemy formation to increase hit probability greatly. Admiral Yi Sun-Sin employed Chumjajin and Hagikjin formation and won ten naval battle during four sorties in 1592. Followings are process of those sorties in detail. Admiral Yi Sun-Sin recognized his inferiority in number of warships from information sent by Admiral Won Gyun(West Gyoungsang region) that Japanese navy had strong five hundreds warships. He want to build combined fleet by joining Admiral Yi Uk-Gi fleet(West Jeolla region) to be able to compete strong Japanese fleet. Due to delay of Admiral Yi Uk-Gi s arrival, Admiral Yi Sun-Sin had to sortie with only 24 warships (plus 61 supporting small ships) because of demanding emergency call from Admiral Won Gyun in frontal sea. Fortunately, Japanese navy became arrogant with their overwhelming land war victory and indulged in robbery, killing, rape, and neglected Korean navy. Admiral Yi Sun-Sin gained one-sided victories at Okpo, Happo, Jeokjinpo against scattered and unprepared Japanese navy in initial stage. Admiral Yi Sun-Sin s second sortie was aimed to disrupt enemy s army-navy parallel advance strategy. Japanese military leaders thought that once they conquered major ports just like they had occupied major cities, eventually the whole area would fall under their control. Japanese navy consisted flotillas and anchored at major ports in southern area, and arranged escort network for convoy armed with musket gun. That was Japanese response not to repeat failures during Admiral Yi Sun-Sin s first sortie. Admiral Yi Sun-Sin s counterpunch was the famous Turtle ship to over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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